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겔18:25-32)-2015.5.24
우리가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정말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공평성에 대한 의문을 품고 계시는 분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와 착각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공평성이 아닐까요? 즉,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신가? 하나님의 구원이 공평하신가? 하나님은 심판에 공평하신가? 혹은 사랑의 공평성문제, 은사와 축복과 고난의 공평성 문제까지 다양하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평은 좌우로 치우침이 없는 공정하고 평등한 결정을 말합니다.
하물며 성경의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도 이런 실수와 오해는 종종 있어 왔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만 보더라도 자기 눈앞에 펼쳐진 사회적인 불법과 불의를 보면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왜 침묵하시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시했고,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은 왜 자기 백성들을 괴롭히는 철천지 원수국가 앗수르를 구원하시려고 하시는지 하나님의 형평성 문제에 불평을 토해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왜 자신처럼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열심을 가진 자를 아합과 이세벨이 죽이려고 하는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처리하지 않으시냐고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고난당한 욥도 고난에 대한 형평성의 문제로 하나님께 항변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모든 갈등은 일종의 하나님에 대한 공평성에 대한 시비논쟁이었던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공평하십니다. 우리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공평성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제대로 알지 못한 소치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공평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던 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잠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형평성 문제로 고민하던 하박국, 구원의 형평성을 따지던 요나, 사역에 대한 형평성 문제로 고민하던 엘리야, 고난에 대한 형평성 문제로 섭섭해 하던 욥,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공평성을 의심하는 것은 무지하고 무모한 것입니다. 공평의 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평의 적은 불평입니다. 불평은 항상 상대적입니다. 만일 절대적이면 불평하지 않습니다. 보통 상대적으로 비교하다가 불평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의 못된 버릇 중에 하나가 항상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불평이 생기고 공평성을 의심하게 됩니다. 공평하다고 느끼면 절대 불평하지 않습니다. 커다란 항아리에 화려한 조화와 향기로운 생화가 함께 꽂혀 있었습니다. 조화는 자신의 아름다운 자태를 한껏 뽐내며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생화는 항아리의 수분이 차츰 줄어들면서 점점 시들어갑니다.
그러자 조화가 생화를 향하여 비아냥거립니다. “이봐 생화야! 너는 왜 그 모양이니? 너는 절대 나의 아름다움을 따라올 수 없어! 내가 가진 뿌리가 무슨 소용이 있니?”.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때 조화는 비를 맞을수록 점점 험상궂게 일그러져 갑니다. 그러나 생화는 생명의 뿌리로 수분을 흠뻑 빨아드리면서 싱싱한 모습을 금방 되찾았습니다. 생화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그윽한 향기를 발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치 이런 식으로 하소연합니다. 왜? 악한 사람이 선한사람들보다 형통하냐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평성에 대한 시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인간의 편협한 생각입니까? 반드시 조화인생과 생화인생이 가려지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니까요.
그러므로 절대 하나님의 공평성을 의심하는 어리석은 죄악을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불공평하나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세상은 불공평하지만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절대 공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말 이해가 안되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공평하십니다. 하나님 자체가 의와 공평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나라가 공평의 나라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공평하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함을 받으시리니”(사5:1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무엇이 공평하시다는 말입니까?
(1) 주의 뜻이 공평하십니다(시17:2)
주의 뜻은 하나님의 의지와 섭리, 계획이나 작정, 생각이나 판단을 의미합니다. 태초 이래로 하나님의 뜻이 변한 적이 있으신가요? 하나님의 뜻은 영원무궁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시대와 사람, 상황에 따라 취소되고 변개된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아니하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십니다(민23:19).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뜻과 전혀 다릅니다. 사람의 뜻은 조석변개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변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은 절대 공평할 수가 없습니다. 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의인이라 할지라도 공평하지는 못합니다. 사람은 좌우로 치우칩니다. 그때 그때 감정이 다릅니다.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환경에 따라 다릅니다. 사람들은 손은 안으로 굽는다고 말합니다. 자기편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감정도 완전히 공평하지 못합니다. 솔직히 예쁜 자식이 있고 그러지 못한 자식이 있습니다. 조금 측은히 여기는 자식이 있고 그러지 못한 자식도 있다는 말입니다. 다만 그것도 본인의 감정에 따라 달라집니다.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공평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공평을 기대하면 실망합니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우리를 통해 공평을 기대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합니다. 왜 사람들이 공평치 못하는 줄 아십니까? 욕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잘해주면 잘해줍니다. 섭섭하게 대하면 서운해집니다. 그래서 오늘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애당초 인간에게 공평이라는 단어는 기대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서부 영화 같은 것을 보십시오. 몇 사람이 처음에는 서로 뜻이 맞고 의기투합하여 보물을 찾아 나섭니다. 보물을 찾으면 똑같이 나누기로 맹세합니다.
