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보고 - 1
1972년 4월 1일 토요일.
완벽한 체포 작전에도 불구하고 백수웅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고, 아침 해는 어김없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지난 밤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잠 한숨 자지 못했던 허열은 아내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
수사 본부가 위치한 반도 호텔로 돌아와 오후 1시가 되도록 정신을 잃고 잠에 취해 있었다.
그가 눈을 뜬 것은 정확히 1시 7분 전이었다. 7분 후는, 치료받고 있는 남성우를 제외한
수사대원이 모두 모여 회의를 열기로 한 시간이다.
객실에서 나와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수사 본부가 있는 306호로 올라갔다. 모두 지치고 피로한 모습들이었지만,
그가 들어서자 다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지난 밤 수고들 했다. 하지만 수확은 전혀 없었어.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그것이 허열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어떤 실수도 부하들에게 떠넘기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부하들이라면 아내보다도 더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그의 부하들은 허열의 통 큰 인간성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고, 그를 위해 기꺼이 자기를 희생할 각오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녀석을 추적한다.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 녀석을 처치할 것이다.
자, 회의를 시작한다. 기탄없이 말하라."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자꾸만 비어 있는 의자로 옮겨 가고 있었다. 가장 현명하고 용감한 남성우의 의자였다.
그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 이를 데 없었다.
회의는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린파크의 대실패에 대해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백 수웅 체포 실패는 이들에게 감당키 어려운 충격을 준 것이다.
"차라리 녀석이 알몸으로 나뒹굴고 있었을 1시쯤 습격할 걸 그랬나 봅니다."
최일우가 분해 못 견디겠는지 이를 악물며 한 마디 내뱉었다.
"아냐, 녀석은 모든 걸 잘 알고 있었어. 적어도 공개 수사를 하지 못하는 우리 입장,
그리고 우리가 체포하려는 인물이 백수웅이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서는 안 되는 우리 사정을
그 녀석은 너무나 잘 알고 있어. 새벽 1시쯤엔 우리가 절대로 쳐들어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
느긋하게 기다렸던 거야. 하지만 조금만 더 일찍, 아냐, 아냐. 그런다고 지금 사정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허열의 판단은 언제나 현명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 그 시간 속에서 진행된 실수가 지금 후회한다고 해서 되돌아오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당장 어떻게 해야겠다는 뾰족한 묘안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공개 수사는 곤란한 겁니까?"
최일우가 다짐하듯 되물었다.
"안 돼. 공개 수사가 가능했다면 진작에 그 방법을 선택했지.
그건, 노 회장님은 물론 이후락 부장님, 각하께서도 반대하셨어.
우리 손으로 해결해야 돼, 은밀히."
모두들 둘러앉은 채 애꿎은 담배만 피워 댔고, 실내는 마치 겨울 안개에 파묻힌 것처럼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지금까지는 잘 추적해 왔지만,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부산에서의 첫 번째 출현 때 이를 잘 감지하여 해운대 잠입 현장까지 찾아 냈고,
두 번째 은신처인 양동의 무허가 하숙집, 그리고 세 번째 출몰 지역인 그린파크를 포착하는 데까지는
운 좋게 추적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글자 그대로 오리무중이다. 녀석이 그린파크에 다시 나타날 이유가 없다.
"허 참. 이거 난감하군."
머리 회전이라면 피스톤처럼 재빠른 허열도 지금은 속수무책이다.
녀석이 은신해 있을 만한 곳을 도무지 추리할 방법이 없었다.
"수사 사무실은 그대로 두는 게 좋겠습니다."
최일우의 제의에 허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인가 이미 노출 된 수사 사무실을 옮기자는 의견이 나왔었지만,
허열이 반대한 일이 있었다.
"어쨌든 녀석은 반드시 허 검사님께 보복하려 덤빌 겁니다. 그렇게 하자면 본부를 지키고 있어야 하거든요."
"그래. 나도 그 생각이야. 이번엔 내가 미끼가 되어 주지. 녀석은 나 아니면 내 아내,
둘 중 하나에게 틀림없이 복수하려 덤빌 테니까,"
수사 본부를 옮기지 않는다는 원칙만 세워 놓은 채 두 시간 동안의 지루한 수사 회의는 끝을 맺었다.
