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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카스트 제도(Caste System)와 불교
인도 불가촉천민들의 저항
1. 카스트 제도의 기원
카스트 제도는 고대 인도의 힌두교(Hinduism) 전신인
브라만교(Brahmanism, 婆羅門敎)에서 사회구조(사람 신분)를
네 개의 계급으로 나눈 체계를 뜻한다.
그 카스트 제도라 하는 세습의 계급제도는 고대로부터
오랜 기간 인도사회를 지배해왔다.
아리아(Arya)족들이 인도 북부로 진출해오면서 원주민인 드라비다(Dravida)족과
문다(Munda)족을 정복해 그들을 차별하고 지배하기 위해 만든 제도였다.
인도 원주민이 세운 인더스 문명은 세계 4대문명 발상지 중의 하나이다.
B.C. 2,500년경에 형성돼, B.C. 1,500년 무렵에 이르기까지,
약 1,000여 년 동안 인더스강 유역의
모헨조다로(Mohenjo-daro)와 하라파(Harappa)를 중심으로
번영한 고대문명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더스 문명이 중앙아시아의 스텝지역(초원지대)에 살고 있던
아리아(Arya)족의 침입으로 종말을 맞게 됐다.
즉, B.C. 1500년경부터 백색계열의 아리아족의 일부가
그들의 지배영역을 남쪽의 인더스강 유역으로까지 확장하면서,
갈색계열의 원주민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럴 즈음에 카스트 제도가 발생했다.
북인도에 침입해온 아리아족은 현재의 유럽인과 같은 백인종 계통이었다.
그들은 원주민(유색인종)을 평정한 다음 지배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바르나(Varna)'나 불리는 신분제도를 만들었다.
‘바르나(Varna)’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색'을 의미한다.
결국 피부 색깔에 의해서 신분의 상하가 구분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카스트 제도인 것이다.
카스트 제도의 기원에 대한 확실한 것은 기원전 1000년경
힌두교 율법전 마누스므리티(Manu-smriti)에
“카스트제도를 사회질서와 규칙성의 기초로 인정하고 정당화한다.”고
명시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카스트 제도가 발생한 동기는 브라만교(Brahmanism)와
함께 들어온 아리아족이 인도를 침략한 후,
이들이 상류층을 장악하기 위해 시설한 제도였다.
즉, 소수의 아리아족(지배계급)은 다수의 원주민(피지배계급)을
분명하게 분리함으로써, 원주민을 지속적으로 그들의
지배하에 두고자 하는 계략이라고 하겠다.
결과적으로. 아리아족의 지배를 받게 된 드라비다족은
하층계급으로 전락해 수드라(Sudra)의 근원이 됐고,
오스트로아시아 계통의 소수민족인 문다족은
불가촉천민(파리아)의 기원으로 간주되고 있다.
※오스트로아시아 계통----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동남아시아어족을 말하는데, 피부색이 약간 검은 편이다.
그런데 ‘카스트’란 인도어가 아니다.
이 말은 16세기에 인도에 온 포르투갈인들이 인도의 특이한
사회제도를 보고 ‘카스타(casta)’라고 부른데서 비롯되고 있다.
카스트(Caste)라는 용어는 혈통을 뜻하는
포르투갈어 카스타(Casta)에서 나온 것으로서,
이것은 피의 순결을 뜻하는 라틴어의 ‘카스투스(castus)’에 소급된다.
그리고 18세기 영국이 인도를 점령했을 때
영국인들에 의해 ‘카스트(Caste)'라는 이름이 일반화됐다.
그러나 인도 사람들은 이것을 피부색깔을 뜻하는
바르나(Varna)라고 부르고 있다.
‘바르나(Varna)’를 한역하면 종성(種姓)이다.
따라서 카스트 제도는 한역하면 사종성(四種姓)이 된다.
원래 카스트 제도라면 브라만(Brahman), 크샤트리야(Kshatriya), 바이샤(Vaisya),
수드라(Sudra)의 4계급으로 이루어진 제도라고 생각돼왔으나,
이것은 사실상 카스트 제도가 아닌 ‘4종성제도(四種姓制度)’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양자는 물론 밀접하게 관련돼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카스트 제도는 인도인들이 말하는 ‘바르나(Varna)’보다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자티(jāti, 출생) 제도에 더 가깝다.
4종성을 가리키는 말인 ‘바르나(varṇa)’는 ‘색(色)’을 뜻한다.
이 말은 본래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침입해 왔을 때,
원주민과의 피부색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말이었다.
그러나 자티(Jati, 출생)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고착화된 가문의 직업과 그 신분을 말한다.
