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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 천태산. 육조 선찰 남화사 성지순례 글
1997.6.16일 중국불교협의회 조박초 회장의 초청으로 한국불교대표자 20여명이 방문길에 오른다.
한국대표로 계종총무원장 송월주스님을 비롯한 각 종단대표들이 베이징공항에 내리자 중국불교
지도자들이 맞이 해준다.
먼저 중국불교협회가 있는 곳은 북경의 광제사로 향한다.광제사廣濟寺는 지금으로부터 8백년
전 금나라 때 창건된 사찰로써 경내에는 10만권이 넘는 도서관이 있고 1984년 베이징시가
이 절의 모든 불상을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유서깊은 사찰이다.
베이징 북경
북경은 중화인민 공화국의 수도로서 행정문화의 중심이자 3천년을 이어온 중국역대왕조의 도읍
지답게 현존하는 역사유적 박물관 그 자체다. B C 11세기는 연나라의 도읍지로 계성이라 불렀고,
10세기 요나라 때는 연경,12세기 금나라 때는 중도, 명나라 청나라 때부터 북경(베이징)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3천년 동안 중국대륙의 수도로 군림해 온 곳이다.
북경의 면적은 1만8천 평방키로 미터로 산지면적은 2/3를 차지하고 있고 동남부는 광활한 평원
으로 발해만과 직접연결되어 있다. 1949.10.1 중화인민 공화국이 발족하여 수도로 정한 후국제
정치의무대로서 하루가 다르게 도시가 발전 변모하고 있다.
베이징의 볼만한 곳으로는 자금성. 천안문.명릉.이화원 등이 있고,가까운 외각에 세계의문화
유산인 유명한 만리장성도 있다. 인구는 약1천만 명이며,북경을 상징하는 꽃으로 국화,월계 두
가지이다.
만리장성 萬里長城
광제사가 마련한 오찬공양 후 베이징 외각북쪽에 위치한 만리장성을 보기위해 간다.만리장성은
고대중국을 대표하는 건물이자,중화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적 우수성을 과시하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이 장성은 산해 관에서 출발하여 발해만을 거쳐 북경과 산서성을 지나 남쪽으로 황하 (黃河)를
건너 남서로 관통하여 실크로드의 하서회랑을 따라 올라가 감숙성 가욕관에 이르는 17개성과
자치구를 통과하는 장장 6,400㎞가 넘는 인류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이다.
중국에 처음 장성을 쌓기 시작한 것은 BC 7C경으로 당시 침입과 약탈을 일삼던 북방 유목민족
들로부터 백성들의 재산과 인명을 보호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훗날 중원을 통일한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은 제국의 경계를 확고히 하고, 북방 유목민들의 침입을 막기위해 막대한 인력과 물
력을 총동원하여 만리장성이라는 인류사에 길이남을 역작을 만들어냈다.
북경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약 7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장성은 북경 인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산 정상의 높이가 해발1,015m에 이르는 만리장성은 사방이 훤히 보이는 넓은 시야와
북경 외각으로 연결되는 사통팔달의 교통 요지라는 뜻에서 그 같은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이다.
현재 일반인들에게 등정이 허용되고 있는 만리장성은 1505년 명나라 때 중건된 것이다.돌아
오는길에 쇼핑센터에 들려보니 칠보도자기와 황산을 비롯한 중국의 절경을 담은 그림도 많다.
환영만찬
저녁에는 중국불교 조박초회장이 한국대표단을 위한 만찬을 마련했다.조박초회장은 오래전
부터 중국불교를 대표해온 실세로써 천하명필이기도하다.93세의 연세에도 보살처럼 인자하고
건강해 보인다.
[6월 17일] 북경시내 관광 -주중대사와 오찬
아침 공양후 대표단을 초청해준 종교국을 방문하여 중국종교정책에관한 설명을 들고, 정종욱
주중 한국대사가 마련한 오찬을 받으며 한중간의 교류와 북한실정을 설명을 듣는다.
천안문(天安門)광장
오후에는 자금성이 있는 천안문 광장을 보기위해간다. 천안문광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이다.