연락관 한 사람만 남겨 놓은 채 이 날은 모두 휴식에 들어가기로 했다. 모처럼 귀가가 허락된 것이다.
이 날만은 백수웅도 어딘가에서 꽁무니를 감춘 채 힘을 축적시키고 있을 것이다.
허열은 우이동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병원에 있고, 미라는 외할아버지 집으로 이미 피신시켜 놓은 뒤였다.
집에서 허열은 위스키를 반 병이나 들이켠 후 깊은 잠에 곯아 떨어졌다.
만약 긴급 사태만 벌어지지 않았다면, 허열은 며칠이라도 잠에 곯아떨어졌을 것이다.
백수웅 출현 이후 단 한 시간도 마음 편하게 수면을 취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긴급 사태는 너무나 엄청난 보고로 시작되어, 반 병이나 들이켠 술을 한 번에 깨워 주었다.
"뭐라구? 그게 사실이야? 좋다. 현지로 출동한다."
4월 2일 일요일 새벽 5시에 최일우가 걸어 온 긴급 전화였다.
한 사내가 청평 부근에서 경춘선 열차에 깔려 즉사했는데,
이 시체의 휴대품에서 콜트 45구경 권총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고는 경기도 경찰국으로, 다시 치안국으로 계속 보고되어 올라왔고,
치안국은 즉각 특수대에 연락해 주었던 것이다.
"시체는 현장에 그대로 보존시켜 놓았답니다. 자세한 상황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
도 현장으로 가겠습니다. 청평 역장실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허열은 집을 뛰쳐나와 자신의 승용차에 몸을 싣고, 있는 힘을다해 새벽 공기를 가르며 청평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혹 탈영병인지도 모르지 않으냐는 의문도 제기되었지만, 시체가 발견된 지점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진 빨간색 오토바이 잔해까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섣부른 판단인지는 모르지만, 백수웅 녀석이 아닌가 해서요."
허열의 귀에는 아직도 부하의 대답이 맴돌고 있었다.핸들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미치광이처럼 고함을 질러 댔다.
"백수웅 이 녀석, 넌 죽어선 안 돼. 기다려.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란 말이야.
네놈 숨통이 끓어지기 전에 듣고 싶은 말이 있어. 살아 줘, 제발 내가 도착할 때까지만 살아 있어 줘."
허열의 승용차는 질풍같이 달려갔다. 녀석이 죽었다는데도 그는 안타까운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사나이들의 승부가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는 자존심과, 녀석의 정체와 목적을
분명히 듣고 싶은 심정 때문이었다.
대통령은 틀림없이 생포해서 무릎 앞으로 끌어 오라고 했고, 대통령께서 분명히 그렇게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인인 노범호 회장은 보는 즉시 사살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보다는, 죽은 녀석이 분명 백수웅이라면, 그리고 그의 죽음이 사고가 아닌 자살이라면,
이건 자신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고통이기 때문에 허열은 더욱 그의 생명 연장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만일 녀석이 눈 뜨고 날 바라볼 힘이라도 있다면, 난 그 녀석 이마에 총알을 박을 것이다. 웃으면서'
서울을 벗어나면서부터 승용차는 더욱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뛰어난 절경의 경춘 가도를 달리면서도 그는 계속 백수웅이 살아있기만을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마석을 지나고, 마침내 청평 읍내의 불빛이 저만큼 보이기 시작 했다.
읍내가 가까워져서야 차의 속력이 줄어들었다. 불과 40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쓸쓸한 시골 역 광장에는 이미 많은 승용차와 경찰차가 와 있었다.
차에서 뛰어내린 허열은 역장실로 단숨에 달려갔다.
육군 중령 계급장을 단 인근 부대의 대대장과 헌병이 보였고,
경찰서장과 사복 형사들이 보였다. 그 틈에 최일우가 섞여 있었다.
"허 검사님, 접니다."
"음, 빨리 도착했구만. 그래, 현장은?"
"네, 청평역에서 서울 방향으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군 부대장과 인근 헌병 장교, 그리고 방첨대 등 군 부대에서 온 사람들이 막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탈영병은 없습니다. 사망자가 군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고를 경찰측에 위임합니다."
