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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1월 13일 충북 문의군(文義郡) 동면(東面) 계산리(桂山里, 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아버지 신용우(申龍雨)와 어머니 최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공집(公執), 호는 예관(睨觀)이다. 신성(申檉), 여서(餘胥), 일민(一民), 청구(靑丘), 한인(恨人) 등의 별호가 있다.
영특하고 총명해 일찍부터 가숙(家塾)에서 한문을 익히고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통달하였으며, 글재주가 뛰어나 문중의 또래인 신채호(申采浩), 신백우(申伯雨) 등과 ‘산동삼재(山東三才)’라 불렸다.
16살 때 정치문란과 풍기(風氣)의 부패를 우려하여 일본을 배척하고 사악을 배격하는 글로 민중의 경각심을 깨우고자 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같은 가숙의 학우들과 소년대를 조직하여 동조하였다.
1896년 봄 향리에서 조정완(趙貞琬)과 결혼하고, 3개월 후 신학문 수학을 위해 상경하였다. 상경 후 관립한어학교(漢語學校)에 입학하여 중국어 및 한국사, 지리 등을 배웠다. 한어학교 재학 중인 1898년에는 독립협회의 주요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00년 9월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학교당국의 부패와 불합리한 처사를 비판하곤 하였다. 부패한 군부를 개혁하고자 동기생 조성환(曺成煥) 등과 동맹휴학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조성환이 수감되기도 하였다. 1902년 7월 6일 육군보병 참위(參尉)에 임관되었으며, 견습생활을 거친 뒤 1903년 7월 3일 졸업증서를 받았다. 1904년 시위대(侍衛隊)로 배치되었으며, 1906년 4월 시위 제3대대에 배속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지방군대와 연락한 후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계획 실패로 비관하여 음독자살을 기도하였다가, 오른쪽 시신경을 다쳤다. 1907년 일제는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군사권을 박탈하였다.
1907년 8월에 발포된 군대해산령에 저항한 시위대 군인들이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의 순국을 계기로 의거를 일으켰다. 부위(副尉)의 신분으로 병사를 이끌고 대한문까지 진출하여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동지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군대는 해산되었다.
1901년 고향인 인차리(仁次里)에 설립된 문동학원의 교육활동에 관여하였고, 1903년에는 향리에 근대식 학교의 면모를 갖춘 덕남사숙(德南私塾)을 설립하고 산술, 측량 등 10여 과목을 가르쳤으며, 유능한 교사를 초빙하는 등, 주변에 명성이 자자했다. 1908년 향리의 신씨 문중의 개혁인사들과 영천학계(靈川學契)를 결성하여 ‘구체신용(舊體新用)’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청주와 문의에 지회를 세우고, 청주에 청동학교와 문의에 문동학교를 설립하였다.
1909년 3월에는 서울 중동야학교의 제3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1910년 8월 중국 망명을 결심할 때까지 이끌었다. 중동학교는 구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사립학교로, 1906년 한어학교(漢語學校)로 시작하였다.
1908년 9월말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 실업부의 부원과 평의원으로 활동하였고,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도 몸담았다. 식산흥업에 의한 민족자본을 육성하려는 시도로 군복무 중 동료들과 광업회사를 발기하였다. 1909년 1월 『공업계(工業界)』란 월간잡지를 창간했는데 당시 발간된 『상공월보(商工月報)』 ・ 『상업계(商業界)』와 더불어 한말 실업계의 계몽에 공적이 컸다는 평가를 받았다.
1910년 8월 경술국치의 강제 체결 소식을 듣고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1909년 7월 입교한 대종교(大倧敎) 창시자 나철(羅喆)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1911년 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이후 한민족의 부흥은 대종교의 발전에 있다고 믿는 대종교 신도가 되었다. 1911년 1월에는 대종교의 지교(知教)에 올라 대종교본사의 경리부장과 종리부장(倧理部長)을 역임하였고, 4월에는 신정(申檉)으로 개명하였다. 일요일에는 상하이 서이도본사(西二道本司) 교인들과 경배식을 올렸다.
3월 15일의 어천절, 10월 3일의 개천절에는 축하기념식을 거행하였고, 국권 상실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8월 29일에는 국치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단군 초상화와 한국지도를 들고 다녔으며, 아침저녁으로 단군영정에 경배를 올리고 조국광복을 기도하였다고 한다.
많은 우국지사가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망명지로 택한 것과 달리, 상하이를 망명지로 택한 배경은 중국혁명의 성공이 곧 한국의 독립해방을 가져올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중국혁명파 잡지 『민립보(民立報)』의 사원 쉬쉬에얼(徐血兒)과 친교를 맺었고, 그를 통해 중국혁명의 지도적 인물인 쑹자오런(宋敎仁) ・ 황싱(黃興, 黃克强) ・ 천치메이(陳其美) 등과도 친교를 맺었다.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가입한 이래 1911년 10월 천치메이와 무창혁명(武昌革命)에 동참해 중국 신해혁명에 참여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1913년 7월 ‘위안스카이(袁世凯) 타도운동’이 일어났을 때 천치메이를 도와, 베이징정부의 ‘요주의(要注意)’ 감시대상이 되었다.
