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통해 본 하멜일행 제주표착지
제주일보 2022.12.13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은 1653년7월30일 스페로베르호를 타고 대만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태풍을 만나, 닷새 동안 악전고투 끝에 1653년 8월16일 ‘퀠파트(quelparert)섬’에서 난파·표류됐다. 승무원 64명 중 28명은 태풍으로 사망했고, 36명만 살아남았다. 여기서‘퀠파트 섬’은 제주도의 유럽식 명칭이다.
하멜 표류기에 의하면, 풍랑 속에서 배는 지명을 알 수 없는 섬 어느 해안가에서 그만 암초에 부닥쳐서 난파되고 말았다. ‘스베페로베르호’가 난파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15분에 지나지 않았다. 해안가에 집결해보니 살아있는 선원보다 사망한 선원이 많았다. 그들은 여기저기 널린 동료들의 시체를 해변 가에 묻고 잔해 물 중 쓸 만한 것들을 바다에서 건져 올렸다. 찢어진 돛의 천 조각을 수습하여 비를 피할 천막을 만들고, 식량 등을 그 안에 주어 담았다.
그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난파지가 일본 근해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8월17일 모습을 드러낸 주민들의 옷차림을 보니 일본 사람들 같지 않았다. 중국 사람인가 싶었지만 옷차림이 다르고 중국인에게서 본 일이 없는 이상한 모자, 즉 말총으로 짠‘갓’까지 쓰고 있었다. 그래서 하멜 일행은 이들이 중국 본토에서 추방된 해적들인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8월17일 밤, 백 명의 무장한 사람들이 포위해 왔다. 이튿날 이 숫자는 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하멜 일행은 이런 포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들의 신변안전 문제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주도민들의 접근이 시도됐다. 하멜은 다른 선원과 함께 대정현 관원 앞으로 끌려 나갔다.
처음에 하멜 등은 그들의 목에 걸린 쇠사슬 때문에 실망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난파지 주민들에 대한 신뢰가 생기기 시작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하멜 일행은 눈치로 원주민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원주민들이 일본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니었기에 지금 어느 곳에 표착되었지 궁금증을 갖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위도를 측정해 보기로 했다. 8월18일 마침내 일등항해사가 이곳 위도를 측정해냈다. 난파지가 북위33도32분에 위치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결국 자신들이‘퀠파트 섬’에 도착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난파지 임시 피난처에서 며칠을 더 머물렀다. 8월21일 대정현감의 명에 따라 이들은 대정현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목간(제주시)으로 이송됐다.
그런데 현재까지도 하멜일행의 난파 표착지가 어딘지에 대한 논란이 가시지 않는다. 현재 하멜일행의 표류지로 화순 항내 형제 섬이 바라다 보이는 해안가, 필자의 고향‘대정읍 신도2리’해안가 등이 거론 되어 있고, 각각 표석을 세워서 그 징표로 삼고 있다. 그 외도‘다시 읽는 하멜표류기의 저자 강준식’은 실제 표류지점을 서귀포 강정 부근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하멜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작은 마을’에 묵고 4 밀렌(마일)을 여행했다. 정오쯤에 출발명령을 받고 1시경 출발해서 오후 6-7시경에 대정현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잠잤다.” 물론 이동 수단은 조랑말이었고, 부상자는 들것에 실린 채였다. 1밀렌은 영국의 단위 마일이 아니라 당시 선원들이 사용했던 거리측정 단위로서 1밀렌은 7.4킬로미터였다. 4밀렌은 29.4킬로미터이다. 그렇다면 하멜 일행의 난파표류지는 어디였을까? 대정현 끝자락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