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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신재 박의장 시호 교지(1784년·시호 '武毅’·위쪽)와 농암 이현보의 시호 교지(1557년·시호 '孝節’). 당사자의 벼슬과 시호, 시호의 의미 등이 적혀 있으나, 시대가 달라서인지 교지의 규격이나 내용 구성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 |
| '충무공 이순신’이라 할 때 충무(忠武)가 시호(諡號)다. 이 시호는 왕이나 사대부 등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기려 나라가 결정해 내리는 호를 말한다.
왕조 시대의 문화인 시호제도는 주요 인물의 평생 동안 공적이나 학덕을 엄정하게 평가한 뒤 두 글자로 요약, 죽은 사람의 선과 악을 나타내어 후세 사람들이 경계의 대상으로 삼도록 한 것이다. 시호는 좋은 의미의 시호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간혹 그 대상인물의 삶이 악할 경우 나쁜 의미의 시호가 내려지기도 했다. 죽은 이의 벼슬 직위가 시호를 받을 만한 위치라면, 그 후손이 시호를 청하는 것이 불문율이던 시대의 산물이었던 것 같다.
시호의 기원은 중국에 두고 있으나 그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시법(諡法: 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는 방법)이 이뤄진 것은 주나라 때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법흥왕이 즉위한 뒤(514년)에 죽은 부왕에게 '지증(智證)’을 증시(證諡)했다는 기록이 그 효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호제도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현재 드러난 사료로는 조선시대에 와서 정비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시호는 조선초기까지는 왕과 왕비, 왕의 종친, 실직(實職) 정2품 이상의 문무관과 공신에게만 주어졌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대상이 점차 완화·확대되었다. 나중에는 문란해져 시호를 돈을 받고 거래하는 대상이 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향촌의 유림에서 정하는 사시(私諡)도 생겨났다. 사시라고 해서 모두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 박의장·이원정 증시(贈諡)사례
시호맞이 행사 '향중의 큰 잔치’
부조만도 초가집 5채 금액 답지
영덕 출신 청신재(淸愼齋) 박의장(1555~1615))과 칠곡 출신 귀암(歸巖) 이원정(1622~80)의 증시 과정을 통해 시호가 어떤 절차를 거쳐 내려지는지 살펴본다. 청신재의 시호(1784년)는 '무의(武毅)’고, 귀암의 시호(1871년)는 '문익(文翼)’이다.
△시장(諡狀) 작성
시장(諡狀)을 작성하는 자격은 당상관 이상의 문망(文望) 있는 인물로 규정돼 있다. 박의장 시장 작성자는 문과 급제 후 사간원과 사헌부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친 황경원(1709~87)이며, 그도 시호(文景)를 받은 인물이다. 그가 임란 중에 세운 전공을 상세히 밝힌 다음, 전란 후 효를 다한 사실을 부기해 충효를 강조한 박의장 시장의 일부다.
'… 공이 경주부에서 지내면서 판관으로 재임한 기간이 2년, 부윤으로 재임한 기간이 7년이었는데, 사방으로 널려 있는 왜적들의 보루 한가운데서 버티면서 크고 작은 전투를 50여 차례나 치렀지만, 조금이나마 병세(兵勢)를 꺾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사변에 대응하고 송사를 판결하는 데서도 마땅한 결과를 내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앞서 말한 문무의 재주를 겸전한 인재라는 칭송이 이러한 점에 이르고 보면 더욱 미덥게 된다. …삼가 역임한 벼슬과 행적 및 사업을 갖추어 적어서 태상시(봉상시)에 이 시장을 올린다.’
△시호 확정
봉상시는 시장을 검토해 시호로 정해질 세 가지 예비 명칭을 준비한 시호망기(諡號望記)를 마련한다. 삼망(三望)의 시호망기는 관련 관청의 심사 검토를 거쳐 최종 확정된 뒤, 이조에 시장과 함께 넘겨진다. 이조는 시호망단자(諡號望單子)를 작성해 국왕에게 보고, 재가를 받는다.