1913년 말에서 1914년 초 중국혁명지사들이 결성한 문학단체인 남사(南社)에 가입하여, 중국 혁명지사 및 지식인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하였다. 이어 학생들의 유학알선, 직업지도 및 교육적 기능을 업무로 한 환구중국학생회(寰球中國學生會)에도 가입하여 리덩훼이(李登輝), 탕원즈(唐文治), 왕페이순(王培蓀), 위르치(余日奇), 주자화(朱家驊) 등과 접촉하였다.
1912년 5월 20일(음력)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하였다. ‘친목융화’ ‘간난상구(艱難相救)’를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국권회복을 목표로 하였다. 최성기에는 회원이 3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발전하여 상해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축이 되었다.
상하이에서 결성된 한국독립운동단체의 효시로, 이후 상하이 지역 독립운동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협력단체인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통해 중국혁명세력의 지원도 확보하였다. 1922년 9월까지 존속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제사의 이사장직을 맡아 총재 박은식(朴殷植)과 운영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동제사는 시민적 민족주의사상, 개량적 사회주의 사상, 대동(大同)사상과 국혼(國魂)을 중시하는 민족주의적 역사관과 대종교의 국가적 신앙을 기본이념으로 삼았다.
1912년 말에서 1913년 초 상하이에서 천치메이 등과 한 ・ 중 연합 비밀결사인 신아동제사를 조직하였다. 감독을 맡은 천치메이를 비롯해 쑹자오런 ・ 랴오중카이(廖仲愷) ・ 다이지타오(戴季陶) ・ 후한민(胡漢民) ・ 저우루(鄒魯) ・ 바이원웨이(柏文蔚) 등이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중국혁명동맹회 회원으로 신해혁명에 적극 가담한 인물들이다. 신아동제사는 동제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양국 혁명가들의 협력단체로서 최초의 한 ・ 중 양국 혁명운동의 호조(互助)기관이었다.
또 1913년 12월 17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명덕리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을 개설하고 한국에서 온 청년들을 교육하였다. 한국청년의 중국, 구미유학을 위한 예비교육이 주요 목표였으며, 영어 ・ 중국어 ・ 지리 ・ 역사 ・ 수학 과목을 가르쳤다.
수학기간은 1년 반으로, 조성환(曺成煥), 박은식, 신채호, 홍명희(洪命憙), 문일평(文一平), 조소앙 이외에 중국인 혁명운동가 농죽(農竹)선생과 미국계 화교 마오따웨이(毛大衛) 등이 교육을 담당하였다. 3기에 걸쳐 졸업생 100여 명을 배출하였고, 중국내 대학과 구미로 유학을 보내거나 학자금을 알선해 주었다.
이와 함께 바오딩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 텐진군수학교(天津軍需學校), 난징해군학교(南京海軍學校), 후베이강무당(湖北講武堂), 원난군수학교(雲南軍需學校), 우쑹상선학교, 광둥강무당(廣東講武堂) 등 중국의 각급 군사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함으로써, 독립운동 인재 양성에 공헌하였다.
1915년 3월 상하이에서 박은식, 이상설(李相卨), 유동열(柳東說), 성낙형(成樂馨) 등과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이후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독립운동의 호기로 활용할 목적으로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였다. 당의 규칙 및 취지서는 박은식이 기초하였으며, 본부장에는 이상설을 추대하고, 외교부장 성낙형, 교통부장 유동열, 재정부장 이춘일, 감독 박은식이 임명되었다.
상하이지부장은 신규식이 맡고, 장춘지부장 이동휘(李東輝), 한커우(漢口)지부장 김위원, 회령지부장 박정래(朴定來), 옌지(延吉)지부장 이동춘, 나남지부장 강재후(姜載厚)를 선임하였다.
신한혁명당은 고종을 당수로 추대하고 중국정부와 신한혁명당의 한국 망명정부 사이에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을 체결하여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하는 군사동맹을 추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성낙형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일본경찰에 체포당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하고 일본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국제적 지위가 높아진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이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신한혁명당의 계획은 외교 중심론적인 상하이지역 독립운동세력과 무장투쟁론적인 베이징지역 독립운동세력이 연합하는 방법으로 독립운동노선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전의 시점에서,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서 정부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또 박은식(단장)과 함께 상하이에서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하였다. 본부는 프랑스 조계 내 명덕리(明德里)에 설치하였다.
