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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강의 2장: 미
<1> “전 세기까지만 해도 미학이론이나 예술 비평에서 거의 지배적일 만큼 자주 등장했고, 전통적으로 고고한 가치를 지시했던 ‘미’라는 말이 20세기의 미학적 논의로부터는 퇴조해 있거나 사라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from 17p
: 미의 인식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미학에서 온전히 ‘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미학의 역사를 통해 볼 때 그것은 현대 미학 이론의 중심 개념이 되고 있는 ‘예술’이나 ‘미적경험’이라는 말보다도 훨씬 지배적이었으며, 미학 이론이나 예술 비평에 있어서 거의 전적으로 추구되어 찬미되어 마지 않던 개념이다.” from 17p
: 앞선 ‘미’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 나의 근거이기도 하다.
<3> “일반적인 가치용어였던 ‘미’는 이제 ‘미적가치’라는 말로 대체되고 있으며, 따라서 미의 개념이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면 미적 가치에 관한 논의가 그 유일한 장소가 되고 있다.” from 18p
: 미에서 미적가치로의 전환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대목이다. 즉, 미적가치는 미의 개념을 설명하는 유일한 장소이다.
<4> “그러하다는 사정은 미와 예술 두 개념 간의 관계 속에서 분명해진다.” from 19p
: 원래 미와 예술의 두 개념은 밀접하지 않다는 주장이 미학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왜냐하면 원래 미와 예술은 서로 긴밀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5> “우리는 항상 아름다운 것은 모두가 예술이요, 또는 예술은 모두가 아름답다. [그러므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예술이 아니요, 따라서 추한 것은 예술의 부정이다라고 가정하나,” from 19p : 과연 아름다운 것 만 예술이고 미 일까?
<6> “그러나 ‘이렇게 예술과 미를 동일시하는 것이 우리의 예술감상을 곤란하게 하는 주원인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반드시 미가 아니기 때문이며, 이러한 사실은 아무리 되풀이되거나 시끄럽게 말해져도 결코 지나치다고는 할 수 없다.” from 19p
: 공감은 간다. 그러나 예술이 반드시 미가 성립하지 않은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
<7> “그것은 전적으로 객관적인 의미의 미의 개념으로부터 주관과 관계가 있는 개념, 곧 관계론적(relationalistic)- 제론스톨니쯔의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현상적(phenomenal)- 의미의 미의 개념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from 20p
: 미의 개념이 객관적인 특성에서 주관적인 특성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8> “이러한 사고의 전환 때문에 전통적으로 객관주의적이었던 미의 이론은 새로운 취미론(taste-theory)으로 바뀌어, ‘주관화된’ 이론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from 20p
: 사고의 전환 때문에 가능했던 이러한 전환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빗대어 설명하기도 하였다.
<9> “애초에 미의 개념은 시각이나 청각에 속하는 형상과 색 또는 음에만 국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습관과 행위, 법률과 도덕, 과학과 진리에 대해서까지 적용되는 폭넓은 의미로서였다.” from 21pp-22pp
: 아름답다고 느끼는 대상은 한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10> “부분들 상호간 훌륭한 배열을 이루고 있는 비례가 맞는(proportionate) 대상들, 그러한 점에서 완전한(perfect) 사물들을 그들은 아름다운 사물들이라 했고, 그러한 완전함이 청각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을 그들은 조화라고 했으며, 건축이나 조각 또는 회화와 같은 시각적 영역에 있어서는 비례라고 했다. from 23p
: 고대 소피스트들이나 소크라테스 그리고 플라톤 같은 철인들은 미를 비례의 산물로 보았다.
<11> “미를 이루는 이 같은 부분들의 관계는 수적으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from 23p : 특히 피타고라스는 수와 하모니가 아름다움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12>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좁은 의미의 미의 본질은 수에 입각한 조화나 비례와 같은 객관적인 형식적 성질에 있다고 믿었다.” from 23p
: 결론적으로 미의 본질은 (좁은 의미에서) 수에 입각한 조화나 비례와 같은 객관적 성질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13>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 같은 사고에 영향을 받지 않은 이론이란 거의 없을 만큼 미는 곧 비례라는 사고에 입각한 미의 이론은 아주 오랫동안 이론과 실천을 통해 서구인들을 지배해 온 것이라는 점에서 타타르 키뷔츠는 그것을 가리켜 ‘서구 미학의 대이론’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from 23p
: 이 서구 미학의 대이론은 18세기 미학이 성립되기 까지 근간을 형성했던 미의 대 기본이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타르 키뷔츠는 이를 ‘서구 미학이 대이론’이라고 거창하게 명명한 것 같다.
<14> “서구의 고대미학이론에 있어서 미의 반대인 추(ugliness)의 개념은 형식을 일탈한 것 또는 탈형식(deformity)을 의미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현대 미술은 추로 인식되어 온 고대의 탈형식이 완전한 형식보다 오히려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추구되거나 찬미되고 있는 것이 그 특색이 되고 있다.” from 24p
: ‘추’라는 것이 미의 카테고리에 속한다면 현대 미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정형화된 형식보다 탈형식을 추구한다라고 볼 수 있다.
