금년 여름, 엄청 더웠다. 금년에는 미리내 엄마랑 이 더운 여름날 세상 밖으로 여행 좀 하자고 했다. 그래서 사흘을 다녔다. 세상 밖 소풍이다. 8월 8일 - 8월 10일까지였다.
이런 연유는 좀 시간이 좀 지나버린 몇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사연은 아래와 같다.
그러니까 2002년, 철도 노동자들은 철도가 민영화되어 해외자본에 매각되는 것을 반대하여 공무원 신분으로 총파업을 했었다. 나는 당시 전국철도노동조합 영주지방본부 홍보국장을 맡아 파업 당시 애들 엄마와 애들은 전에 공부하던 절에 파업기간 동안 가 있으라고 보내고 우리집을 지방본부 파업 상황실로 썼다. 그 사실은 집행부만 아는 비밀이었다. 전화는 휴대전화로 받되 외부로 하는 전화는 밖에 나가서 공중전화로 하는 보안도 유지했다.
그때 우리의 요구사항이 국민철도 사수, 철도 민영화 반대도 있었지만 노동조건 개선도 있었다. 즉, 한해 35명씩 작업하다가 죽어 나가도 산업안전보건법을 적용하기는 커녕, 본인 부주의라는 단 한마디로 죽은 자만 서러운 현실을 바꿔보자는 염원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철도노조의 파업이 공무원 신분으로 한 파업이니 위법하다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정부도 위법상태인 철도현장의 산안법 미적용상태와 24시간 맞교대를 근로기준법에 맞게 정부가 법을 지키든지, 아니면 24시간 맞교대에 대해서 근로기준법에 시간외 수당을 다 지급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래서 3조 2교대에 대해서 계속협의한다는 합의가 이뤄졌고, 내가 노조전임으로 일하던 2004년 하반기에 3조 2교대에 대한 논의가 끝나 2005년부터 24시간 맞교대는 3조 2교대가 적용되었다. 만일, 24시간 맞교대를 두고 근기법상 수당을 다 지급하면 어찌 되는가? 초과근무수당이 근기법상 엄청나게 지급되기 때문에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 도저히 24시간 맞교대를 할 수 없게 된다. 간략하게 보자면 기본급 100만원인 직원에게 24시간 맞교대를 시키면서 근기법을 적용시키면 300-400만원을 줘야하지만 3조 2교대일 때는 170 -180만원 정도면 가능하다. 그러니 어느 바보가 24시간 맞교대를 시키겠는가?
그때 파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 온 미리내 엄마에게 3조 2교대 되어 여유시간 있으면 전국을 다녀보자고 했었다.
그 후 철도청장과 철도노조위원장이 직인찍고 서명한 노사합의를 정부가 또 휴지조각으로 만드려고 했다. 약속 어기기를 손바닥 뒤집듯한다는 두보의 시가 생각났다. 그래서 2006년, 또 노사합의를 지키라고 파업을 했다. 이때 나도 본조합 대의원으로 직위해제 되어 한달간 직무를 정지 당했고, 업무방해죄로 고발 당해 경찰서에 불려가 조사도 받고, 기소중지 처분도 받았다. 그렇게 바쁘게 시간은 흐르고 어찌 어찌 해서 민족문제연구소 일에도 참가하고 그 민족문제연구소 일을 바탕으로 풍기의 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일도 하게 되어 미리내 엄마가 나에게 붙여준 별명은 집안 친척들에게 말할 때 "영주서 제일 바쁜 사람"이 되었다. 제발 아침에 나가면 그날을 넘기지 말고 들어오라는 소리였다. 그렇게 노조일을 접고 봉성에 있다가 영주역에 있다가 예천으로 갔다.
그런데 올해 작은 놈 영진이도 대학가고 나니 미리내 엄마가 기분이 많이 가라앉은 모양인 것 같았다. 그래서 집에서 잔소리도 군말하지 않았고, 설거지도 자발적으로 하는 횟수를 늘리고, 빨래도 헹구고.....그러다 3조 2대가 몸에 익숙할 쯤....매월 한 번 씩 지정휴무가 있을 때는 비번일, 휴일, 지정휴무를 연속으로 사용하면 3일 연휴가 생기니 그때 원하는 곳에 가보자고 하였다. 그래서 지난 달에는 독립기념관, 현충사를 가 봤다. 그건 내가 가보자 해서 가 본 곳이었다.