현재 인도에는 약 3000여 개의 자티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티'란 4단계의 카스트에 종속하는 체계로서 계급의 성격도 있지만
특정 직업을 세습하고 있는 가문 정도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
2. 인도의 카스트에서 바르나(Varna)와 자티(Jati)의 구분
인도의 계급제도를 외부인들이 카스트라 하지,
진작 인도인들은 카스트라 하지 않고 ‘바르나(Varna)’라 하거나
자티(Jati)라 한다.
카스트 제도란 바라문, 크샤트리야, 바이샤, 수드라의 4계급과 불가촉천민을 말한다.
이것을 피부색으로 구분할 때 바르나(Varna, 색깔)라 하고 4종성(四種姓)이라 한역한다.
뜻은 색깔, 정확히는 피부의 색깔이라는 뜻이다.
이는 인도의 지금까지 내려오는 인종 구성에서 백인에 가까운 아리아인이 계급이 높고,
피부색이 검은 드라비다계 인종이 계급이 낮았던 과거 역사이자 인종차별 제도로,
현재도 인도는 다인종국가임에도 피부색에 따른 인종차별이 여전히 남아있는 국가이다.
이와 같이 처음에 카스트 제도는 단순히 피부색을 구별하는 제도로 출발을 했다.
이때의 카스트 제도를 힌두어로 ‘바르나(Varna)’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직업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제도로 변질이 되고 말았다.
급기야 카스트 제도는 비록 더럽고 힘든 직업이지만
그것이 세습화되면서, 신분 계층에 따른 차별을 뒷받침하는 제도가 됐다.
즉,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카스트 제도의 네(다섯) 계급 중의
어느 하나에 자동적으로 귀속이 되며, 대대로 자기 집안의 직업을 계승해야 했다.
따라서 카스트 제도는 피부색을 의미하는 ‘바르나(Varna)’와도 관련이 있으나
보다 직업을 구분하는 자티(Jati)에 더 가까운 개념으로 변질됐다.
때문에 오늘날엔 카스트 제도가 자티(Jati)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자티(Jati)’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고착화된 가문의 직업에 따른 신분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가 외부에서 인도의 신분제도를 카스트라 할 때,
그 의미는 현실적으로 자티의 의미에 가깝다.
따라서 카스트 자체는 신분제가 아니며,
한국에서 예전에 무슨 김씨, 무슨 이씨처럼 족보를 따지듯이,
인도 사람들이 각자 속해있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족보와 비슷한 카스트에 저마다 속해 있다.
성명만 봐도 어느 카스트인지 대강 구별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카스트를 분류해서,
상류층에 속한 카스트 족벌과 하류층에 속한 카스트 족벌 등으로
이것을 등급화 시켜놓은 것이 '바르나'이다.
즉, 한국에서는 브라만, 수드라 등을 카스트 계급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인도에서 카스트라 하면 자티를 말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자티'는 각 개개인이 속한 직업군이 족벌화 세습화돼온 족벌사회의 연장선이며,
그 카스트 족벌들을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불가촉천민 등으로
구분해 놓은 것이 바로 '바르나'이다.
그러니까 다른 신분제에 비해 더 무서운 개념인데,
사회적 계급이라면 상하로 이동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있지만,
이건 핏줄(족벌)이자 직업의 구분이고 사회적 관념까지 덧씌워져 있어서
개인의 노력으로 벗어날 길이 없고, 계급 계층 간의 이동이 불가능한 매우 가혹한 제도라 하겠다.
이와 같이 4성제도란 당시의 사회 실정에 순응하면서도 꽤 인위적으로 수립된,
즉 브라만의 입장에서 조성한 할 사회상이었던 것이다.
3. 카스트의 네 계급 - 4종성(四種姓)
4종성(四種姓), 즉 바르나(Varna)는 힌두교 창조신 브라흐마(Brahma)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계급에 따라 태어난 브라흐마의 부위가 다르다.
1) 브라만(Brahman, 婆羅門) ; 사제, 성직자, (브라만 교리를 가르치는)교사,
지식인들로 구성됨.---브라흐마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한다.
브라만 계급이 출현하게 되자, 브라만들은 점차로 자신들의 지위를 최상위에 두는
4종성제도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브라흐마나> 문헌에 따르면
“브라만의 혈통을 보유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며, 명예를 존중하고 남을 교화한다.”고
스스로에게 의무를 부과했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브라만을 존경하고,
보시하며, 또 반항하지 않는다.”는 의무를 강요했다.
2) 크샤트리야(Kshatriya) ; 왕족, 귀족, 관리, 군 지휘관들로 구성됨.---
브라흐마의 옆구리에서 나왔다고 한다.