본래 북경에는 내성 외성이 있었으나 청나라 때 내성에는 지배계층인 만주족과,외성에는 피지배
층인 한족이 살았다.
황제는 황성안의 자금성에 살았으나 지금은 내성 외성의 흔적만 남아있고,황성은 천안문만 남아
있다.천안문은 1417년부터 하늘의 뜻을 받들어 천하를 편안하게한다는 뜻으로 승천문이라 부르
다가 청대에 개축 하면서 천안문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자금성(紫禁城)
자금성은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크고 완전한 궁전이다.이궁성이 널리알려지게 된것은 영화 마지
막 황제를 통해서다.자금성의 자 (紫란 천자란 뜻이고.금성禁城이란 별자리란 의미로 곧 천자의
궁성이란 말이다.
명나라초 (1406~1420)14년에 걸쳐 건축된 자금성은 8백여개의 궁전과 9천여개의 방이 있는엄청
난 규모의 궁전이다.천안문은 천안문 사태로 더욱 유명하다.1980. 4월 중국 전총서기이자 개혁
가였던 후야오방 胡耀邦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한 학생들의 시위가 점차 많은 시민으로 번지게 되자 여기에 위기감을 느낀 덩샤오핑은
같은 해 6월4일 데모군중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하며 탱크와 무력으로 강제진압을 시켰다.이 과정
에서 중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음을 당한 이후부터 천안문은 중국민주주의 상징처럼 전 세계
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화원
베이징외각 있는 이화원은 중국3대정원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총8키로 둘레의 곤명호와 만수산
(萬壽山)과 천간낭하(千間廊下)장랑(長廊)을 비롯한 수많은 전각들 하나 하나마다.사람의 손길
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이화원은 12세기 금나라 때부터 역대 중국 황실의 휴양지로 만들어 졌다.
특히 청나라 말기 섭정을 맡았던 서태후가 1885년부터 약10년 동안 군비증가용 차관까지 전용해
보수공사를 강행하는 바람에 중일전쟁의 패배의 원인을 재공하는 원성의 대상이 됐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년 간 수백만 명의 국내외 관광객들의 사랑받고,황금 알을 낳는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면적은 87만7천 평으로 며칠을 구경해도 다 볼 수없을 정도로 커고 3/4를 차지하는 곤명호
는 육지속의 호수로 이를 만큼 항주 서호의 소제(蘇堤)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6월18일] 남경
방문 3일째를 맞아 국내선을 타고 강서성의 성도成都 남경南京으로 간다.중국의 사대고도 (낙양.
북경. 서안.) 중의 하나인 남경은 진나라 진시황 때 건설된 오나라 수도였다. 인구 60만 명으로
동해안에 자리하여 6.300km나 되는 양자강 남쪽에 위치한 도시로 옛날 불교의 중심지 였다.
남경의 명승지로는. 각경처와, 농부출신으로 명나라를 세운 명태조 주원장의 능,중국혁명의
아버지요, 정신적 지주로 불리던 손문孫 文선생의 능과 서하사와 영곡사가 있기도 하다.
각경처 刻經處
각경처는 양인산(楊仁山)거사가 세웠다는 각경처[刻經處]서위주임은 각경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준다.“거사는 본래 불교와는 인연이 없든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 전신이 마비되는 불치병
으로 방에 누어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병문안을 온 친구가 “어쩌다 병을 얻어 이렇게 누어만 있는가, 좋은 책이니 많이 병마와
싸우고 있는 자네에게 힘이 되어줄 걸세“ 하며 책 한권을 주고 갔다. 누어서할 일도 없는 처지에
친구가 주고 간 책만 읽었는데 어느 날 희한하게도 병이다 낫게 되었다.
양인산은 그때서야 그 책이 불경임을 깨닫고 자신처럼 병고를 앓는 사람들을 위해 사재를 털어
경전을 만드는 각경처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칼끝에 정성을 모아 한자 한자
경전을 새기고,그 목판을 찍어 책으로 만든 다음 중국전역의 불자들에게 보시하는 현장 이다.
