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과 석회와 나무가 빚은 비경
한밭대학교 김 명 녕
집 떠나면 고생인 줄 뻔히 알면서 여행길에 오를 때마다 가슴이 설레고 가족을 비롯하여 절친한 사람과 함께 떠나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이번 4박 5일의 중국 황룡-구채(黃龍-九寨)여행은 중학교 동기동창 부부에다 여섯 살바기 친손녀와 친구의 외손녀를 보태 14명이 떠난다. 10월 22일 오전 9시 55분에 인천공항을 이륙하는 145인승 대한항공비행기로 165분 동안 날아가서 장안이라 부르던 역사적 도시인 시안(西安)에서 내린다. 오후에 진시황과 관련된 아방궁 세트장, 대자은사에 있는 당대(唐代)의 대안탑(大雁塔) 및 대규모의 섬서성 역사박물관을 둘러보고 이화궁대주점(頤和宮大酒店- Yihe Palace Hotel)에서 첫날밤을 묵는다.
23일 오전 8시 10분에 시안공항을 이륙하는 중국동방항공 소형비행기를 타고 황룡-구채공항으로 떠난다. 1시간쯤 뒤, 착륙하려고 고도를 낮추는 비행기의 창밖으로 구름을 뚫고 불쑥 솟아오른 눈 쌓인 바위산들의 황홀지경이 펼쳐진다. 9시 20분에 해발 3,500미터의 공항에 착륙한다. 해발 3,454미터인 스위스의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역과 해발 3,571미터인 바로 위의 스핑크스(Sphinx)전망대와 엇비슷하게 높은 지역에 있는 공항이다. 7년 전에 ‘유럽의 지붕’이라는 융프라우요흐에 올라갈 때는 사람에 따라 고산증세로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는 가이드의 말에 잔뜩 긴장하였는데 이번에는 무덤덤하다.
공항에서 현지 가이드를 만나 버스를 타고 황룡으로 가다가 천주사(川主寺)마을에 들러 장강공예(藏姜工藝)전시관에서 장족(藏族)과 강족(姜族)의 희귀 보석류인 천주석(天珠石)공예품을 구경하고, 가까운 식당에서 한식(韓食)으로 점심을 먹는다. 해발 3,200미터라 기압이 낮아 80℃에서 물이 끓으므로 쌀밥은 메져서1) 입에 맞지 않지만 아삭아삭한 고산(高山)상추가 입맛을 돋운다. 다시 버스로 이동하면서 가이드가 “오늘은 황룡풍경구를, 내일은 구채구를 관광합니다. 황룡지역은 해발 4,000미터가 넘는 고산이라 대소변이 자주 마렵고,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리고, 토악질이 나고, 식욕이 떨어지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증세로 괴로울 수 있습니다. 예방약과 산소통을 준비하였으니 필요한 분만 쓰되 예방약 2병은 지금 마시고, 산소통은 가지고 다니다가 고통스러울 때 사용할 것을 권합니다. 예방약과 산소통은 각각 미화(美貨) 10달러입니다. 황룡에서는 될수록 느릿느릿 걷고, 잠깐잠깐 쉬고, 말을 적게 하고, 담배를 절대 피우지 말고, 물을 자주 마시기 바랍니다. 물은 무료로 드리니 1통씩 가져가기 바랍니다.”하고 말한다. 이번 중국여행은 버스에서든, 비행기에서든, 호텔에서든, 물 인심이 넉넉해서 좋다.
점심식사 후 버스로 험준한 산길 40㎞를 80분 동안 달려서 오후 1시 25분에 해발 3,050미터에 있는 황룡케이블카센터에 도착한다. 걸으면 두세 시간 동안에 황룡고사(黃龍古寺) 근처까지 올라갈 500미터 높이를 2006년에 설치된 케이블카를 타면 5분 만에 올라간다. 예방약은 버스에 탄 손님 25명이 모두 마셨으나 산소통은 몇 사람만 챙긴 채 버스에서 내려 케이블카를 탄다. 늦가을과 초겨울이 섞인 풍경을 지나 해발 3,550미터의 케이블카 위쪽 역에 닿는다. 역에서 내리니까 나무가 빼곡한 망룡평(望龍坪)에 닦은 관광길이 열린다. 황룡지역은 쓰촨성 송판현에 있는 민산(岷山)산맥의 주봉인 설보정(雪寶頂) 아래에 펼쳐진다. 설보정의 주봉은 1년 내내 눈이 덮여 있고, 많은 관광손님이 둘러보는 골짜기는 길이 약 7.5㎞, 폭 300미터, 평균 해발 3,550미터인 석회협곡으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한 마리의 황룡이 산림에 누워있는 것처럼 보인다. 못과 개울의 바닥은 모두 석회침전물이고, 종유석동굴이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생김새와 빛깔이 독특한 카르스트(karst)풍경을 이룬다. 황룡은 ‘채지(彩池), 설산(雪山), 협곡, 삼림’의 ‘4대 절경’으로 이름을 떨친다. 우리나라에서는 ‘황룡의 오채지’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못은 중국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황룡관광지역은 1992년에 세계자연유산목록에 올랐고, 2000년에 세계생물권보호구, 녹색환경지구21에 선정되었다.
고산반응은 사람마다 크게 다르게 나타나므로 4시간 후인 오후 5시 40분에 버스터미널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뿔뿔이 흩어진다. 구름이 산에 걸쳐서 공기가 희뿌옇다. 자연도 깨끗이 보호하고 사람들에게 일거리도 제공하는 정부정책에 따라 길에서 비로 쓰레기를 쓸거나 집게로 줍는 사람이 많고 쓰레기통이 즐비하다. 800미터 간격마다 산소공급소가 있는데, 산소는 무료지만 마스크이용료가 1위안이다. 무료로 이용하는 화장실도 여러 군데 마련되어 있어서 편리하다.
