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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기독교 형성사
초대교회는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기독교의 교리는 어떻게 형성 되었을까?
대부분의 신자들은 기독교의 교리들이 초대교회가 등장했던 애초부터 기독교의 교리가 형성
된것 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12제자들은 어디로 사라지고 신약에서 바울이 강
한 영향력을 남기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가지 않을수 없다.
바우어(1792~1860)는 바울의 신학적인 핵심으로 반유대교적인 교리로서의 의인론을 제시했
다는 것을 밝힌다 있다. [F.C.Bauer / Vorlesung ber Neutestamentliche Theologie / 1864 /
P.128~230]
즉, 바우어에 따르면 초대교회가 친율법적인 성향의 유대인 중심에서 이에 반대하는 헬라지역
의 유대인 내지 이방인 중심으로 축이 이동 되었다는 것이다.
정의를 내리자면, 기독교란 디아스포라의 헬라화된 유대인들이, 배타적인 유대교를 버리고
헬레니즘의 문화를 받아들인데서 생겨 났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 오늘날의 기독교가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배격하고는 있지만, 초대교회가 영지주의의 성격을 띠었다는것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기독교를 바울교라고 보는 시각도 제시 된지 오래이다. 왜, 기독
교를 바울교라고 평가하는 시각이 등장했는가? 오늘날에 정경으로 채택된 신약에는 바울서신
이 주를 이루고 있고, 12제자의 행적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바울서신에는 바
울이 유대적인 관습을 빌미로 베드로와 바나바를 비롯한 다른사도들과 격렬히 싸웠고, 바울은
그들에 대해서 위선자라고 비난을 퍼붓고 있다. 그러한 교권다툼의 흔적은 신약의 곳곳에 등
장한다. 그리고 그 치열한 교권다툼속에서 최후로 승리한 자는 바울이었다.
그리고 바울이 기독교의 제1창립자라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의 제2창립자 였다.
기독교는 정치권력과 손을 잡았으며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기독교의 대부분의 교리가 성립되
가기 시작한다. 성경적이지 않은 삼위일체의 교리, 기독교의 기념일, 십자가 숭배....등은 격렬
한 논쟁중에 종교회의에서 그 당시의 시대상황에 맞추어서 결정내려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교
리는 수많은 오류와 문제점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논쟁은 종교회의에서 끝나지 않았으며, 결국 동로마 교회와 로마카톨릭이 서로를
이단으로 파문해 버린뒤 결별하게된다. 이제 초대교회의 치열한 교권다툼의 흔적과 기독교의
교리를 형성시켰던 종교회의의 역사적 비화를 탐구해 보도록 하자.
▶ 디아스포라
헬라어 디아스포라(Diaspora)는 분산(分散), 이산(離散)을 뜻하는 단어로써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로마 통치기간동안 전세계로 흩어져 나간 유대인의 이산을 가리키고 있다.
초기 기독교를 연구할 때,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에 대해서 연구해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유대교가 기독교로 변모해 가는데 빼놓을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가 유대
교의 구약과 유대적인 관습을 지켰으면서도, 기독교와 유대교는 엄연히 차이가 난다.
기독교에는 유대인들의 헤브라이즘적인 요소에, 그리스적인 헬레니즘적인 요소가 유입 되었기
때문이다.
유대 민족이 팔레스타인 바깥쪽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은 BC 8세기 후반부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팔레스타인의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이스라엘 왕국이 BC 734∼721년의 앗시리아
의 침입으로 멸망하여 앗시리아 영토에 편입되었을 때 많은 유대인이 고향을 떠났다.
또 BC 598∼587년 사이의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남쪽의 유대 왕국이 멸망하자 비슷한 이주현상이
일어났다. 그 후, BC 4세기 초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자, 근동에서는 그리
스인의 통치에 의해서 파급된 그리스 문화에 실려 문화적인 혁신을 겪게 되었다.
또 교역과 상업이 급속하게 발달시킨,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들이 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을 취했던 탓으로
유대인의 이산을 촉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매우 능동적으로
반응하여, BC 1세기 말엽에는 시리아, 이집트,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이탈리아에
많은 유대인 공동체가 나타났다.
신약성경의 사도행전 2장 9∼11절에도 바르티아,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다, 갑바도기
아, 본도, 아시아, 프리기아, 밤필리아, 이집트, 키레네, 로마, 그레데, 아라비아에 거주하는 유
대인들이 언급되고 있다.
디아스포라의 가장 큰 중심지는 로마 제국의 3대도시인 로마,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였다
고 한다. 안티오키아에 유대인들이 정착한 것은 BC 150년 이후 였으며 로마인은 그보다 더 늦었다.
규모가 크고 부유하였으며 영향력이 강하기로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었다고 전해진다.
신약시대의 디아스포라 학자 필로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에만도 100만 가량 있었던 것 같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보다 그리스 문화에 대해 훨씬 개방적이어서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사용하던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헬라어를 사용했다. 헬레니즘
문화권의 도시들에서 주로 수공업과 무역에 종사하던 그들은 본토 유대인들보다 높은 수입을
올렸으며, 그들이 행하는 무역의 중요성 때문에 알렉산드리아 같은 곳에서는 원주민보다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로마의 시민권이 제국의 여러 곳으로 넓혀질 때, 사도 바울처럼 로마
의 시민권을 얻은 사람도 많았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그리스 문화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 학문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는 유대적 헬레니즘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그곳의 유대인들은 '70인
역(譯)'이라고 불리는 구약성경의 헬라어 역본을 출간하여 초대기독교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
고, 그들 중에서 많은 학자, 저술가가 나왔는데 필로가 가장 유명하였다. 또한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신앙을 흡수하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가끔 디오니소스, 또는 제우스와 같은 신으로도 취급되고 있다...(중략)...
한편 BC 2세기 말에는 소(小)아시아의 유대인들이 사바지오스를 제우스와 동일한 신으로 보
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만군(萬軍)의 주신(主神, The Lord of Sabaoth)과 동일시 하기도 하
였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사바지오스 Sabazios항목]
그리스 문화에 물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을 그들의 정신
적인 고향이며 지도력으로 생각하여 예루살렘과 밀접한 연관을 가졌고 성전과 성직자들을 후
원했다. 팔레스타인 안에서는 여호와에 대한 제사는 오로지 예루살렘에서만 거행하도록 규정
되어 있었으므로, 종교적 회당(會堂) 즉, 시나고그(synagogue)가 디아스포라에서 생겨났으며
그것은 팔레스타인으로 역수입되었다.
실제로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에도 유대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시나고그를 통해서였으며, 이 회당 조직이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의 통로가 되기도 했다.
성전이 파괴되기 전 그리고 파괴된 후 얼마동안도 이집트에는 오니아스(Onias)가 세운 성전이 있었으나
오니아스의 성전은 주변의 지역 유대인을 위한 것이었고 이집트 전체 유대인을 위한 종교 중심지의 역할조차
하지 못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회당이 있었지만 모든 희생 제사는 예루살렘에서만
드릴 수 있었다.
헤롯 아켈라오 통치시에 이스라엘 밖에서 많은 유대인이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모
였다고 요세푸스는 말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 절기에 많은 유대인이 모이면 자연히 헤롯 가문
이나 로마 통치자에 대한 반감 때문에 소요가 일어나곤 했다.[유대 고대사 17권 214절]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비록 팔레스타인 밖에 살고 있었으나 때때로 팔레스타인의 정치 상황을
간섭하기도 했다. 헤롯 아켈라오가 로마 황제의 인가를 받기 위해 로마로 건너갔을 때에 유대
인의 대표 50 여명이 로마로 가서 아켈라오의 잔인성을 폭로하며 황제에게 그를 고소했다. 그
때의 유대의 대표들은 헤롯 가문의 통치보다는 차라리 시리아의 속국이 되는 것을 택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때에 로마에 거주하던 8천 명 이상의 유대인들은 이 대표단을 지지했다고 한다.
