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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로마서 9 : 21 - 24 2012년 10월 07일
설교 제목 : 그릇과 저울 김종우 목사
우리가 갑작스런 횡재를 만나면 보통 어떤 반응을 합니까? 주택복권이나 로또복권 같은 엄청난 횡재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지만 때로는 경품에 당첨되어 라면 한 박스를 얻게 된다든지 쌀 20kg 한 포대를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굉장히 기분 좋지요. 우리가 한창 어렵게 살 때 아내가 가스렌지를 경품으로 얻은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우리 그거 10년 이상 애지중지하면서 사용하였습니다. 학교 소풍을 가서도 보물찾기 한번 당첨된 적이 없던 아내가 난생 처음 얻은 상품이었습니다. 당시 꼭 필요했던 물건이고 그게 자기 돈 들이지 않고 경품에 당첨되어 들어왔으니 기쁨이 두 배 이상 된 것입니다. 더구나 평생 처음 당첨이라는 것을 경험했으니 그것 또한 기쁨 중의 기쁨이었지요. 지금이라면 좀 다르겠지만 그 때는 우리 신앙이 초보에 있던 때라 ‘할렐루야!’ 소리치지는 않았습니다. 자, 반대로 갑작스런 불행을 당하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우리 신자들은 보통 뜻하지 않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을 곧잘 찾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겠지요. 그런데 특히 어디서 예민하게 반응하지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행운보다는 불행에서 예민해집니다. 어떤 반응이 나옵니까? 흔히 ‘왜 내가?’ 하는 식입니다. ‘하나님, 왜 저입니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여만 하느냐 여기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신앙에 따라서 이 해답을 찾는데 시간 차이가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래 전 경기도 이천에 있는 도자기 공장을 가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화면을 통해서도 익히 아는 모습입니다. 흙을 반죽해서 모양을 내고 불에 구워내는 과정을 통해 그릇이 만들어져 나오지요. 그 과정을 어떻게 거치느냐에 따라서 모양새나 도자기의 품질이나 가치가 여러 가지로 다르게 나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손에서 도자기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비유를 합니다. 사 64 : 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시는 토기장이시고 우리는 그 손에서 만들어지는 진흙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시기에 따라서 멋없는 뚝배기가 될 수도 있고 하시기에 따라서는 국보급 상감청자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만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갖추려면 불에 몇 번을 더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저 되는 일이 아니지요. 소위 불같은 연단을 그만큼 많이 받아야 그만한 그릇이 되어 나온다는 말입니다. 어영부영 지내면 뚝배기만도 못한 그릇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었다고 말씀합니다(창 2: 7). 그래서 사람은 흙으로 비유되고 또 결국 죽어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흙을 밟아 부수고 주무르고 반죽해서 구워내 그릇을 만들어 냅니다. 흙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참으로 괴로울 것입니다. 게다가 이제는 불에까지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다. 속된 말로 환장할 일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그릇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쓸모 있고 아름다운 그릇이 되려면 보다 더 많이 불 속을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다. 혹 뜨겁다고 도중에 튀어 나오면 그릇이 될 수가 없습니다. 뜨거워도 견디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연단을 많이 받은 사람이 보다 더 요긴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그렇겠지만 우리 교회에서도 그런 사람을 일꾼으로 사용합니다. 많은 훈련과 연단을 받은 사람이 어렵고 힘든 일을 참고 인내하면서 잘 풀어가는 것입니다.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때 우리는 바로 그릇이 되어가는 과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보다 더 쓸만한 그릇이 되려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는 거죠. 하나님이 나를 보다 더 아름답게 보다 더 귀하게 만드시려고 불 속에 집어넣으시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견디어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우리를 그렇게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사 43 : 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할!
