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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七十古來稀의 回想
김금만 장로
일찍이 공자는 나이 육십을 이순(耳順)이라 했다.
耳順이란 글자 그대로 다른 사람의 어떠한 말도 귀에 거슬림 없이
모두 수용하고 이해할 만큼 삶의 이치를 깨달은 경지에
이른다는 뜻으로 풀이되는데,
칠순(七旬)을 갓 지난 나로서는 부끄러울 뿐이다.
참으로 빠르고도 허망한 것이 세월이다.
이제 내 나이 정확하게 70세 회갑을 지난 지 만 10년.
앞으로 나에게 주어지는 세월이 얼마인지 알 수 없다.
나는 공자의 耳順과 옛 성인들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내 주 예수님” 닮아가는 삶을 보다 충실하게 살아가고자 나 자신과 다짐해본다.
1. 출생 - 해방 - 전쟁
나는 1942년4월18일 경북 선산군 고아면 신촌동 241번지에서 농부이셨던 아버지(金 正用)와 평범한 촌부이셨던 어머니(金道順)사이에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에는 일제강점기였지만 3년 후 8월15일 갑자기 도둑처럼 찾아왔다는 광복을 맞았다. 나의 유년 시절은 해방공간에서 좌우이념이 격돌하던 혼란기였으나 이보다 더 문제는 내가 워낙 병약하여 각종 질병으로 근근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유행하던 홍역을 치르는 과정에서 부모님이 나를 포기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항상 크고 작은 병치레를 하던 나는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 참혹한 동족상잔의 6.25를 맞았다. 모심기를 갓 끝낸 7월초 만8세였던 나는 어머니가 무명천으로 지어 만든 배낭 속에 미숫가루를 넣어 메고 피난길에 나섰으나, 이미 때가 늦어 인민군이 먼저 쳐들어와 마을은 김일성치하의 생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청년들은 인민군에 잡혀가고, 어른들은 보국대(보국대는 인민군의 짐을 대신 옮겨 주는 일을 하는 대원)에 잡혀가고, 마을 양조장에 중대본부를 차린 인민군들은 소 돼지 등 닥치는 대로 뺏어갔다. 며칠이 지나자 미군정찰기 한 대가 날아왔다 간 뒤 10분쯤 후 전투기가 날아와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機銃掃射)를 하자 인민군 부대는 혼비백산 도망가고 수십 명의 인민군 시체가 뒤엉켜 있고 도로나 중요한 길목에는 지뢰와 온갖 폭발물이 매설되었다. 나는 폭발물 사고로 죽어가는 이웃을 보면서 날마다 폭발물에 대한 공포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남녀노소 모두는 흰 옷을 입었다. 검정 옷은 폭격기로부터 적으로 오인 받을 우려 때문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아수라’ 가 아니면 ‘생지옥’ 이었다.
1950년9월15일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은 독안에 든 쥐가 되었고, 9.28 수복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중앙청에 태극기가 다시 휘날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북진하는 연합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에 손을 씻고 전쟁이 이대로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4후퇴, 1953년6월7일 휴전협정으로 현재의 휴전선이 생기면서 3년에 걸친 전쟁은 막을 내렸다. 당시 잿더미로 변해버린 폐허 속에 거리마다 고아와 과부가 넘쳐났다. 전쟁으로 학교건물은 불타 일부만 남아 있었고 운동장이나 나무 밑에서 수업을 했으며 겨울엔 2부제로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수업을 했다.
고향의 농사는 수리시설이 비교적 잘되어 있지만 천수답이 많은 우리 집은 해마다 하늘만 쳐다보는 농사로 힘겨운 보릿고개를 넘어야만 했다. 초등학교 학동기의 새 봄맞이는 희망보다는 허기진 배를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채워야만 하는 고달픈 계절이었다. 꽁보리밥에 된장으로 도시락을 싸서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기였다. 겨울이면 장작 몇 조각씩 새끼줄에 묶어 집에서 가져와 난로를 피웠다.
하지만 아직도 냉전(冷戰)과 국지전(局地戰)으로 북한과 대치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조선일보 2012년3월19일자 A 1면 기사 중 우리나라 20대 여자 45%와 국민29%가 천안함폭침의 북한소행을 못 믿는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런 불신풍조가 나라를 망친다. 나라를 위해 희생된 천안함 장병46명의 전사자와 그 유족들 앞에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북한의 폭침을 부인하고 북한의 논리에 동조하는 철부지 친북좌파들에게 말하고 싶다. 앞에서 이야기한 꽁보리밥에 된장이라도 실컷 먹어봤으면 여한이 없다고 하는 북한으로 그들을 보내고 싶다. 공산당의 폭정 치하에서 살아보고 전쟁을 경험한 입장에서 철없는 친북좌파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너희들이 전쟁의 공포를 아느냐? 배고픔의 서러움을 아느냐?