손 문 선생 능
손 문 선생이 1926년 서거하자 1929년까지 3년의 공사 끝에 완공한 증산 능 까지는 총392개의 돌
계단을 밟고 올라 가야한다.능문에는 손 문 선생이 쓴 천하위공(天下爲公)이란 글이 있고, 묘실
을 둘러보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름다운 고도 남경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으로 보인다.
영곡사
영곡사는 541년에 창건한 고찰로서 60m나 되는 높은 영곡탑에 올라가 굽이쳐 흐르는 양자강을
바로보고 있노라니 마치 승천하는 용을 보는 듯하다.
주원장의 묘
영곡사에서 차를 타고 주원장의 능을 찾는다. 그런데 능은 보이지 않고, 허술한 야산에 무성한
잡초만이 우거져 있다.“명나라를 세운 "주원장" 황제의 무덤치고는 너무나 허술해 보인다“ 고
안내원에게 말하자, ”유해의 도굴을 막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남경학살기념 탑
얼마 떨어지지 않는 거리에 남경대학살의 넋을 기리는 추모 탑이 서있다. 남경대학살사건은
일본군이 1937.12.13일 6주 만에 남경을 점령하고 노인 부녀자할 것 없이 30만 명을 참혹하게
학살한 현장에 그때의 참상을 "잊지말라" 는 기념관이다.
서하고사棲霞古寺
서하사는 중국에서도 유서깊은 선종사찰로서 수많은 승려들을 교육하는 불교승가대학이 있는
절이다. 대학의 시설과 교육의 현장을 돌아본 뒤 총장스님으로부터 중국불교의 미래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다과를 나누고 기념촬영을 갖는다.
[6월 19일] 구화산 九華山
남경을 출발하여 5시간 만에 안휘성 구화산 취룡호텔에 도착한다. 해발1300m의 산길을 오르는
동안 10분이 멀다하고 해와 구름이 교차하는 기상을 보인다. 숙소에 짐을 풀기가 바쁘게 구화
산 종정 인덕 仁德장로가 수행하는 기원사 환영법회에 참석하여 양국간의 상호관심사를 논의
하고 개산조 김교각開山祖 金橋角스님에 대한 고행과 행적에 관한 말씀을 듣는다.
1천3백 년 전 신라의 왕자였던 김교각 스님은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당나라로 건너와 지장
이란 법명으로 출가하여 중국대륙을 두루돌며 구도수행을 하다가 양자강 남쪽 구화산의 동굴
에서 깨달음을 얻은뒤 화성사를 창건하고 제자들과함께 구화산을 지장도 량으로 만들고 지장
신앙을 전파하였다.
당시 중국 사람들에게는 생소하였던 지장신앙을 널리 전파해 구화산을 중국사대 불교성지
중의 하나로 자리잡게 한분이다.특히 김교각스님은 99세에 열반한지 3년 뒤 생전의 예언대로
지장보살로 화신하는 등신불이 되어 오늘날까지 13억 중국인들에게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인
생불로 존경받고 있다.
구화산 내에는 기원정사를 비롯하여 50여 사찰이 있고, 6백여 명의 스님들이수행하고 있는 지장
대성지이며 1만 명이 넘는 불자들이 도읍을 이루고 생활하는 도량이다.이는 천3백 년 전의 지장
김교각 스님의 법력이 현재까지 감응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저녁이 되자 안휘성 "양다량"성장을
비롯한 안휘성 불교간부스님들이 환영마찬을 베푼다.
6월20일] 김교각 등신불참배
오늘은 먼저 김교각 지장보살의 등신불이 안치된 지장사 참배를 위해 출발을 한다.1천3백년 전
김교각 스님은 체은이라는 흰 삽살개 한 마리를 대리고 구화산에 와 초근목피의 수행으로 생불
지장보살이 되어 월신보전에 산부처로 앉아 계신다.
김교각 스님이 구화산을 지장도량으로 삼게 된 인연은, 체은 이라는 삽살개 한 마리를 상좌처럼
앞세우고 다였다, 그런데 이상히도 다른 곳은 다 싫다하고 구화산에 이르자 꼬리를 흔들며 떠나
려하지 않아 이곳을 수행 처로 정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체은이라는 삽살개는 문수보살의 화현이고, 김교각 보살은 말세중생의 제도를 위해
이 세상에오신(취의원정 시상사문(취衣圓頂 示相沙門)하는 지장보살임을 얼른 짐작케 한다.
