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은, 어떤 현자라 해도 자기가 살아온 분량만큼의 인생 밖에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분명히 인생에는, 간접경험이나 추체험으로 얻지 못하는, 오직 그 세월을 살아 견딘 자들만이 얘기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 올해 74살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에서 우리는, 그 어떤 재능 있는 젊은 감독들도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그것은 노인의 지혜다. 글쎄, 그것이 무엇이냐고 정확하게 설명하라고 다그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의 영화를 봐라.
노장 영화 팬들은 잘 알다시피, 그는 셀지오 레오네 감독의 마카로니 웨스턴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에 나오던 건달 총잡이였다. 그 다음에는 도시의 뒷골목을 누비며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것을 실천한 [더티 하리] 시리즈의 형사였다. 사회악을 청소하기 위해 매그넘 44 권총으로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범법자들을 직접 처단하는 그는 현대인의 영웅이었다. 만약 그가 그렇게 배우 인생을 끝냈다고 해도 그는 존경받는 영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봐라,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1년)라는 사이코 스릴러 영화로 감독 데뷔한 이후 그는 조금씩 전진한다. 그의 필모그래피에 썩 훌륭한 작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버드](1988년)라든가 [용서받지 못한 자](1992년)에 이르면 그가 단순히 장르적 공식 안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비슷한 이야기를 비슷한 방식으로 복제해내는 삼류 감독은 아니라는 것이 확연해진다. 특히 [용서받지 못한 자]의 서늘한 시선에는, 무서운 자기 절제 없이는 이루어낼 수 없는 성취가 담겨 있다.
[데드맨 워킹]에서의 사형수의 명연기로도 수상하지 못했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지난해 숀팬에게 안겨준 [미스틱 리버]에는, 삶의 다양한 측면, 그 화려한 아름다움과 쓸쓸한 뒷모습까지도 모두 경험한 현자의 지혜가 담겨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근 영화가 갖고 있는 공통된 미덕은, 감성적 충동에 몸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성의 힘에 의해, 삶의 벼랑을 목격하는 감독의 날카로운 시선에 의해, 삶의 추악한 껍질은 벗겨지고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도 그 속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세계의 비정한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말이 너무 장황해졌다. 내 원래 의도는,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의 최근작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보기 드문 걸작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었다. 이 영화 속에 묘사된 인생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은퇴해서 낡은 체육관을 운영하는 늙은 권투 트레이너가 31살의 여자를 훈련시키는 이야기가 뭐 그리 재미있겠는가? 청춘 남녀가 부딪치며 발생하는 풋풋한 에너지도 없고 싱그러움도 없다. 그렇다고 [록키]류의 권투 성공담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왜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걸작으로 분류해야 하는가.
링 위의 권투 선수가 부상당하면 그 상처를 꿰매어서 계속 경기를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컷맨 출신의 F.X.톨이 쓴 단편집 [타버린 로프] 속의 단편을 영화로 옮긴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우선 그 생생한 권투 선수들의 삶이 채집되어 있어서 튼튼한 디테일을 구축한다. 권투 선수가 링 위에서 좌우로 움직일 때 반대쪽 발이 움직이는 씬의 묘사라든가, 샌드백을 단순하게 치지 않고 마치 사람을 대하듯이 고개를 움직이며 돌면서 주먹을 날리는 묘사는 현장 경험없이 체득될 수 없는 구체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뿐이라면,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나이든 여성 권투 선수가 챔피언전에 도전하는 인간승리의 이야기로 끝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아닌 것이다. 우선 영화의 핵심인물인 복싱 트레이너 프랭키를 보자. 그는 세속적 성공과 거리가 있다. 땀 흘려 선수를 키워 놓으면 그 선수는 마케팅 능력이 유능한 다른 매니저에게 떠나버린다. 프랭키의 손은 항상 비어 있다. 그것은 경제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의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한때 그의 선수였지만 무모하게 도전했다가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이제는 그의 체육관에서 트레이너로 일하고 있는 스크랩뿐이다. 하나 밖에 없는 딸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 23년째 꼬박 미사에 참석하지만 신부의 말에 절대적으로 귀 기울이는 것도 아니다.