붓다께서 옆구리에서 태어나셨다고 전해지는 이유도
고타마 싯다르타가 왕족이었기 때문이다. 정치⋅군사상의 지도자 계층은
크샤트리야라고 불리게 됐다. 이 말은 크샤트라(권력)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브라만의 경우 성직자 신분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할 수 없어
크샤트리아가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브라만과 크샤트리야는 서로 의존해가면서, 지배계급을 형성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크샤트리야 출신의 브라만도 있었으며, 또 형제가 각각 왕과 사제를 분담하는 예도 있었다.
3) 바이샤(Vaisya) ; 브라만들은 아리아를 세분해 세 등급 - 브라만, 크샤트리야, 바이샤로 나누었다.
따라서 초기에는 바이샤가 아리아들이었다. 바이샤는 주로 상인이나, 자영농, 유목민,
기술자, 하급무사, 지주 토지의 관리인들이 여기에 속했다.---
브라흐마의 허벅지에서 나왔다고 한다.
바이샤는 ‘남에게 공물을 바치고, 납세의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신분이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오히려 상류층이었다.
인도의 인구 대부분이 수드라인 상황에서 바이샤는
그래도 괜찮은 편인 낮은 지도자급에 속했다.
4)수드라(Sudra) ; 일반 백성, 천민, 노예들로 구성됨.---
브라흐마의 발가락 사이에서 나왔다고 한다.
수드라는 파리아(Paraiyar)를 제외한 마지막 계급으로
평민 혹은 노예에 속하는 계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수드라는 주로 육체적인 일을 담당하고, 농사 같은 일이나,
공사 및 잡다한 일들을 담당했던 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바이샤와 함께 납세의 의무가 부과돼있었다. 양자의 차이는 명확하지 않으며
다 같이 농업과 수공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수드라는 바이샤에 고용되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파리아(Paraiyar)---찬달라(Caṇdāla)
한역해서 전다라(旃陀羅)라고 여자는 전타리(旃陀利)라 했다.
카스트(四種姓)에도 포함되지 못하며,
노예보다 더 천한 마하르 카스트(Mahar caste)라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다.
파리아(Paraiyar)에 대해선 숫제 태어남에 대한 설명조차 없다.
파리아(Paraiyar)들은 카스트 아래 계층으로서,
사회악으로 취급돼 다른 계층들로부터 경멸을 당한다.
보통 힘들고 천한 일을 하는데, 가죽을 다루는 일,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는 빨래꾼을 비롯해서, 청소부, 이발사, 가축도살자,
시체를 다루는 일, 구식 화장실의 변을 정리하는 일 등의
가장 힘들고 궂은일을 담당하며, 이들은 여러 면에서 엄격한 차별대우를 받는다.
파리아는 다른 일반 인도인과는 다르게 모든 종류의 고기를 먹는 것이 허용되는데,
파리아는 이제 더 이상 타락할 수 없을 때까지 타락했고
더러울 수 없을 때까지 더러워진 저주받은 천민이라는 인식이
인도인들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우물조차 격리돼 있는데, 파리아 전용 우물은
동물의 뼈로 그 주위를 둘러쌓아 표시한다.
만약 파리아가 다른 카스트와 신체적 접촉이 발생될 경우
큰 죄로 다스리게 되고 심지어 이 사유로 죽을 수도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M. 베버(Weber)가 사용한 사회학 용어로
천민자본주의(賤民資本主義, Paria kapitalismus, pariah capitalism)란 말이 있다.
이 말이 바로 인도 불가촉천민 파리아(Paraiyar)에서 따온 말이다.
4. 카스트 제도의 특징
1) 업(業)과 윤회설(輪回說)
이러한 카스트는 흰두교의
카르마(karma-業報)와 다르마(dharma-여기서는 義務라는 뜻)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고대 브라만교에서는 ‘윤회설(輪回說)’을 시설해 이를 근거로
엄격한 계급사회를 정당화해서 사람들에게 이를 숙명으로 여기게 했다.
“네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기에 현생에 천민으로 태어났다.
현생에 잘해야 내생에는 귀족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설명의 근거가 윤회였다.
2) 결혼 문제 - 족내혼
힌두교도는 원칙적으로 동일하거나 동등한 카스트의 집안끼리만 결혼을 한다.
단, 같은 카스트 안에서도 너무 가까운 친족인 경우에는 결혼이 금기로 돼있다.
그리고 남성이 한 두 계급 아래의 여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드물게 일어나지만,
그 반대로 고위의 여성과 신분이 비천한 남성의 혼인은 철저하게 금기시돼있다.
이런 풍습은 시골이 더 심한데, 이런 질서를 어길 경우, 심지어 살해까지 한다.
이런 살인을 ‘명예살인’이라 한다. 자기네 카스트의 피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행한 명예로운 살인이라는 것이다.
3) 식사의 문제
힌두교도는 보통 다른 카스트와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다.
이 규제는 단순히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물건을 주고받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상위 카스트는 하위 카스트로부터
음식물이나 음료를 받지 않는다. 만일 그가 음료를 받는다면
하위 카스트의 더러움이 상위 카스트로 전염된다고 생각해 왔다.
