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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암송아지의 재 (민 19:1-10)
민수기 19장에는 붉은 암송아지를 태운 재를 물에 타서 뿌리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
습니다. 이 붉은 암송아지의 재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신앙생활에 대단히 중요한 문
제 한 가지를 다루는데, 바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매일매일 짓는 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는 이중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 받는
순간 우리는 죄의 책임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게 됩니다. 결코 지옥에 떨어질 수 없
는 존재가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칭의의 구원(Justification)’이라고 말합니
다. 고인이 되신 백영희 목사님은 이를‘기본구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다
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면 기본 구원을 받습니다. 기본구원의 기능
은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인지 지옥에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침례를 받으면 이미 기본구원을 받은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구원은 천국 갈 기본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늘
죄의 영향력 가운데 있기 때문에 우리가 비록 천국 갈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
롭다고 칭해주셨지만 수시로 죄에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삶 가운
데서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백영희 목사님은
이 성화를 가리켜서 ‘건설구원’이라고 칭하셨습니다. 건설구원은 천국과 지옥을 결
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천국에 가면 얼마만큼 상급을 받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
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죄로부터 차츰차츰 벗어나서 거룩함에 이르면
성화를 크게 이루고 천국에서도 많은 상급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반면에 우리가 매
일 짓는 죄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다면 천국에 가도 큰 건설이 이루어지지 아니하
고, 조그만 상급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짓는 죄를 제대
로 처리해야 합니다. 이것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큰 손실을 보게 될 것
입니다.
예를 들어서 다윗과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천국에 간 사람들이
지만 그들의 삶 가운데도 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베드로는 그 죄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그 죄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더욱 귀하게 쓰이고 천국
에 큰 상급을 쌓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그 남편 우
리야를 전쟁터에 보내서 간접적으로 살인을 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은 다윗은
시편 32편 4절의 고백처럼 마치 몸의 모든 진액이 여름 가물에 마름과 같이 고통스러
웠습니다. 만약에 다윗이 계속해서 그런 죄악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면 그는
영적으로 큰 손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속히 반성문을 씁니다. 나단 선
지자의 책망을 받고 반성문을 쓴 것이 시편 51편입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
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편 51:7)고 고백하였습
니다. 다윗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정결케 해주심을 간구했기 때문에, 죄
를 씻음 받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함으로 왕으로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큰 업적
을 남긴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는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밖에 나와서 크게 통곡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에 면목 없는 모습이지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 결과 예
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베드로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큰 삶의 열매를 맺게 되었
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매일 죄의 오염을 처리
하지 않으면, 우리는 때때로 영적인 침체와 인생의 좌절에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붉은 암송아지의 재’ 교훈은 한 마디로 ‘매일 매일 죄의 오염
을 씻으라’는 것입니다. 광야 40년의 삶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염되기 쉬운 환
경 속에 늘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의 불신앙을 통해 40년 동안 광야에
서 무려 60만 명이 죽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평균적으로 40년 동안 하
루에 약 40명씩 죽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장례를 치르고 곡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행진은 한 마디로 장례 행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
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염될 위험성이 대단히 높았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패를 통해 오염되는 경우는 네 가지입니다. 먼저 “사람의 시체
를 만진 자는 칠일을 부정하리니”(19:11). 시체와 직접 접촉하면 그 사람은 부정해
집니다. 두 번째로 “장막에서 사람이 죽을 때의 법은 이러하니 무릇 그 장막에 들어
가는 자와 무릇 그 장막에 있는 자가 칠일 동안 부정할 것이며”(19:14). 장막에서 여
러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서 한 사람이 죽었다면 시신을 만지지 않았다고 할지라