높낮이가 거의 없는 산허리 길을 많은 관광손님과 더불어 걸어간다. 대부분은 즐거운 마음으로 걷지만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걷는 사람, 의자에 앉아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및 산소공급소에 들어앉은 사람이 심심찮게 보인다. 손녀가 고산을 아랑곳하지 않고 앞장서서 걸어가니 천만다행이다. 울창한 숲을 2㎞쯤 지나가니까 물소리가 들리더니 누런 비탈에 맑은 물이 흐른다. 황룡의 백미(百媚)인 오채지(五彩池)로 가는 오르막부터 손녀가 칭얼거리기 시작한다. 오르막에서 땀을 흘리면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라 초가을 옷차림새로 나서서 산바람을 차갑게 느끼던 판이라 등에 업고 달리다시피 오르며 추위를 쫓아버린다.
유명한 황룡고사를 지나면서 얄궂게 구름이 갑자기 짙게 끼더니 설산은 물론 눈앞의 절경마저 가린다. 오채지 둘레의 위쪽에는 구름에 밴 는개2)가 물꽃을 흩날리며 떠다니는 가운데 물이 바위와 수목을 뚫고 흐르고, 아래쪽에는 오색영롱한 물빛의 무릉도원이 펼쳐진다. 못에 고여 있는 물마다 노랑, 초록, 파랑, 자주 등등 제각각 찬란하다. 화산 폭발 이후 생겨난 석회성분 중에서 칼슘이 지표면에 많이 깔려 있어서 물이 다양한 빛깔로 보인단다. 다섯 가지 빛깔을 내뿜는 오채지를 한눈에 바라보며 ‘힘들어도 올라오길 참 잘 했다.’고 생각하면서 “신선이 살 법한 높은 곳에 올라 우리평생에 다시 못 볼 아름다운 선경(仙境)에 우리부부와 손녀가 들어왔군요.”하면서 온가족이 기념사진을 찍는다. 손녀와 씨름하면서도 물과 석회와 나무가 빚은 비경에 넋을 잃는다. 해발 5,588미터의 설보정 입구 안내표지가 있는 해발 4,010미터 지점부터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많은 사람 틈에 치이는데다 날씨도 흐리고, 고산증세를 느껴서 만사가 마뜩찮은 손녀의 기분에 따라 ‘업다, 내려놓다’를 되풀이하며 빛깔고운 개울과 못, 물 가운데 선 나무 및 단풍이 어우러진 경치를 감상하며 내려온다. 신선을 맞이하는 접선교(接仙橋), 구름이 머무는 숙운교(宿雲橋), 맑은 거울처럼 거꾸로 보이는 명경도채지(明鏡倒彩池), 화분을 쏙 빼닮은 분경지(盆景池), 금모래가 깔린 금사탄지(金沙灘地), 풍덩 뛰어들어 미역 감고 싶을 만큼 맑은 세신동(洗身洞), 물꽃을 흩뿌리며 물이 뛰어내리는 비폭류휘(飛瀑流輝) 등을 지난다. 작은 그릇만한 크기부터 100평 이상의 무논만한 크기까지 모양이 제각각인 못이 우리나라 산허리에 들어박힌 다랑논처럼 옆으로, 아래위로, 다닥다닥 붙어 있다. 못 둑은 터키의 파묵깔레처럼 수직으로 엷게 쌓였지만 단단하고 아름답다. 못마다 물이 가득하고 물 빛깔이 서로 다르다. 금세 본 물빛이 고와서 다시 보려고 고개를 돌리면 신기롭게도 다른 빛깔로 바뀐다. 산에 나무들이 빼곡하고, 개울은 조잘조잘 지껄이고, 폭포는 게거품을 내뿜으며 떨어진다. 구름이 걸린 고산인데다 낮이 토끼꼬리만큼 짧아져서 약속시간인 5시 40분 이전에 내려왔지만 벌써 땅거미가 드리워진다.
버스에서 일행을 만났으나 피로해서 시르죽은3) 사람과 고산증세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아서 분위기가 엉망이다. 한국에서 준비해간 김, 고추장, 김치 등을 밑반찬 삼아 현지 음식으로 저녁을 먹고, 구채도가촌(九寨度假村- Jiuzhai resort hotel)에서 이튿날 밤을 묵는다. 침대에 전기장판이 깔려 있어서 따듯하다. 내일은 온종일 구채구를 관광하므로 아침에 거뜬하게 일어나도록 푹 자는 것이 보배다.
어린 손녀와 가냘픈 몸매의 아내가 기압이 낮고 산소가 적은 황룡을 아무 탈 없이 관광해서 그저 고맙다. 독특하게 아름다운 자태를 지녔으면서도 수줍음이 많아서 구름을 짙게 두르고 고원에서 끄떡없는 사람에게만 일부 모습을 드러낸 황룡지역은 틀림없이 빼어난 선경(仙境)이다. 우리나라 국립공원도 산세가 아름답고, 골짜기물이 맑고, 울긋불긋한 가을단풍이 매우 고우면서도 다채롭고, 깃들여 사는 동식물의 종과 개체수가 많고, 누구나 편안히 감상할 수 있는 등 황룡과 뚜렷이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새근새근 잠든 손녀의 숨소리를 자장가로 들으며 난생 처음 백두산보다 높은 곳에 있는 호텔에서 단잠을 이루려고 눈을 감는다.
1) 메지다 : 끈기가 적다. 차지지 아니하다. 2) 는개 : 안개보다 좀 굵은 비. 3) 시르죽다 : 맥이 쑥 풀리거나 풀이 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