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한 도리 깨달아 나를 구하라 / 종범 스님
복은 화살이요
지혜는 허공이라
화살에 집착하니
허공을 알지 못한다
삼세가 일념이고
일념이 삼세인걸
지혜없어 못깨달으니
무상함에 집착하네
오늘 법문은『금강경』제 24장의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편입니다.
‘복과 지혜는 비교할 수 없다’ 이런 말이지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있는
모든 수미산과 같은, 그렇게 많은 칠보(七寶)를 다른 이에게 보시하고,
또 어떤 사람은 반야바라밀경의 네 글귀로 된 한 게송만이라도
잘 지켜 간직하고 독송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 들려주는 이가 있다면,
어떤 것이 더 큰 공덕이겠는가.
수미산 같은 엄청난 보물을 보시해도 결국은 금강경의 한 구절
게송을 지니는 공덕에는 전혀 미치지 못할 것이니라.”
자! 여러분 여기 복(福)과 지혜(智慧)가 있습니다. 복도 여러 복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복입니다. 수미산만큼 크고 보물 중의 보물이라는
칠보를 보시해서 얻은 복입니다.
그리고 한 쪽은 금강경. 그것도 아주 일부분을 수지하고 독송해서 거기에서 얻은 지혜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것이 서로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일부분이라도 금강경의 게송을 독송해 얻은 지혜가 수미산만큼
거대한 보물의 보시보다 훨씬 큰 공덕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복이 무엇이고 지혜는 또 뭘까요. 복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좋은 것’입니다.
몸에 좋은 것은 신복(身福), 재물에 있는 복은 재복(財福).
주변의 사람들이 도와주는 것은 인복(人福)입니다. 그러면 신복은 무엇일까요.
눈 밝은 것도 복이고, 귀 밝은 것도 복이고, 몸 건강한 것도 복이고, 전부 복입니다.
걸을 수 있는 것도 복이고 숨 쉬는 것도 복입니다. 몸이 쇠약해지면 숨을 못 쉽니다.
몸이 쇠약해지면 물도 못 마십니다. 그래서 걸음 걷는 것도 복입니다.
물론 음식 넘기는 것도 복이지요.
복을 명(命)과 함께 설명해 보겠습니다.
명이라는 것은 생명 명(命) 자 인데 숨 쉬는 것입니다.
코에 숨이 들락날락하는 것은 명이 붙어 있는 것이고 코에 숨이 없으면 명이 진 것 입니다.
그만큼 명이 중요합니다. 명은 남아 있는데 몸이 꼼짝 못하는 일도 있습니다.
병원에서 이런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식물인간이 대표적이겠지요.
이런 경우 생명은 남아 있지만 몸의 복은 이미 끝난 상태입니다.
명은 있는데 복이 가 버린 거지요. 반대로 복은 있는데 명이 가 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몸이 건장한데 갑자기 숨이 멈추는 경우가 있지요. 아마 심장마비가 그 예가 되겠지요.
또 명과 복이 한꺼번에 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소중한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물은 많은데 명이 다해 죽는 수가 있습니다.
또 명은 남아있는데 재물이 하나도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재물과 명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수도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겠지요. 도와주는 사람은 많은데 죽어 버리는 경우,
이때는 인복은 남아 있지만 명이 가버린 것이지요. 도와주는 이 한명 없는데
질긴 목숨만이 남아 있는 비참한 사람도 있지요. 우리네 삶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복을 짓는다는 것은 건강을 살피는 것이고, 재물도 잘 관리하는 것이고,
사람도 잘 받드는 것이고, 그래서 몸과 재물과 사람을 함께 받드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래야 복이 생기고 유지되겠지요. 사실 세상을 살면서 복이 없으면 되는 것이 없습니다.
복이 없으면 공부도 못합니다. 먹고 입고 자고 하는 것도 힘듭니다.
이러니, 세상을 살아가는데 복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복이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꿈을 꾸고 있다고 합시다.
꿈속에서 출세도 하고 좋은 곳에도 가보고,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실인가요. 좋았다고 하지만 꿈은 꿈입니다. 지혜는 꿈에서 딱 깨는 겁니다.
꿈속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해도 깨면 그만입니다.
우리 인생도 이렇습니다. 한 평생 복이 대단해서 도와주는 사람도 많고 몸도 건강하고 재물도 많고,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 죽는 순간에 뒤돌아보면 이 모든 것이 꿈입니다.
죽기 전에는 꿈인 줄 모릅니다. 죽는 순간에 돌아보면 10년을 살아도 꿈이고
50년을 살아도 꿈이고 100년을 살아도 꿈입니다.