헤롯은 그후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온갖 정책을 폈다고 한다. [유대 전쟁사 2권 80절]
그리고, 주목할 것은, 디아스포라를 통하여 최초로 반(反)유대인적 풍조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의 민족적 배타성, 경제적 번영, 특권들 때문에 많은 도시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외국인 혐오가 퍼졌다.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체사레아 등지에서 반유대인 폭동이 일어
났고 법정에서는 유대인에게 무거운 벌금이 부과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끊임없는 반목
이 계속되어 결국 칼리굴라의 박해로 이어져, 학자 필로를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로마 법정
에 박해의 중지를 호소했는데 이 박해는 칼리굴라의 암살로 끝났다.
반유대적인 편견(偏見)은 키케로, 페르시우스, 세네카, 퀸틸리아누스, 타키투스 등 로마의 문
학가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2000년을 두고 전유럽과 중근동(中近東)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난 집요하고도 비이성적인 반유대주의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 되고 있다.
▶ 초대 교회의 분열
사도행전 6장에 따르면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약간의 문제가 일어난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사도행전 6장 1절]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본토 유대인들에게 푸대접을 받게 되자 불만이 생긴다.(개역한글판에
는 애매모호하게 번역되었으나 공동번역판에는 "식량을 배급받을 때마다 푸대접을 받았기 때
문이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헬라파 유대인이란 앞서 언급한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을 말한다.
얼핏 보기에는 별 특별한 내용이 없는 것 같지만 이 구절은 초대교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
서를 전해주고 있다. 즉 여기서 알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의 원시 기독교공동체가 한 가지 성향
을 지닌 동질집단(a homogeneous community)이 아니라 선명히 구별되는 두 계열의 사람들
이 섞여 있는 이질집단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내에는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이라는 두개의 집단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가 있다. 사도행전 5~6장에 보면 예루살렘 유대교적 기독교 공동체(The Jewish-Christian
Community in Jerusalem)초창기에는 베드로와 요한을 중심으로 한 히브리파 기독교인이 지도권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과부구제 문제로 야기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7집사가 선출되었는데 이들은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였다. 이들 7집사의 이름을 살펴보면 모두 헬
라 이름이고 그들 중의 하나인 니골라는 안디옥 출신의 이방인으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었
다고 한다.
사도행전 6장 3~4절에서는 새로뽑힌 7집사에게 식량배급을 맡기고 자신들(사도)들은 기도와
전도에만 힘쓰겠다고 말한다. 아마도 당시 초대교회의 실질적인 힘은 본토 출신 히브리파 사
람들이 갖고 있지 않나 여겨진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지도권은 차츰 바뀌어 간다.
헬라 출신 유대인들은 본토 출신 유대인들과는 달리 유대교적인 전통이나 율법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유로웠고, 특히 할례에 대해서는 자유스러운 입장에 서 있었다. 이에 비해 히브리파 기
독교인들은 유대교라는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초대교회의 헬라화된 유대인들은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비해 여성인권에 대해 다소 나은
편 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여성들이 자유롭게 수건을 벗고 지도력을 발휘하자 바울은 고린도
전서 11장 5절에서 여성이 머리에 수건을 벗는 자유로운 행위에 대해서는 무조건 써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한다. 이는 유대 사회의 전통에 어긋나지 않고, 자유주의자들의 문제를 벗어보려
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유재인 / 바울서신에 나타난 여성 이해 / 서울신학대학원, 1994]
애찬식의 음식문제 역시 "서로 다투니 집에서 먹고 오라"고 원천봉쇄하고 나선다.
바울이 이토록 세세한 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당시의 고린도 교회는 예언하는 자나 방언하는
자들과, 이방인들에 의해 퇴색되어 가고 있었는데, 이런 문제를 바르게 조절해 줄 것을 에베
소에 있는 바울에게 요청한 것이다. 고린도 전서는 그렇게 형성된 것이다. [the new thompso
n annotated-chain reference bible]
초기에는 히브리파가 초대교회의 지도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기독교가 헬라 지역으
로 점차 퍼져 나가는 후기에는 헬라파 기독교인들이 이방인 선교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7집사
중 한명 이었던 빌립은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 전도를 하며, 특히 사도행전 21장 8절 이
하에서 그를 전도자(Evangelist)라고 기록하고 있다. 식량배급의 문제를 일임하기 위해 만들
었다는 7집사들은 나중에는 사도들과 동등한 역활을 하게된 것이 틀림없다. 즉 사도가 유대
본토 출신들의 지도자였다면 7집사는 헬라 출신 유대인들의 종교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헬라파와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주축이 된 초대교회는 7집사중 하나였던 스데반의 순교
로 인해서 갈림길에 서게된다. 사도행전 11장 19절에서 스테반이 순교하자 신도들이 각 지역
으로 흩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11장 22절에서는 예루살렘교회는 건재한듯이 묘사되고 있
다. 즉, 히브리파 기독교인은 박해를 받지 않고 유대땅에 남았고 이방인에 대해서는 유대교의
율법인 할례를 받아 그들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들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같은 일은 다음
의 구절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
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사도행전 15장 1~2절]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사도들이 안티오키아로 와서 이방인들도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
고 시비를 걸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안디옥 교회의 대표
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야고보의 주재 하에 회의를 갖게 된다. 바울서신이나 그 밖의 전승들은
야고보를 예루살렘의 유대교적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로 부각시키고 있다. 아마도 베드로 같
은 사도들은 시리아나 소아시아 등지로 흩어지고,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는 야고보가 단일
지도체제를 형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회의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
한다." [사도행전 15장 5절]
야고보의 주재하에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할례 논쟁은 결국 이방인들에게 할례 없이 복음을 전
해도 된다고 결론 내려졌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수용문제는 이 회의에서 끝나지를 않았다. 할례의 문제 때문에 베드로 분
파와 바울분파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갈라디아서 2장이 증거해준다. 바울의 편지중 하나인
갈라디아서 2장에는 바울이 바나바와 그리스인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왔다. 거기서 바울
은 할례를 강요받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7절에는 베드로는
할례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바울은 할례받지 않은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도직을
임명 받았음을 알게된다. 즉, 베드로와 바울은 서로 다른 사도직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갈라디아서 2장 12~16절에서 또 다시 이방인들의 할례문제가 제기되자 바
울은 베드로를 비난한다. 갈라디아서 2장 12절에 의하면 베드로는 이방인 교우(헬라파 기독교
인)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야고보가 보낸 할례파 사람들이 나타나자 그들을 두려워하
여 식사(예배의식인 주의만찬으로 추정)를 그만두고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이것을 안디옥 사
건이라고도 일컫는데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예루살렘 종교회의 이후로 추측된다. 제임스 던은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는 이방인의 할례문제가 현안으로 되어 있으나, 적어도 바울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안디옥 사건에는 이 문제가 이미 타결된 것이 전제가 되어 있다. 따라서 안디옥
사건은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James D. G. Dunn / "The Incide
nt at Antioch (Gal. 2:11-18)," / JSNT 18(1983) / P.57]
갈라디아서 2장 13절에 바울은 할례파를 두려워하여 자리를 피한 바나바와 그들을 가르켜 위
선자(개역한글판에는 "외식하는 사람들")라고 비난한다. 결국 바울은 이러한 바나바와 심한
다툼 끝에 갈라서게 된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
하니라.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
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
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사도행전 15장 35~41절]
제임스 던(James D. G. Dunn)에 의하면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베드로와 오랜 동역자 바나
바와 결별하게 되었고, 안디옥교회의 후원도 끊어져 직접 돈을 벌면서 전도를 하는 독자적인
선교사가 된 것이라고 추측한다. 결국 이 사건 이후 바울은 기존의 선교지였던 시리아와 소아
시아를 버리고 유대 율법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지 않는곳으로 선교를 하게 된다.
