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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스크랩 떠돌이 걸승 출신의 황제 주원장과 큰 발의 마황후
(정선례) 추천 0 조회 154 06.09.17 22: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안휘호주(安徽濠州)출신의 주원장(1328~1398)은 중국 명나라의 개국황제로 중국 역사상 유일한 빈민출신의 황제이다. 항우와도 비할 수 없을만큼 출신이 비천했다. 17세에 고아로 되어 중으로 지내다가 25세 때 곽자흥(郭子興)이 이끄는 봉기군인 홍건군(紅巾軍)에 가담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무수한 전투를 치르고 무수한 승리를 이룩하였다. 16년의 전쟁 결과 1368년에 명나라를 세우고 황제로 등극하여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였다. 이렇게 주원장의 일생은 전기적 색채가 다분한 파란곡절 많은 인생이었다.

 

주원장의 인생역전

   주원장에 대해 세인들은 지주계급의 걸출한 정치가이자 군사가라 칭송하는 한편 또한 그의 포악무도 함에 혀를 내두른다. 하지만 그의 옆에는 마음이 비단결보다 더 부드럽고 인자하며 너그러운 마황후-마수영(馬秀英, 1332-1382)이 있었다.

   마수영은 곽자흥의 양딸이었다. 그의 아버지 마공(馬公)은 곽자흥과 절친한 사이였는데 죽으면서 친구에게 딸을 맡겼다 한다. 마수영은 영리하고 시문에 능한 동시에 성품이 어질고 다정다감하여 양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1352년, 탁발승(托鉢僧)이 되어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생계를 유지해 가던 주원장은 곽자흥을 찾아 그의 무리에 가담할 것을 청했다. 곽자흥이 보니 앞 이마가 튀어나오고 돼지 코와 말상(馬像)에 곰보의 괴이한 얼굴과 험상궂게 생긴 모습이 흉측할 정도여서 호감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곽자흥은 이런 모습이 어쩌면 오히려 적도들을 부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점차 그를 중용한 나머지 양딸 마수영과 혼인시킨다.

 

못생긴 남편과 발이 큰 아내

  주원장과 마수영 사이에 이런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결혼한 그날, 주원장은 마수영의 큰 발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봉건사회 당시 중국에서는 미인의 기준이 발이 작은 것이어서 어릴 때부터 발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도록 인위적으로 전족(纏足)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수영은 발의 크기가 정상이었다. 원래 마수영의 아버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냈고 어머니 또한 일찍 돌아가셨기에 집에는 그를 보살필 사람이 없었고 발을 감지도 않았다. 하여 어릴 때 그의 별명은 ‘마대각(馬大脚)’이었다. 남편이 자기 큰 발을 보고 놀라는 것을 눈치챈 마수영은 당당히 “저는 당신의 흉측한 모습도 꺼리지 않는데 당신도 제 발이 크다고 나무람하지 마세요. 서로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갑시다.”이렇게 말했다 한다.

 

사랑의 증표

결혼 후, 두 사람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달콤한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주원장이 거듭 큰 승리를 이룩하고 곽자흥의 신뢰를 받음에 따라 많은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도 자아냈다. 그 중에서 곽자흥의 두 아들에게서 오는 질투가 가장 컸다. 아무런 재능도 없는 두 형제는 주원장이 전쟁터에서 포획한 재물을 혼자 삼킨다는 등 온갖 나쁜 말을 다 했다. 곽자흥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더니 점차 아들들의 말을 믿게 되었다.

어느 하루, 두 형제는 갑자기 주원장을 납치하여 작은 방에 가두고는 굶어 죽이려 했다. 3일 동안 물 한 모금, 쌀 한 알 입에 넣지 못한 주원장은 4일째 되던 날에야 다른 사람에 의해 발견되고 아내에게 소식을 알렸다. 소식을 접한 마수영은 허둥지둥 달려왔으나 도대체 곽씨 형제의 수작인지 아니면 곽자흥의 지시인지를 파악하지 못했기에 섣불리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하여 마수영은 매일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몰래 음식을 나르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그가 금방 익혀낸 떡을 들고 남편에게 가다가 양어머니를 만났다. 당황한 마수영은 떡을 숨길 곳이 없어서 덥석 가슴에 집어넣었다. 양딸의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든 곽부인은 무슨 일이냐고 다그쳐 물었다. 마수영은 묵묵히 눈물만 흘릴 뿐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그의 가슴에서 더운 김이 솟구쳐 나오는 것을 본 부인은 그의 옷자락을 열어보았다. 커다란 떡이 나오는 것을 본 곽부인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졌다. 마수영은 자초지종을 이실직고했다. 연유를 알고 또 한번 놀란 부인은 당장 남편을 찾아 어떻게 된 영문인가고 물었다. 곽자흥 또한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 듯 어안이 벙벙했다. 두 아들의 작간임을 알게 된 그는 냉큼 그들을 불러 모든 이들 앞에서 질책하고 또 각자 20매씩 때리게 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마수영의 앞가슴에는 떡에 의해 말발굽크기의 깊은 상처가 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사랑의 증표이기도 했다.

후에 양아버지가 주원장이 점령한 재물을 혼자 차지한 줄로 의심하는 것을 알게 된 마수영은 남편을 속이고 자주 자신의 금은장신구와 기타 값진 물건들을 양부모님께 드리면서 사위가 효도하는 것이라 말씀 올렸다고 한다. 사실 그는 남편을 굳게 믿고 있었다. 군기를 엄격히 준수하는 주원장은 종래로 재물을 혼자 삼키는 법이 없이 수하병사들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마수영은 어질고 또 현명한 여인이었다.

 

어진 품성의 대각마황후(大脚馬皇後)

1368년,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우고 황제로 등극한다. 따라서 부인 마수영도 황후로 되었다. 하지만 황제로 된 후 주원장의 성격은 점점 더 괴팍해지고 포악해졌는바 사람을 죽이기를 밥 먹듯이 했다. 마황후는 그런 주원장에게 시시각각 냉정하고 심사숙고하며, 상벌을 공정히 하도록 조언을 주는 동시에 남편의 정무를 도와주고 올바른 의견을 제기한다. 그리고 제1부인이 되었어도 검소함과 온화함을 잃지 않고 문맹퇴치에 참가하고 황제의 수라상을 직접 챙기고 백성들의 안위를 항상 염려했다고 한다.

   주원장은 잔인하고 포악했으나 부인인 마황후의 말은 그 누구보다 잘 들었고 황후가 아프자 손수 간호하기도 했다. 허나 마황후는 의원이 자기 병을 고치지 못하면 억울한 죽음을 당할 것을 생각하고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약도 먹지 않았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도 무고한 의원에게 생트집 잡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마황후가 죽자 세상을 평정하면서 만전수전을 겪은 주원장이였건만 부인의 영전 앞에서는 꺼이꺼이 울면서 비통해 했다. 그리고 마황후를 기념해 평생 다시 황후를 책봉하지 않겠다고 선포하고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낸다.

   모든 황제들이 그러했듯이 주원장에게는 수많은 여인이 있어 모두 26명의 아들과 16명의 딸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제일 사랑한 것은 역시나 마황후였다. 지금도 쟝쑤성(江蘇省) 난징(南京)의 중산(鐘山)기슭의 완주봉(玩珠峰)에 가면 그들을 합장한 명효릉(明孝陵)이 있다. / 상해경제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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