도 장막에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오염되어 부정해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무릇
뚜껑을 열어 놓고 덮지 아니한 그릇도 부정하니라”(19:15). 장막 안에서 사람이 죽었
는데, 그 장막 안에 뚜껑을 덮지 않은 그릇이 있다면 뚜껑 덮지 않은 그릇과 함께 그
내용물도 부정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부주의함에서 오는 부정입니다. 마지막으로
16절입니다. “누구든지 들에서 칼에 죽이운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
면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19:16) 들을 지나가다가 전쟁통에 활에 맞아 죽은 군인의
시신이나 뼈에 몸이 닿아도 그 사람이 부정해 진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
들은 늘 오염의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2. 오염 처리의 필요성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죄에
오염될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늘 죄인들과 접촉하고, 죄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오염을 처리하지 않게 되면 큰 위험과 손해가 옵니다. 오염을 처리하
지 않고 부정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 13절과 20절 말씀이 그 결과를 이야기합니
다.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
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
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저 있음이니라” 어떻게 보면 작은 범죄
에 비해 너무 큰 형벌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벌이 큽니다. 또 20절을 보면 “사람
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
에서 끊쳐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
라”고 했습니다. 지나가다가 자기도 모르게 시체 한 번 건드렸다가 암송아지의 잿물
한번 안 뿌렸다고 해서 이스라엘에서 그 사람을 끊어버리는 것은 너무 가혹한 형벌 같
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사소한 부정에도 큰 벌을 명하셨을까요? 우리에게 강한 메시지
를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죄에 오염된 채 살면서도 그 부정
을 날마다 처리하지 않으면 그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요, 엄청난 손해를 초래하는 일이
라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기본구원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건설구원
에 큰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을 대단히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3. 오염 처리의 방법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체에 접촉했을 때, 그 오염을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붉
은 암송아지를 태워서 그 재를 받은 후에, 흐르는 물을 취하고 그 재를 물에 타서 우
슬초로 찍어 정한 사람이 부정하게 된 사람에게 뿌렸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
지만, 이스라엘의 문헌을 참고할 때 일주일 동안 부정하기 때문에 제 삼일과 제 칠일
에 각각 일곱 번씩 뿌려서 그 사람이 정함을 입게 하였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
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
로 끌어오게 하고”(19:2)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붉은 빛이 나고 멍에를 메어보
지 않은 흠 없는 암송아지만이 오염을 제거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붉은 암송아지(red heifer)는 흔한 짐승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 이 붉
은 암송아지는 아홉 마리 밖에는 탄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세시대 한 마리, 에스
라 시대에 한 마리, 그리고 그 후에 일곱 마리가 태어났는데 마지막 붉은 암송아지는
AD69년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 마지막 붉은 암송아지를 태워서 재를 만들고 난 후
에 로마의 장군 타이투스가 예루살렘을 침공해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사
건이 일어났습니다. AD70년대의 아홉 번째 붉은 암송아지를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02년 3월에 붉은 암송아지 한 마리가 자연적으로 이스라엘에서 출생했습니
다. 그러자 예언을 좋아하는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이 이 붉은 암송아지 한 마리를 가지
고 별 이야기를 다합니다. 2002년 4월 11일자 National Review라고 하는 잡지에서 로
드 드레어라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글에 “지난달에 태어난 이 작은 암소가 이스라엘
에 아마겟돈 전쟁을 일으킬 것인가?”라는 타이틀을 붙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습니
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의 제목부터 참 우습다는 생각을 했지만 예언을 좋아하는 사
람들은 그것을 아주 심각한 질문으로 받아들일 정도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붉은 암
송아지가 예수님의 재림을 예고하는 징조이며, 예수님께서 오시면 모리아 산에 있는
회교 성전을 부수고 그 곳에 여호와를 섬기는 성전을 지으심으로 소위 제 3성전의 시
대가 올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이 붉은 암송아지가 신기한 동물입니
다.
그러나 저는 이런 이야기들은 다 헛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붉은 암송아지가 상징하
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나 종말이 아닙니다. 그럼 이 붉은 암송아지가 상징하는 것
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붉은 암송아지가 태어나면 제사장에게 가져옵니
다. 본문 당시의 제사장은 아론의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붉은 암
송아지를 엘르아살에게 데리고 오면 엘르아살은 붉은 암송아지를 끌고 이스라엘 진영
바깥으로 나가고, 그 송아지를 끌고 온 사람은 제사장 앞에서 붉은 송아지를 잡았습니
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피를 받은 후에 손가락에 찍어서 회막 정문을 향해 일곱 번
뿌렸습니다.