사도행전 15~16장에 의하면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 때 시리아, 길리기아, 더르베, 루스드라,
프리지아, 갈라디아, 드로아를 거쳐 마케도니아의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두 도시에서 선교활동
을 벌인다. 그 후에 바울은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로 내려가 1년반동안 머무른다. 그 후에 바울
은 에베소로 떠나는데 이곳에는 세례요한의 세례밖에 모르지만 구약으로 예수를 증거한다는
아볼로라는 사도와 세례요한에게 세례받은 사람들이 주축이 된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다.
에베소의 기독교 공동체는 바울이 창립한것이 아니었지만 헬라사상과 영지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던 초대교회로 추정된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바울 공동체들은 헬라적 사상 영향 아래에서
세워진 교회들이다.
이 바울공동체는 팔레스타인에 자리잡은 유대교적 기독교 공동체와 신학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AD 50년대 초반에 바울공동체가 겪은 갈라디아 사건과 고린도 사건은 바로 이러한 신학
적인 대립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초대교회 안에 존재하는
유대주의자들(Judaisers)이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에
게 할례와 율법준수를 강요했다는 점이다. 당연히 무할례의 복음을 기초로 하고 있는 바울의
신학과 강렬히 대치될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도들간의 분쟁은 보편적인 구원론과, 유대적인 구원론의 교리논쟁이었는가?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할례라는 문제를 표면적으로 내세웠을 뿐이고,
실상은 두세력간에 주도권을 두고 벌어진 분쟁에 지나지 않는다. 즉, 할례를 제외하고는
헬라화된 유대인들에도 율법은 철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바울교파가 로마에 널리 전파된 후에도,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할례를 제외한 대부분이 유대적
인 율법을 지키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피에 대한 율법이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피가 들어간
음식을 먹지 말도록 규정하고 있다.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레위기 17장 10~11절]
"그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을찌니라....(중략)....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중
략)....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레위기 17장 13~ 14절]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
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
라." [창세기 9장 4~5절]
이러한 율법이 그대로 신약에도 등장한다는 것은 주목해 볼만한 일이다.
바로 할례문제로 논쟁을 벌이는 두 교파를 향해 야고보가 다음과 같은 중재안을 내놓았던 것
이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15장 29절]
보다 확실한 공동번역판의 동구절은 다음과 같다.
"다만 우상에게 바쳐서 더러워진 것을 먹지 말고,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고, 목 졸라 죽인 짐승
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라고 편지를 띄웠으면 합니다." [사도행전 15장 29절 / 공동번역판]
여기서 목매어 죽인 것은 피를 빼지 않은 고기를 말한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구약의 율법을 준수하려고 했다. 로마 시대에 박물학
자인 플리니우스와 2세기의 의사인 아레타이우스는 사람의 피가 간질 치료약 이었다고 말했
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원형 경기장의 놀이판에서 사악한 범죄자들의 생피를 게걸스럽게 취
하여....(중략).... 자기들의 간질을 고치려고 가져가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오"라고 말하면서,
그런 사람들과 기독교인들을 대조하여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인들은 동물의 피조차 식탁에 올리지 않는다....(중략)....기독교인들을 시험할 때에 그대들은
피가 가득 들어 있는 소시지를 그들에게 제공한다. 물론 그대들은 (그것이) 기독교인들에게 금지된 것임을
알고 있다."
여기서 이상한 괴리감을 느끼실분들이 많이 계실 것이다.
초대교회의 사람들은 어째서 할례는 거부하면서, 나머지 구약의 율법은 준수하려고 했는가?
다른 율법은 모두 지키면서, 할례 때문에 사도들간에 격렬한 다툼이 일어나 교회가 분열되었다
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교리논쟁이 아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것은 헬라파 기독교인들과,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의 주도권을 가지고 교권다툼을 한것이라 추측된다. 그렇지 않다면 할례
는 거부하면서, 이방인들은 지키기 어려운 편협한 유대인의 다른 율법들을 지키는 모순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대교회를 이룬 두 세력간의 주도권 다툼일
뿐이다.
▶ 베드로와 바울의 교권 다툼
앞서 예수신화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의 12 제자와 상관없는 독립적으로 구약 성경을
통달한 영지주의자들이 곳곳에서 나타났고 그들중에 주도권을 잡게된것은 바울이었다. 당시
바울은 쌍벽을 이루던 라이벌이었던 아볼로와 함께 수많은 사도들과 교세다툼을 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헬라어로 베드로)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린도 전서 1장 11~12절]
개역한글판의 해석이 희미하므로 공동번역판의 동구절을 올린다.
"내 형제 여러분, 나는 클로에의 집안 사람들한테 들어서 여러분이 서로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장 11~12절 / 공동번역판]
이미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아볼로파, 베드로파, 바울파로 나뉘어진 교인들에 대해서 한탄하
고 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
니리요." [고린도 전서 3장 4절]
역시 번역이 애매하므로 공동번역판의 동구절을 올린다.
"여러분이 세속적인 인간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나는 바울로파다 라느니 나는 아폴로파다 라느
니 할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 전서 3장 4절 / 공동번역판]
나그하마디문서를 비롯한 금 세기 발굴들로, 그 어느 때 보다도 초기 기독교에 관한 정보를 더
많이 가지게 된 오늘 날, 모든 학자들이 한 가지로 공통되게 찬성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초
기 기독교의 극심한 다양성일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분열상은 적어도 현대의 기독교계의 분
열상 그 이상이었다. 오늘 날의 분열상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현재는 그래도 정립된 유
사한 범주의 정경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초기 시절의 다양한 분파의 난립 와중에, 바울 분파(Pauline Faction)과 베드로 분파(P
etrine Faction)간의 대립과 갈등의 흔적이 신약에서 보여지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바울은
할례파 사람들에게 굴복한 베드로와 바나바에게 위선자라고 비난한적도 있었다.
고린도 후서 10~12장에 나오는 바울의 라이벌 사도들은 누구인가? 바울은 고린도 후서 11장
13~14절에서 그들에 대해서, 거짓 사도, 가면 쓴 자들로, 천사의 탈을쓴 사탄으로 매도한다.
특히 고린도후서 11~12장 전체는 주목해 볼만하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을 비방 하면서도, 내
가 저들보다 조금도 못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며(고후 11:5), 다른교회에서 돈을 받아
고린도 교회에 봉사했으므로 고린도교회에는 피해가 아니라 득을 주었다고(고후 11:8) 항변하
고 있다.
그리고 고린도 후서 11장 21~30절에서 바울 자신도 그들과 똑같은 유대인이며, 모진 핍박과
힘든 일을 당한 사람이라고 동정을 호소하고 있으며, 12장에 이르러서는 자신도 그리스도로부터
환상과 계시를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2장 17절에는 자기가 어느 누구를 착취한 적이
있냐고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하고 있다.
우리는 이 서신이 쓰일당시 고린도에서 바울의 권위가 상당히 위태로웠다는 것을 추측해 볼수
가 있다. 12장 16절에는 고린도교회의 어느 사도가 바울을 해꼬지 했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바울을 위기에 빠뜨린 그 사도들은 누구인가?
여기에 하나의 단서가 있다. 아래의 베드로 후서에서 베드로는 바울서신에 대해서 언급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
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베드로후서 3장
15~16절]
베드로는, 바울도 그리스도에게 지혜를 받은 한 형제지만, 그의 서신은 내용이 어려워서 무식
한자들이 잘못 해석하면 멸망에 이른다고 경고한다. 얼핏보면, 바울서신을 함부로 해석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 같지만, 자세히 내용을 살펴보면 베드로의 숨은 의도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 베드로는 복음서의 베드로가 아닐 가능성도 높다)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종말론에 치중해서 수많은 묵시문학이 등장했으며, 구약의 예언서들에
심취하는자들이 많았다. 난해하기 그지없는 상징들로 가득찬 묵시록을 함부로 해석하는 자들
에 대해 베드로가 경고를 했다면 당연히 이해가 가지만, 도데체 바울서신이 어떤면에서 난해
하다는 것인가?