화성사 참배
화성사는 김교각 스님의 법손法孫 자명慈明대사의 등신불이 안치되어있는 절이다.자명선사는
김교각 생불을 친견하러 온 사람들이 그냥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대신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수행한 끝에 생불이 되어 누구나 화성사에 오면 등신불을 친견할 수 있도록 항상 앉자
있는 절이다.
구화산 벼경대
케이블카를 타고 구화산 정상에 오르자 깎아지른 바위산에 천상에서 떨어지다가 걸려서 매어
달린 듯 한 배경 대에 천태사가 있다.여기가 바로 김교각스님이 구화 산에 와서 참선하고 수행
하시던 절이다.참배를 올리고 산세를 살펴보니 환희심이 절로 나온다.깎아지른 바위들이 하늘
높이 우뚝우뚝 서 있고,산허리를 감고 도는 운해는 승천하는 용의 모습같다.
[3월 21일] 절강성 항주
구화산 참배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 7시간만에 항주에 이른다. 중국의 6대고도 중의 하나인
항주는 청산록수 사부다향[淸山綠水 絲府茶鄕] 푸른 산 맑은 물이 있고, 실크와 차로 유명한
인구450만의 아름답고 유서 깊은 도시이다. 오늘로서 중국방문 6일 째를 맞는다.
[6월22일] 천태산 天台山
아침부터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무슨 일을 낼 것만 같은 날씨다.아니나 다를까 중도에 억수
같은 장대비를 만나 도로가 끊기고, 산사태가 길을 가로막아 하는 수없이 성한 길을 찾아 돌고
돌아서 가는데 불귀의 혼이 될지도 모를 위험한 구간이 한 두 곳이 아니다.
본래 대로라면 항주에서 국청사까지는 그다지 먼 길이 아니지만,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5시간
만에 국청사에 도착한다.오늘밤 묶게될 숙소는 계곡물이 흐르고 숲이 우거진 산속 산장이다.
정해진 일정이라 지자대사의 등신보탑을 친견해야 하는데 비가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곳
까지와서 생불이나 다름없는 지자대사의 등신보탑 친견을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조금 무리
하다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비닐우산을 바쳐 들고 길을 나선다.
지자대사 보탑
지자대사의 보탑은 해발 1천M의 천태산 정상 가까이 있다. 바람을 동반한 줄기찬 빗 줄기를
맞으며 올라가느라 모두가 물귀신처럼 보인다. 대사의 등신이 안치 된 보탑에 참배를 올리고
나니 많은 것을 얻는 느낌이 온다. .
하지만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탓으로 절이 퇴락하고,도량은 잡초로 무성하여 지난 수십 년간
중국불교의 아픔과 침체를 보는 듯하여 마음이 아프다. 하산할 때는 다행히도 비가 그치고 날이
개여 고산이 뿜어내는 운해와 아름다운 천태산을 마음껏 바라보고 느낄 수 있어 다해이다.
밤이 되자 적막으로 가득한 산장 옆 물론에서 울어대는 개구리들의 합창소리가 고요한 심산의
정적을 깨트린다. 저들이 무슨 그리움이 많기에 저렇게 울어댄다는 말인가? 멀리서 온 손님을
반기는 소리인가, 지자대사에게 배운 법화경을 읽는 소리인가, 쉼 없이 울어대는 열창의 하모
니가 더없이 애절하고 간절하게만 들려온다.
[6월 23일] 국청사
아침이 발아오자 밤새 울어대던 개구리 소리는 없어지고 방문 앞 나무가지 위에서 새들이 지져
대는 소리가 새로운 하루를 알린다.비록 이들과 짧은 인연이었지만 우연은 아닐 것이란 생각에
금강경한편으로 이고득락을 빈다.
오늘 사시에는 천태 지자대사가 창건한 국청사에서 한국대표단을 위한 오찬을 대접 한다하여
방문한다. 천태(천태)란 본래 산 이름이다. 이 산은 중국 절강성 태주부에 위치하는 천태 지자
대사(天台 智者大師)가 538년부터-597까지 여기서 수행한 이후로 불교의성지가 되었다.