군 부대 사람들이 떠나자, 서장이 허 검사에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최일우를 통해 교육받은 것이다.
"일찍 나오셨습니다. 가평 경찰서 서장입니다. 치안국 지시가 있어 직접 나왔습니다."
서장 이외에도 정 . 사복의 형사들이 몇명 더 보였다.
"좋습니다. 이 사고는 제가 책임지고 지휘합니다. 담당자 한 명만 남고 모두들 돌아가시오."
역장의 안내를 받으며 허열 일행은 사고 현장으로 갔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살아 있어 달라는 기원이 한낱 욕망에 지나지 않았음을 현장에 도착한 뒤에야 알게 되었다.
상반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하체도 걸레가 되어 있었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오토바이는 마치 성냥깝을 발로 짓이겨 놓은 것처럼 구겨져 있었다.
그래도 그것이 빨간색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보다도 권총이 더 궁금했다.
G82241127. 이것이 남성우가 백수웅에게 탈취당한 권총 고유 번호다.
"문제의 권총은?"
"네, 제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현지 형사가 비닐 봉투에 담겨진 권총을 허열에게 내밀었다.
날이 밝아지기 시작해, 손전등 없이도 충분히 판독할 수 있었다.
허열은 권총 몸채의 고유 번호를 찾아 읽었다.
G82241127.
허열의 눈이 크게 팽창되었다. 틀림없다. 이 총은 남성우가 지난 밤 백수웅에게 탈취당했던 것이다.
역장이 보충 설명을 해 주었다.
"이런 사고가 별로 없었는데요 아무튼 사고 상황으로 보아, 죽은 자가 오토바이를 몰고
달리는 열차로 뛰어든 게 분명합니다. 워낙 강하게 부딪쳐 상반신이 완전해 분해된 거죠.
권총에도 핏덩이가 범벅이 되어 있었죠. 권총 때문에 놀라 경찰서와 부대에 즉각 통보한 겁니다.
하필 제 구역에서 이런 사고가 "
"아, 괜찮습니다. 역장님 책임은 아니니까요."
허열이 다시 반토막의 시체로 다가갔다. 겨우 가슴 부분만이 너덜너덜 붙어 있을 뿐,
얼굴은 물론 상반신은 완전히 분해되어 사방으로 튀어나가고, 부근 여기저기는 시체의 살점으로 가득했다.
이 소름끼치고 구역질나는 시체를 허열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들여다보았다.
낡은 청바지와 하얀색 농구화를 신은 두 발이 힘 없이 늘어져 있었다. 겨우 이것이 백수웅의 실체라니
청평역에서 열차 충돌로 사망한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나이. 그러나 비록 얼굴과, 몸통은 산산조각이 되어
완전 분해되었지만, 그가 백수웅임을 의심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문제의 콜트 45구경과 빨간 오토바이가 그걸 너무나 분명히 증명해 준다.
허열로서는 분명하고 확실한 승리였지만, 그리 기쁜 표정은 아니었다.
수사 본부인 반도 호텔로 돌아온 뒤에도 그는 내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아직 허열의 이런 감정을 읽지 못한 최일우는 남성우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백수웅의 자살이나 다름없는 죽음을 기분 좋게 떠벌리고 있었다.
"예, 그러니까요, 오갈 데 없이 쫓기던 녀석이 오토바이를 탄채 달려오는 열차와 박치기를 해 버린 겁니다."
"백수웅이? 자살을?"
남성우도 무척 놀라는 목소리였다.
"그리고요, 녀석이 탈취한 권총도 현장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지문 채취는 실패했지만,
권총 넘버가 남 형사님 것이 분명했으니, 뭐 지문 따위에 신경 쓸 일은 아니었습니다."
"좋아. 나 대신 고생해 주어 정말 고맙다. 그래, 허 검사님은?"
"네, 지금 보고서 작성하고 계십니다. 빨리 완쾌하셔야죠. 그래야 중앙정보부 정식 요원이 되는 겁니다."