아마도 베드로는 위의 고린도서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다른 사도들에 대해서 비난을 퍼붓는
바울에 대해 불쾌감을 느낀 것 같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할례파에게 굴복한 베드로와
바나바를 위선자라고 한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린도서에서 바울이 비난하는 다른
사도란 베드로, 혹은 베드로의 추종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로마서에서부터 히브리서 까지 바울 서신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불평은 바로 사도
권에 관한 것이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
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찌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고린도 전서 9장 1~2절]
이러한 베드로 분파와 바울분파의 마찰은 외경속에서도 드러난다.
초대교부(apostolic fathers)인 저스틴은 기독교의 사조 바울에 대해 일체 언급이 없으며, 바울의 서신들에
대해서도 침묵 한다. 사도 행전도, 바울의 행적이 주된 내용이 되어야 할 성질의 글이 었으나 그의 순교하기
까지의 기록은 싣고 있지 않다. 바울이 나사렛 예수에 대해 침묵 했듯이 베드로 분파의 바울에 대한
침묵이라는 현상이 존재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바울에 관한 침묵 내지는 암시적 공격의 극치를 보여 주는 문서를 보자.
초기 교부인 클레멘트는 베드로의 후계자로 알려진 중요한 인물이다. 이 클레멘트의 이름을
저자로 빌린 유사 클레멘트 문서, 설교(Homily : 설교, 훈계)가 우리의 관심 거리이다. 이 문서
는 클레멘트가 기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그의 이름만을 빌린 위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허멀리I(Homily I)에서 저자는 클레멘트 본인이 쓴 형식을 취해, 클레멘트 자신과 행적과 그가
베드로와 바나바를 직접 만났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작자는 미상이고 2 세기 중반
내지 3 세기 중반의 문서로 추정 되고 있다. 물론 역사적 사실이 아닌 허구임이 분명 하지만
저자의 의도가 숨어 있는 문서라고 추정된다. 그 의도는 무엇일까?
바로 이 문서는 베드로 분파의 작품 이라는 것이다. 초기 이방 선교 상황을 묘사 하는 이 문서
는 바울에 대해 일체 침묵 하고 있다. 한술 더 떠서 바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바나바와 베드
로를 직접 만났다고 까지 언급하고 있다.
독일 튜빙겐 학파의 바우어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문서가 베드로 분파의 바울 분파에 대
한 공격을 암시 하고 있다고 해석 한다. 즉 글 중에 나오는 베드로의 적이자 경쟁자 시몬은 사
실 바울을 빗댄 인물 이라는 것이다.
이 문헌에서 줄기차게 베드로 따라 다니며 공격하고 비판하는 시몬, 그는 누구인가? 사도 행
전 8장 9절 이하에도 나타나는 시몬은 마술사이며 동 구절이 성경 상에 보여지는 그에 관한 정
보의 전부이다. 저스틴 교부(First Apolog., xxvi)에 의하면, 시몬은 사마리아의 깃타 지역 출신
으로, 스데반과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 왔을 때, 그들에게 세례를 받았으나, 그의 진짜 목적
은 그의 마술의 힘을 키우는 것에 있었다고 한다. 후에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사마리아에 왔을 때
그들의 능력을 보고 돈으로 사고자 했음은 사도 행전에 기록 되어 있다. 잘못을 빌고 베드
로의 축도 받기를 원했으나 그 후에도 그의 행실은 여전했으며, 최초의 이단자 또는 이단의 아
버지라 명명 되었다고 한다.
허멀리XVI(Homily XVI)에서 시몬은 줄기차게 베드로에게 언쟁을 걸어온다.
베드로가 시몬에 빗대서 바울을 공격하려고 했다면 무슨 공격이 가장 필요 했을까? 성경속에
서는 사도직의 권위 다툼 와중에서도, 어느 누구도 나사렛 예수의 친제자임을 들어 기득권을
주장 하지 않는 이상한 현상이 있다. 즉 베드로를 포함한 어느 사도도 예수를 옆에서 목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신화파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이제 바울서신과 복음서들이 쓰여
진 지 적어도 100년 뒤에 허멀리(Homily)의 저자가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100 년 전
의 침묵에 대해 보완하는 것이다. 즉 베드로는 예수를 옆에서 직접 목도한 사도 이므로 환상을
통해 예수를 만난 사도보다 우월한 사도임을 설파하는 것, 바로 그 것이다!
베드로는 "환상을 통한 경험을 토대로 한 자가 선생의 지위에 오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시몬을 공격 하기 시작 한다. 허멀리XVII(Homily XVII)에서 베드로는, 육체적 감각 기관으로 체
험한 것이 초 자연적 환상의 경험보다 더 확실 하다고 주장 한다.
"여호아가 진노중 아론과 미리암에게 하신 말을 보라. '선지자가 너희 중에 일어 나면, 내가 그
에게 꿈과 환상들로 나타내 보이겠으나 모세에게는 그러히 아니 하리니, 모세에게는 내가 친
히 내 모습을 보이리라. 꿈이 아닌 마치 친구에게 얘기하듯....(중략).... '진노 중 에는 환상과
꿈으로 보이시는 것을 알겠느냐? 그러나 친구에게는 얼굴 마주 대 하듯이 하시느니라. 적에게
는 꿈과 환상을 통 하지만........"
즉, 진정한 사도는 예수를 직접 만났지만, 꿈과 환상을 통해 예수를 경험한 자는 예수의 진노
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허멀리XIX(Homily XIX)에도 이런 내용이 이어진다.
"만약 예수께서 너에게 환상을 통해 나타나서 말씀 하셨으면, 그는 필시 너를 적대하여 분노
중에 나타내 보이셨음이라.....(중략).....몽환 중에 예수의 가르침을 받을 자격을 갖춘 자가 어
디 있는가?....(중략).....만약에 그럴 자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중략)....왜 예수께서
우리와 친히 섞이셔서 일 년을 지내시며 가르치셨는가?...(중략)...너희가 진짜로 환상을 통해,
한 순간 만 이라도, 예수의 제자가 되었더라면, 그와 현실에서 동행까지 했던 나를 적대하지
말라. 너희가 교회의 반석을 적대하게 됨이라."
이 문서에서 베드로는 환상적인 메시아를 접한 시몬을 적 그리스도로 묘사 되고 있는 데, 다메
섹으로 가던중 예수의 환상과 접하게 된 바울을 비아냥 거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것은 왜일까?
바울의 가르침은 복음서 보다 앞서 이미 유행 하고 있었고 따라서 나사렛 예수에 대해 침묵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는 역사적 예수를 목격하지 못했다.
Homily에는 다음과 같은 암시가 있다. 베드로는 거짓 선지자가 나와 거짓 복음을 먼저 전파
할 것이라고 예수가 말했다고 주장하며, 진짜 복음은 이단의 방해를 피해 숨겨져 있었다고 설
명 하고 있다. 바우어등의 학자들은 이 문헌들을 초대 교회의 베드로 분파(Petrine faction) 와
바울 분파(Pauline factions)의 대립의 증거로 지적하고 있다.
즉,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바울과 다른 사도들 간에 투쟁은 할례라는 유대 율법적인 문제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바울서신들이란, 갈라디아 교회와 고린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의 유
대주의자들의 측에 서서 바울을 배척하자, 위기에 직면한 바울은 서신들을 통하여 자신의 사
도권을 변호하려고 한 것이다. 이런 바울의 노력이 갈라디아교회에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로
나타났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최후의 승리자가 바울이었음을 오늘날의 신약에서 당연히 알수가 있다. 오늘날의
신약의 1/4을 차지하는 바울서신들로 인해 진정한 최고의 사도는 바울처럼 비춰진다.
