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현(金台鉉)은 자가 불기(不器)이며 광주(光州) 사람이다. 먼 조상인 사공(司空) 김길(金吉)은 태조를 도와서 공을 세웠다. 아버지 김수(金須)는 담력과 지략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는데, 과거에 급제한 후 어사(御史)를 거쳐 영광군(靈光郡)의 수령이 되었다. 장군 고여림(高汝霖)을 따라 삼별초(三別抄)를 토벌할 때 먼저 육지에 올랐다가 전쟁터에서 죽어서 돌아오지 못하였다.
어머니 고씨(高氏)가 밝은 별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김태현을 낳았다.
〈김태현은〉 10살 때 고아가 되어서도 부지런히 공부하여 일찍 〈학문을〉 이루었으며 풍모와 위의가 단아하고 눈매는 그린 듯하였다. 일찍이 동년배들과 함께 선배[先進]의 집에서 공부하였는데, 선배가 기특하게 여기고 아껴서 자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 집에는 새로 과부가 된 딸이 있어 시를 조금 이해하였다. 어느 날 창틈으로 시를 던졌는데, 〈그 시에서〉 말하기를, “말을 탄 어느 댁 미남 서생이신지, 석 달이나 되도록 이름을 몰랐다오. 이제야 비로소 김태현인줄 알았네, 가는 눈 긴 눈썹에 남몰래 정이 들었소.” 라고 하였다. 김태현은 이때부터 그 집에 발길을 끊고 가지 않았다. 숙부 김주정(金周鼎)이 그의 사부(詞賦)를 보고 비범하다고 여겨 말하기를, “우리 가문을 대성시킬 사람은 반드시 너다. 우리 형은 죽지 않았구나.”라고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원년(1275) 나이 15살에 감시(監試)에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뒤에 다시 전시(殿試)에 올라 좌우위참군 직문한서(左右衛參軍 直文翰暑)에 임명되었다. 좌창별감(左倉別監)으로 있을 때 판응방사(判鷹坊事)인 인후(印侯) 등이 〈그가〉 응방(鷹坊) 사람들의 봉급을 주지 않았다는 죄를 꾸며서 순마소(巡馬所)에 가두었다. 〈그 뒤〉 여러 번 옮겨 판도총랑(版圖摠郞)이 되어서 권부(權溥)와 조간(趙簡)과 함께 전주(銓注)를 맡았다. 〈이후〉 우승지(右承旨)로 옮겼다가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다.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賀聖節]으로 원(元)으로 가다가 상도(上都)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황제는 감숙(甘肅)에 행차하였으므로 조서를 내려서 천하의 진공사(進貢使)는 모두 경사(京師)에 가서 머물러 있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김태현이 중서성(中書省)에 말하기를, “우리나라[下國]가 대국(大國)을 섬긴 이래 세시(歲時) 때마다 조정에서 하례 드리는 일을 일찍이 빠뜨린 적이 없었습니다. 경사에 머물라고 하는 것은 황제의 명령이지만 행재소까지 가라고 하는 것은 우리 임금의 명령입니다. 내가 황제로부터 벌을 받을지언정 감히 우리 임금의 명령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더니 중서성이 허락하였는데, 마침내 행재소에 도착하니 황제가 그 충성과 간절함[忠懇]을 갸륵하게 여겨서 크게 상을 내리고 어찬을 하사하여 총애하였다.
〈이후〉 동지사사 문한승지 지공거(同知司事 文翰承旨 知貢擧)로 옮겨서 인재를 선발하였으며, 새로 급제한 자들을 인솔하여 왕을 알현하였더니 왕이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그때 원의 사신인 이학사(李學士)가 그 자리에 있다가 왕에게 말하기를, “천하에 이런 일이 없는데, 오직 그대의 나라에서만 옛 풍속[古風]을 없애버리지 않았소. 지난해에 장(張) 참정(參政)과 함께 사신으로 왔을 때 마침 이 광경을 보았는데, 지금 다시 목도하게 되었으니 감히 축하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원에서는 김태현을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 左右司郞中)으로 임명하였고 〈고려에서는〉 지첨의사사(知僉議司事)로 승진시켰다.