특이한 점은 인도의 요리사 중에서는 유독 브라만 계급이 많은 편인데,
그 이유는 낮은 계급이 한 요리를 높은 계급이 먹게 되면 부정을 탄다는 믿음이 있어서다.
하지만 높은 카스트가 만든 음식은 같은 계급이나 그 아래 계급 누구에게나 줄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힌두 교인이 운영하는 식당(외국인도 출입할 수 있는)의 경우,
주방장은 거의 다 브라만 출신이다.
왜냐하면 위생과 정결함을 교리로 못박아놓을 만큼 중시하는 힌두교에서
어떤 음식은 깨끗하고 어떤 음식은 불결한지를 판단하는 것이
바이샤나 수드라 같은 천한 카스트가 할 수 없고,
이들이 만든 음식 역시 부정을 탄다고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4) 지역적인 차이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는 사물과
그 부정함의 정도에는 지방에 따라 어느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를테면 대다수의 브라만은 육식을 하지 않는 채식주의자이지만
벵골 지방의 브라만에게는 생선을 먹는 행위가 허용되고,
추운 북부 캐시미르 지방에 거주하는 브라만은 고기를 먹는다.
그리고 결혼 문제를 비롯해 카스트의 규제는 시골이 더 심하다.
도시의 경우 서서히 변하고 있다. 하위 계층이지만
대학교육을 마친 지식인이나 전문직 종사자들은 상당한 고위직에까지 진출하고 있다.
5) 카스트 계급의 구성비율
최근 인도의 카스트 계급의 구성비율을 살펴보면,
브라만 4%, 크샤트리아 7%, 바이샤 12%, 그리고 수드라 77%(불가촉천민 20% 포함)라고 한다.
이것은 카스트 제도가 사회구조(사람 신분)를 네(다섯) 계급으로 나누고 있으나,
실제로는 두 개의 계층, 즉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으로 나누어져서,
소수(23%)의 지배계층이 다수(77%)의 피지배계층의 위에 군림을 한다는 것이
실체적 진실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실은 두터운 중산층을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실로 놀랄만한 일이라 하겠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러한 카스트 제도로 인한 직업차별은
아이러니하게도 경영학에서 말하는 분업화, 전문화(specialization)를 가능케 해서,
인도 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에 기여를 하고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피지배계층, 곧 빈곤층은 대를 이어 자유와 평등이 없는
노예로서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악법이 얼마나
무서운 괴물이 될 수 있는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6) 카스트 제도에서의 정(淨)⋅부정(不淨)의 관념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정⋅부정의 관념에 의한 불가촉성은
어느 사회에나 일부 존재하지만 인도에서는 이러한 정⋅부정의 관념이 상당히 고착화돼있다.
그것은 힌두교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관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스트라 불리는 인도의 계급제도에 있어서
그 근거에 깔린 기본적인 특징은 정⋅부정의 관념에 의존하고 있어서,
그 정⋅부정의 정도에 따라서 카스트의 상하순위가 결정되는 것이다.
부정하다고 생각되는 사물이나 행위는 다음과 같다.
우선 사람의 배설물은 부정하다.
이것은 물리적인 의미이기도 하지만 관념적으로도 부정함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땀이나 오물이 묻은 의류의 세탁, 이발, 해산 뒷바라지,
분뇨수거 등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배설물을 몸으로 받는다고 해서 부정한 것으로 간주된다.
사냥이나 어로에 종사하는 사람, 가축을 잡아서 식용으로 판매하는
백정 등도 부정하다고 생각된다.
죽음도 부정하며 따라서 시체의 처리를 맡은 사람도 부정하다.
지금도 힌두교도는 남의 집에 문상을 다녀오면,
가족들로 하여금 문에 성수를 뿌리게 해 그 부정함을 씻는 풍습이 있다.
4계급의 카스트는 존귀한 자와 비천한 자라는 고저(高低)의 서열을 나타내고 있어서
더 높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은 더 낮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의 곁에만 가도
더럽혀진다고 볼 정도다. 낮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은 부정시(不淨視)된다.
그래서 불가촉천민이란 말이 생긴 것이다. 부정해서 접촉해선 안 되는 천민이라는 것이다.
5. 카스트 제도의 폐해
이러한 카스트 제도가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많은 폐해를 낳아왔다.