베드로와 요한을 제외한 예수의 나머지 12사도들은 어떻게 된것인지 행적도 제대로 알수가 없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외경을 다룬책인 숨겨진성서(THE OTHER BIBLE)에서 다른 사도들의 행
적을 담은 외경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가 있다. 베드로 복음, 베드로계시록, 베드로행전, 요한
행전, 도마행전, 안드레아행전, 에비온복음(12사도의 선택),등등이다. 이것들이 버림을 받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필자는 바울분파가 득세하면서 많은 것들이 정경으로 채택되지
목하고 버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물론, 예루살렘에 근거지를 둔 정통적인 베드로 분파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베드로
가 초대 교황으로 추인 되었고 천국의 수문장으로 숭상되는 전통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최후의 승리자는 바울분파였다. 갈라디아서2장에서 베드로는 유대 민족에게,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직을 부여받게 되었는데,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가 된곳
은 유대땅이 아닌 로마제국이었다. 무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바울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 분파는 로마에서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바울분파가 정통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 콘스탄티누스는 미트라의 숭배자였다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를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황제이자, 기독교를 공인하여 로마를 기독
교화 시키는데 앞장선 성자(聖者)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그가 그동안 핍박받던
기독교를 공인했기 때문이고, 그의 사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는 점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콘스탄티누스는 태양신 숭배자였고, 그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수없이 변질 되었음
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또한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한 이후인 AD 326년에 콘스탄티누스
는 자신의 친아들 크리스푸스와 장인 막시미아누스을 살해 했고 그의 2번째 아내인 파우스타
를 끓는 열탕 속에 쳐넣어 죽이기도 하였다. 그는 바르바리(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의 왕
들과 수천명의 부하들을 짐승들의 먹이로 내던졌다. 또한 그는 음식물을 도둑질한 노예의 입
에 납을 녹여 붓는 형벌과, 가난한 자는 자식을 팔아도 된다는 법을 정하기까지 했던 폭군 이
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콘스탄티누스가 등장할 당시는 로마의 황제가 6명이나 되었다.
로마의 황제는 중국식의 강력한 황제가 아니었다. 로마 황제는 프리켑스(princeps=제 1의 시민)
또는 가이사(caesar)이라 불렸으며, 민주주의와 다신교를 숭배하는 로마인의 자유로운 사상 때문에
시저 마저도 황제가 되려다가 시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공화파에게 암살 당하기 까지 했다.
결국 시저의 양아들 옥타비우스는 황제라는 명칭을 포기하고 프리켑스라는 명칭을 사용했다.(옥타비우스는
그 명칭보다는 존엄한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명칭을 자주 들었음)
그후 폭군으로 알려진 칼리귤라(=가이우스)와 네로황제가 암살당한후, 군인 황제시대인 AD 6
9년에는 한해동안 무려4명의 황제가 등장 하기도 했었을 만큼 황제의 권위와 세습체계가 미약
했으며, 누구든 힘있는 자가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이중 6명의 황제중에 프랑스와 브리튼의 로마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부제는 마지막 라이벌인
막센티우스(Maxentius)와의 운명을 건 물비안(Mulvian)다리에서 전투를 하기전 꿈속에서 십자가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꿈에서 본대로 군사들의 방패에 XP를 표시하도록 했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전투에서 승리한후 그동안 핍박 받았던 기독교를 AD 312년 공인 했고, 그의 사후 AD 392년에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된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태양신, 즉 미트라의 숭배자였다. 그는 평생동안
태양신 종교의 고위성직자로 있었으며, 그의 통치하에서의 로마의 국교는 태양신 숭배였다.
실제로 그의 통치는 태양의 제위(帝位)라고 불리웠으며, 태양신 솔 인빅투스(Sol Invictus :승리의 태양,
로마식 미트라)는 당시 제국국기는 물론 화폐에 까지 등장 했으며, 그가 발행한 화폐에는 "무적의 태양,
나의 보호자"라고 새기도록 했다. 심지어 그의 기념축전에서는 거대한 기둥탑을 세워, 미트라신과 자신의
모습을 조각케 했다고 한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죽음에 임박한후, 즉 사망하기전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즉, 그가 로마를 통치하고 있을 당시, 그리고 니케아 종교회의를 개최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예수를 실패한 메시아로 보고 자신을 진정한 메시아로 생각했다. 그의 이런
견해는 유명한 주교인 유세비우스의 다음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종교는 마침내
예수가 아닌 콘스탄틴에게서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실패한 메시아이고 콘스탄티누스가 참메시아라는 것을 받아 들
여야만 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곳곳에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있었기 때문에 왕권의 원조를
원했고, 따라서 권력을 놓고 다투던 여러명의 황제들중에 어느 누군가와 결탁해야 했던 것이
다. 그렇지만 그것은 순전히 협상, 비지니스에 불과하다.
키(A. Kee)의 견해에 따르면 다신을 믿으면서 민주주의적으로 자유분방한 로마인들(그래서
황제가 여러명이나 등장할 수가 있었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대안으로 일리리안(Illyrian)은
태양 숭배를 생각했는데, 콘스탄틴도 처음에는 그와 동일한 목표를 지니고 있었던 것 으로 여
겨진다. 즉, 그의 태양신 숭배는 유일신 사상으로 로마인들을 통합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A. Kee / Constantine versus Christ / London / 1982.]
헨리 채드윅은 그의 저서 초대 교회사에서 콘스탄티누스에 관하여 이렇게 언급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무적 태양을 숭배하였다....(중략)....그의 개종을
내적인 은혜의 체험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중략)....그것은 군사적인 문제였다....(중략)
....그리스트교 교리에 대한 그의 이해는 결코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투에서 승리하
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의 권한에 속하는 것이라고 확신 하였다." [Henry Chadwick /
초대교회사(The Early Church) / 서영일 역 / 종교개혁사]
▶ 종교회의
예수는 인간인가 신인가? 이 문제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예수가 신이라고 투표로 결정나기
전까지 수많은 논란을 야기 시켰으며 그 논란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기독교의 정통적 교의가 확립될 때까지는 많은 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1) 제1차 종교회의(니케아)
324년에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제국의 동부에서 그의 정적인 리키니우스를 이기고 정권을 장악
하자, 325년 니케아에서 최초로 종교회의를 개최했다.
당시 교회는 예수의 신성(神性)문제를 둘러싸고 생겨난 아리우스 논쟁 때문에 분열의 위기에
놓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분쟁이 국가적 차원에서 분열이 조장될 것을 걱정하여 황제 자신
의 주선으로 그 당시 황제의 거주지인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케 했다. 이 회의의 동기는
아리우스 논쟁 즉,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派)를 이단(異端)으로 단죄하여
분열된 교회를 통일시키기 위함 이었다.
이 회의를 통해서 예수는 투표에 의하여 신(神)이 되어 버렸는데, 기존의 상당수의 기독교는
예수를 신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한 점은 9장의 삼위일체설의 허구성에서 신약의 저자들도
복음서를 기록할 때, 예수와 창조신을 동등하지 않게 기록했음을 언급한 바 있다.
당시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예수는 신의 독생자로 모든 창조물중에 으뜸가는 존재요, 모든 선
지자중에 으뜸인 인간으로, 신과 인간의 중간에 놓인 중보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
고 그러한 관점은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속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서 기독교는 차츰 미트라의 영향을 받아가면서 미트라의 성삼위일체설
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기독교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정통파 아리우스파와 미트라의 삼위일체설을
받아들인 아타나시우스파로 갈려지게 된다.
미트라의 숭배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 종교회의를 개최하면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하려고 했다.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세례도 받지않은 상태로 종교회의를 사회 하면서 공포적인 분위기로 회의를 주도해
갔다. 콘스탄티누스는 모인 사람중 몇명을 추방하고 종교회의의 다수 규칙을 따르지 않는자는 누구나
죽이라고 명령했다.
콘스탄티누스가 "교회의 불일치는 제국의 분열을 가져올 것이므로 연합하지 않는자는 죽여라"고
명령을 내려 회의장은 그야말로 공포의 분위기 였다고 한다.