대사는 중국남북조 말기에서 수(隨나라 사이의 고승대덕으로서 성은 진(陳)씨고 이름은 덕안
(德安)이다. 출가한 후에는 "지의"라고 하였으며 ,또 수양제가 내린 존칭이 '지자 대사"이다.
대사를 흔히 "천태 대사"라고 하는데. 천태산에서 수행을 한데서 붙여진 호칭이고, 대사가
거주하던 산의 이름을 따서 그 종파를 천태종이라고 하는
것이다.
천태교의 성립은 560년 대사가 광주 하남성에서 남악혜사南岳慧思의 가르침을 받아 법화삼매
를 깨달은 대서부터 시작된다. 그 후 와관사 (瓦官寺)에서 법화경을 설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8년간 교화하고 천태 산으로 들어와 수행하였는데 교화의 강설은 대부분 제자인 장안 관정에
의해서 전해지게 되었다.
여러 강설 중에서 587년 대사가 50세에 금릉의 광택사에서 법화경강설과, 56세 때 형주 옥천사
에서 묘법연화경 5자를 강론한 것과, 다음해 4월 같은 절에서 법화의 관심수행을 강의 한 것이
각각 '법화문구법화현의마하지관"이며. 오늘날 법화3부 또는 천태 3부라고 일컬어지는 천태종
의 중심사상이다.
천태지자 대사는 천태종의 시조이다. 국청사는 바로 수나라 때 천태대사가 창건 한 절이다. 절
입구에 이르자 주지 가명 (可明)장로를 비롯한 많은 스님들이 대표단을 맞이한다.그러나 이곳
에도 모택동의 종교 법난의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국청사의 오찬공양을 받고 버스편으로
영은사 참배를 위해 항주로 출발한다.
항주 영은사 참배
영은사는 인구450만을 가진 항주시에서 그리 멀지 않는 위치에있는 절이다.1백만 평의 경내를
가진 대찰로써 매일 1만 명이 넘는 참배객들이 찾는 시민의 공원이자 부처님의 도량이다.
영은사는 1660년 인도승려 혜리대사가 창건한 절이다.참배를 올리기 위해 대웅전 앞에 이르자
참배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고, 도량에는 불자들이 공양올린 향연기가 운무처럼 가득하다.
저녁에는 영은사 주지 근원(根源)스님을 비롯한 항주불교 지도자들과 절강성 항주인민 국장이
주최하는 환영만찬을 받고, 먼 길 떠날 내일을 생각하여 일찍 잠자리에 든다.
[3월 24일] 항주 서 호
오늘은 소관으로 가기에 앞서 항주 서호를 찾았다.절강성의 성도인 항주의 총면적은 683평km
이고 중국의 10대명승지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항주는 고래로부터 이름난 문인이 많이 나온
곳이 기도하다.
전당강 하류의 북쪽과 경향대운하의 남단에 위치하여 상해와의 거리는 200km로 고속버스로
2시간이면 오갈 수 있다. 예로부터 중국 사람들은 “하늘에는 극락이 있고,땅에는 소주와 항주
가 있다(上有極樂 下有蘇杭)는 칭찬에 걸맞게 년 간 2천만 명의 관광객들이 항주를 찾는다.
서호는 항주 서쪽에 있다하여 서호[西湖]라 이름 한다.13억 중국인들은 서호를 말하길“아침
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비가와도 좋고, 눈이 내려도 좋고, 사계절 어느 때나 다 좋다“ 할
만큼 서 호를 극찬한다.오후2시 항주에서 국내선항공으로 광동성 광주廣州 공항에 내린다.
여기서 소형 버스에 몸을 싣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의 비포장도로를 끝없이 가고 있다.
폭우가 얼마나 내리는지 버스가 진흙길에 빠지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때 마다 내려서
차에서 내려 버스를 끌어내느라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며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모두가 지처서
초죽음의 상태이다.