현재 법적으로 카스트 제도는 폐지된 상태지만, 여전히 인도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딸과 결혼한 천민 사위를 청부살인한 잔혹한 인도 아버지>
이런 제하의 중앙일보 기사(2019년 8월 21일자)는
카스트 제도의 병폐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인도 남부 텔랑가나(Telangana)주에서,
불가촉천민인 프라나이(Pranay;23세)라는 남성이
바이샤인 암루타(Amrutha;21세)라는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
프라나이는 임신 5개월 된 아내인 암루타의 면전에서 살해를 당했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이들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던 암루타의 아버지가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해서 사위인 프라나이를 죽였으며,
또한 살인을 청부한 암루타의 아버지는 불과 8개월 만에 보석으로 석방이 됐다는 것이다.
현재에도 인도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소위 명예살인
(집안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이유로 가족구성원이나 타인을 죽이는 악습)이라는
명분으로 종종 발생하고 있으며, 이러한 명예살인은 법적으로도 어느 정도 용인되고 있다.
• 또 다른 사건----
인도에서 ‘명예살인’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된 가운데
이번에는 부모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제한 딸과 딸의 남자친구를 살해한 뒤
본보기로 동네 주민들에게 전시한 사건이 벌어져 파문을 일으켰다.
2010년 6월 21일 인도 일간 <타임스 오브 인디아> 보도에 따르면
전날 북부 찬디가르의 비와니에서
18세의 모니카와 그녀의 남자친구 린쿠(19)가 살해된 채 발견됐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난 2년간 교제해왔다.
그러나 이를 반대해온 모니카의 가족들이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두 커플을 살해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사건 담당 수사관은 “부검 결과를 기다리고 있지만 정황상 명예살인이 분명하다.
모니카의 아버지와 오빠, 삼촌과 사촌 등 살인해 개입한 사람들이 잠적했다.”고 말했다.
특히 가족들은 집안의 명예를 떨어뜨린 모니카와 린쿠의 시신을
동네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집안에 매달아 놓기까지 했다고 수사관은 전했다.
최근까지도 인도에서는 이런 사건과 유사한 명예살인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끔찍한 카스트 제도가 무려 3,500여 년이나 지속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사 이래로 하나의 제도가 큰 진화도 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오래토록 유지되고 있는 끈질긴 생명력이 참으로 경이롭기까지 한다.
6. 카스트를 없애려는 인도 정부의 노력
카스트의 폐해는 식민지 시절 영국정부에 의해 규제되기 시작했다.
‘카스트’라는 용어가 널리 알려진 것도 이 시기이다.
그리고 1947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인도는
이러한 신분차별의 악습을 근절하기 위해서,
제헌 헌법에 카스트 제도를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이러한 차별을 바꾸려고
불가촉천민 계층에게 일정한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일종의 ‘역차별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후 역대 인도 정부도 여전히 카스트로 인한 사회적 차별이 뿌리 깊게 남아
각종 사회적 문제의 한 근원이 되고 있음을 잘 알고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카스트 제도를 폐지한 적은 없다.
왜냐하면, 카스트 제도는 실제로 법제화 내지 제도화가 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즉, 카스트 제도라는 말을 사용함에 있어서,
이것이 일종의 법률/규정인 양 오인이 되고 있는데,
실제로 카스트 제도는 단지 힌두교의 교리일 뿐이다.
카스트는 종교적 관습이 체계적으로 고착화된 것으로 전근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성문화된 적이 없다. 법전에 써진 적조차 없었다.
따라서 인도정부는 오랫동안 카스트 제도의 폐해를 없애려고 노력을 하고 있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카스트 제도는 여전히 뿌리 깊은 관습법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의 인도정부도 카스트를 뿌리 뽑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인도가 지나치게 거대하고 인구가 많으며, 지역마다
각자 인종, 문화, 언어가 뿔뿔이 흩어져있고,
그만큼 사회변화 속도가 제각각이라 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켰음에도
그 변화가 인도 전체에 미치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이다.
더구나 인도는 지방분권이 강한데다가
도시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도입해서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는 정책을 펴오기는 했지만,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그리 강하지 못한 나라다가 보니
토지개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해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카스트 의식을 유지하던
지방 토호들의 힘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고,
그래서 시골 깊숙한 곳까지는 철폐가 쉽지가 않아서
카스트 제도가 그대로 잔존하는 씁쓸한 현실이다.
그리하여 차별은 여전하며 계급으로 인한
하층 카스트와 불가촉천민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때문에 인도 정부는 1950년대부터 인위적으로라도
이들의 신분상승을 할 기회를 주기 위해 하층 카스트와 부족에 우대 정책을 펴고 있으나
하층 카스트에 대한 우대책에 대한 역차별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자트(Jat) 카스트 사건도 역차별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최근 인도의 극심한 취업난 때문에 하층민 우대정책이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특히 근접 상위 계급의 박탈감과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런 역차별 때문에 자신들의 계급을 낮춰서라도
정부의 지원을 받고 싶다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을 통해 내세의 삶을 중요시 하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내세보다는 현생이 더 중요하고 생각하는
놀랄만한 변화를 일부나마 볼 수 있다.