이 회의의 참석자는 318명이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이들을 감독들(교부)이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각자 장로 두 명과 수행원 셋을 거느리고 니케아에 모였다. 감독들중에서 가장 눈여겨
볼만한 인물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AD 295~373)이다.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는 신(神)이 무(無)에서 창조한 존재로, 인간의 영(靈) 대신에 로고스가
들어간 존재라고 말했다.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는 무(無)에서 창조된 것은 아니지만, 시간 이전의 영원에서
신(神)이 창조한 존재로 본질은 신(神)이 아니나, 신과 비슷한(homoi) 존재라고 주장했다.[성경통신대학
제3권 /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교육부 / 1992]
그러나 그들이 제출한 신경(信經)은 폐기되고, 황제의 지지를 받고 있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
이 채택되어 니케아신경(Nicaenum)이 공포되었다. 이 신경의 특징을 나타내는 단어는 '호우
시우스'인데 그 의미는 성자(聖子)는 성부(聖父)와 본질이 하나라는 것이다. 이 말은 콘스탄티
누스 대제가 코르도바의 오시우스(Ossius von Cordoba)의 말을 빌려 한 말이다.
이 회의에서 예수는 투표에 의하여 인간에서 신이 되었으며, 그 결과 4명의 아리우스파가 파
문(破門), 유형당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때의 투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직접 회의를 주재하면서, 토론을 적극적으로 지도하였으며....(중략)....공의
회가 발의한 신조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하나의 실체'라고 표현한 결정
적인 공식 문을 직접 제안하였다....(중략).... 주교들은 황제에게 위압되어 단지 두명만 제외하
고 신조에 서명하였는데, 그들 중 다수는 자신들의 견해와 매우 달리 행동한 것이다." [Encycl
opaedia Britannica]
또한 이 회의를 통해서 많은 이교도적인 종교의식이 기독교에 도입되었다.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부활절의 시기였는데, 당시 지중해 국가에서 봄의 여신축제(동시에 미트라의 부활절)시기를 부활절로
결정 지었다.
이밖에도, 부활절 계란이나 결혼 반지, 종교적인 행사, 촛불을 켜는 것, 까운 복장의 성가대, 죽은 자들에 대한 기도, 예배 도구로 쓰인 나무 토막이나 천조각, 방에 성수(聖水)를 뿌리는 것등의 의식이 도입되었다.
(2) 제2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 작은 종교회의
381년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가 소집, 안티오키아의 주교 멜리티우스가 주재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이 회의에는 모두 150명이 참석했으며, 이 회의에서 특히 성령의 신
성함을 옹호하면서 삼위일체의 교의(敎義)에 관하여 논의 되었으며,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공
의회의 합의를 공인했다.
첫 번째 회의에서 예수가 신과 동등해진 후, 2차회의에서는 여기에 성령이 끼워져서 삼위일체
가 결정된 것이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배척 되었으나, 그뒤 아리우스와 그 일파는 콘스탄티
누스 1세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여 콘스탄티우스 2세 아래서는 전 로마제국을 지배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따라서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필요 했는데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
파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아리우스파 Arianism항목]
당시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는 테오도시우스 장군의 아들로, 서로마제국의 정제(正帝) 그
라티아누스에 의하여 동로마의 정제로 선임되어 사르마티아인과 서고트족을 토벌했다. 그는
서제(西帝)가 살해된 후 서방의 군대 실력자와 제위참칭자(帝位僭稱者)들을 쳐부수고 전제국
을 수중에 넣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후 분할 통치되고 있던 제국을 394년 재통일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직전 제국을 둘로 나누어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계승시켰으며,
380년에는 아타나시우스파의 교리를 정통파 신앙으로 정했다
테오도시우스는 392년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아서 미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로부터 대제
라는 호칭을 받았으나, 실상 그는 콘스탄티누스를 뺨치는 폭군이었다.
그는 암브로시우스에게 명하여 이방종교의 신전을 파괴하고, 신전령(神殿領)을 몰수시키면서
이교도를 압박했다. 394년에는 올림픽 경기를 금지시켰다. 또, 빈민들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부담케 하고, 빈민들을 숨겨주거나 했을 경우 마을 주민 전체를 학살시키기
도 했었으며, 관리들에게는 고문을 예사로 자행시켰다. 390년에는 데살로니카시 근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시민 7천명이 대학살 되기도 했다.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나,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은 황제 모두 내노라하는 폭군이었던 셈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두 번째 종교회의가 끝난후에도 간헐적으로, 401년 카르타고 종교회의(T
he Council of Carthago), 415년 멜라 종교회의(The Council of Mela), 415년 누미디아 종교
회의(The Council of Numidia)등이 개최되기도 했다. 이 작은 종교회의에서는 유아세례(幼兒
洗禮)가 공인되었다.
카톨릭에서 행하는 유아세례는 기독교의 원죄론을 정립한 어거스틴의 작품이었다.
216년, 터툴리안은 성인들만 침례에 합당한 대상이라고 했고, 96년경에 초대교부였던 클레멘
트(Clement)는 침례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을 받고 그가 침례를 받을 만한지 심사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스우스(Dionysius)역시 신앙고백이 있은 후에 침례를 베풀었다.
쁘와띠에의 힐라리(Hilary), 아타나시우스, 달마티아의 제롬, 가이사랴의 바실도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 한 아무에게도 침례를 베풀지 않았다. 크리소스톰,
나지안젠의 그레고리, 밀란의 암브로스도 같은 말을 했다.
역사가들은 90~300년 사이에는 아무도 유아 침례를 베풀지 않았다고 보는데, 알렉산드리아
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이에 대한 교리들을 가르친 점이 주목된다. 필립 샤프(Philip Schaff)
는 오리겐에게 유아세례를 인정한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오차아드(Orchard)는 유아세례가
카톨릭 교리로 처음 나타난 것이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의 글에서라고 하는데, 그는 오리겐
처럼 외경을 담은 70인역이 영감이 있다고 생각하였던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은 누미디아 종교회의에서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저주했다.
그 이유는 도나티스트(Donatists)들이 성인에게 다시 침례(재침례)를 베풀 때 그들은 처음의
세례(유아세례)가 의미 없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유아세례가 성경적이며 성인침례는 유아 때 이미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이단적이
라고 주장을 펴나갔다. 418년에 개최된 카르타고 종교회의는 어거스틴을 지지하여 그의 주장
을 정통 교리로 인정했다. 후에 416년 멜라 종교회의(The Council of Mela), 789년 샤를마뉴
(Charlemagne)는 유아세례를 국법에 규정하기조차 하였다.
유아세례라는 것 자체가 모순일 수밖에 없다. 많은 수의 신자들이 아기를 교회에 데려오지 않으면
파문의 위협을 받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기를 데려와야 했으며, 물을 뿌리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도 못하는 아기들에게 기독교인으로 못을 박아버리는 것이었다.
(3) 제3차 종교회의(에페소스)
AD 431년에 에페소스에서의 제3차 종교회의로, 예수의 품격(品格)과 마리아 숭배를 둘러싼
논란이 초점이 되어 테오도시우스 2세가 소집한 3차 공의회이다. 이회의에는 250명이 참석했는데,
에베소는 오래 전부터 다이아나를 동정녀와 어머니 여신으로 경배해온 도시였으며, 지금도 아르테미스를
숭배했던 신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안티오키아학파 출신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總大主敎)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의 인성(人性)
을 강조하는 학파의 입장에서 마리아에 대한 '신(神)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정했다. 반면에,
예수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이에 이견을 제시하자, 네스토리우스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강요하여 이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하는 안티오키아의 요한, 시리아의 주교들, 교황 셀
레스티누스 1세측의 대표자들과, 네스토리우스의 적수인 에페소스의 주교 멤논의 지지를 받
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등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의 적수들은 네스토리우스의 지지자들이 회의에 도착하기도 전에 고의적
으로 회의가 개회 시켰으며, 여기에서 마리아를 신(神)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을 결의했다.
당시 이 회의의 소집자는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2세와 서로마의 발렌티아누스 3세였지만,
두 황제는 모두 누이와 황후, 어머니들에 의하여 섭정이 이뤄졌던 허수아비왕으로 회의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의 방관 아래 네스토리우스파는 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회의는
불공정하게 진행되었다.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직에서 해임되고 파문(破門)을 당하였으며 그의 교구는
단죄되었다.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은 후에 테오도시우스 법전에 수록되어 국법이 되기도
했다.