찾아 나설 때는 어떤 위험이나 어려움이라도 서로 도우며 극복해 나갑니다. 그러다가 원하는 보물을 손에 쥐는 순간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그리고 처음의 생각이 무너집니다. 욕심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교활한 사람이 고생했던 동료를 죽입니다. 욕심 때문에 마음의 형평성이 무너진 것입니다. 욕심은 공평의 적입니다. 사람들은 분배를 잘못합니다. 보통 관계가 좋았던 사람들도 이익을 분배할 때 공평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고 감정싸움을 하다가 험악한 사태로 발전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형제끼리 부모님의 재산을 분배하다가 법정 싸움을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칼부림이 일어나기도 하고 원수가 됩니다. 인간의 탐욕이 공평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어떤 가난한 가게를 운영하던 주인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랍비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랍비는 하나님의 공평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는 저 세상에서 가난하게 되고,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는 저 세상에서 부자가 될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공평하시니까요”. 가게 주인은 설교를 듣다가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매우 가난합니다. 저 세상에서 분명히 부자가 될 것입니다. 그때 가서 갚아 드릴 테니 지금 저에게 현금 일 억원을 빌려 주십시오” 하더랍니다. 랍비는 두말하지 않고 돈을 빌려주면서 그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때 가게 주인은 “이제 얼만 안 있으면 새해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물건을 많이 사서 팔아 부자가 되고 싶어서 그럽니다”. 그러자 랍비는 그 돈을 도로 빼앗으면서 말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이 땅에서 부자가 될 것이고, 저 세상에서는 다시 가난해질 터이니 내 돈을 받을 수 없겠소. 그러니 내가 당신에게 돈을 빌려줄 수 없소. 그냥 돌아가시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 욕심이 바로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다고 불평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안에 욕심이 있는 한 우리는 불평하게 될 것이고, 불평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절대 공평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죽는 날까지 욕심이 사라질 수 있나요? 욕심이 남아 있는데 불평이 사라질 수 있나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한 사람도 공평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만 공평하십니다. 우리 주님의 뜻이 공평하십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공평하게 판단하시며(시67:4), 만민을 공평하게 판단하신다고 말입니다(시96:10). 하지만 어떤 인간도 공평치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앞에 “나의 공평치 못함을 용서해 달라”(고후12:13)고 부탁했습니다. 정직한 고백입니다.
(2) 주의 길이 공평하십니다(신32:4)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은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는 것입니다(29절). 여기서 말하는 길은 하나님의 방법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지를 가지고 당신의 방법대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 가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주의 길은 공평하십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곁길과 딴 길로 주님이 원하지 않는 길로 다니려고 합니다. 한마디로 그 길은 악인의 길입니다.
우리 인생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의 길로만 다녀야 합니다. 그 길은 공평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로 다녀야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공평의 길을 보호해 주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잠2:8). 세상의 길은 전혀 공평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불법과 편법이 난무하고 뇌물이 통합니다. 약삭빠르고 눈치 빠른 기회주의자들의 천국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잠간입니다. 아침안개와 같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때문에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고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배 아플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것을 인하여 하나님의 공평성을 의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로 하나님께 범죄하면 안됩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다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묵묵히 공평하신 주님의 길로만 다녀야 합니다. 잠언8장 20절은 “나는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의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모든 길은 울퉁불퉁합니다. 언제 어느 때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전혀 모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좋아 보이나 필경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그 길은 공평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험하게 보일지라도 주의 길로 다녀야 보호를 받습니다. 오직 그 길만이 공평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공평하신 주님의 길은 공평치 못한 인간의 길과는 전혀 다릅니다. 여러 가지 분야에 길이 있습니다. 구원받는 길도 있고, 축복받는 길도 있으며, 은혜받는 길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길이 예수 안에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이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구원도 예수 안에 있고, 은혜도 예수 안에 있으며, 축복도 예수 안에 있고 은사도 예수 안에만 있습니다. 심판도 예수 안에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구원과 은혜와 축복, 사랑과 은사까지 모든 것을 공평하게 분배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은혜 주실 자에게 은혜주시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출33:19).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에게 구원을 주시고 축복받을 자에게 축복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우리가 공평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공평은 모든 사람이 기계처럼 평등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발 사이즈가 250인 사람에게는 250에 맞는 신발을 주어야 하고, 280인 사람에게는 280에 맞는 신발을 주어야 합니다. 그냥 모든 사람에게 250짜리를 준다면 난처한 일이 벌어집니다. 공평은 모든 규격과 그릇이 똑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이 있고, 1,2,5달란트가 있습니다. 한 달란트 가질 자에게 한 달란트를 주는 것이 공평입니다. 한 달란트 받을 그릇밖에 안되는데 두 달란트를 주는 것은 공평이 아닙니다. 진정한 공평이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수준으로 분배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그러지 아니하고 우리의 기준으로 본다면 모든 사람의 키와 몸무게와 사이즈와 생김새 등 모든 것이 똑같아야 합니다. 이것은 공평이 아니고 공포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기계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대통령되는 것이 공평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대치가 공평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기대치에 미치는 사람은 구원하시고,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버리시는 것이 불공평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불공평은 하나님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데 눈감아 주는 것이요, 하나님의 기대치에 미치는데도 불구하고 버리시는 것입니다. 불법이나 편법이 불공평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 공평하십니다. 이 땅에 예수 믿지 않았는데 천국 갈 자 하나도 없고, 예수를 믿었는데 지옥 갈 사람도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공평성에 시비하는 자는 정말 무지한 사람입니다. 본문 26-27절이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공평성입니다.
