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설교) 성령강림후 둘째주일/환경주일
일상에서 발견하는 거룩함/Holiness found in everyday life
사무엘상 3:1-10
고린도후서 4:5-12
마가복음 2:23-3:6
오늘은 성령강림 후 둘째주일이며, 총회가 제정한 환경주일입니다. ‘환경’이란, 우리의 생활을 둘러싸고 있으며 일정한 접촉을 유지하고 있는 외부세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자연뿐 아니라 종교, 정치, 경제, 문화, 역사, 교육 등 다양한 우리의 일상과 관련된 환경의 건강성을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환경의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미세먼지나 GMO식품, 공장식 축산의 문제뿐 아니라, 이단 사이비와 적그리스도의 문제, 세비나 축내는 정치인들의 문제, 땀 흘려 일하지 않고도 노동자들의 수고를 착취하는 경제구조의 문제, 소비문화 일색의 문화환경, 왜곡된 역사의 문제, 경쟁을 부추기는 제도교육의 문제 등, 우리를 둘러싼 제반 환경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들이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기독교운동이 전개되고, 그 덕분에 우리를 둘러싼 제반 환경이 긍정적으로 변화되어갈 때 교회는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인은 별세계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어떤 신앙인이라도 이 세상에 발 딛고 살아갑니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을 우리는 ‘일상’이라고 합니다. 사실, 단 한 번도 똑같은 날은 없었고, 또 없을 터인데 우리는 매일매일 반복된 일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상 탈출’이라는 말도 있는 것이겠지요. 많은 분이 여행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통해서 삶의 활력을 얻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행은 왜 떠날까요? 돌아오기 위해서 떠난다고 합니다. 이 말은 돌아올 것이니까 여행을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이 이어지던 집을 떠나보니, 그 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비로소 깨닫고 여행지에서 집을 그리워한다는 것입니다.
■ 사무엘상 3:1-10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후서의 말씀과 병행 본문으로 주어진 교회력의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사무엘상 3장 1-10절의 말씀은, 어린 사무엘이 여호와의 전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신 내용입니다. 사무엘은 엘리가 부르는 줄로 알고 세 번 달려갑니다. 그제야 엘리는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는 줄 깨닫고 사무엘에게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고 귀뜸을 해주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는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만, 정작 이 본문에서 중요한 내용은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내용입니다. 하나는 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던 시대’였다는 것과 2절에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때에’라는 말씀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으로 말미암아 엘리의 집에는 저주가 내렸습니다. 결국, 엘리의 두 아들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죽었으며, 하나님의 언약궤도 빼앗겼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엘리는 의자에 앉아있다가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일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자 일상이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지는 시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사사 엘리도 눈이 어두워져 더는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이상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은 단지, 육체적인 시력의 상실을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교회력은 일상이었던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이 희미해진 시대에 그것을 다시 회복하시기 위해 사무엘을 부르시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 마가복음 2:23-3:6
복음서 본문에는 안식일법관 관련된 두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에서 이삭을 자른 일로 바리새인들이 ‘추수하지 말라’는 안식일법을 어겼다고 시비하는 사건입니다. 또 하나는, 사람들이 이 일로 예수를 고발하려고 벼르고 있음에도, 안식일에 회당 한가운데에 손 마른 사람을 서게 한 후에 고쳐주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반문하십니다.
당시 ‘안식일법’은 법의 형식과 껍데기만 남아서 본래의 법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은, 일 년 365일 쉬지 못하고 강제노역을 하던 노예생활과 관련이 있는데, 그 정신은 사라지고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세부조항을 만듭니다. 유대교에서는 39가지 금지조항(미쉬나)을 만들었는데 그중에는 본문에서 문제시하고 있는 추수와 병 고치는 일 외에도 알파벳을 두 자 이상 쓰거나 지우는 일, 빗질도 포함됩니다. 빗질하다 머리털이 빠지면 ‘떨 깎는 일’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매듭짓기와 풀기도 안됩니다. 단, 24시간 이내에 매듭을 풀을 경우는 가능하므로 신발 끈을 매듭 매거나 푸는 일은 허용됩니다. 이렇게 복잡한 법 조항들은 문자로 기록되었고,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에는 문자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이들은 소수였으며, 설령 일반인이 안식일법 조항을 읽는다고 해도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지 늘 불안했습니다. 이렇게 안식일법이 본래의 정신을 상실하여 사람을 옥죄는 법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안식일법을 고의로 어기시면서 본래 의미를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지는 시대에 사무엘을 부르신 구약의 말씀과 복음서의 말씀은 병행 본문이 된 것입니다.
