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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익(柳舜翼) 묘갈명(墓碣銘) - 이경석(李景奭)
선군자(先君子) 만년에 당시의 경대부(卿大夫) 제공들과 기로계(耆老稧)를 결성하였는데 공(公)도 참여하였다. 좋은 철이나 아름다운 절일(節日)을 만나면 연회를 베풀어 모이는 바 혹 남여(籃輿)를 타기도 하고 혹은 말을 타고 빠르게 오갈 때 눈썹과 수염이 호호백발이고 금관자(金貫子) 옥관자(玉貫子)가 서로 비치니 도로의 구경꾼은 부러워 감탄하며 마치 지상(地上)의 신선같이 여겼다.
그때 나는 자제로서 술시중을 들며 즐겁게 모시기를 자주 하였다. 공이 몰(歿)하고 묘소에 오래도록 빗돌이 없었는데 공의 아들 유중형(柳重炯)이 내가 일찍이 태사[太史, 사관(史官)]를 지냈고 또 선대에 친분이 있다고 하여 내게 명(銘)하기를 청하니 내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행장(行狀)을 살펴보니 공의 선계(先系)는 진주 유씨(晉州柳氏)인데 고려 좌우위 상장군(左右衛上將軍) 유정(柳挺)의 후예이다.
고조부 휘 세침(世琛)은 대사간(大司諫)이었는데 곧은 말을 하여 연산군(燕山君)이 죄를 주었다가 후에 중종(中宗)이 장어사(長御使)로 발탁하였다가 곧 관찰사(觀察使)가 되었다. 공이 졸(卒)하자 부인 유씨(兪氏)도 따라 순절하였는데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내렸다.
증조부 휘 홍경(弘慶)은 상서원 부직장(尙瑞院副直長)이었는데 좌통례(左通禮)에 추증(追贈)되었고, 조부 휘 유일(惟一)은 장례원 사평(掌隸院司評)이었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아버지 휘 사규(思規)는 장례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였는데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정경 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된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현령(縣令) 이숙(李淑)의 딸이다.
가정(嘉靖) 기미년(己未年, 1559, 명종 14) 11월 30일에 공을 낳았으니 휘는 순익(舜翼)이고 자(字)는 여중(勵仲)이며 호(號)는 지강(芝岡)이다. 임오년(壬午年, 1582, 선조 1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갑오년(甲午年, 1594, 선조 27)에 금오랑(金吾郞)에 임명되고 병신년(丙申年, 1596, 선조 29)에 금화별제(禁火別提)에 제수되었다.
정유년(丁酉年, 1597, 선조 30) 겨울에 명(明)나라의 장수 형 군문 개(邢軍門玠)가 우리나라에 와서 막부(幕府)를 개설하여 왜적(倭賊)에 대비할 때 도감(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오래도록 낭청(郎廳)으로 있었던 공로로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에 전보(轉補)되고 얼마 안되어 과천 현감(果川縣監)이 되었다.
기해년(己亥年, 1599, 선조 32) 문과(文科)에 합격되고 경자년(庚子年, 1600, 선조 33)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신축년(辛丑年, 1601, 선조 34)에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임명되고,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으며, 계묘년(癸卯年, 1603, 선조 36) 외직(外職)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제수되었다.
을사년(乙巳年, 1605, 선조 38)에 정랑(正郞)이 되었다가, 재상 경차관(災傷敬差官)의 명을 받고 영남 좌도(嶺南左道)에 갔고 얼마 후 돌아오니 함경 도사(咸鏡都事)에 제수되었던 바 진정(陳情) 상소(上疏)하여 면하게 되니 어버이가 연로했기 때문이었다.
병오년(丙午年, 1606, 선조 39)에 군임(郡任)을 청하여 면천 군수(沔川郡守)에 추천되었고, 정미년(丁未年, 1607, 선조 40)에 찬성공(贊成公)의 상(喪)을 당하였다. 기유년(己酉年, 1609, 광해군 원년)에 상복을 벗고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후 대동 찰방(大同察訪)으로 나갔다가 1년 만에 파직되었다.
임자년(壬子年, 1612, 광해군 4)에 사도시 정(司寺正)에 임명되었고 얼마 후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나갔다. 갑인년(甲寅年, 1614, 광해군 6)에 공로로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계자(階資)를 더하여 주는 은총이 있었다. 병진년(丙辰年, 1616, 광해군 8)에 만기가 되어 돌아와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으나 해유(解由)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체직되었다.