<15> “그(플로티누스)는 미의 본질이 부분들의 비례와 배열에 있다라는 주장을 수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미의 본질일 수 는 없다는 반론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만약 미의 본질이 부분들의 적합한 배열에 있다고 한다면 복잡한 사물들만이 아름답다. 그러나 실제로는 빛이나 별과 같은 복잡하지 않은 단일한 사물들도 아름답다. 고로 비례의 미는 비례로부터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비례를 통해 그 자신이 드러나고, 또 비례를 비춰주는 영혼(psyche)으로부터 온다고 플로티누스는 주장하고 있다.” from 25p
: 플로티누스는 주장에 적절한 공감이 간다. 반드시 비례이면서 복잡한 사물들만이 아름답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서 영혼 도입설은 그다지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16> “이 같은 플로티누스의 미에 대한 사상이 5세기경 기독교적 입장에서 그에 가장 밀접했던 슈도 디오니시우스에 의해 주세미학의 한 불가결한 요소로 흡수되면서 미의 개념에는 이원적 사고가 형성되었다...그것은 ‘비례와 밝음의 원인’이다.” from 25p
: 미의 본질을 비례와 밝음의 원인으로 규정했던 것은 흥미로운 것 같다. 여하튼 직접적인 사상의 영향은 플로티누스이다.
<17> “사실 이와 같은 미의 이원성의 주장은 추후 미학이론에 있어서 미란 형식과 내용- 이념-의 조화에 그 본질이 있다라는 전통을 낳는 데로 인도되고 있다.” from 26p
: 비례와 밝음은 후세에 미란 형식과 조화에 기인한다라는 근거가 된 것 같다.
<18> “그(성 어거스틴)는 ‘다만 아름다움만이 우리를 즐겁게 해 주며, 아름다움에 있어서는 형상들이, 형상들에 있어서는 비례가, 비례에 있어서는 수가 즐거움을 준다.’고 쓰고 있다. from 26p : 결국 아름다움은 즐거움을 준다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 “그(보에티우스)에 의하면 미라고 하는 것은 ‘부분들의 균형(commensurateness of part)일 뿐 그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from 27p
: 미가 완전한 균형이 아니라 부분들의 균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귀납적인 사고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언제가 완전한 균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균형이 없는 비례를 본 것도 아니지만 그 중간쯤 될 법한 비례를 보았을 때 아름다움을 느꼈을 경우가 있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 “르네상스 시대의 미에 관한 이론도 중세나 다를 바 없음은 동일하다. 그들이 미술과 시에 대해서 논할 때 그들은 고대의 두 문헌을 교본으로 갖고 있었다.” from 27p
: 여기서 말하는 두 문헌은 비트루비우스의 『건축론』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말한다. 아직 『건축론』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시학의 경우 나는 읽어본 적이 있기에 비례나 수의 척도에 대해 공감을 느낀다. 물론 온전히 시학에서 말하는 비례의 본질의 경우를 말한 것이다.
<21> “17세기 중엽의 푸셍이 ‘미의 이념은 만약 그것이 질서와 척도와 형식을 구비하고 있지 않으면 한낱 사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전락되고 만다.’ from 28p
:그 당시에 강력하게 믿고 있던 미의 기준을 알 수 있다.
<22> “프랑스의 건축가 브룽델은 미를 가리켜 ‘조화스러운 통일(harmonious unity)이라고 하면서 ’그것이야말로 건축이 우리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의 원천이요, 기원이요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from 28p
: 건축가 중 렘콜하우스라는 네덜란드 건축가는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건축가 이다. 왜냐하면 그의 예술작품에서 즐거움과 경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브룽델과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은 조화스러운 통일이 내재되어 있으면 특별한 유니크적 성질도 함께 지니고 있다.
<23> “미, 곧 비례라는 대이론의 또 다른 면은 그것의 객관주의적 주장이다.... 미는 아름다운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객관적 성질이다. from 30p
: 미의 대이론의 다른 성질을 알 수 있다. 그건 바로 객관적인 성질(objective quality)이다.
<24> "비례와 배열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요, 보는 이나 듣는 이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사물은 그 자체 아름다운 비례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므로 때에 따라 혹은 사람에 따라 아름다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from 30p
: 내가 생각하는 미의 성질과 같다. 미라는 것은 절대적 기준은 없을 것이다. 위에처럼 사람에 따라 아름다움을 느끼는 척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25> “플라톤은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미를 관조하기 위해서이다.’ from 31p
: 관조라고 하는 것은 미학에서 미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미를 인식함으로서 아름다움을 느끼며 그로인해 인생이 허무함과 지루함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26> “말하자면 예술과 과학은 동일한 이성의 활동이 아니요, 따라서 미는 규칙에 입각하여 평가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주장을 말함이다.” from 35p
: 미는 엄밀히 예술의 영역이지 과학은 영역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뇌는 좌뇌우뇌의 다른 특징을 지닌다. 예술과 과학의 업적은 각각 다른 뇌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은 두뇌의 교량(bridge)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우뇌좌뇌의 상호작용이 중요시되고 있다. 어쨌든 예술과 과학은 동일한 영역은 아니다.