귀암의 경우의 국왕에게 올린 이 시호망단자가 남아있어 세 가지 예비 명칭(文翼, 孝文, 孝翼) 중 첫 번째 명칭이 낙점된 것을 알 수 있다. 시호망단자를 보면 명칭별로, 명칭 아래 그 의미를 풀이한 문구가 적혀 있다. 통상 첫번째가 낙점된다.
국왕의 낙점 후 사헌부가 여러 관원들의 합의로 적격하다고 판정을 하는 서경(書經) 절차를 거쳐 시호가 최종적으로 확정된다. 귀암의 경우 이 시호서경 문서도 남아있다. 여기에 보면 시호와 날짜가 기록돼 있고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 등이 직함 부분에 성을 표기하고 수결을 하고 있다.
모든 절차가 완료되면 시호를 내린다는 교지를 만들어 전달하게 된다.
△선시(宣諡)·연시(延諡) 행사
시호 결정 절차가 마무리되면 시호 교지를 전달하는 선시(宣諡) 행사가 진행된다.
박의장의 경우, 시호 '무의(武毅)’가 결정되자 이조에서는 이조정랑 조윤대(1784~1813)를 사시관(賜諡官)으로 파견해 시호를 내리는 선시 행사를 주관토록 했다. 1784년 봄에 시호가 확정되었고, 10월에 시호를 맞는 연시(延諡) 행사 준비가 완료되자 조정으로부터 사시관이 파견되었다. 조윤대는 선시례를 행하기 위해 무의공 종가로 향하는 길에, 영해와 가까운 영양군 석보 인근에 유숙하면서 날씨로 인해 일정이 지체되게 된 사정과 양해를 구하는 사연을 적어 종가에 보낸다. 그 서한이 지금도 전한다.
무의공 종가에서는 시호를 맞이하는 연시 행사가 진행된다. '무의공연시시일기(武毅公延諡時日記)’에 1784년 10월22일부터 25일까지의 그 내용이 기록돼 있다. 연시행사 참가자들이 속속 도착하는 상황과 집사관(執事官)의 선임, 연시례와 관련한 문답 등이 담겨져 있고, 24일의 일기에는 사시관 도착이 지연됨에 따라 행사 참석을 위해 미리 도착한 빈객에 대한 대접의 어려움이 기술돼 있다.
25일에는 조윤대를 비롯해 영양현감 김명진, 영덕현령 윤기동, 영일현감 이양선이 선시단으로 참가하고, 무의공 종손을 비롯한 문중 인사와 영해향중 유림도 행사에 참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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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암 이원정의 시호망기(諡號望記). 시호 예비명칭 세 개를 정해 왕에게 올린 문서로, 국왕이 '文翼’을 지명했음이 표시돼 있다. | | |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진행된 선시례는 종손이 박의장의 신위를 받들고 사당에서 나오는 것에서 시작돼, 영해부사가 시함(諡函)을 안치한 다음 시호 교지를 읽고 무안박씨가 자손들이 네 번 절한 뒤 시호교지를 받들어 신위 앞에 펼쳐놓으면서 마무리되었다.
△연시 행사 비용
시호 맞이 행사에는 막대한 경비가 소요됐던 모양이다. 비용은 가내의 재력으로 충당하는 것이 당연하나, 행사 자체가 향중의 큰 잔치였으므로 재력 있는 인근 사족으로부터의 부조도 답지하기 마련이었다.