정사년(丁巳年, 1617, 광해군 9)에 또 판결사가 되었다가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변경되었으며, 해서 안찰사(海西按察使)가 되어 나갔고 만기가 되어 첨지(僉知)가 되었다가 얼마 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겼으며, 얼마 안되어 체직하고 또 판결사를 거쳐 은대(銀臺, 승정원(承政院))에 들어가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
이때에 폐모론(廢母論)이 발의되려 하므로 공개적으로 글을 올려 죄상을 탄핵하였다가 체임되고 면직되었다. 공조 참의(工曹參議)와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하였으나 예조(禮曹)에는 상피(相避)가 있어서 공조(工曹)로 옮겼으며 곧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전보되었다.
관동 안찰사(關東按察使)로 나갔고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승급되니 해서(海西)에 있을 때의 공로 때문이었다. 경신년(庚申年, 1620년 광해군 12년)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신유년(辛酉年, 1621, 광해군 13) 가을에 양 감군(梁監軍)이 바다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온다고 하여 공이 문안사(問安使)로 서읍(西邑)에 가서 머물렀는데 공이 오랫동안 소식이 없다고 아뢰니 돌아올 것을 허락하였다.
임술년(壬戌年, 1622, 광해군 14) 봄에 다시 용천(龍川)으로 가서 감군(監軍)에게 예를 올리고 돌아왔고 이해 여름에 분병조(分兵曹)에 숙직하였는데 대체로 광해군(光海君)이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다 유폐시키고 공을 분병조의 참판(參判)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정사 공신(靖社功臣)들이 이미 광복(匡復)할 계획을 세워놓고 공과 약속하여 서궁(西宮)에 숙직하면서 금위군(禁衛軍)의 방비를 느슨하게 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즉위년)에 의거(義擧)가 실시되니 밤에 궁문을 열어 맞이하였다. 반정(反正) 초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임명되었고 뒤에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교체되었다. 외직을 구하여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었으나 비국(備局, 비변사(備邊司))에서 멀리 나갈 수 없다고 의론이 일어나므로 양주 목사(楊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책훈(策勳)을 할 때 혹간 공은 홍제원(弘濟院)의 집회에 가담하지 않았으니 녹훈(錄勳)할 수 없다고 말하였으나, 논의하는 이는 “폐모론(廢母論)이 퍼질 때 주론자(主論者)를 보고 위험한 말로 두려움을 주었고 의거 때 많은 주선을 하였으니 녹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공은 이이첨(李爾瞻)의 내형(內兄)이 되는 지라 일찍이 흉론(兇論)을 면박하기를, “다른 날 인적(隣賊)이 따지거나 중국 조정에서 죄를 성토하면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질 것이냐?” 하였는데, 위험한 말로 두려움을 주었다고 함은 이것을 지적한 것이다. 의론이 결정되지 않아 임금께 아뢰니 특별히 녹훈하라고 명하므로 공이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이에 답하기를, “자신을 망각하고 숙직을 한 충신이 어찌 여러 공신만 못하겠는가?” 하고, 이에 정사 3등 공신(靖社三等功臣)을 내려 주고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승급(陞級)하여 청천군(菁川君)에 봉하였다. 반정(反正)한 뒤에 혼조(昏朝, 광해군) 때에 포상하고 가자(加資)한 것을 모두 정리하였으므로 공도 강등되었다가 이때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급된 것이다.
갑자년(甲子年, 1624, 인조 2) 정월에 양주 목사(楊州牧使)를 버리고 돌아왔는데 얼마 후 이괄(李适)이 배반하였다는 보고가 있었다. 조정에서 처음에 경성(京城)을 고수하려고 공을 찬획사(贊畫使)로 삼았었는데, 적병이 이미 가까이 다가오자 거가(車駕)가 공주(公州)로 행차하는데, 진위(振威)까지 호위하였던 바 검찰사(檢察使)가 되어 앞서가서 필요한 조처를 취하였고 도중에서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
난이 평정되자 서울로 돌아와 호종(扈從)한 공로로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어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임명되었으며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변경되었다가 나중에 어떤 사건으로 면직되었다. 을축년(乙丑年, 1625, 인조 3) 봄에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임명되었고 사은 부사(謝恩副使)로 중국에 가게 되었으나 조정에서 나이가 많다고 하여 그만두었다.