1917년 7월 조소앙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과 『대동단결(大同團結) 선언』을 발표하였다. 박은식, 신채호, 박용만(朴容萬), 윤세복(尹世復), 조소앙, 신석우(申錫雨), 한진교(韓鎭敎) 등 14명이 발기하였으며, 선언서는 조소앙이 작성하였다. 모든 해외독립운동 세력을 단결시키려는 취지로 계획된 이 운동은 통일된 최고기관 즉 정부의 수립이라는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이론적 결집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1917년 8월에는 조소앙 등과 ‘조선사회당’의 명의로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 ‘조선의 독립’을 촉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전문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원인이 발칸반도의 문제인 것처럼, 일본의 노예상태에 있는 한국문제는 전쟁발발의 요인이 될 것이므로, 모든 민족의 정치적 균등, 국제정의의 실현, 피압박민족의 원상복귀, 국제적인 독립한국의 실현 등을 회의의제에 반영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1918년 11월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민족 대표 파견을 결의하자, 자신의 이름으로 한국독립 지원을 요구하는 전문을 발송하였다. 또 1919년 1월 하순 펑톈(奉天)의 정원택(鄭元擇)에게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 파견 및 국내 및 미국 동지와 연계한 거족적 독립운동의 추진 구상을 알리고, 이 사실을 서북간도에 전해 대기응변(待機應變)토록 지시하였다.
1919년 2월 1일(1918년 11월, 음력) 만주 ・ 러시아지역 독립운동가들 39명과 함께 최초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2월 초순경 선우혁(鮮于爀)을 평안도지방에 잠입시켜 양전백(梁甸伯), 이승훈(李承薰), 길선주(吉善宙) 등에게 파리강화 회의에 한국대표를 파견한 사실을 알리고,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도록 촉구하였다. 또 조소앙을 도쿄에 밀파하여 한국 유학생들에게 파리강화회의 계획을 알리고, 이를 지원하는 독립운동을 거사하도록 종용하였다.
이어서 장덕수(張德秀)를 도쿄를 거쳐 국내로 잠입시켜 일본에서의 운동은 2월 초순, 서울에서의 운동은 3월 초순에 거사할 예정이니, 양 지역에서의 정황을 통신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도쿄의 2 ・ 8독립선언에 이어, 국내에서 3 ・ 1운동이 발발하였다.
1919년 3월 하순 상해 여운형, 선우혁, 한진교, 김철(金澈), 손정도(孫貞道), 이광수(李光洙) 등과 프랑스 조계 보창로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임시정부 조직에 착수하였다. 1919년 4월 11일 국호를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정하고, 대한민국임시헌장(臨時憲章)을 제정 선포하였다.
1919년 4월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또 충청도 구급의연금모집위원으로 선임되어, 5월 초 정원택과 김덕진을 국내로 밀파하였다. 7월 14일 부의장직과 의원직을 사퇴하고 임시정부에서 물러났다. 1919년 9월 상하이 임시정부와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와 국내의 한성정부를 통합한 통합 임시정부의 법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3월 이시영과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김규식, 안창호가 내각에서 물러나 국민대표회의의 추진을 본격화하고, 대통령 이승만은 태평양회의 참석을 위해 워싱턴으로 떠났다. 5월 16일 국무총리대리를 맡게 되었고, 26일에는 외무총장직도 겸하게 되었다.
워싱턴회의에 한국대표단을 파견하여 대한민국의 ‘요구서’를 제출하였고, 신익희(申翼熙)와 함께 중국남방지역 외교활동의 책임자가 되었다. 1921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친선전권대사 자격으로 광동호법정부(廣東護法政府)에 파견되었다. 11월 3일 쑨원(孫文) 총통을 접견하고 5개조의 외교문서를 전달하였다.
호법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호 승인, 한국 학생의 중화민국 군사학교 수용, 차관 지원, 한국독립군 양성을 위한 조차허용 등의 조항이었다. 호법정부의 임시정부 승인을 이끌어 냈으며, 중국의 각급 군사학교에 한인청년 수용 지시와 북벌 완성 후 한국독립운동 원조 약속을 받아냈다.
11월 18일 호법정부가 북벌서사(北伐誓師) 기념식 때, 임시정부대표로 참석하여 정식 외교절차에 따라 쑨원을 접견함으로 임시정부와 호법정부와의 공식적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22년 2월 임시정부는 외무부 외사국장 박찬익(朴贊翊)을 광둥주재 임시정부대표로 파견하여 외교업무를 관장토록 하였다.
1922년 2월 태평양회의가 기대와 달리 성과없이 끝나자 임시정부는 안팎으로 큰 시련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해 3월 신규식 내각은 외교적 실패 등을 이유로, 노백린(盧伯麟) 군무총장을 제외하고 사퇴하였다. 이어 임시의정원회의에서 국민대표회의 찬성안이 통과되었고 대통령 이승만 불신임이 결의됨으로써, 이후 임시정부는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5월 이후 심장병과 신경쇠약으로 병석에 누워 한인들의 분열을 통탄하면서, 25일 동안 먹지 않고, 말하지 않고, 약도 거부하다가 1922년 9월 25일(8월 5일, 음력) 순국하였다. 상하이 프랑스조계 홍챠오 만국공묘(虹橋萬國公墓)에 안치되었다가 1993년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사론집인 『한국혼(韓國魂)』과 시집인 『아목누(兒目淚)』가 남아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로서는 선구적으로 상하이에 망명하여 중국혁명의 중요성을 한국독립과 연결선상에서 인식하고 공동항일을 위한 한중 연대의 토대를 쌓았다. 이와 함께 동제사, 신아동제사, 대동보국단, 신한혁명당 등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고 ‘대동단결 선언’ 등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함은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이론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공헌한 독립운동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