그리고 이번 달은 미리내 엄마가 원하던 광릉 수목원을 갔다. 가면서 강화도를 한번 돌고 가자고 했다.
가면서 덕평 휴게소를 지나며 인천을 지나서 갈 것 같아 주택이에게 전화를 했다. 혹 지나면서 만나면 차라도 한잔할 수 있을까 해서.....그런데 저녁에 약속이 있다고 하기에 우리는 신경쓰지 말고 볼일을 보라하고 우리는 그대로 부지런히 다녔다.
가다가 덕평 휴게소에서 싸온 밥을 펼쳐 놓고 가스렌지에 김치찌게를 끓여 점심을 먹고 강화도로 향했다. 그런데 잠시 잠깐 밀리더니 그대로 강화도에 도착~~강화도는 전체가 역사박물관이라 하기에 관광안내도를 보니 우선 강화역사관을 가봐야 할 것 같아 강화 역사관에 갔다.
<강화 역사관을 한바퀴 돌고 부근을 다 본 다음 정자에 올라 서니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그냥 자리에 눕다 보니 소르르 잠이 들고.....부부가 각기 다른 의자에 널부러져 한시간을 족히 잤다. 내가 일어나보니 내무부 장관은 그냥 자기에 한 장 찍고~~그래도 한 이십분 더자고 일어났을껄?>
<강화 역사관 앞에서, 권율, 정제두, 이규보 모두 강화도 출신이었구나>
<신미양요 때 미군과 전투하다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얼이 서린 광성보에서~>
<강화도 하면 전등사~ 전등사 대웅보전 앞....대웅보전 추녀 밑에는 이 절을 지을 때 대목수의 아내의 부정한 일로 그간 번 10만냥을 전부 사기당한 대목수가 그 아내의 상을 나녀상으로 다듬어 대웅전 추녀를 받치고 있으면서 그 죄를 씻으라고 조각한 나녀상이 전국 법당 가운데 유일하다....사진 가운데 용머리 위를 자세히 보면 원숭이 비슷한 조각이 보인다. 그것이 나녀상이다.>
<자세히 본 나녀상>
<첫날은 강화도에서 나와서 김포에서 자고 이튿날 8월9일, 임진각에 도착, 임진강역에서~~>
<임진강역 앞에서 임진각 쪽으로~~>
<행주산성에 도착, 권율장군 동상 앞에서>
<행주산성 정상에서 고양시를 바라보며~ >
김성한 선생이 쓴 소설 임진왜란에 보면 행주산성에서 권율장군은 2,300명의 장병을 데리고 3만 왜군과 싸워 이겼다. 권율장군은 문신이라 병법을 잘 모르는데 그는 위임과 신임의 대가였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즉, 광주목사였던 권율은 행주산성에 도착하자 그와 함께 수도 서울 탈환을 의논하고자 온 순찰사와 사흘간 행주산성을 떠나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때 권율을 보좌한 조방장 이경은 승병을 포함한 병사를 이끌고 목책을 치고 무기를 정비하고 군량과 식수를 챙겼다. 그리고 사흘 뒤에 돌아 온 권율은 이경이 이미 배치해 놓은 진영을 그대로 두고 전투에 임하였다. 결과는 대승~
그 대승 후 권율이 명장일 수 있었 것은 한번 이긴 전술을 다시 쓰지 않는다는 손자병법의 내용을 들며 설명하는 조방장 이경의 건의에 따라 그길로 이 좁은 성에서 또 다시 전투가 벌어지면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철수한 것이다. 사흘간 술마시러 간 후 돌아와 조방장 이경이 배치해 놓은 진영을 군말 한마디 하지 않은 위임과 그 배치대로 전투에 임한 동지에 대한 신뢰~ 이것에 따라 상하가 일치하여 싸운 승리가 행주대첩이었다고 한다.>
<포천에서 저녁을 지어 먹으며~~이렇게 직접 해먹는 밥은 정말 식당을 찾기보다 훨씬 낫더라~바쁘지 않고 시간을 생각하지 않고 편하게 해먹으며 다니고~~ 참 좋았다. 세상 밖 소풍의 또다른 한 면이다.>
<광릉 국립수목원에서>
둘 째날은 행주산성 등을 보고 포천에서 자고 세째날은 광릉 국립 수목원을 찾았다. 유네스코에도 등재된 정말 가볼만한 곳이었다. 이 수목원이 텔레비전에 나오자 미리내 엄마는 이곳을 꼭 가보자 해서 이번 세상 밖으로 소풍의 주목적지가 되었다.