겨울에 춘천 부사(春川府使)로 나갔으며, 정묘년(丁卯年, 1627, 인조 5) 정월에 금(金)의 군사가 깊숙이 침입하여 오니 도체찰사[體相]가 춘천 방어사(春川防禦使)를 무관(武官)으로 삼기를 건의하였기에 공은 체직되어 강도(江都)의 행궁(行宮)으로 달려갔고 환도(還都)하여서는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기사년(己巳年, 1629, 인조 7) 봄에 장흥 부사(長興府使)에 제수되자, 언로(言路)에서 그가 노쇠하였다고 논하자 임금이 들어주지 아니하다가 계속 상소가 올라오자 체직되었다. 여름에 한성 우윤(漢城右尹)에 임명되었다가 좌윤(左尹)으로 옮겼다. 경오년(庚午年, 1630, 인조 8) 가을에 파직되었고 겨울에 다시 공훈에 봉해졌다.
신미년(辛未年, 1631, 인조 9)에 금화사 제조(禁火司提調)가 되고 임신년(壬申年, 1632, 인조 10)에 동지 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가 되었고 또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임명되었다. 이해 11월 21일에 집에서 질환으로 졸(卒)하니, 향년 74세였다. 조문(弔問)과 치제(致祭)를 예(禮)로 하였고 숭정 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다음 해 정월에 금천군(衿川郡) 소재지 서쪽 기성리(己省里) 선영(先塋) 곁에 장사지냈는데, 국가에서 양사(襄事, 장사 지내는 일)를 치러주었으니 이는 예우(禮遇)이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정경 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된 안동 권씨(安東權氏)인데 주부(主簿) 권주(權澍)의 딸로서 공과는 동년생(同年生)이고 공보다 6년 후인 정축년(丁丑年, 1637, 인조 15) 윤 4월 12일에 졸(卒)하니, 향년 79세였다.
술자(術者)의 말에 따라 졸한 지 12개월만에 공의 묘소에 합장하였다. 공은 체구는 보통사람을 넘지 아니하였으나, 담(膽)은 몸체보다 컸으며 지기(志氣)가 경확(勁確)하고 대의(大義)에 내닫는데 용강(勇剛)하여 세상의 환란을 만나면 강개하여 흥복(興復)할 뜻이 있었다.
공명(公明)하고 사정(私情)이 없었으며 믿음으로 친구를 사귀었고, 마침내는 홍업(洪業)을 은밀하게 도와 공적이 사직(社稷)에 남아 있으니 공 같은 이는 지혜롭다고 말할 만하다. 아들이 없어서 족제(族弟)인 판관(判官) 유경붕(柳景朋)의 아들을 3세 전에 아들로 삼았는데 바로 유중형(柳重炯)이다. 중추(中樞)와 경력(經歷)으로 여러 고을 수령을 지냈다.
현감(縣監) 권경중(權景中)의 딸에게 장가들어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유장원(柳長元)ㆍ유장무(柳長茂)ㆍ유장신(柳長新)ㆍ유장창(柳長昌)ㆍ유장배(柳長培)이다. 유장원은 3남 1녀인데, 장남은 유윤화(柳胤和)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유장무는 3남 1녀인데 모두 어리고, 유장신의 아들은 둘인데 어리며, 유창신(柳昌新)은 장가들었고, 유장배는 장가들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닫힌 서궁문을 열어제치니 오랜 암흑이 백일(白日)처럼 밝았도다. 몸은 그윽한 곳에서 닫혔으나 명성은 후세에 밝게 전해지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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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柳舜翼 墓碣銘 - 李景奭 撰。
先君子晩年嘗與一時卿大夫諸公修耆老稧, 公亦與焉。 佳辰令節輒燕集, 或輿或馬, 聯翩往來, 鬚眉皓白, 金玉交輝, 道路觀者艶歎若地仙焉。 余以子弟侍酒所, 得陪歡數矣。 公歿而墓久無刻。 公之胤重烱, 以余曾叨太史, 且有世好, 請余銘, 余惡得辭?