"개새끼, 내 손으로 죽였어야 하는데 "
"헤헤, 상처 때문에 화가 나셨군요. 하지만 이미 뒈진 녀석 붙잡고 시비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허열은 노범호 회장과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보고할 서류를 직접 작성하고 있었다.
1972년 3월 7일 부산 동백섬에 출몰할 때부터, 4월 2일 새벽 청평에서 열차와 충돌하여
시체로 발견되기까지의 보고서는 장장 20여 페이지에 육박하고 있었다.
보고서 작성을 끝낸 허열은 피곤한 모습으로 허리를 폈다. 그리고 부하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이 때 문이 열리며 어깨에 붕대를 감은 남성우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니, 치료나 하지, 여기는 왜?"
깜짝 놀란 요원들이 모두 일어나 상처투성이의 남성우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병원에 누워만 있을 수가 있어야죠. 그래, 청평에서 발견된 시체가 백수웅인 건 틀림이 없습니까?"
"물론이지. 사실 자네가 무기를 빼앗긴 건 군법에 회부해야 할 사항이지만,
그 권총 때문에 녀석이 백수웅이란 걸 확인하게 되었어. 나는 17시까지 청와대에 다녀온다. 마지막 보고다."
허열이 보고서를 들고 반도 호텔을 빠져나와 청와대로 출발한 뒤에야,
요원들은 박수를 치며 녀석의 죽음에 축배의 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렇게 애타게 추적하던 백수웅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제 이들은 1계급 특진과 함께 치안국에서 중앙정보부로 옳겨가게 된다.
청와대를 제외한다면 가장 막강한 파워를 가진 중앙정보부로
허열은 청와대를 스쳐 지나 삼청동 공원 입구에서 차를 세웠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공원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 한 시간 후는 백수웅의 죽음을 보고해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가장 기뻐해야 할 백수웅 죽음에 대한 보고임에도 불구하고
허열의 마음은 전혀 그렇지가 못했다.
자신의 손으로 체포하거나 사살하지 못한 원통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보다도 더 그의 가슴을 압박하는 것은 애석하게 시체의 실존, 즉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었다.
"지나친 신경 과민일까?"
그가 백수웅이 아니라면? 이미 백수웅이란 인간에게 몇차례의 시련을 겪은 허열이다.
죽은 시체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는 일말의 불안감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녀석이 잠적하기 위해 에꿎은 녀석을 잡아 열차에 처넣었다면?
그래서 지금도 어디선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잔뜩 웅크리고 날 기다린다면?
녀석이 만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그런 무서운 상상에 휘말리면서도 몇 가지 상황이 허열을 다소 안도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남성우로부터 탈취한 권총이었다. 민간인 몸으로 서울 바닥에서,
그것도 쫓기는 입장에서 권총을 입수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입수한 권총을 백수웅이 버린다는 건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또 하나는 그의 시체가 발견된 장소 때문이다. 그 치밀하고 주도 면밀한 녀석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그 녀석은 틀림없이 어른(노범호)의 별장을 알아 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별장은 바로 녀석이 사고를 낸 청평에 있다.
그는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고통스러울 만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살아 있을까, 아니면 정말 죽었을까? 살아 있다면 지금 어디에 있으며, 죽었다면 그렇게 쉽게?
자살은 아닐 것이다. 그린파크에서의 완벽한 포위망도 뚫고 나가는 그런 무서운 녀석이
실수로 죽는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그렇지 않다면 핏덩이 속에서 발견된 권총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벤치에서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청와대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는 마음의 결심을 내려야 할 차례다. 다시 공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그리고 핸들을 잡으며 부르짖었다.
'녀석은 죽었어. 무기까지 포기할 녀석도 아니며, 그런 방법으로 스스로를 잠적시킬 성격의 인간도 아니야.
이번 테러리스트 잠입 사건은 이것으로 끝났어.'
공원 입구에서 출발한 그의 승용차는 총리 공관을 지나 청와대 정문으로 들어섰다.
노범호 전용 회의실에는 이후락 정보부장과 노 회장, 그리고 김현옥 내무부 장관이
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허열이 들어서자 김 장관이 자리를 피해 주었다.
"앉지. 중대 보고가 있다고?"
"네, 부장 각하."
허열이 정보부장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얼굴이 몹시 상기되어 있었다.