그러나 “1천 3백년 전 신라의 "혜초"는 수만리 천축 길을 걸어서 다녀왔고,당나라 현장법사는
죽음도 마다않고 인도구법에 비하면,아무것도 아니다." 란 생각을 가지니 견딜 만하다.이렇게
12시간의 고행 끝에 중국의 최 남단 육조스님의 법향이 그윽한 소관에 도착하여 숙소에 드니
새벽4시가 넘는다.
[6월 25일] 소관시 남화사
새벽 4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든 관계로 아침9시 남화사南華寺 참배를 위해 늦으감치 출발한다.
남화사는 버스로 약30분 거리다.절 앞에 이르자 방장스님을 비롯한 많은 불자들이 환영 해준다.
남화사는 선을 크게 중흥시킨 육조 혜능六祖 慧能 대사의 육신보탑이 모셔진 절이고,대사께서
선풍禪風을 더 날리며 수많은 선지식을 배출시킨 불교사에 빛나는 전통 선禪을 뿌리를 내리게
한 역사의 현장이다.
육조 혜능대사 六祖 慧能大師
대사는 출가 전 홀 어머니를 모시는 나무꾼이었다. 하루는 나무를 팔려고 시장에 갔다가 어느
스님의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던중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其心"이란 구절에서
문득 깨우침을 얻고 황매현의 홍인대사를 찾아가서 출가 하였다.
당시 홍인대사 문하에는 고승 수천 명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신수神秀대사는 선교禪敎에
밝은 선지식 이었다. 그러나 홍인대사는 신수를 법통으로 삼지 않고, 나무꾼 출신 혜능에게
법통을 물려주는 이변을 일어 켰다.
역시 홍인대사는 큰 인물을 알아보는 눈 밝은 도인이었다. 후일 육조는 스승의 기대에 보답
이라도 하듯이 이 땅에 선풍禪風을 더날리고 확립시킨 불교사에 빛나는 위대한 선지식이었다.
24세 때 행자의 신분으로 오조五祖 홍인 대사로부터 도道가 경지에 이르렀다는 인가認可를
받고, 법통의 상징인 가사와, 발우를 물려받은 뒤 남쪽으로 내려 왔다. 의봉원년 병자 1월에
광동성 광주 법성사에서 인종印宗법사로부터 수계受戒를 받고, 다음해 2월8일에 서경西京
지광智光법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혜능은 그길로 광동성 소주부 동남으로 30리 조계강曹溪江이 있는 쌍봉산에 보림사선문을
세우고 37년간 법문을 하시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지식을 배출하였다.
그로인해 43명의 제자가 법을 이었고,깨달음을 이룬자가 무수히 많았다. 대사께서 설법하신
것을 모아 후세에 남겼으니 이것이 바로 선가 禪家에 귀감으로 삼는 법보단경法寶壇經이다.
육조대사는 오도悟道한 직후 최초의 말씀은 “불사선 불사악 不思善 不思惡하라.“는 것이다.
착한일도 생각하지 말고, 악한일도 생각하지 말라. “착한 일은 더 많이 취하려다 빠지게 되고,
싫어하는 것은 버리려고 하다가 온갖 불안에 빠지기 때문이다.
선과 악을 담고 있으면 취하려는 마음과, 버리고자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여기에서 또다른 집착과 번뇌심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오늘날 한국불교의 조계종이라는
이름은 육조 혜능 대사가 선풍을 더날리던 보림사 앞을 유유히 흐르는 조계강의 이름에서
유래 된 것이니 이는 육조대사의 전통선풍을 이어받는 수행 승단이라는 뜻이다.
남화사 들어서자 불자들이 사루는 향연기가 운무 같고, 학승들의 독경소리가 산문을 울린다.
법당에 절을 올리고 육조대사의 진신탑에 감격스런 삼배의 큰 절을 올린다.수행에 많은 도움이
되는 남화사 참배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 저녁 7시 광동성 광주에 도착 한다. 오늘 저녁공양은
육조스님의 수계사인 광효사 주지 신성新成 스님과 광동성 불교협회 스님들이 한국대표들을
위한 방문을 환영만찬을 베뤂어준다.
