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조 혜능선사의 일대기를 인터넷에서 퍼 올립니다.
중국 선종 제6조는 혜능스님(慧能大師, 638∼713)이다. 스님의 속성은 노(盧)씨이고, 관향(貫鄕)은 범양(氾陽)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남해(南海) 신주(新州)로 귀양 오게 되어 신주에서 태어났다. 3살 때에 아버지를 잃게 되어 어머니가 수절하며 길렀는데, 자라면서 점점 가세가 궁색해져 땔나무를 해서 편모를 봉양할 수밖에 없었다.
스님은 24세 되던 해 어느 날 나무를 여관에 배달하는 길에 한 손님의〈금강경〉읽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 중에서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應無所住而生其心)”라는 경전의 말씀을 들었을 때 마음이 맑아져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그 손님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책이며, 누구에게 얻었습니까” 그 손님이 말했다. "이는〈금강경〉이라는 경전입니다. 나는 호북성 기주 황매현의 동(東) 빙무산(憑茂山)에서 5조 화상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홍인 화상으로부터 ‘한 권의〈금강경〉을 손에 든 것만으로도 곧 견성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스님은 그 말을 듣자말자 홍인스님과의 사이에 숙세(宿世)의 인연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곧 늙은 어머니에게 스스로의 생각을 알려서 이해를 구하고는 황매의 빙무산으로 홍인스님을 뵙기 위해 달려간다.
스님이 홍인스님을 찾아가 뵙자, 홍인스님께서 물었다. “그대는 어디 사는 누구인가?” 스님이 대답했다. “영남(嶺南)의 백성입니다.” “무슨 일로 왔는가?” “오직 부처가 되기 위하여 왔습니다.” 홍인스님이 말했다. “그대는 남방 출신의 오랑캐여서 불성(佛性)이 없거늘 어떻게 부처가 되려고 하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사람에게는 남쪽과 북쪽의 차이가 있겠지만 불성에 어찌 남북이 있겠습니까” 스님의 대답을 들은 홍인스님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느라고, “네가 무엇을 안다고 그렇게 대답하느냐”라고 꾸짖으면서 방앗간으로 보내어 주야로 방아를 찧고 장작 쪼개는 일을 시켰다.
스님이 방앗간으로 보내진지 8개월 후 홍인스님은 문하의 수행자들에게 불법의 큰 뜻을 깨달은 게송(偈頌)을 지어서 보인 사람에게 가사와 법을 전하겠다고 말한다. 이에 700대중 중의 상좌(上座)인 신수(神秀) 스님이 게송 하나를 지어 복도 벽에다 붙여놓았다. “몸은 진리의 나무, 마음은 맑은 거울의 받침과 같다.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 먼지가 않지 못하게 하라.” 신수스님의 게송을 들은 혜능스님이 말하였다. “아름답고 아름답다. 그렇지만 깨달은 것도 있고 깨닫지 못한 것도 있다.”
그런 다음에, 문자를 읽고 쓸 수 없었기 때문에 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게송을 지어 복도 벽에다 붙여 놓았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며, 맑은 거울도 원래 받침이 없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때가 낄 수 있겠는가.” 스님의 게송에서 큰 기량을 본 홍인스님은 그날 밤 스님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심법(心法)을 전수한 다음에, 주위의 시기를 꺼려, 야밤에 산을 떠나도록 하였다.
스승의 곁을 떠난 스님은 이후 15년간 산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선법을 더욱 영롱하게 닦으며, 인연을 기다린다. 의봉원년(儀鳳元年, 676년, 39세)에 마침내 때가 되었음을 알고, 산에서 내려와 광주(廣州) 법성사(法性寺)에 도착한다. 그때 마침 그곳에서는 인종(印宗) 법사가〈열반경〉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때 두 학인이 뜰에 서서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한 사람은 “바람이 움직인다.”라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깃발이 움직인다.”라고 논쟁하고 있었다. 이때 스님이 그 두 사람에게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스님의 이와 같은 지적에 놀란 인종법사는 스님을 윗자리에 모셨다. 여기서 스님은 스승이 전해준 가사를 보여준다. 이에 인종법사는 스님이 5조 홍인스님의 전법자임을 확인하고는 스님을 삭발해준다. 이 곳에서 마침내 혜능은 정식으로 출가절차를 밟아 그의 선법을 본격적으로 펴게 된다.