사건은 31살의 레스토랑 종업원 매기가 체육관을 찾아오면서부터 발생한다. 물론 처음부터 프랭키가 매기를 자기 제자로 받아주는 것은 아니다. 프랭키는 6개월 체육관비를 선불로 낸 그녀를 절대 지도하지 않는다. 다른 매니저, 혹은 여성 트레이너를 찾아보라고 충고할 뿐이다.
매기는 3년 전인 28살부터 혼자서 복싱을 시작했다. 그냥 복싱이 좋은 것이다. 13살부터 접시닦이를 시작했고 오빠는 감옥에 가 있으며 아빠는 돌아가셨고 변변한 집도 없이 가건물 같은 트레일러에서 352파운드나 나가는 비만인 어머니와 살지만, 복싱을 할 때 비로소 그녀의 눈은 생기로 빛난다. 그녀에게 권투는 [내가 하면서 좋았던 유일한 하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모두 떠난 체육관에서 혼자 밤늦게까지 샌드백을 두들긴다. 그러므로 프랭키와 매기가 진정으로 만나는 순간, 이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그 순간은 프랭키가 매기를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수락할 때이다.
누구나 프랭키와 매기에게서 노스승과 여제자의 공식을 읽기 보다는, 사이가 소원해진 프랭키의 딸 자리를 매기가 매우고 있음을, 아니 흔적도 없는 프랭키의 여인 자리에 매기가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 사이에 그 흔한 키스씬 한 번 없지만, 우리는 그 어떤 러브 스토리보다 가슴 절절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침대에 누워서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예감한 매기에게 프랭키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키스를 한다. 그것은 남녀의 그것이 아니다. 생과 사, 이승과 저승의 분계점이다.
스크랩의 역할은 사건 당사자인 프랭키와 매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는 작품 내적으로는 프랭키와 매기를 연결짓는 교량 역할을 하며, 외적으로는 관객의 시선을 대변해 주면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시점을 제공한다. 나레이션이 스크랩의 목소리로 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담백하다. 극적인 부분이 등장하는 링 위의 사건조차도 그 비극성을 깨달을 틈도 없이 처리되어 있다.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려고 했다면 훨씬 더 드라마틱하게 포장되었어야 했을 매기의 챔피언 도전전은,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의 피를 뜨겁게 하는 것을 철저하게 방해한다. 매기가 4라운드, 그리고 6라운드에서 상대 선수들을 연속적으로 1회 KO 시키는 장면들은 오히려 코믹하게 편집되어 있다.
문제는 결말의 비극성이고, 매기의 최후 진술이다. 아니다, 문제는 결말의 비극성을 다루는 방식의 절제됨이고, 삶의 의미를 뱀의 이슬처럼 토로하는 매기의 절규다. 우리는 그 장면에 이르러서야, 왜 이 노감독이 나이 든 여류복서의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우리에게 폭넓게 열어준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말할 때 우리는 매기 역의 힐러리 스윙크와 프랭키 역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년은 울지 않는다]로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힐러리 스윙크는, 당시 남자 역의 레즈비언으로 등장해서 흉내낼 수 없는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바 있다. 그러나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매기는 그보다 한 발 더 전진한다. 3개월 동안 실제 복싱 트레이너와 훈련하면서 6kg의 근육을 만들어 영화를 찍은 힐러리 스윙크는, 복싱에서 유일한 즐거움을 찾은 31살 시골 레스토랑 종업원 매기를 무서운 집중력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정점으로 그와 매기, 그와 스크랩의 관계는 절제된 연기가 폭넓은 아우라를 발산하는 것을 복격하게 해준다. 특히 스크랩과 구멍 난 양말에 대해 티격태격 하는 씬은, 아무 것도 아닌 일상의 사소함으로도 대가들의 절제된 연기가 얼마나 큰 흡인력을 발휘하는가를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매기의 마지막 모습이 계속 어른거린다면, 그것은 감독이 그녀를 통해 삶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