(3) 주의 일이 공평하십니다(렘9:24)
주의 일은 사람의 일과 다릅니다. 주의 일은 공평하시나 사람의 일은 공평치 못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공평하시고 하나님의 길이 공평하시며 하나님의 일이 공평하십니다. 이 땅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일이 공평하십니다. 너무 억울하고 불공평할 것이 있으면 이 시간 고발하십시오. 하나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중에서 말입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의 모든 일은 정확하시고 절대 공평하십니다. 빈틈이 없으시고 실수도 없으시며 오류도 없으십니다. 은혜와 복을 주시는 일, 사명을 주시는 일, 고난을 주시는 일까지 모든 일이 공평하십니다. 꼭 필요한 자에게 꼭 필요하다고 여기실 때 주시기 때문입니다.
메마른 가뭄 속에서 소나기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지만 장마철에 소나기는 반갑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하나님의 공평성에 대해 시비하는 문제가 축복과 고난입니다. 왜 나는 복을 주시지 않느냐고 항변하고,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합니다. 결국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피해의식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공평성을 의심하고 반발합니다. 왜 그들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요? 비교의 대상 때문에 그러합니다.
우리가 욥기서를 보면, 처음에 고난당한 욥은 매우 순전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위로한답시고 방문해서 자꾸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습니다. 한참을 듣고 있던 욥이 서서히 약이 오릅니다. 이유는 교만하기 짝이 없는 친구들은 아무런 고난도 없는데, 겸손한 자기만 고난을 당하는 것 같은 피해의식이 든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하나님께 섭섭한 생각이 들고 하나님의 공평성에 대한 의구심이 든 것입니다. 만일 친구들이 없었다면 욥은 하나님의 공평성을 따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보면서 주님의 공평성을 의심하는 이유 중에 첫 번째가 비교의식입니다. 가장 실감나는 예를 보십시오. 마태복음 20장의 품군의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과 일군이 하루 한데나리온의 품삯을 받기로 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군들의 노동시간이 다양했습니다. 어떤 이는 제 삼시, 제 육시, 제 구시, 제 십 일시 등으로 말입니다. 드디어 하루해가 저물고 일군들은 삯을 받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됩니다. 가만히 지켜보니까 이른 아침부터 와서 일한 사람이나 금방 들어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는 사람이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와서 일한 사람들이 포도원 주인에게 따집니다.
한마디로 자기가 주인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옆 사람과 비교함으로 불공평시비가 붙은 것입니다. 그냥 자기들이 계약한대로 한 데나리온만 받아 가면 그만인데 옆 사람과 비교하면서 불만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평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습니다. 자꾸 비교하면서 피해의식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범죄하다가 걸리면 주변 사람을 끌어드리는 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이른바 물귀신 작전이라고나 할까요? 사실 형평성은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 공평하십니다. 공평치 못한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눈으로 보니까 공평하지 못한 것처럼 여겨질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절대 하나님의 공평성에 대해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불신이요, 도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 공평하십니다. 그분의 뜻이 공평하시고, 그분의 길이 공평하시며,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이 공평하십니다. 한 사람도 하나님의 공평성에 시비를 걸어 자기 영혼을 망치는 사람이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할렐루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