지혜는 바로 꿈꾸는 내가 누구인지 훤히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지혜입니다.
복과 지혜를 비유하기를, 복은 저 하늘을 향해서 쏘아 올리는 화살과 같다고 말합니다.
앙전사허공(仰箭射虛空)이라. 화살을 높이 들어서 허공에 쏜다는 말인데,
화살을 하늘로 쏘아 올리면 올라가다 결국은 땅에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쏘아 올려 진 화살이 한계에 이르면 다시 내려옵니다. 복도 같습니다.
허공에 쏘아 올린 화살처럼 아무리 쌓아도 결국은 허물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는 무엇일까요. 허공 그 자체가 지혜입니다.
화살이 아무리 높이 올라간다고 해도 하늘인 허공하고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지혜를 어떻게 체득할 수 있을까요. 내가 나를 바로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미혹해서 화살만 알고 지혜를 모릅니다.
복은 화살과 같고 지혜는 허공과 같습니다.
그런데 화살만 집착하니까 화살이 날아가는 허공, 화살이 날아가고 떨어지고 왔다 갔다 하는
그 공간을 전혀 모릅니다. 태어나서 머물고 죽는 모든 것이 지혜의 군상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복만 압니다. ‘지혜와 복은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은
결국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 복덕을 짓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지혜를 알면 중생이 겪는 고통의 원인도 알 수 있습니다.
고통은 왜 생길까요.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없는 죄. 어리석은 죄.
깨닫지 못한 죄. 그 죄로 우리 모두는 고통 받고 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불이 뜨거운 줄 모르고 잡는 것과 같이, 지혜 없음이 바로 고통의 원인입니다.
인생이 무상한 줄 모르는 것. 모이면 흩어질 줄 모르는 것. 늙으면 죽는 줄 모르는 것.
이 모든 것이 지혜 없는 죄입니다.
불교에서는 아주 재미있는 관점이 하나 있어요. 늙음과 죽음을 같이 보는 것입니다.
노사(老死). 노(老)는 곧 사(死)입니다. 노와 사를 분리해서 보지 않습니다.
늙는 것이 바로 죽는 것입니다. 12연기(十二緣起)에서도 노사를 같이 봅니다.
왜 그럴까요. 눈이 밝다가 가물거리면 죽는 것이지요. 달이 밝다가 힘이 없으면 죽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몸이 무상한 줄 모르거든요.
재물이 무상한 줄 모르고. 사람이 무상한 줄 모릅니다.
그래서 삼세(三世)가 일념(一念)이고 일념이 삼세임을, 무량겁(無量劫)이 일찰나(一刹那)이고
일찰나가 무량겁임을 모르기 때문에 무상한 현상에 자꾸 매달립니다.
컵을 볼까요. 컵은 형상을 가지고 있지만 언젠가는 깨집니다.
아무리 소중히 간직해도 깨집니다. 이렇게 가지고,
또 깨지고 하는 행동을 무진억겁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나면 헤어질 것 아닙니까.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만나고, 내가 한 번 이기면 한번은 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기는 것만 알지. 다음을 모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무상합니다.
삼세가 모두 일념이요. 억겁의 세월이 일찰나입니다. 그런데 이 도리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만 지혜로 알 뿐입니다. 그래서 나를 구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다른 어떤 것도 구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약견제상(若見諸相)이 비상(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
모든 상이 상이 아닌 것. 즉 모양으로 있는 모든 것, 또는 모든 현상이 다 허망한 것임을 알면
곧 여래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가 일념인 한 마음 속에 있는 그 도리.
무진억겁이 찰나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 곧 여래를 아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이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한가하게 살아야지 이렇게 마음먹는 이들이 있습니다.
조용한 산중에 홀로 들어가 보세요. 열흘을 못 견딥니다. 이유가 멀까요. 답답해서 지요.
이것이 중생심입니다. 환경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혜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항상 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그 덫에 걸리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이 법문은 부산불교거사림회(회장 배호암)가
2007년 12월 11일 부산 소림사에서 개최한 초청법회에서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이 설법한 내용이다.
* 종범 스님은
통도사에서 벽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통도사 승가대학 강주(1971~1976)를 역임했다.
1980년 3월 중앙승가대 강사를 시작으로
1990년부터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0년 제3대 총장에
취임한 이후 지금까지 중앙승가대학교의 교수와 학인들을 이끌고 있다.
스님은 ‘교수들의 교수’, ‘학자들의 학자’라고 불릴 만큼
불교학에 대한 깊은 조예와 열린 행정으로
학계 안팎의 존경을 받고 있다.
출처 :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