[6월 26일] 홍콩경유 귀국
중국불교성지 순례를 마치고 양국불교 간의 우의증진과 21세기의 세계평화와 번영을 위해 공동
으로 노력하자“는 다짐을 채택하고 열차 편으로 심천을 거쳐 오전 11시경 홍콩에 도착한다.
홍 콩
홍콩은 본토말로 샹강[香港]이다.광둥성[廣東省]남쪽 해안 지대에 위치한 특별행정구으로서
과거 백년 동안은 영국 식민지였으나 1997년 7월 중국으로 반환 되었다. 본토 주룽반도[九龍
半島]와 란터우 섬을 비롯한 230개가 넘는 섬들로 이루어져있다. 남북길이는 43km이고 동서
길이는 56km이다.
인구의 90%가 불교이고, 힌두교 이슬람 그리스도교들은 아주 소수이다. 금융과 국제무역에
기반을 둔 시장경제를 유지하며,일인당 국민소득은 아시아 최고이다.1980년까지 경제성장의
주요 견인차는 경공업이었으나 이후 서비스 분야가 점차 경제기반을 장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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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훌륭한 항구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세계최대규모의 컨테이너 하역장과, 카이탁 공항
에는 수십 개의 항공사들이 취항하고 있는 세계로 통하는 하늘과 바다의 길목이다.
빅토리아
홍콩에 도착하여 빅토리아 파크를 보기위해서 간다. 이곳은 홍콩을 찾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 씩은 들리는 명소이다. 넓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홍콩이 자랑하는 현란한 야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구미를 당기는 레스토랑과, 좋은 물건들이 진열된 갤러리들이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 드리고 있다.
윙 타이신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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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를 회향하는 마음으로 홍콩시내 윙타이신 사원을 참배한다.이 사원은 홍콩에서 가장 많은
불자들이 찾는 곳으로 1921년 독실한 불자가 단독으로 세웠다고 한다.도심의 사원치고 규모도
대단하지만,참배를 올리는 불자들의 행렬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윙 타이신 사원참배를 끝으로
찬란한 등불이 홍콩의 밤을 밝히는 저녁시간 귀국길에 오른다.
항공기가 이륙하자 모두 단잠에 들고 만다. 나는 이번 순례에서 보고 느낀 일들을 정리하는데
집중하다보니 "김포공항에 도착 하였다" 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이번 중국불교순방은 참
얻고 배운 것이 많다. 광동 성의 남화사와 천태산 국청사는 개인적으로 참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좋은 기회를 주신 중국불교 조박초회장님께 손 모아 감사드린다.
흥 륜 사 주 지 정 법 륜 합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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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큰스님 좋은글과 사진 감사히 공양 하였습니다...너무 자세히 올려 주셔서 저도 다녀온것 같은 마음입니다...많이 배우고 담아 갑니다...나무 관세음 보살..._()_
큰스님 사진이 넘 젊게 나왔네요...세월은세월이네요...상세하게 자세히 올려 주셔서 모두가 동참하여 다녀 온것 같네요....같이 누릴수 있어서 감사합니다....나무관세음보살()()()
큰스님 좋은글과 멋진사진 감사히 감상하고갑니다.....감사합니다...성불하세요....
큰스님 불교 초청 방문 기행문 멋진 사진과 꼼꼼이 올려놓으신 글 감상하고 갑니다.성불하십시요.().
스님~저희들을위해 멋진사진과 기행문 올려주고 불교에 대해서도 알게되고 세계나라를 알수있음에 감사합니다...성불하십시요_()_
불교의 법향이 그윽한 곳만을 다녀오셨습니다. 가고싶다하여 아무나 인연이 되지는 않을겁니다. 큰스님은 닦으신 복이 많으신 듯합니다. 신앙수행에 많은 도움이 될 좋은 글과 성지사진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반 사람들이 참배하기 힘든 불교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좋은 성지를 볼 수 있게 되어 너무 행복합니다.
큰스님 공덕으로 불교의 성지를 많이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큰 스님의 성지순례를 통하여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생불과 같은 선사님들이 수행하시던 좋은 성지를 친견하게 되어 더없는 보람과 인연공덕으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