2. 달콤한 눈깔사탕에 이끌려 예수님을 만나다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12월25일 우리 마을에 천막을 치고 교회를 개척하는 전도부인(고신측 여전도사)이 교회가면 눈깔사탕 준다는 말에 내 나이 8세 처음으로 천막교회에 갔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눈깔사탕 주는 것만 기다리며 커다란 눈으로 말똥말똥 쳐다보다가, 말씀이 끝나자 드디어 기다리던 눈깔사탕과 박군의 심정이란 전도책자를 주었다. 나는 그 책을 집에 가져와 읽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박군의 마음속에 뱀 개구리 지렁이 구더기 등등 무섭고 더러운 동물들이 가득 들어있었으나, 예수님을 영접한 박군은 그 마음속이 아주 깨끗하게 된 것을 보고 나는 결심했다. 나도 박군처럼 예수 믿고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그 후 매주 천막 교회에 출석하며 어린 나이임에도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 안에 들어차있는 끔찍한 동물들을 내쫒기 위해 천막교회로 매주일 출석했지만 날이 갈수록 예수님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 당시 주일만 되면 아버지는 봄에는 보리밭 매기, 여름엔 소풀 뜯기, 가을이면 산에가 낙엽 끌어오기(땔감), 겨울이면 가마니 짜는 세끼 꼬기, 사계절 쉴 틈 없이 일을 시키신다. 내가 주일만 되면 없어지니 이놈이 일하기 싫어서 교회 간다고 핍박을 하셨지만 나는 천막교회 가는 것이 너무 좋았다.
3.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나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을 보면 너무 불쌍하게 생각되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엄마를 졸라서 예수 믿어야 한다고 전도를 시작했고, 엄마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너나 믿어라 나는 이다음 믿겠노라고 하셨다. 그 당시 나는 불신자만 보면 불쌍한 마음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친한 친구들에게도 전도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 후 어머니는 예수님을 영접하셨고, 봉덕중앙교회에 출석을 하시다가 1996년4월20일 85세를 일기로 임종 시에는 찬송가를 들려 달라고 하시며 주무시듯 하늘나라로 가셨다.
학창시절은 계속 내 고향시골 신촌교회(고신)에 출석을 했고 1958년5월 평소 아주 건강하시고 술을 입에 대지도 못하셨던 아버지는 간경화로 1년 가까이 고생하시다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1년여 동안 입원비 등으로 가산은 기울고 나는 학업을 중단하고 3년여 동안 농사를 지었다 초보 농부가 제초제(除草劑)를 잘못 살포해서 한해 농사를 망친 일도 있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나도 모르게 뜨겁던 믿음도 식으면서 교회를 가지 않았다.
4. 탕자로 전락한 믿음과 군 입대
1964년1월 군 입대를 하면서 나는 완전히 믿음에서 떠난 자가 되었다. 남자들은 군대 가면 불신자도 교회를 다니게 된다. 그 이유는 부대 안에 있으면 주일 이런 저런 작업을 시키는데 교회에 가면 면제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부대 안에서 심부름과 사역을 다하면서도 교회를 가지 않았다. 주님을 외면하고 PX에 가서 전우들과 함께 다른 주(酒)님을 뱃속에 모시는 재미로 살았기 때문이다. 육군50사단에서 6주간 신병훈련을 마치고, 육군 병기학교 12주 후반기 교육을 받고나서 “무한괘도수리(탱크정비) 2급정비사” 주특기를 받았다. 경기도 포천에서 2개월 동안 탱크대대 근무 후, 춘천 202병기단 308대대 차량지원반 병기 100% 기술검사반으로 전출되었다. 수송부대 차량을 정밀검사 하는 것과 노상검사근무 등 나름 재미있는 군생활을 보냈으나 아까운 시간을 술로 흥청망청하다가 1966년 3년여 만에 전역했다.