<수목원 안 산립박물관 안에서~ 뒤에 보이는 나무는 팽나무인데 보이는 나무가 팽나무의 밑둥이다.>
<산림박물관 앞 호랑이 박제 앞에서>
<크낙새 박제~ 천연기념물인 크낙새는 광릉 수목원에만 산다고 한다. 그 박제를 통하여 실물을 처음 보았다.>
<광릉 수목원 이름이 붙은 계기가 된 광릉~ 사진에도 억수로 쏟아지는 비가 보인다>
광릉은 세조와 그의 비 정희왕후 윤씨의 릉이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이거 보려고 여기왔는데 안보고 가면 아쉬울 것같아 안내하는 사람이 주는 일회용 우비를 입고 다시 올라간 세조릉~ 무인석 2, 문인석 2, 짐승상 12개, 12개 돌기둥으로 돌리고 석등을 세운 세조릉~조선왕조 왕실 릉은 멀리서 보면 언덕위 릉이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언덕으로 릉이 직접 보이지 않는 존엄의 대상으로 삼은 구조라고 한다. 당시 명나라 연호를 썼으니 왕은 조선왕이다. 황제는 이런 둘레석이나 석상의 제한이 없었다. 참고로 중국의 황제는 황후 1명을 둘 수 있고, 후가 1명이면 비가 4명, 빈이 7명, 귀인이 몇명 해서....모두 127명의 여인을 공식적으로 둘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왕은 24인의 여인을 둘 수 있었다고 한다.
<광릉의 비보사찰인 봉선사 앞에서~ 광릉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고 관람 후 옷이 다 젖어 반바지로 내것을 갈아입고 봉선사를 찾았다.>
<봉선사 공양간 안에서, 마침 그날이 백중날이라 대중이 많았다. 우리도 점심식사에 한자리 했다. 벽에 걸린 붓글씨는 바른 생각이 양약이니 고형을 치료하라는 뜻으로 시작하는 법어인 것 같기에 잘 쓴 글씨냐 물었더니 미리내 엄마의 평은 추사체를 모방한 글씨체인 것 같은데 그획이 들어갈 자리에 획이 다 들어갔지만 글씨 솜씨는 "되나 마나 쓴 글씨"라 붓놀림이 완전히 돌아간 것은 아니라고 평하더라~절 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설거지까지 하고 왔다.>
<봉선사 대종~ 보물 493호인가 한단다~조선시대 종이라 한다.>
<승과원 기념석 앞에서. 왕실비보사찰인 봉선사는 후에 문정왕후가 섭정할 때 승과를 시행했는데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도 이 승과에 응시했다고 한다. 그 과장이 봉선사에 있었음을 기념하는 기념석이 있기에 그 앞에서 한장 찍었다.>
이렇게 사흘 간 세상 밖으로 다녀온 소풍은 몇푼 들지 않았다. 우선 돌아다닌 승용차 연료비가 7만원 정도 되었다. 그리고 잠은 텐트에서 잘까 하다가 텐트치는 야영장도 1만원은 들기에 그 돈에 더 보태 찜질방에서 잤다. 사우나 맘대로 하고 잘 때 편하게 자고.....그리고 식사는 그 지방의 특별한 음식이 있으면 한끼 정도 맛이나 보고, 나머지는 가스렌지로 직접 밥을 해서 먹고 라면도 삶아 먹고 하면서 다녔다. 부부 둘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 술값도 없고, 밥도 자체해결하며 히히낙낙, 돌아다니다 피곤하면 시원한 곳에서 널부러져 자다가 시엄시업가고, 그러다 해지면 찜질방 가서 놀다가 자고.....그렇게 사흘 소풍에 10만원 남짓 들었다면 다들 믿을까 웃을까?
다음 달 세상 밖 소풍이 또 기대된다.
2010.8.10.
영주에서 동규 씀
첫댓글 오우............... 대단혀..........다음에는 나도 데려가라.......너끼리 가지 말고......
일상을 떠나 다른 지역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좋은 여행......내려가면서 전화함 하지.....
다음달은 추석지나고 한번 울산쪽으로 가려고 한다....2박 3일로 함께 갈까? 금, 토, 일 맞추면 좋은데....밥은 해먹고, 찜질방서 자고....몇푼 안들이고 아주 즐겁게 여행이 가능하겠더라...
나이 더 들기 전에 좋은 구경했어,,,,역시 총무님 다운 멋진 여행과 글과 사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