스님 설법담은 ‘육조단경’.., 자기본성 깨치라는 것…
‘정혜불이’의 선법은 중국 선종의 진정한 개조
육조혜능(六祖慧能)스님은 신수(神秀)스님과 더불어 홍인스님 문하의 2대 선사로서, 후세에 신수의 계통을 받은 선을 북종선(北宗禪), 혜능의 계통을 받은 선을 남종선(南宗禪)이라고 했는데, 이른바 오가칠종(五家七宗)은 모두 남종선에서 발전했다.
혜능스님의 선법은 자성(自性)의 발견으로 일관된다. 스님의 설법을 기록한〈육조단경(六祖壇經)〉전편에 흐르는 이야기는, 한마디로 자기 본성을 깨치라는 것이다. 이때 말하는 자기 본성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면 모두 갖추고 있는 마음이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이 현실에 있는 존재자 각자의 마음이다.
따라서 부처나 중생 모두가 개체적 실존, 즉 주체의 다른 경계이지 결코 또 하나의 다른 주체가 있어, 우리가 그것을 부처라 이름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번뇌와 해탈은 동일한 주체(主體)의 다른 활동이며 결코 이 번뇌의 주인공을 떠나 따로 보리(菩提)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스님이 말하는 바의 깨달음(見性)은, ‘인간의 자성(自性)’을 유일한 근거로 해, 불성(佛性)인 자성을 홀연 발견(頓悟見性)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한편, 스님이 표방하는 바의 깨달음(見性)은, 오랫 동안의 좌선간심(坐禪看心) 끝에 청정한 자성(自性)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말 끝에 문득 깨달아[言下便悟] 자성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내용은 일상 속에서 만법(萬法)을 념(念)하되 그 념(念)에 미혹되지 않고 항상 청정한 자성(自性)을 유지하며 자재해탈(自在解脫)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님의 증오론(證悟論)은 언하변오(言下便悟)라는 돈오견성(頓悟見性)을 통하여 반야삼매(般若三昧)에 들어가 무념행(無念行)을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념행이란 무엇인가? 스님은 설파한다. “우리의 법문은 먼저 무념(無念)을 세워서 종(宗)으로 삼고, 무상(無相)을 체(體)로 삼고, 무주(無住)를 본(本)으로 삼는다. 무상이란 상에 있어서 상을 떠남이다. 무념이란 생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음이다. 무주는 생각 생각 가운데 전경(前境)을 생각지 않는 것이다.” 이때 무주란 세간의 모든 일은 전부 다 실체가 없는 공(空)이므로 거짓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모든 것의 모양으로서 상이라는 것은, 모두 생멸변화하는 가(假)이어서 진실한 것이 아니므로, 상에 사로잡혀서는 안되기 때문에, 무상(無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념은 모든 대상에 있어서 마음이 물들지 않음을 말한다. 이것은 마음에 본래 두 상이 없고 청정 그 자체이어서, 떠나야 할 망념 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단경〉에 의하면 선정수행과 깨달음의 지혜, 즉 정혜(定慧)는 불이일원(不二一元)의 체용(體用) 관계로서 그 선후가 있지 않다. 스님은 설파한다. “나의 이 법문은 정혜(定慧)로써 근본을 삼는다. 미혹하게도 정혜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혜는 일체로써 둘이 아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작의(作意)하여 정에 든 다음에 혜가 발(發)한다거나[先定發慧] 혜가 먼저 있고서 정을 발한다거나[先慧發定]하여 정혜가 서로 다르다고 하지 말라.”
스님에 의하면 자성의 정혜는 불이(不二)로서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행과 깨달음은 선후가 없기 때문에 정혜불이(定慧不二)이며 오수동시(悟修同時)일 뿐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달마스님을 중국선종의 초조(初祖)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국선이라는 새로운 선문(禪門)을 처음으로 열어제친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조(開祖)는 혜능스님이다. 그것은 실천형태의 측면에서는 점수(漸修)에서 돈오(頓悟)에로의 변화를 의미하고, 심성관(心性觀)과 수증관(修證觀)의 측면에서는 사망귀진(捨妄歸眞)과 수인증과(修因證果)에서 일체개진(一切皆眞)과 정혜불이(定慧不二)에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혜능스님이 새롭게 연 이러한 선법은 이후 중국을 위시하여 한국이나 일본으로 전파된 선불교의 기본 토대가 되며, 특히 임제종(臨濟宗)의 간화선(看話禪)으로 계승된다. 따라서 혜능의 선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바로 중국선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된다.
[출처:불교신문]
첫댓글 .... 감사히 읽고 갑니다 . 관세음보살_()_
너무 감사합니다_()_
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