인도의 전설적인 지도자 간디(Mahatma Gandhi)는
이러한 계급에 속하는 이들을 신의 아들인 '하리잔(Harijan)'이라 이름을 붙여줬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름에 숨어 있는 동정적 의미에 반발해
스스로를 핍박받는 자라는 뜻의 달리트(dalit)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오늘날 ‘달리트’는 불가촉천민의 대표적 명칭이 됐다.
그러나 인도정부의 공식호칭은 ‘예정 카스트(scheduled caste)’라는 말을 쓰고 있다.
카스트의 편입이 예정돼있는 무리들이란 뜻이다.
카스트에 있어서의 불가촉성은 단순한 관념적 개혁만으로는 제거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더럽혀진 사람들’이니까 소외당하고 남들이 싫어하는 직업과
가난한 환경에 처하게 됐는지, 아니면 대대로 빈곤해서 그러한 직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더럽혀진 사람들’이 됐는지, 그 선후관계는 매우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으므로
성급히 결론을 내릴 수 없다.
현대 인도는 만민평등을 헌법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카스트에 의한 법적인 차별은 일체 인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경제 상태가 점차 개선돼가고 있으므로
이와 함께 ‘불가촉’이라는 관념도 사소 줄어들고 있다.
또 현실적으로도 공장 노동, 군대, 기타의 사회적 요인에 의해
카스트 제도가 옛날만큼의 엄격함을 잃어가고 있음이 사실이다.
물론 일반인들의 사고방식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그리하여 달리트(불가촉천민)에서 대통령이 두 명이나 나왔다.
1997년 코테릴 라만 나라야난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현 람나트 코빈트 인도 제14대 대통령(2017~2022 재임) 역시 불가촉천민 출신이다.
그는 대졸 후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비하르주 지사를 역임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데 선거 당시 코빈트 당선인과 맞붙은 전 하원의장 쿠마르 후보도 달리트 출신이어서
최초로 여야 후보 모두가 달리트 출신이라는 기록까지 세웠다.
그러나 결혼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아직도 카스트 제도의 벽이 두껍다.
결국 전반적으로 볼 때, 카스트는 아직 엄연히 그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7. 불교의 입장
붓다의 시자이자 십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아난다는 붓다와 같은
샤꺄족 출신으로 붓다 사촌 동생이며, 마음씨 착한 젊은이였다.
어느 날 외출했던 길에 그는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 한 처녀를 보게 됐다.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라 그는 물 한 그릇을 청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마탕가의 처녀입니다.”
마탕가(Matanga)란 접촉해서는 안 될 낮은 계급에 대한 또 다른 명칭이다.
붓다의 제자인 아난다에겐 세속 사회에서의 계급 차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설명한 다음 아무렇지 않게 물을 얻어 마시고 떠났다.
불교 경전에 나와 있는 이 일화는
세존 시대에도 이미 카스트적 계급제도가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정⋅부정의 관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원래 붓다는 카스트 제도가 어리석은 대중에 최면을 건 사기극임을 깨닫고
브라만의 윤회설을 부정했으며, 그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쳤다.
즉, 불교에서는 카스트 제도를 합리화시키는 그런 윤회설을 부정했다.
붓다는 타고난 종족이나 신분, 가진 재산이나 지식과 능력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부당한 세상의 잣대로 무시당하고 소외받던 사람들에게 더욱 세심한 배려를 기울이셨다.
카스트교육에 있어서 불타는 카스트제도 하에서 중히 여기는
가계나 탄생 등에 대해 중시하지 않고 행위에 중점을 두었다.
그렇다고 기존 질서에 대한 반사회적 개혁가는 아니었다.
불타는 사회로 부터의 초월을 도모했던 것이다. 불교교단은 일미평등의 대해에 비유되었다.
우팔리(Upali, 優婆離)는 붓다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이다.
불타의 교단은 세속적인 제도에 의한 입단의 자격을 제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석가족 궁정 이발사로 최하층인 수드라(sudra)계급 출신이었다.
우팔리는 불교교단의 규율 및 규칙에 정통했고, 또 계를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엄격했으며,
계율에 통달해 ‘지계제일(持戒第一)’로 불렸다.
붓다 입멸 직후 제1차 불전결집에서 ‘계율’ 부분은 대부분 우팔리 존자에 의해 송출(誦出) 됐다.
석가족의 일곱 왕자들이 한꺼번에 출가할 때의 일이다.
일곱 왕자들이 왕실 전용 이발사였던 우팔리를 찾아가 머리를 깎았다.
우팔리는 고귀한 왕자들이 출가하는 이유를 물었다.
왕자들은 “부처님의 깨달음은 세상의 부귀영화나 그 어떤 것보다 훌륭한 일이다.”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우팔리는 크게 발심해서 부처님을 찾아가서 출가를 청했다.