謹按狀, 公之系曰晉州柳氏, 高麗左右衛上將軍挺之後也。 高祖諱世琛, 以大司諫言直, 燕山罪之。 中廟擢長御史, 尋爲觀察使卒。 夫人兪氏死以下從, 命旌其閭。 曾祖諱弘慶, 尙瑞院副直長、贈左通禮; 祖諱惟一, 掌隷院司評、贈吏曹判書: 考諱思規, 掌隷院判決事、贈議政府左贊成。 妣李氏, 贈貞敬夫人, 縣令諱淑之女。 以嘉靖己未十一月三十日生公, 諱舜翼, 字勵仲。
中壬午司馬。 甲午, 拜金吾郞。 丙申, 授禁火別提。 丁酉冬, 皇朝邢軍門東出, 開府備倭也, 設都監久, 公用郞廳勞轉爲內贍主簿。 無何, 出監果川縣。 己亥擢第。 庚子, 投紱歸。 辛丑, 拜禮曹佐郞, 遭內艱。 癸卯, 外除, 除兵曹佐郞。 乙巳, 轉正郞, 奉災傷敬差之命, 之嶺南左道。 旣還, 授咸鏡都事, 陳情得免, 以親老也。 丙午, 乞郡爲沔川倅。 丁未, 丁贊成公憂。 己酉制除, 拜司僕僉正。 已而出大同察訪, 居一年而罷。 壬子, 拜司䆃正, 頃之出順天府使。 甲寅, 用有勞就加通政階。 丙辰, 官滿歸, 拜判決事, 以未解由遞。 丁巳, 又爲判決事, 改工曹參議。 出按海西, 秩滿爲僉知。 旣遷同副承旨, 未幾解遞。 又由判決事, 入銀臺爲右副。 時廢母之論將發, 卽露章遞免。 歷工、禮曹參議, 禮曹有避, 改工曹, 尋遷兵曹參知。 出按關東, 進秩嘉善, 以海西時有勞也。 庚申辭歸。 辛酉秋, 梁監軍將駕海出, 公以問安使往留于西邑。 公以久無聲息聞, 許歸。 壬戌春, 復往龍川, 禮監軍而還。 是年夏, 直分兵曹, 蓋光海幽大妃于西宮, 以公爲分曹參判也。 當是時, 靖社諸公已定匡復之計, 乃與公相約, 使之仍直西宮, 以緩禁衛。
癸亥, 擧義, 乃夜闢宮門以迎之。 反正初, 拜兵曹參判, 後遞授工曹參判。 求外爲光州牧使, 備局以不宜遠出白, 授楊州牧使。 及策勳, 或言“公不與弘濟院之會, 不可錄”, 議者以爲: “當廢論之張, 見主論者, 懼之以危言, 及擧義, 多所周旋, 不錄不可。” 蓋公於李爾瞻爲外族, 嘗面詆兇論曰“異日隣敵致詰, 中朝聲罪, 則誰執厥咎”云, 所謂懼之以危言者指此也。 議未之定, 白諸上, 上特命錄勳。 公拜疏
辭, 答曰: “忘身入直之忠, 豈下於諸功臣乎?” 於是賜靖社三等功臣號, 加嘉善階, 封菁川君。 反正後, 昏朝時資級, 盡行釐正, 故公亦降資, 至是陞嘉善。 甲子正月, 解楊州紱歸。 尋有賊适反報, 朝廷初欲守京城, 以公爲贊畫使。 賊兵旣迫, 車駕幸公州, 扈到振威, 爲檢察使, 前往飭供頓, 途中兼副摠管。 賊平回鑾, 用扈從勞加嘉義階, 拜工曹參判, 改戶曹參判。 久之, 以事罷。 乙丑春, 拜刑曹參判, 以謝恩副使將如京, 朝廷老之, 免。 冬, 出春川府使。 丁卯正月, 金兵深入, 體相建請以春川爲防禦使, 用武弁。 公遂遞, 奔覲行宮於江都, 還都兼
摠管。 己巳春, 除長興府使, 言路論其衰。 上不聽, 連啓乃遞。 夏, 拜漢城右尹, 轉左尹。 庚午秋罷。 冬, 敍復勳封。 辛未, 提調禁火司。 壬申, 同知義禁府事, 又拜工曹參判。 是年十一月二十一日, 疾卒于第, 壽七十四。
賜弔祭禮,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 越翌年正月, 葬于衿川治西巳省里先壟之側, 官庀襄事, 禮也。 貞夫人安東權氏, 贈貞敬夫人, 主簿諱澍之女。 與公同年生, 後公六歲卒, 丁丑閏四月十二日也, 壽七十九。 用術人言, 乃以卒之年十二月, 始克合葬于公墓。
公身不踰中人, 而膽有大於身。 志氣勁確, 勇於趨義, 見世之亂, 慨然有興復之志。 公以忘私, 信以結友, 卒能密贊大業, 功存社稷, 若公者, 亦可謂智矣。
無子, 育族弟判官柳景朋子, 於三歲前子之, 卽重烱也。 中樞經歷, 屢經邑宰。 娶縣監權景中女, 生五男: 長元, 長茂, 長新, 長昌, 長培。 長元男三女一: 男長胤和, 餘皆幼。 長茂男三女一, 皆幼。 長新男二, 幼。 長昌新娶, 長培未娶。 銘曰:
啓宮之錮兮, 白日乎長夜。 身閑於幽兮, 名昭垂於後也。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