당시에 간신들이 무리를 나누어서 왕 부자를 이간질하였으므로, 〈부자지간에〉 정이 서로 통하지 않았다. 김태현이 그들 사이에서 여러 일을 주선하면서 한결같이 지극히 공정하게 처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간하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충선왕(忠宣王)이 〈원〉 인종(仁宗)을 받들어 내란을 평정하게 되자, 본국의 신료들 중에서 딴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을 모두 죽이거나 유배 보냈지만, 김태현만은 남겨서 지밀직사사(知密職司事)로 복직시켰으며 곧이어 자의찬성사(咨議贊成事)에 임명하였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대신(大臣)들을 나누어 파견하여 제도(諸道)의 민호(民戶)를 조사하게 하였는데, 김태현은 양광수길도계점사 행수주목사(楊廣水吉道計點使 行水州牧使)로 삼았다. 〈이때〉 제도는 첨의사(僉議司)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게 하였는데, 모든 돌려보내는 첩문(牒文)에서 말하기를, “마땅히 양광수길도에서 한 바에 의거하여 처리하라.” 라고 하였으므로 제도가 모두 〈그〉 법식을 따랐다. 〈이후〉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가 되자 예에 따라 벼슬에서 물러나 10년 동안 한가하게 지냈다.
충숙왕(忠肅王) 8년(1321)에 기용되어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고 곧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충선왕이 티벳[吐蕃]으로 유배되고 충숙왕이 원에 억류되자 나라 안에는 당론(黨論)이 일어났으며 수상(首相)은 왕을 따라가 있었다. 김태현은 비록 2부(二府)의 우두머리에 있었지만 아래에 있는 자가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일을 하는데 막히는 것[扞格]이 많았다. 그러나 김태현이 진정시키는 데에 힘입어서 끝내 나라를 그르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이때〉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 바얀투구스)가 충선왕을 해칠 것을 꾀하고 그의 형 임서(任瑞)가 김지갑(金之甲)의 패면(牌面)을 빼앗자, 숙비(淑妃)가 여러 신하들에게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올려 호소하게 하였다. 김태현은 먼저 서명하였으나 백원항(白元恒)과 박효수(朴孝修)는 모두 핑계를 대고 서명하지 않았다. 충숙왕이 다시 정사를 맡자 개정한 것들이 많았는데 김태현을 파직시키려고 하다가 조금 뒤에 말하기를, “이 늙은이는 시종일관 딴 마음을 먹지 않았으니 마땅히 버려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집정(執政) 중에서 찬성하는 자가 없어서 결국 파직하였으며 곧이어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김태현의 어머니는 100살이었는데 해마다 쌀 30석(碩)을 주었으며 〈김태현의 어머니는〉 102살이 되어서 죽었다. 뒤에 관제(官制)를 개혁하였으므로 중찬(中贊)으로 치사한 것으로 고쳤다.
충숙왕 17년(1330)에 충혜왕(忠惠王)이 세자로서 원에 있었는데, 왕이 왕위를 물려줄 것을 청하니, 원에서 사신을 파견해 와서 국왕의 인장을 거두어들이고 김태현에게 행성(行省)의 일을 임시로 맡겼다. 사신이 돌아가자 재상이 충숙왕의 명령이라며 김태현을 부르기에 갔더니 행성의 인장을 거두어들이고 김태현과 윤석(尹碩)·원충(元忠) 등을 가두고 정방길(鄭方吉)에게 행성의 일을 임시로 맡겼다. 이에 김태현은 가족을 데리고 동쪽 금강산(金剛山)으로 유람을 떠났는데 이는 혐의를 멀리하기 위해서였다. 충혜왕이 사신을 보내어 재상이 마음대로 행성의 인장을 거둔 것을 문책하고 좌우사(左右司)의 관리를 파직하였으며 역마를 보내어 김태현을 불러서 다시 행성의 일을 맡겼다. 이 해에 죽으니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나이는 70살이었다.
〈김태현은〉 성품이 청렴하고 곧았으며 말과 행동이 정연하고 예에 맞았으니, 낮에는 눕지 않았으며 더워도 윗옷을 벗지 않았다. 〈그는〉 사람을 대할 때 온화하게 하였고 어머니를 효로써 섬겼으며 자손을 가르칠 때는 규범이 있었고 함부로 사람을 사귀지 않았으며, 남에게 원한을 사지도 않았다. 세 왕[三朝]을 섬기면서 의리에 따라 〈관직에〉 나아가거나 물러났으며, 바쁘고 번거로운 사무를 처리하면서도 정밀하고 민첩하게 결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명철함에 탄복하였다. 역대의 전례(典禮)와 고사들을 말할 때에는 마치 어제 일처럼 하였으니, 나라에 큰 의혹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그를 찾아가서 자문한 뒤에 결정하였다. 일찍이 손수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문(詩文)을 모아서 『동국문감(東國文鑑)』이라고 이름 붙였다.
아들은 김광식(金光軾)·김광철(金光澈)·김광재(金光載)·김광로(金光輅)이다. 김광식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총부의랑(摠部議郞)에 이르렀다. 김광철은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판밀직(判密直)이 되었고 화평군(化平君)으로 봉해졌다. 김광로는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요절하였다. 김광철·김광재·김광로는 후처인 왕씨(王氏)가 낳았는데, 왕씨는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해마다 나라에서 내려주는 쌀 20석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