"백수웅 문제인가?"
노범호가 긴장된 허열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우선 보고서를 올립니다만, 간단히 구두 보고부터 하겠습니다.
오늘 새벽, 청평역에서 한 사내가 열차에 치여 사망했는데,
그 인물이 바로 백수웅인 것으로 추리하고 있습니다."
"추리?"
이후락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뜻밖의 보고였다.
머리를 짓누르게 만들었던 테러리스트가 열차와 충돌하여 죽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인이 아닌 추리라는 것이다.
이후락이나 노범호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용어였다.
"추리라니, 시체 확인을 직접 하지 않았나?"
이후락이 허열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사고 현장까지 달려갔었습니다."
청평역에서 발견된 처참한 시체와 탈취당했던 권총, 그리고 시체와 권총의 동시 발견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죽은 자는 백수웅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는 지금까지의 경위를 자세히 보고했다.
노범호는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후락의 얼굴은 그렇지가 못했다.
국제 첩보의 1인자이며 CIA에서 정식으로 교육 받은 몸이다.
게다가 지금은 한 국가의 정보를 총책임지고 있는 한국 중앙정보부 최고 지도자이다.
그는 허열의 보고를 받으며 반신반의의 혼란에 잠겨 있었다.
"외형상으로는 죽은 자가 테러리스트인 게 분명해. 하지만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건 의심해 볼 여지가 있어.
좋다. 일단 반도 호텔 특수대는 철수한다. 하지만 해체되는 건 아니야.
남북 회담이 끝날 때까지 특수대는 그대로 존속한다. 정보부 경호까지 책임져라.
이번 남북 회담의 총 경호 책임을 허 검사가 맡는 거야."
'휴우.' 하고 노범호는 가슴을 쓸어내렸고, 허열은 기쁨을 감추지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가 꺾어지도록 절했다.
"감사합니다, 각하. 목숨을 걸겠습니다."
"이번 경호는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지만, 무사히 끝나면 엄청난 논공 행상이 주어질 거야.
허 검사, 자넨 노 회장님 사위라는 명예도 있어. 그러니 잘 알아서 해.
회담장이 워커힐이 되든 영빈관이 되든, 결정나는 대로 20명의 정보부 요원을 파견시켜 주겠다.
기타 경비는 관할 경찰서에 별도로 지시할 테고."
"알겠습니다."
"특수대 새 본부 자리를 물색하라. 이번에는 반도 호텔처럼 눈에 뜨이는 곳은 안 돼.
허름한 사무실 하나 얻어 임무 계속 수행 하라고. 백수웅이란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허열은 용기 백배하여 본부로 되돌아왔다. 부하들의 얼굴도 전에 없이 밝아 있었다.
오늘은 허열이 한 잔 살 생각이었다.
"청와대에 들어가 결론을 내렸다. 백수웅은 이제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새 사무실을 얻어 옮긴다. 단 한 가지. 새 임무가 끝날 때까지는 백수웅이 살아 있다는 가정하에
모든 걸 움직인다. 오늘 내가 한 잔 멋지게 낸다. 그리고 3일간의 특별 휴가와 보너스로
1인당 50만 원씩 지급한다. 다음 수요일(4월 5일)까지 쉬고 이 곳으로 다시 출근하라,
그 동안 새 사무실을 물색할데니까."
'얏호!' 하고 일제히 환성을 질러 댔고, 날이 어둡기가 무섭게 무교동 술집을 찾아 나섰다.
이들이 회의를 하는 동안 청와대의 노범호와 이후락은 심각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그럼 아직도 생존 가능성을?"
"그렇습니다, 노 회장님. 2차 대전 당시 유럽의 첩보 요원들 중 이중 간첩들이,
입장이 곤란해서 잠적이 필요할 때 종종 이런 수법들을 써 먹었죠."
첫댓글 백수웅이 그렇게 쉽게 죽을수가 없지요! 수사방향을 다른곳으로 유도했겠지요!
잘봤어요..
백수웅이 죽은척 가장한다음 다음일을 계획하고 있는게 분명해요 ㅎㅎㅎ
즐감요 ~~
잘 읽고갑니다~~
감사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