그릇의 하는 일 가운데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물건을 담아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이것 때문에 그릇의 판도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 속에 물이 담겨 있으면 물그릇입니다. 밥이 담겨 있으면 밥그릇이고 국이 담겨 있으면 국그릇입니다. 아무리 예쁘게 생겨도 그 속에 개밥이 담겨 있으면 그 그릇은 개밥그릇입니다. 그 내용물에 따라서 귀하게 또는 천하게 사용되는 그릇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라오면서 누구나 한두 번은 그런 마음을 가집니다. 즉 자기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입니다. 키가 조금 더 컸으면, 얼굴이 좀 갸름했으면. 쌍까풀이 되었으면 등등. 청소년들의 중대한 고민거리들 중 하나가 바로 자기 외모입니다. 그래서 성형수술이 여전히 장사가 잘 된다고 합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한국 사람들 때문에 골치 아프답니다. 천국에서는 실물 대조작업 하느라 바쁘고 지옥에서는 불구덩이 리모델링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라지요. 이미 지상에서 불가마로 단련된 사람들이라 웬만큼 뜨거워서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런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우리의 외모가 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결코 실망할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담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생 역전의 사람입니다. 바울이라 불리기 전에 그는 사울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율법에 ‘열심’이 특심한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이단에 미친 사람들을 잡으려 사방팔방을 뒤지며 다녔습니다. 행 9 : 1 - 2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그런데 바로 그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아마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8 - 9절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그 즈음 주님은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를 찾아 가십니다. 그리고 지시합니다. 11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아멘! 그 때 아나니아가 대답합니다. 아니 그 사람이 누군데 그에게로 갑니까? 우리를 잡으려고 온 사람입니다. 그러자 15절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아멘! 예, 사울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려 특별히 택하신 하나님의 그릇입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처음 어떤 사람이었는가 보겠습니다. 빌 3 : 5 - 6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민 중에서도 선민이었습니다. 하나님 중심, 율법 중심의 인물이었습니다. 그 믿음에 있어서 누가 감히 사울을 탓하겠습니까? 그는 어디를 가도 당당했습니다. 좀 과하게 표현한다면 아마도 세상에서는 하나님 다음 가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그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행 22 : 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그 시대 석학들이 모여 배우는 가말리엘 문하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으로나 학문으로나 그 행함으로나 어디 흠잡을 데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180도 바뀌었습니다. 자기가 여태 담고 있던 율법과 지식을 다 쏟아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새 것을 담았습니다. 그 새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울은 여전히 사울입니다. 코 수술한 것도 아니고 쌍까풀 수술한 것도 아닙니다. 사울 그대로였습니다. 다만 기념으로 이름만 바꾸었습니다. 사울을 바울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릇이 바뀐 것은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바뀌었는가? 담은 내용물을 바꾸었다는 말입니다. 빌 3 : 7 - 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아멘!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지식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배설물이 무엇입니까? 싸버렸다는 뜻이지요. 왜요? 그래야 새 것을 담을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새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담았습니다.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사실 세상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달라졌습니다. 무엇이 달라진 겁니까? 보는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자꾸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세상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습니다. 무엇이 빠릅니까? 나를 바꾸면 됩니다. 예수님도 세상을 뒤집으려고 오신 것 아닙니다. 우리를 바꾸려 오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릇을 바꾸는 것은 좀처럼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속의 내용물을 바꾸면 간단합니다. 여태 가지고 있던 잘못된 지식은 과감히 내 버리십시오. 그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의 사울의 신앙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과 율법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 즉 하나님 말씀 속에 숨겨져 있던 비밀에는 눈이 어두웠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문자대로 보았을 뿐입니다. 히 10 :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율법은 그림자일 뿐입니다. 실체는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림자를 붙잡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사울이 여태 그 율법을 지키려고, 일점일획 놓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쓰고 힘썼습니까? 그런데 이제 깨달은 것입니다. 그건 그림자일 뿐이다. 그 속의 비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이지요. 실체를 알고 나니 여태 붙잡고 있던 그림자가 소용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배설물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가 아닌 껍데기를 붙잡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알맹이를 담게 되었습니다. 그릇은 그냥 그릇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그 사람입니다. 그러나 담고 있는 내용물이 달라졌습니다. 