부처님은 우팔리를 먼저 출가시키고, 석가족의 왕자들은 일주일 후에야 출가를 허락하셨다.
일곱 왕자가 승가의 법도에 따라, 먼저 출가한 사형(師兄)에게 차례로 절하며 인사하다가,
맨 나중에 한 왕자가 우뚝 멈추어 서고 말았다.
천민으로 자신들의 머리를 깎아주던 이발사 우팔리가 가사를 입고 의연히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하층 계급이었던 이발사 우팔리에게 예를 표하는 것을 머뭇거리는 왕자에게
붓다는 엄하게 가르침의 말씀을 하셨다.
“너는 왜 주저하느냐. 아만심을 꺾은 자라야 우리 가문의 형제가 되나니,
내가 우팔리에게 먼저 허락한 것도 이 때문이니라. 너희들은 마땅히 우팔리에게 경배하라.”
이 가르침 후에 붓다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법하셨다.
“여러 강이 있어서, 각기 강가, 야무나, 아치라바티, 시라부, 마히라고 불리어진다.
그러나 그 강들이 바다에 이르고 나면, 그 전의 이름은 없어지고 오직 ‘바다’라고만 불리어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네 계급도
일단 진리(法)과 계율(律)을 따라 발심하고 나면 예전의 계급 대신 오직 ‘중(衆)’이라고 불린다.”
※스님을 "중(衆)"이라고도 하고, "승(僧)"이라고도 부른다.
막스 뮐러(Friedrich Max Muler, 1823~1900)는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 빌헬름 뮐러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에 귀화해 1850년부터 옥스퍼드대학의 교수가 돼
인도-유럽어족을 중심으로 한 언어학과 비교신화학을 통해 종교의 본질을 해명하고자 했다.
그는 다수의 불교경전을 번역 출판해 불교를 서구 사회에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서구에 산스크리트 문헌학을 보급했다.
뮐러는 이른바 사제적 종교를 비종교적이라고 비판했다.
사제(司祭)의 권력으로 발전한 종교는 종교의 제도화와 함께 자연 종교에서 멀어지게 된다.
참된 종교는 유한한 자연과의 접촉을 통해 무한을 인식하는 것이며,
무한에의 인식이 인간의 도덕적 특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양상으로 표현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뮐러는 여러 종교의 신(神)들은 주인 없는 가면이며 인간이 창조해 낸 것이지,
신이 인간의 창조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붓다를 당시 인도인을 억누르고 있던 윤리적 정신적 삶의 올가미를 풀어준 성인으로 평가했다.
붓다의 위대한 성취는 계급제도와 특권층에 억눌려 있던 인도인에게
참된 평등과 자유의 길을 가르친 데 있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뮐러는 붓다가 가르친 자비의 윤리가 내포한 사회복지적 의미를 주목하고,
평등과 무아의 윤리적 탁월성을 찬양했다.
불교의 평등사상은 직업에도 귀천이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뒷받침했다.
다만 붓다는 올바른 직업과 그릇된 직업을 엄격히 구분했다.
올바른 직업의 판단기준은 종교적 목표와 사회적 도덕성,
이것이야말로 경제윤리와 종교윤리의 만남이었다.
불교적 입장에서 본 노동의 의미는 선농일치(禪農一致)였다.
노동은 ‘종교적 수행을 위한 수단’이다. 노동 그 자체는 수행의 과정이다.
노동의 결과는 고통 받는 중생에게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노동관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인도에서의 불가촉천민을 중심으로 한
신불교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불교의 평등사상에 근거해서 사회개혁을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도 카스트제도는 너무 공고하다.
그러다가 보니 심지어 간디조차도 카스트제도를 존중할 정도였으니
인도에서 카스트제도의 극복은 불교 힘만으로는 힘들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다가 인도 지도층의 대부분이 상위 계층이자,
힌두교신자들이어서 이래저래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인도에서 불교 부흥운동을 비롯해서 카스트 개혁 운동이 미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다가 세력이 미약한 천민계급 중심으로 하는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므로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다가 보니 19세기 말엽 이후 인도에서 미약하게나마 진행되는
불교부흥운동이 소수 지도자가 개인 중심으로 진행되는 실정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암베드카르(Ambedkar), 람 라즈(Ram Raj),
나렌드라 자다브(Narendra Jadhav, 1953년~) 등이다.
암베드카르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수재로서,
귀국 후 전인도 하층민 모임(All-India Depressed Classed Conference),
‘하층민 복지협회’(Hahishkrit Hitakrini Sabha) 등의 조직의 결성을 주도해
피억압계급 교육과 계몽에 헌신하는 한편, 하층민의 지위향상을 위한 운동을 주도했다.