이처럼 붉은 암송아지는 재도 중요하지만 피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재로 정결함
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피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피를 일곱 번 뿌린다는 것
은 완전한 속죄를 의미합니다. 붉은 암송아지의 피가 재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것은 사
람이 건설구원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설구원 이전에 기본구원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천국에 가서 상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 받기 이
전에 기본구원을 받는 것이 필수요소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인생에서 결정적으로 중요
한 것입니다. 다른 것을 다 실패했다고 할지라도 기본구원만 받았다면 우리는 성공한
사람의 대열에 들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공해도 실패고, 실패해
도 실패입니다. 살아도 비참하고 죽어서 더욱 비참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성공하면 성공이고, 실패해도 성공입니다. 살아서도 복을 누리고 죽어
서도 영원한 복을 누리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
들 가운에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분이 계신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확고하게 믿
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붉은 암송아지의 상징
제사장이 피를 손으로 찍어서 일곱 번 뿌린 후에 피를 뿌린 붉은 암송아지의 고기와
가죽, 피와 똥까지 모두 불사르게 됩니다. 이때 제사장은 붉은 암송아지를 태우는 곳
에 세 가지를 더 던져 넣게 됩니다.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입니다. 이 세 가지와
함께 붉은 암송아지가 다 타면 남는 재를 거둬서 깨끗한 항아리에 담아 진 밖에 둡니
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정을 입게 될 때에는 흐르는 물을 받아다가 그 재를 물
에 타서 우슬초에 찍어 제 삼일과 제 칠일에 뿌려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붉은 암송아
지의 재는 더럽게 된 것을 정결케 하는 목적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피와 재를 생각할 때에 이 붉은 암송아지가 누구를 상징하는 것이냐 하는 데에 있어서
는 이견이 없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흠
없고 죄 없이 영문 밖에서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백향목과 우슬
초와 홍색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많은 성경
학자들이 백향목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우슬초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홍색실은 그리스
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약성경 민수기 19장은 대단
히 복잡한 것처럼 보여도 그 속에는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거가
일맥상통하게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에게 기본구원도 주
고 건설구원도 줍니다.
결론
이처럼 붉은 암송아지의 재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죄에 오염된 채로 살지 말라는 교훈
을 줍니다. 요한복음 13장 10절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
하나 다는 아니니라” 유다는 목욕을 못한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목욕은 기본
구원을 말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여러분들은 이미 목욕을 하셨습
니다. 기본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언제 죽어도 지옥에는 갈 수 없고 천국에 갈 하나님
의 백성들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목욕한 것이 끝은 아닙니다. 인생을 가다가, 길을 가
다가 발이 자꾸 더러워지면 발 씻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 발 씻는 일이 매일의 오염
을 씻는 성화의 작업이요, 건설구원의 작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목욕한
사람은 발을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발을 살펴보십시오. 내 발은 깨끗한
지, 내 발을 씻었는지 날마다 살펴보면서 건설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
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도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했습니
다. 우리의 인생은 마치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만약 씻지 아니한 오염, 고백하지
아니한 죄를 우리가 지니고 있다면 이는 무거운 짐을 지고 마라톤 경주에 참가하는 사
람과 같은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진 마라토너는 빨리 뛸 수도 없고 금방 지쳐 버려
서 결국 상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오염된 죄를 씻고 살아
야 합니다.
우리가 오염된 죄를 씻는 방법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시대에는 붉은 암송아
지 잿물을 뿌렸습니다만, 지금은 붉은 암송아지의 재가 필요 없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
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오염
된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
게 하시지만, 자백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깨끗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날마다 자신
을 반성하고 오염된 죄를 자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게 되면 우리의
심령은 날마다 깨끗해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7장 4절을 통하여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이 죄를 짓고 와서 하루
에 일곱 번씩이라도 용서를 빌면 그를 용서해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사람에게도 이렇
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하물며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얼마나 신속하게 자주 우리를
용서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민수기 19장의 말씀을 통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이 날마다 죄악 가운데 오염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
으시고, 날마다 자백하여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아 심령이 정결하고 하나님과 동
행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명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