여지껏 사울이 담고 있던 내용물은 껍데기, 그림자, 거짓 진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도 바울이 담고 있는 내용물은 알맹이, 실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사울은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 대단히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반대로 마귀를 돕는 일이었습니다. 왜 그런 엄청난 실수가 일어날 수 있었는가?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릇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 그것 때문입니다. 거짓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 딴에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앞에는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는 꼴입니다. 우리가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다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교회 출석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하고 아무튼 두루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무엇을 담고 열심인지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거짓을 담고 열심히 뛴다면 그 열심은 오히려 마귀를 위한 일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행여 껍데기 붙잡고 동분서주해봐야 주님은 그 날에 분명하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마 7 :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아멘! 사울이 율법, 하나님 말씀을 몰랐습니까? 자기 딴에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자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몰랐습니다. 약속(구약성경) 속에 숨겨진 비밀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구약의 비밀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이 어디에 숨어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신약성경) 속에 있겠지요. 그런데 이미 말씀하였지만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과 장래사를 비유로 감추어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속의 비유를 깨닫지 못하면 옛날 사울처럼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같은 처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모두 비유를 통한 참 진리를 깨닫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저울을 알아봅니다. 저울은 잘 아는 대로 측량하는 기구입니다. 무게를 달아보는 것이지요. 그것이 세상에서 이해하는 육적인 저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달리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잠 24 : 12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예,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달아보십니다. 삼상 2 : 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이제는 행동도 달아보십니다. 욥 31 : 6 “그리하였으면 내가 공평한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이 나의 정직함을 아시게 되기를 원하노라” 여기서는 그 저울로 정직함을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분명 사람의 몸무게를 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달아본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으로 우리 마음을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히 4 :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아멘! 무엇이 우리 마음을 감찰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면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지 또는 정직한지 아닌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저울질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저울이 되어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달아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실한지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것인지 무엇이 가늠한다고요?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2 :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누가 심판한다고요? 예수님 말씀하신 바로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갖다 대보니 사울의 신앙은 마귀의 짓거리였습니다. 사울은 그것을 깨닫고 껍데기였던 지식을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참 진리를 담게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비유를 깨닫지 못하고 문자대로 껍데기를 가지고 있다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심판을 받게 됩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도 말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저울을 들고 있었던 것이지요. 백성을 가르치는 목자인데 잘못된 말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저울이지요. 즉 그들은 거짓 진리를 가지고 있던 거짓 목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들을 따라가면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욥 31 : 6절에서 무슨 저울에 달리기를 기도합니까? ‘공평한 저울’입니다. 흔히 장사꾼들이 저울을 속입니다. 눈금을 속이는 경우도 있고 처음부터 기준치를 잘못 설정해 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것은 거짓 저울입니다. 호 12 : 7 “저는 상고여늘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기를 좋아하는도다” ‘상고’란 쉽게 말해서 상인입니다. 그런데 그가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요? ‘거짓 저울’입니다. 속이는 거죠. 거짓 저울은 하나님의 참 진리의 말씀이 아닙니다. 거짓입니다. 사단의 말입니다. 거짓 저울을 가지고 있는 자 또한 하나님의 목자가 아닙니다. 거짓 목자 즉 사단의 목자입니다. 사단의 목자는 거짓 저울 즉 거짓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공평의 저울로 사용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그것으로 사취한다는 말은 곧 성도들을 미혹한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속뜻을 모르고 영적인 것을 육적인 말로 문자대로 가르치면 그것이 거짓입니다. ‘사람의 계명’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공평한 저울에 달리기를 원합니다. 참 진리의 말씀을 담고 있는 목자에게 가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우리 자신이 공평한 저울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비유의 말씀을 바르게 깨달으면 됩니다. 우리 모두 그 길을 찾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