그의 사상적 기반에는 불교의 자비와 평등사상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비폭력 평화주의를 외친 인도의 간디는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인도의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하지만 힌두교도인 간디는 카스트제도라는 고질적인 인도의 병폐를 깨뜨리기를 거부했다.
이러한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반면 같은 시기 인도의 정치가였던 암베드카르는
“인도의 적은 외부가 아니라 카스트라는 내부에 있다”고 외치며
여성의 권리인정, 불가촉천민 해방과 불교 중흥을 내걸고 간디보다 큰 정치를 펼쳤다.
그 내면에는 “모든 만물은 평등하다”는 불교의 평등사상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힌두교인으로 태어났으나 힌두교인으로 죽지는 않는다.”
1935년 나시크의 대중 집회에서 한 이 유명한 선언은
암베드카르의 사회개혁운동이 신불교운동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다.
하층민의 인권을 보장하는 길은 오직 불교로 개종하는 일에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이 선언은 당시 인도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인도의 소수종교 지도자들로부터 큰 지지와 성원을 받았는가 하면,
또한 정치, 종교계의 많은 지도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간디는 종교란 집이나 외투처럼 바뀌는 물건이 아니라는
말로 암베드카르의 입장을 비난했다.
암베드카르는 1947년 인도독립과 함께 네루정부의 초대법무장관에 취임했다.
1948년 그가 초안한 헌법이 이듬해 거의 원안대로 확정됨으로써
카스트 제도의 폐기를 명문화해 그는 인도헌법의 아버지로 불리게 됐다.
1949년 카트만두에서 열린 제1회 세계불교도 회의 이후
여러 불교 모임에 참석해 연설을 했으며,
1951년에는 인도 불교도 모임을 결성해 보다 조직적인 불교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암베드카르는 카스트 제도 폐기에 미온적인 간디와 지루한 협상 끝에
‘푸나협정’을 이끌어냈다. 이 협정으로 피압박계층이 의회 의석 가운데
148석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획기적인 진전이었다.
암베드카르(Dr. Bhimrao Ramji Ambedkar)가 주도했던 신불교운동 이후
반세기만의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람 라즈는 최하층 카스트 힌두교도들을 돕기 위해
결성된 단체를 통솔하는 총수였다. 삭발한 머리에 손에는 오색의 불교기(佛敎旗)기를
든 수천 명 군중들이 불상과 암베드카르 사진 앞에서 빠알리어로 된
찬트(전례음악)를 낭송하는 가운데, 람 라즈는 “이 순간이 수천 명
달리트(不觸賤民)들이 힌두교를 거부하기로 결심하는
역사적인 순간”임을 선언했다. 당초 백만 명의 달리트들이 운집해
인도 역사상 최대 규모 개종이 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다수 사람들이 경찰력에 의해 원천 봉쇄됐다.
• 상카시아 불교대축제---우타르프라데시 주의 상카시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석가족 후손들이 매년 음력 9월 보름에 개최하는
상카시아 불교대축제의 경우는 20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행사로서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널리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인도에 불교사원을 세우기 위한 각종 모금 행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이와 같은 인도불교의 부흥 운동은 티베트인들의 유입과도 무관하지 않다.
• 4월14일의 축제 행렬---눈에 띄는 사원은 잘 보이지 않지만,
신불교도들의 움직임은 적극적이다. ‘포교’라는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도 신불교도들이다.
매년 4월14일 저녁이면 인도 곳곳에서 “비자야 로드 붓다!
비자야 암베드카르!”를 외치는 끝없는 행렬을 본다.
암베드카르의 탄생을 기념하는 신불교도들의 축제 행렬이다.
최근 뭄바이 시내 한복판에 암베드카르의 동상이 세워지고,
산치의 마하스투파를 본뜬 대형 신불교사원이 조성되기도 했다.
신불교도의 가정에는 으레 부처님의 사진과 나란히
암베드카르의 사진이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직은 미약한 운동이지만 작은 불씨가 점점 커지듯 신불교운동은 점점 키워갈 것으로 믿는다.
인도가 워낙 복잡한 나라이다가 보니,
일사불란한 개혁이나 전진은 힘들겠지만
이러한 신불교운동을 통해 다소 불교도의 수가 늘었고
불교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신불교운동이 안고 있는 문제점 또한 적지 않다.
이들에게 있어서 개종은 불교 그 자체에 대한 이해와 감화라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불가촉천민으로서의 사회적인 신분을 벗어나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이 지속된다면 신불교라는 이름의
새로운 힌두 카스트가 하나 더 생겨나는 것으로 그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처럼 인도에서 신불교운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주요 동기는 카스트제도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고,
그것도 인도가 불교 발상지라는 입장에서 볼 때 극히 미미한 수준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출처 : 네이버 블로그 Amisan | 작성자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