5. 결혼 - 순박하고 알뜰한 아내를 만남
1968년 가을, 누님의 중매로 여고졸업 후 신부수업 중이던 신부감이 기다리는 처가로 맞선을 보러갔다, 새로 맞춘 양복에 버버리코트자락을 휘날리며, 키178 몸무게 59kg 핸섬한 몸매를 뽐내며 농촌의 풍요로운 가을 들판을 지나 지금의 처가에 도착해 맞선을 보았다. 다소곳이 자기 방에서 기다리던 신부 감을 봤을 때 “음, 나의 이상형이로다” 유난히 키가 작은 신부감은 키가 크고 잘 생긴 신랑감이 당시 월급 15,000원의 회사중견간부급 월급이라고 하자, 그 많은 돈을 어디다 다 쓸 것인가를 생각했다고 했다. 그녀는 첫눈에 백마 탄 왕자, 나의 동반자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리하여 3개월만인 1968년11월17일 약혼하고 12월29일 결혼하여 초고속으로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1970년 딸 정아와 1972년 아들 종진 둘을 얻었다. 아내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지만, 나는 교회와 담을 쌓고 지내다가 아내의 권유로 봉덕제일교회(박경열목사)가 산비탈 호박밭 창고에 가마니 깔고 예배드리던 시절 출석하였다. 그러다 다시 세상유혹에 빠져 주(酒)님이 좋아, 친구가 좋아 그러면서 밤새 놀다가 새벽이면 당시 신축된 봉덕제일교회(현재 건물)에 아무도 없을 때 들어가 울면서 기도하는 습관이 생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일학교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술 먹고 다니면서도 언제나 교회가 고향처럼 느껴지고 나는 교인이라는 생각은 늘 하였으니 말이다.
5. 돌아온 탕자
1975년 봄 뱃속에 주(酒)님을 너무 많이 모셔서 위장이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탈이 났다. 소화도 잘 안되고 뱃속도 편치 않아 활명수를 2홉들이 병으로 사다놓고 마시며 견디다가 급기야 대구 중앙로 김정수 내과에서 내시경을 보았더니 위궤양이 암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내 나이 34세, 아내는 30세, 어린 두 아이(6살, 4살)를 두고 내가 이대로 죽으면 아내와 두 아이는 어쩌라고! 이대로는 안 된다, 안 된다!
주(酒)님은 이제 그만. 오직 한길 주(主)님 살려주세요! 다시 예수님 앞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기도하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 보니, 위장도 깨끗하게 치유되고, 아이들도 잘 자라주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열심히 교회를 섬기다보니 하나님께서 보잘 것 없는 나를 1991년11월27일 봉덕중앙교회 장로로 안수해주셨다. 주님을 다시 찾지 않았으면 벌써 죽어 지옥 불에서 허우적거릴 내가 교회중직자가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다. 할렐루야!
6. 남은 여생과 믿음
이제 내 나이 만70세! 경북 선산군 고아면 신촌동 시골에서 태어나, 1966년 대구에 와서 43년 동안 지내며, 33년 동안 개인택시를 하다가 2009년 LPG충전소 사업주가 되어서 경주까지 오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루어지기 힘든 기적 같은 일이다.
이제부터 나는 무었을 하며 어떻게 여생을 살 것인가? 병고 없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나는 지금부터라도 가능하다면 나의 황혼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나는 내 스스로 실천해야 할 일상적인 일이 적지 않을 것 같다. 그것들은 대부분 나의 의지에 달려있고, 그 의지를 반드시 실천하여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비록 가장 일상적인 일이지만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해본다.
이제는 제발 욕심을 버리자. 그래서 최소한 노욕을 부린다는 소리는 듣지 않도록 하자. 권위를 앞세우는 나의 아집을 과감히 버리자. 그리고 마음의 문을 열고 속을 비워 내면공간을 키우자. 이제 남은 인생은 오직 단순하고 소박하게만 살자. 하나님 말씀대로 살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자. 해방과 6.25 전란, 숨 막히는 고도성장과 생존경쟁에서 전쟁 치르듯 살아온 젊은 날, 나는 항상 긴장 속에서 살아온 까닭으로 인간적인 여유와 멋을 모르고 살아왔다. 이제 모든 욕심을 버리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 베풀면서 인간미 넘치는 아름다운 노년을 장식하고 싶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죽음 이후 곧 사후 세계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염원해 왔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내세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다. 혹시 너그러우신 하나님께서 “너는 큰 죄를 저지른 일이 없으므로 너를 천국으로 보내노라”하고 그곳에 보내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신자들의 소망일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죽은 이후 자기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하여 관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아직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수많은 형제자매가 하루속히 예수님을 영접하여 영생을 얻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행16:31)
7. 남은 여생 나의 기도
오, 하나님 아버지! 남은 여생동안 김형곤 목사님이 사역하실 때 모세를 도운 아론과 훌처럼 목사님의 양팔을 붙들어 올리는 역할을 충실하게 하소서! 행복한교회가 크게 부흥하여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고 세계선교에 앞장서는 교회로 삼아주소서! 교회창립 30주년기념 선교지교회가 캄보디아 현지에 아름답게 세워지고, 현지인 사역자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 하신 주님의 지상명령을 잘 받들어 교회가 크게 부흥하도록 도우소서. 남은 여생동안 우리 내외 건강하게 주님의 일 하다가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역시 장로님이시네요^^
옛날 드라마 한편을 본것 같아요. 권사님이랑 저희들 곁에서 신앙의 본이 되어 주세요. 오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