무의공 시호 맞이 행사의 부조 상황을 기록한 '연시시부조기’는 타관과 본가(영해)로 구분해 부조상황을 작성하고 있다. 경주, 양동, 안동, 영양, 진보, 영천, 평해, 울진 등지의 유력가문과 서원에서 모두 94냥 8전의 부조가 답지했다. 그리고 영해 관내의 부조액 97냥, 영해와 순흥 일대 무안박씨 종중의 부조액 161냥 6전 등 총 부조액은 373냥이었다. 현물 부조를 합치면 더 많을 것이다. 전체 부조 수령액의 대부분은 행사를 위해 서울을 왕래하며 소요한 경비, 접빈객에 필요한 각종 물품 구입비 등으로 지출됐다. 당시 서울의 후원이 딸린 방 3칸짜리 초가집이 70냥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연시행사 비용이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김봉규기자
■ 시호와 불천위
한번 내려진 시호는 영원…불천위 오를 자격 갖추는 셈
시호는 불천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 인물이 죽은 후 그 학행이나 공적이 기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면, 조정에서는 임금의 명으로 시호(諡號)를 내리게 된다. 사대부로 살아서 최고 명예는 대제학 벼슬이고, 죽어서는 시호를 받는 일이었다. 시호가 내려진 인물은 말하자면 영원히 추모를 받을 권리, 즉 불천위에 오를 자격이 갖추어지는 셈이다. 불천위에 오르면 제사 때는 나라에서 제관과 제물을 보내고, 그 후손에게 은일(隱逸)로 벼슬을 제수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신주가 영구히 사당에 모셔지고, 그 인물은 통상 중시조(中始祖)가 되어 하나의 종가를 이루게 된다.
시호를 받았다고 모두 불천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죽은 자의 직위가 시호를 받을 만한 위치라면 후손은 시호를 청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시호가 일단 내리면, 좋지 않은 시호가 내려진 경우에도 다시 시호를 청하거나 개시(改諡)를 청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었다.
시호는 실질적인 수혜가 후손에게 미치기도 하기 때문에 조선의 사대부 가문으로서는 가장 큰 명예였다. 그리고 종가라고 할 때 엄밀하게는 불천위 조상이 있어야 종가이고, 그 후손이라야 종손이라 불렀다.
■ 시호 결정 절차
임금의 낙점 후 사헌부·사간원의 적격판정 거쳐 최종확정
왕이나 왕비가 죽은 뒤 시호를 내릴 때는 시호도감을 설치하고 담당자를 임명, 시호를 내리는 증시(贈諡) 절차를 엄숙하게 진행하도록 했다.
국왕이 아닌 일반인은 봉상시(奉常寺)에서 주관했다. 그 절차는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으나, 통상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1.시호를 받을 만한 사람이 죽으면 그 자손이나 인척 등 관계 있는 사람이 행장(行狀)을 작성해 예조에 제출한다. 2.예조에서는 그 행장을 검토한 뒤 봉상시에 보낸다. 봉상시는 행장에 근거하여 행적을 다시 조회하고 시법에 따라 시장(諡狀)을 작성하며, 시호로 내려야 할 문자 세 가지(三望)를 정한다. 3.홍문관은 봉상시와 이 삼망을 의논하는 의시(議諡) 과정을 거쳐 확정하며, 의정부의 담당자가 이에 적격하다는 판정인 서경(書經)을 한다. 이를 시장과 함께 이조에 넘긴다. 4.이조에서는 시호망단자(諡號望單子)를 작성해 국왕에게 제출해 수점(受點:낙점)을 받는다. 이때 시호망단자는 삼망이 일반적이나, 단망일 경우도 있다. 5.국왕의 낙점 후 사헌부·사간원의 서경을 거쳐 시호가 확정된다. 시호서경에는 후보로 올랐던 시호는 제외되고 확정된 시호만을 올린다. 확정된 시호는 왕의 교지로 증시된다.
■ 시호에 사용하는 글자
시호에 사용하는 글자 수는 정해져 있었는데, 그 수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주례(周禮)의 시법에는 28자에 불과했고, 사기(史記)의 시법에는 194자였다. 1438년(세종 20년) 봉상시에서 사용하던 글자도 194자로 한정돼 있으나, 후에 세종의 명으로 집현전에서 여러 문헌을 참고, 107자를 추가해 모두 301자로 늘어났다.
그러나 실제로 자주 사용된 글자는 文, 貞, 恭, 襄, 孝, 忠. 安, 景, 翼, 武, 敬, 純 등 120자 정도였다. 그리고 각 글자의 의미는 여러가지로 풀이된다. 예를 들면 문(文)은 '온 천하를 경륜하여 다스린다(經天緯地)’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한다(勤學好問)’ '널리 듣고 많이 본다(博聞多見)’ 등 15가지로 사용됐다. 따라서 시호법에 나오는 시호의 의미는 수천 가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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