(4) 제4차 종교회의(칼케돈)
AD 451년에 칼케돈에서 열린 제4차 종교회의로 참석자는 500~600명 정도로 추측된다.
이 회의의 개최자는 형식상으로 비잔틴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소집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신
학자 에드알트 슈바르츠의 주장에 따르면, 테오도시우스2세가 죽은 뒤, 마르키아누스를 남편으로 삼은
부르케리아가 각 교회의 의사에 반하여 압력적으로 종교회의를 소집, 그녀가 주도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이 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s)는 재차 단죄 되었고, 결국 5세기경 네스토리우스는 페르시아로
망명한뒤 동방으로 건너가 경교가 되었다.
칼케돈에서 열린 4차회의에서 교황 레오1세는 도그마 편지에서 예수의 이중성(二重性)에 대한 신조를
도입시켰다. 이 회의에서 예수라고 하는 인격 안에 신과 인간의 성격이 불가분적으로 합치되어 있는
것으로 결정되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칼케돈 신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으로 이 이중성은 지금까지
살아 남아 있다.
니케아공의회(325) 및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에서 삼위일체의 교리가 결정된 후에도, 그리스도는
그 본질에 있어 무엇인가를 놓고 논쟁이 계속 이루어졌는데 이 회의에서 결정이 나게 된것이다.
이 회의에서 삼위일체론을 믿었지만 단성설을 믿은 유티키아파가 단죄당했다. 그들이 주장했
던 단성설(monophysitism)이란, 성육신(成肉身)한 그리스도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완
전히 결합 또는 융합하여 단일의 성(性)을 이룬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론(論)이다.
즉 예수의 인성까지도 신성에 속한 것이라는 이 주장에 의하면 예수의 몸은 우리의 몸과 같지 않고
그의 육체도 신성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단성설은 라오디게이아의 아폴리나리스, 알렉산드
리아의 키릴로스 등, 이른바 알렉산드리아학파 사람들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그리고 에페소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설(說)이 배척된 뒤, 에우티케스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었다.
교회는 칼케돈공의회(451)에서 이러한 단성설을 부정하고, 성육신의 그리스도는 신인양성 일인격 (神人兩性一人格)이라는 양성설(兩性說)을 교의로 채택하였다.
이 회의에서 예수의 인성과 육신까지 신이었다는 단성설이 배척되었지만, 복음서의 마지막에는
부활한 예수가 육신채 하늘로 승천 했다고 한다는 점에서 단성설도 타당 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리고 이 회의에서 로마 교황의 탄생되었으며, 교황에 의해서 교리가 통일될수 있게 되었다.
(5) 제5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553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1세가 소집한 회의로, 156명의 동방정교회의 주교
(主敎)들만 참석하였다. 당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1세의 공동 통치자인 그의 아내인 테오도라
에 의해서 회의가 주도 되었다. 그녀는 청색, 녹색의 서커스당이 반기를 들었던 니카의 난때
황제자리를 되찾아 주었던 공로자 였다.
이 회의에서는 유스티아누스가 이미 교서, 법률로 먼저 공포해 놓았던 것이 의제로 채택되어
회의는 형식적인 것일 뿐이었다. 따라서 5차종교회의는 갈채 회의라는 이름으로 비웃음을 사
기도 한다.
4차회의에서 예수에 대한 정의가 내려졌지만, 반대하는 그리스도의 단성설 지지자가 아직도
많았다. 이 회의를 통해 그리스도의 단성설(單性說)로 대표되는 그리스적 신학과, 그리스도의
양성설과의 조화를 찾고자 로마측에 양보를 강요했으나, 팽팽히 대립함으로써 결국은 교회분
열을 가져왔다.
이 회의에서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신의 도성'(De Civitate)을 세상통치를 위한 이론으로 결정
짓게 되었다.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이 이론의 핵심은 교회가 온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천
국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기독교의 원죄론을 정립하였던 어거스틴이라는 자는 로마정부에 대단한 아첨꾼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아세례를 주장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들을 태아나자 마자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기독교 국가였던
로마에 충성케하고,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기독교국가, 즉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는것)이 천국이
이땅에 실현되는것이라는 주장을 펼친 그는 대단한 아첨꾼이자 수완가가 아닐까?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교리적인 사안이 논의되었다. 인류의 타락이 누구의 죄인가하는 문제이다.
만일 여호와가 전지전능한 신이었다면 아담과 이브의 거역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은 천국에서 반란을 일으킨 천사 루시퍼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사탄이 타락한 천사라는 관념은 유대교의 또 다른 창세기인 하가다서에서도 알수가 있다.
하가다서에서는 신이 아담을 창조하자, 천사들이 아담을 시기하였다고 한다.
천사들은 아담을 불로 죽이고 싶었지만 여호와가 그것을 막아 주었다. 그중에 사탄이라는 12장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아담을 가장 시기 하였다고 한다.(다른 천사들은 날개가 6장이었음) 천사 미카엘은 신의
형상을 한 아담에게 경배하였으나, 사탄은 그것을 거부하여 천사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천상에서
추방 되었다고 한다. 위와같이 사탄이 타락한 천사이고, 이것이 인간을 죄짓게 했다는 외경적인 사상이
이 회의에서 그대로 주입되어 버렸다.
그러나 무한과, 영생, 행복이 가득한 완전함과 전지전능함 세계인 천국의 천사가 창조자인 신에게 거역했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결국 천국이나, 천사라는 것이 완전한 것이 아닌, 불완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호와는 전지전능하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형이 인류의 죄를 대속한 것이라는 개념은 이 회의에서 결정을 짓게 되었다.
즉, 예수가 피흘리고 죽은 것을, 동물의 제물을 바치는 구약적 제사와 연관지어 예수의 죽음을
대속적 제사의 의미로 결정지은 것이다. 기독교는 자신들의 신을 희생 제물로 바친 입다의 딸을
받아먹는(사사기 11장)수준의 고대 화산신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이것은 고대의 미개한 의식을
아름답게 치장한것에 불과하다.
뉴저지주 뉴어크(Newark)의 감독파 교구의 독립 주교인 죤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은
자신의 저서인 '어째서 기독교가 변하거나 죽어야만 하는가'(Why Christianity Must Change or Die)에서,
소멸하지 않기 위해 기독교가 반드시 수용해야만 하는 열 두 주제들을 제안했다.
여섯 번째 것은 이것이다. "십자가가 세상의 죄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견해는 반드시
사라져야 만 할, 원시적인 개념에 기반을 둔 하나님에 대한 야만적 사고이다."
인간 탐구(Human Quest)의 보다 최근 기사에서, 그는 이 주제에 대한 항변을 다음과 같이 제
시했다.
"나로서는, 우리가 예수의 죽음과 그것을 요구했다고 일컬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의미를 이렇
게 고대적으로 해석하는 야만적인 성질을 노출시키고 기독교에서 이러한 영적인 잔악한 행위
를 제거하지 않으면, 기독교에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현대의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
가에서 인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을 바라는 하나님을 매력적으로 볼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만일 기독교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의미를 필요로 한다면, 우선, 나부터도 더 이상
이 오래된 믿음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특성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수동적인 반대
는 절대 효과가 없을 것이다. 대신, 이 생각은 공격적으로 제거 되어야 하는데, 만일 그렇지 않
으면 새로운 것이나 보다 매력적인 것은 그 어느 것도 결코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
로 오늘날의 기독교회가 새롭고 강력한 개혁을 필요로 하며,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교
리들을 점검하고 재구성할 때까지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이유라고 믿는다."[ Reforming Chri
stology: He Did Not Die for My Sins! / 1999-11-12 / P.7]
어쨌든 이 종교회의 이후에 유스티아누스는 교황 비기리우스에게 이단 소탕 법령를 내린다.
종교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부인하는 자는 이단자로 낙인을 찍어 사형을 행했으며 세습권도 정지 당했다.