■ 고린도후서 4:5-12
사무엘을 부르실 때의 시대가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였고,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던 시대도 ‘문자적인 안식일법’에 얽매여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계명이 왜곡된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고린도후서 8-9절의 말씀대로 ‘사방으로 욱여쌈을 담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일’이 생기겠지요. 예수님도 결국,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결국, 박해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거꾸러뜨림을 당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고린도후서의 반전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시고 살면 그로 인해 빛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깨어지고 낡아질 질그릇과도 같은 존재지만, 보배를 담는 순간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곳에 계신 모든 분은 보배이신 예수를 모시고 빛나는 삶, 생명의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일상에 깃든 거룩함
하나님이 불러도 알지 못하는 질그릇 같았던 사무엘을 부르시어 위대한 사사로 세우시고, 질그릇 같이 깨어질 유한한 존재인 우리에게 보배를 모시고 살아가게 하셔서 빛나는 삶을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메시지>의 저자인 유진 피더슨 목사는 7절의 말씀을 아주 탁월하게 해석했는데 이렇습니다.
“우리는 이 귀중한 메시지를 우리 일상의 삶이라는 수수한 질그릇에 담아 가지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입니다. ‘질그릇’은 ‘일상의 삶’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포함한 모든 삶이 ‘질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에 예수 그리스의 복음이 깃들면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은 곧 거룩한 삶, 보배로운 삶, 빛나는 삶’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잘 아는 성경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모세가 호렙산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들려온 소리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 모세가 서 있는 그곳은 양 떼를 치던 모세가 매일매일 오가던 곳에 하나님이 불로 임하시자 일상의 땅에서 ‘거룩한 땅’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을 탈출하고 벗어버릴 것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을 낯설게 봄으로써 일상에 깃든 보배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상에서 보배를 발견한다는 것은 일상에서 거룩함을 발견한다는 것이요. 그것을 발견하게 되면 흐렸던 눈이 밝아져 우리가 매일매일 맞이하는 일상이 무의미하고 지겨운 반복이 아니라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빛나는 선물 같은 삶이요, 소중한 삶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상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간직하고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 일상을 거룩하게
바울 서신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바는 삶 없이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일이므로 무익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며,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거룩한 삶이요, 유익한 삶이라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도 다르지 않습니다(한자 ‘거룩할 성’ 자(字)의 구성). 구약의 말씀도 결국,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결론은 거룩한 삶은 별난 곳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우리의 일상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맞이하는 일상, 특별한 일이 있어도 좋지만 ‘별일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장기하라는 가수가 ‘나는 별일 없이 산다’는 제목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사가 재미있습니다.
‘니가 깜짝 놀랄 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 뭐냐 하면 나는 별일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니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 오늘밤 절대로 두다리 쭉 뻗고 잠들진 못할 거다 그게 뭐냐면 나는 별일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이번 건 니가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을 거다 그것만은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거다 하지만 나는 사는 게 재밌다 하루하루 즐거웁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매일매일 신난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하루하루 즐거웁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매일매일 신난다 나는 별일없이 산다 나는 별일없이 산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매일매일 아주그냥’
상당히 철학적인 가사입니다.
이런 일상의 재미를 발견하는 일도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이런 일상의 발견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 일상이라는 질그릇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만나고, 박해를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이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렇게 보배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이들 덕분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변화될 것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