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인도 최초 불교석굴 군투팔리를 찾아서 / 이희봉 교수
석굴사원 폐허서 경주 석굴암 원조 더듬다
인도는 석굴의 나라다. 물론 석굴사원 중심에는 지금까지의 인도 탑 스투파가 모셔진다.
자, 이제부터 불교 석굴사원 탐방 대장정 여행을 떠나보자.
행선지는 우선 인도 남부 불교 유적지다.
넓은 땅덩어리에서 불교 전파 영역상 남부라고 하지만
인도 지도를 보면 중부의 남쪽 끝에 불과하다.
나가르주나콘다, 아마르바티 유적도 있지만 무엇보다 인도 최초의 불교석굴,
그리고 우리 석굴암의 원조 군투팔리 석굴을 보기 위해서다.
안내 20년차도 군투팔리 몰라
▲1.군투팔리 여행 경로.
2007년 4월3일 새벽 6시45분 델리 중앙역 출발 하이더라바드 행 특급열차에 올랐다.
아침 기상 종에 맞춰놨지만 몇 차례 자다 깨다 밤잠을 완전 설쳤다.
기차는 남쪽으로 계속 달려 오후 5시에 산치의 보팔에 잠시 정차하고
또 밤새도록 달렸다. 다음날 만 하루가 지나 온몸이 뒤틀리는데 동이 터오고 나서
7시30분에 드디어 종착역 쎄쿤더라바드 역에 도착했다.
제2 하이더라바드 신시가지 뜻이다.
나가르주나콘다 가는 버스를 알아보는데 뭔가 도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도로가 텅 비어있고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이리 저리 뛰면서
아무 트럭이나 삼발이 택시 오토릭샤를 서로 타려고 난리가 아닌가.
‘반드’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총파업이란다. 인도 여행은 늘 예기치 않은 즉흥의 연속이다.
간신히 한 여행사 대합실에 도착하여 기다렸으나 막막하다.
여관을 잡아 쉬면서 기다릴 것인가도 생각했으나
파업이 언제 풀릴지 기약이 없어 역시 막막.
장거리 버스는 다닌다기에 일정을 바꿔 나중 기착지를 먼저 가는
거꾸로 방식을 택해 비자와다 행 사설 버스에 간신히 올랐다.
얼마 가지 않아 버스가 멈춰 섰다.
내다보니 길바닥에 사람들이 깃발을 들고 죽 주저 앉아있었다.
새빨간 낫과 망치의 공산당 깃발도 보였다.
경찰이 잔뜩 와도 무전기 통화만 부지런히 하더니 팔짱만 끼고 수수방관,
역시 민주주의의 나라를 실감했다. 얼마간 있었는지 연좌농성을 풀었다.
뜨거운 햇볕에 달궈지며 버스는 하루 종일 달렸다.
비자와다 도시는 인도 동쪽 끝으로서 남부인
현대자동차 공장이 있는 첸나이보다는 무려 400km 북쪽이다.
불교 조각으로 미술사에서 중요 위치를 차지하는 아마르바티 유적지는 정작 폐허,
그야말로 커다란 원형 스투파 터에 돌덩어리만 나뒹굴고 있었다.
뜯어간 석판 조각은 영국, 독일, 미국 등 식민지 열강의 박물관에 전시되어있고
일부는 인도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단다(그림2).
▲2.아마르바티 대 스투파 페허.
호텔에서 점심먹고 군투팔리 석굴을 가기위해 여러 군데 물어보았으나 아무도 모른단다.
전문 여행사라는 곳을 찾아갔는데 자기가 20년 넘게 안내했지만 그런 곳은 없단다.
가져간 석굴 그림을 보여주어도 그저 잘못 왔단다. 당황스러웠다.
우왕좌왕 하다가 지도가게에 가서 안드라프라데시 주 지도를 사서 간신히 확인한 사실,
인근 군에 그런 곳이 있단다. 땅덩어리가 넓다보니 군 경계를 벗어나면,
말하자면 용인에서는 안성에 뭐가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물론 관광지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교통편이 없어 비싼 요금으로 흥정하여 택시를 빌렸다.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다가 국도 길로, 다시 시골 마을길로 접어들어 달리고 또 달렸다.
가져간 자료에 거리가 60km로 되어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곱절은 더 되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자 조바심이 났다.
무엇보다 어두워지면 사진을 못 찍기 때문이다.
땅거미가 질 무렵 마을에 겨우 도착, 관리인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니
감격스럽게도 눈앞에 석굴들이 죽 펼쳐졌다.
바위 절벽 한 가운데에 사진으로 보던 스투파 모신 주 굴이 눈에 들어왔다.
몇 십 년 애용하던 니콘 F2 명기 카메라를 이번 여행에 디지털로 바꾼 것이 천만 다행이다.
산줄기 석굴들을 다 누볐더니 아사 감도를 높여도 더 이상 찍을 수 없을 정도로 껌껌해 졌다.
▲3.군투팔리 주 석굴. 가운데 암벽 약간 왼쪽이 스투파 굴, 오른쪽이 주거 굴.
군투팔리 석굴은 B.C.3세기경의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석굴이다.
산언덕에 Y자로 세 갈래 산줄기 암벽에 각각 석굴을 팠다(그림3).
상당수 석굴이 파헤쳐져 훼손되었지만
주 예배굴 차이탸는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어서 석굴 발달사에 족보가 된다.
4.주거 굴 비하라 전면 뾰족 아치.
그 옆 조금 떨어져서 거주 굴 비하라가 있다. 암벽 전면 돌이 많이 삭았지만
석굴 입구 표시인 인도 특유의 뾰족아치 모양은 남아있는데(그림4)
일부 시멘트 보강 땜질을 했다.
인도 석굴사원은 반드시 스투파를 모신 예배굴 ‘차이탸’와
스님 거주 굴 ‘비하라’로 구성된다는 것을 잘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석굴은 예배·거주굴로 구성
5.산등성이 노천 유적. 꼭대기 주 스투파 모심.
언덕 위 세 산줄기가 모이는 평평한 곳에 19세기 말에 발굴된 노천 사원이 펼쳐져 있다.
노천 단지에 바닥만 남은 여러 개의 둥그런 작은 스투파 즉 봉헌 스투파 군이 있고,
제일 꼭대기 높은 단에 주 스투파가 모셔져 있는데 분위기가
마치 우리 금산사 언덕의 방등계단 같다(그림5).
주 스투파는 원형 담 속에 고이 모셔져 있다(그림6)
다른 산줄기 석굴들은 다 파헤쳐져서 폐허만 겨우 남아있는 것이 아쉽다.
6.꼭대기 원형 담 속에 모신 노천 주 스투파.
7.석굴 필수 물 저장 수조. 가운데 내려가는 돌계단.
인도 석굴사원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물 저장수조다.
인도는 여름 장마철 제외하고는 가뭄이 심하다.
샘물이던 빗물을 받아두던 물 저장 탱크가 필수이고 여기에도 몇 개 있다.
물론 물 길러 내려가는 계단도 일체식 돌이다.
군투팔리 주 굴은 원형 스투파를 모신 원형굴에 앞에 전실을 갖추고 있어서
가히 경주 석굴암의 원조라 할 수 있는데,
반세기 전에 잘못 복원한 우리 석굴암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다음 호에서 자세히 보기로 하자.
2012. 04. 05
이희봉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