유스티아누스의 명령에 의해 로마 관리들은 큰무리로 떼지어 다니면서 이단자들을 색출해서 강제적으로
세례를 받게 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유스티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와 마찬가지로
카톨릭의 성인 품에 올려져 있다.
(6) 제6차 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
680∼681년 동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가 소집했으며,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說)을 배척하고
로마카톨릭 교회와 화해했으며 호노리우스 교황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이로서 그리스도의 단성설은 완전히
배척받게 되었다.
(7) 제7차 공의회(니케아)
787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공의회로, 당시 섭정(攝政)이던 동로마제국의 황후 이레네 2세
가 총대주교 타라시우스를 책동하여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는 성화상(聖畵像) 숭배, 유물숭배 (유물을 제시하지 않으면 어떤 주교도 교회건물
을 헌당할 수 없게 함), 성자숭배, 죽은 성도와 순교자들에 대한 기도, 남녀공주수도원(男女共
住修道院)의 금지 등에 관한 조규(條規) 20개 조가 의결 되었다. 그러나 성화상에 관한 교리는
서유럽에서 오해를 불러일으켜 얼마 동안 그 승인이 보류되었다.
(8) 제8차 공의회(콘스탄티노플)
869∼870년 이콘(聖畵像) 논쟁을 둘러싼 동,서 교회의 대립을 배경으로 한 공의회이다.
교황 아드리아누스 2세는 동,서 양교회 분리의 요인을 조성한 포티우스 주교를 파문했다. 또
한 불가리아인에 대한 동로마제국의 권리를 배격하고, 로마가톨릭 교회로의 귀속을 확인하였
다. 교회합동을 재현한 공의회였으나 그것은 일시적이었다.
▶ 십자군에 의해 벌어진 동방교회의 비극
삼위일체설을 부인했던 아리우스(Arius 250?~336?)는 리비아 출생으로 안티오키아에서 신학
을 배우고 젊었을 때 메리티오스의 교회분열운동에 가담하였다가 파문(破門)당했으나, 후에
사면을 받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사제가 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사제가 된후 스승 루키아노스의 설을 이어받아 그리스도의 피조성
(被造性)을 강조한 일로 321년 알렉산드로스 주교에 의해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에서 또 파
문당하고 친구인 니코메디아의 주교 유세비우스에게 피신했다. 그 곳에서도 다시 자기 주장을
펴다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논쟁에 패하고 정식 추방당하여 일리리쿰으로 유배 되었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은 대등하며, 오직 성부만이 영원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창조 되었을 뿐, 피조물과 신의 중개 역할을 하고 신이 그에게 세상을 구
원하도록 선택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은총을 입어 하나님의 양자(養子)로 선택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이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으나, 그
후 아리우스와 그 일파는 로마황제에게 접근 하는데 성공하여 콘스탄티누스 2세 황제 아래서
는 전 로마 제국을 지배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엄격(嚴格) 아리우스파와
반(半)아리우스파의 분열이 일어난 데다 361년 황제의 죽음까지 겹치자 급속도로 몰락 하게된
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이른바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파 문제에 종지
부를 찍었다. 그러나 그후로도 아리우스파는 제국의 북쪽 게르만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게르
만인의 민족적 종교라고도 할 만한 지위를 얻었다.
종교란 승자의 정신적 먹이이다. 종교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한뒤, 로마황제에 대한
아첨꾼들인 그들은 두 번다시 아리우스의파가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예수의 신
성을 부정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는 이론으로 못을 박아 로마에서 추방했다.
하지만, 오히려 로마의 기독교가 정통성과 권위가 아리우스파에 미치지 못했으며, 아리우스파
는 동로마 교회와 게르만족의 땅 서고트족이나, 반달족등에서 득세 하였고, 예루살렘과 레바
논까지 세력을 펼친 강력한 세력이었다.
십자군 전쟁의 목적이 성지 탈환 때문 이었다고 오늘날 알려져 있는데, 십자군 전쟁에 원인은
한가지가 아니라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학자들은 교황의 권위와 왕들이 왕권을
신장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십자군 전쟁이 일어 났다고 보고 있다.
필자는 거기에 덧붙여서 로마 교황청이 그리스 정교회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본다.
원래 로마 카톨릭은 동로마 교회에 비해서 권위가 많이 부족했고 세력을 얻지 못했다. 서로마의 경우,
그들의 민족 자체가 초기의 로마인들이 아닌 게르만 민족으로 대체 되었다. 그러다가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왕이 카톨릭으로 개종한 이후 로마교회는 유럽지역에 세력을 넓혀 갔다. 클로비스왕
은 왕권의 정당성을 보장 받았고, 로마 카톨릭은 자신의 세력을 널리 전파할수 있다는 점에서
클로비스왕의 개종은 일종의 계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야만적이었던 당시 게르만 민족은 형이상학적인 이해 자체가 불가능했으며 따라서 교황청에서는 무수한
왜곡이 필요했다. 우상과 징표를 섬겨서는 안되면서도 그들은 십자가를 비롯한 다양한 상징물들과 건축물,
성상들을 만들어야 했고, 당시 보편적인 대모신을 섬기던 민족이었기에 성모 마리아를 신격화하는 작업도
필요했다.
당연히 동로마 교회로부터 압력을 받았지만 로마 교황청은 멈출 수 없었다. 정통 기독교 특히,
당시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지금의 레바논 지역까지 교세를 갖고 있었던 '아리우스파 수도
회'의 비난은 절정에 이르렀었다.
아리우스 수도회는 로마에서 축출 당한후 이슬람의 영향력으로 흘러 들어 갔으며, 이후 아리우스파를
비롯한 동방 정교회의 영향으로 이슬람의 코란에 예수가 선지자로 등장한다. 당시 로마 교회 경쟁 상대였던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등 동방의 3대 본산(本山)교회에 로마 교황청은 정통성 마저 위협받게
되었으며, 오래 동안 주도권을 놓고 다투던 콘스탄틴노플의 동방교회와는 성만찬에 쓰는 빵에 누룩 넣는
여부를 놓고 맞부딪쳐 1054년 서로를 파문(破門)함으로써 그리스 정교(Greek Orthodox Church)로 알려진
동방교회가 분리되기에 이른다.
1095년, 드디어 로마 교황청은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하에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
는 아무런 명분이 없었다. 무역을 중시하는 아랍인들은 왕래를 통제하거나 박해한 적도 없었
으며, 어떤 종교에도 신이 있고, 어떤종교를 믿어도 올바르게 살아간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는
다고 생각했던 무슬림들은 기독교인에게 관대했다. 또한 기독교의 예수를 그들의 경전인 코란
에도 선지자로 받아 들였다.
당시 십자군은 절대로 종교적 이념을 갖는 전사가 아니라 약탈자였고 학살자 였다. 그들은
무슬림들은 어린이들과 여자들까지 대학살을 자행 했으며, 무슬림 만큼이나 아리우스 수도회를
따르는 기독교도들과 동방교회 신자들이 이단이라는 명목하에 대학살 되었다. 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이유로 많은 숫자의 유대인들도 대학살을 당했다.
13세기(1204년) 또 다시 발생된 십자군 원정대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동방교회의 중심지
인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침략하여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이렇게 해서 동방교회는
카톨릭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이방신의 숭배자였던 폭군에게 공인받고, 그에 못지 않은 다른 폭군에 의해서 국교로 공포되고,
성경의 내용과는 어긋나는 삼위일체등이 투표로 결정나고, 로마제국의 아첨꾼이었던 자가
원죄론을 정립했고, 이방신의 축제가 섞여버리고, 성경에 충실하던 교파가 같은 같은 기독교
인들에게 대량학살 당해서 쓰러져 버리는.......이것이 기독교 교리가 형성되어 갔던 숨기고 싶
은 역사적 사실들이다.
물론, 마리아숭배, 유아세례, 성화숭배등은 카톨릭에만 국한되는 사항일 것이다. 그러나 그 외
의 사항들은 오늘날의 개신교가 버리지 못한 주요한 교리들인 것을 명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