<27> “17세기 말의 이 같은 현상은 이성적이요 객관적 본질의 미의 개념에 대한 반성을 계속 불러 일으키기에 족한 것이었다. 따라서 미는 이성에 반대되는 ‘나도 모를 그 무엇’에 관련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from 36p
: '나도 모를 그 무엇‘은 내가 미학과 철학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감정과 동일하다. 엄청난 학문을 공부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나도 모를 그 무엇’이 존재하기 때문에 공부하면서 혼동을 자주 느낀다.
<28> “무관심적이라 함은 ‘자기 이해가 동기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 경우 그러한 무관심적 즐거움- 달리 말하면, 미의 감정- 은 비례와 같은 형식적 성질에 의해 환기된다고 이들 경험주의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만을 놓고 볼 때 새로운 미의 개념에 대한 접근은 여전히 형식적 성질을 수용하면서 전통적 주장을 답습하고 있다. from 39p : 무관심적이라 함은 결국 객관적이라는 말과 상동하다. 고전주의적 미의 개념가 다를 바 없다.
<29> “그러나 이것은 미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한 요소로서 일 뿐이지, 미 그 자체가 아니라는 단서가 따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from 39p
: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미의 주장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미의 구성요소 중 하나에 불가에 불가하다라는 사실이다.
<30> “앞에서 본 연구에서 나는 ‘미’라고 하는 말을 우리의 마음 속에 일어난 하나의 관념(idea)이라고 부르겠고, 이러한 관념을 수용하는 우리의 능력을 미의 감관이라 부르겠다.”
from 42p: 이는 허치슨의 『미와 덕의 관념의 기원에 관한 연구』에서 쓴 말이다. 허치슨이 독특한 것은 미라는 것이 마음 속에 있는 수 많은 방 중 한 곳에 사는 하나의 관념으로 정의 한 것이다. 관념이라함은 플라톤의 이데아(idea)와 다른 개념이다. 어쨌든 허치슨의 표현은 마음에 든다.
<31> “나는 오히려 [미라고 하는] 이 관념을 지각하는 우리의 힘을 내적인 감관(internal sense)이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from 42p
: 허치슨은 미의 관념을 수용하는 우리의 감관이 있다고 믿었는데 거기에는 힘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그는 ‘내적인 감관’이라고 부른 것이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러한 감관이 존재하는지는.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분명 라이프니츠의 표현을 빌려서 ‘나도 모를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32> “스톨니쯔가 ‘미학에서 일어난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이라고 표현했듯이 경험적인 객관적 성질을 지시하는 말로서의 ‘미’, 또는 그 바닥에 깔려있는 이성적 본질을 지시하는 말로서의 보편적인 ‘미’를 옹호해 온 전통적인 미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from 43p
: 앞서 내가 말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스톨니쯔가 말한 것과 상동이다. 즉, 객관적 성질에서 주관적 성질로의 인식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33> “로크에 의하면 ‘미’는 색이나 형상의 어떤 구성이 지각하는 이에게 즐거움을 환기시켜 줄 때 형성된 하나의 복합관념, 더 자세히 말해 혼합양식으로 만들어진 복합관념들 중의 하나를 가리키는 말이다. from 43p
: 미는 단순히 미라는 한 글자가 지니는 특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합관념이 형성되어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이다.
<34> “미가 복합관념들 중의 하나를 지시하는 말이라고 했던 로크의 분류가 가지는 중요한 의미는 그러므로 미는 결코 객관적으로 주어진 성질이 아니라는 주장이 그로부터 추론되고 있다는 점이다. from 44p
: 로크의 복합관념은 절대적 객관적 성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로크 자신도 주관적 성질이라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흑백논리로 로크의 사상을 판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디까지 추론은 추론일 뿐이다.
<35> “이 같은 미의 개념의 변화를 통해 주목할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 중의 하나는 고대의 전통을 잇는 고전적 미의 이론에서는 즐거움이 수반적인 성질이 되고 있었던 데 반해, 취미론에 있어서는 그 관계가 역전되어 다양의 통일성과 같은 형식적 성질이 수반적인 성질로서 간주되고 있다는 점이다. from 45p
: 미의 인식 변화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다. 취미론은 나중에 칸트의 취미론을 공부할 때 자세히 알게 되겠지만 미는 반드시 즐거움을 수반되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오히려 형식적 성질이 수반되는 것이다. 의문이 생기는 것은 즐거움과 형식적 성질은 동시적 수반은 가능하지는 않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