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고에, 한국의 꽃문화[송홍선/문예산책/1996]란 책이 있어서 찾아보니, 무궁화에 대해 2.5 페이지를 할애해서 찬찬히 읽어 보았다. (토산물로 본 조선[최두환/도서출판 경남/2006]에선 의외로 안나온다.) 그 일부를 옮겨 보면,
"우리나라 문헌에도 무궁화라는 말이 16세기 초부터 나타나는데, 한자어는 무궁화가 아니라 목근화로 나온다.
목근화는 중국음에서 입성음인 받침 "ㄱ"소리가 탈락되면서 무긴화-무깅화-무궁화의 형태로 변했다고 한다"
목근화역시, 실록에서는 한개도 검색되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부르고 있는 무궁화는(참 좋은 이름이다!) 고려 무렵에 개칭된 목근화이며, 백운거사 이규보와 관련된 일화에서도 보이고 있다(아래 가져온, 기사중 중간쯤에 그의 친구들, 문씨,박씨가 무궁화에서의 "궁"의 한자에 대해 서로 다른 글자를 주장한다는 내용이 나옴)
포스팅의 제목은, 이 책의 말미에, 꽃의 속담과 격언이라는 부제하에 <ㄱ>란에 있어서 따왔다.
근화일조몽 (槿花一朝夢): 무궁화는 겨우 하루 아침에만 영화를 누린다는 말로서, 인간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뜻.
무궁화를 주눅들게 하려고, 일부러 지어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무궁화의 속성이 그런 것은 사실이다.
또한 백거이의 근화일일영이란 말도 같이 찾아 진다.
槿花一日榮(근화일일영)-백낙천의 시 방언 중에서
槿 : 무궁화 근, 花 : 꽃 화, 一 : 한 일, 日 : 날 일, 榮 : 영화 영
근화는 겨우 하루뿐인 덧없는 수명이지만 그것도 그런 대로 하나의 영화인 것이다. 백낙천(白樂天:본명은 백거이)이 44세 때 조정의 미움을 사서 강주(江州:지금의 후베이성 武昌)의 사마(司馬:군사 담당의 벼슬)로 가는 도중, 원진(元稹:자는 微之)이 《방언(放言)》이란 시를 보내준 데 대해 같은 제목으로 답해 지은 칠언율시(七言律詩) 5수 중의 첫 수로서 넷째의 구(句)이다.
원진은 백낙천과는 함께 과거에 올랐던 둘도 없는 친구로, 그가 강릉(江陵:후베이성 강릉군)으로 좌천되어 슬픔에 싸여 있을 때였다.
泰山不如欺毫末
(태산불여기호말)
태산은 털끝만큼도 속일 게 뭐냐
顔子無心羨老彭
(안자무심선노팽)
안자는 노팽을 부러워할 게 없다.
松樹千年終是朽
(송수천년종시후)
소나무 천년이로되 마침내 썩고
槿花一日自爲榮
(근화일일자위영)
근화꽃 하루로되 영화롭다 여긴다.
위의 글에서 안자(顔子:안영)는 공자의 수제자 안회(顔回)로 31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노팽(老彭)은 은(殷)시대의 재상 팽조(彭祖)의 존칭으로 800세의 장수를 누렸다고 한다. 근화(槿花)는 무궁화로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때 시든다.
그러나 안회가 노팽을 부러워할 것이 없듯이 근화는 소나무보다 영화롭다. 인생은 이 모두가 덧없는 것. 무엇 때문에 그 덧없는 가운데 있는 인간이 애락(哀樂)에 얽매이느냐는 것이 이 시의 뜻이다. 여기에서 '근화일일자위영'이 '근화일일영’이라는 말로 줄여서 쓰게 되며 '근화일일지영(槿花一日之榮)'이라고도 한다.
백낙천은 사람의 영화는 무궁화꽃과 같이 하루동안 피었다 지는 것이라며, 인생은 모두가 환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므로 슬퍼하고 기뻐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다.
무궁화에 대한 의미부여는, 호불호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 찬성만을 위한, 혹은 반대만을 위한 주장은 무가치하다.
동책,한국의 꽃문화에서, 같은 부제하에 "꽃에 불 지른다"라는 말도 소개되어 있다.
꽃에 불 지른다:1.풍류를 모르는 짓을 한다는 말. 2.잔인한 일이나 몰상식한 일을 이르는 말
뭔, 억하 심정에, 무궁화꽃에 불을 지르고 싶어서가 아니다. 유관순의 예에서도 보듯이, 혹시 잘못된 이미지 조작은 아닌가 검토해 볼만한 주제이고, 자라던 동네에서 본적없는 꽃이라서, 늘 회의가 있었고, 동네 곳곳에 봄이면 피어 나는 노란 개나리꽃이 더 친숙하고, 애정이 가서 ,그것이 전욱씨,고양씨,순임금보다도 직접적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반도적 사고방식이다...)
아직 강효백씨의 책을 못구했다. 필히 읽어 볼 것이며, 찬반의 변곡점에 혹시, 다시 서지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 변곡점에 혹시 도달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르겠다.
반도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이여,"무궁화의 핵심은 대륙에 있노라."
"그것을 일깨우러, 애국가에,국화에,국새에,나라문장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일본가문의 문장등은 그것을 희석하고 분탕칠하려는 의도이며, 조선의 것을 본 뜬 것일 뿐이다."
관련 글을 링크만 하려니 예의가 아닌것 같아 그냥 전체를 카피해서 올린다.
(깁니다. 관심있는 분들께서는, 봉지커피라도 한잔하시면서 예전의 논쟁들을 훑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이하, 무궁화에 대한 논쟁들
■ 시대적 배경 | 무궁화 수난 | 나라꽃 무궁화 수호 | 국화 논쟁
우리 나라 국민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가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인식하고 있다. 우리의 나라꽃 무궁화는 콜롬비아나 베네수엘라의 나라꽃처럼 법률로 제정되지도, 어떤 일개인의 창안에서 비롯된 것도 아닌 국민 모두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자연히 나라꽃으로 인정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나라꽃으로서 의 무궁화 부·적정론의 시비가 글로써 공개 논란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쯤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수도 서울시 이름을 바꾸자는 공식 담화가 나온 후 국기를 바꾸자느니 무궁화가 국화(國花)가 될 수 없다느니 하는 논란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1982년 7월 동아일보사 김충식 (金忠爛)기자는 〈명대결(名對決)〉이란 제목하에 국화논쟁에 관한 기사를 9회에 걸쳐 연채하였다. 이 기사는 1956년에 일었던 국화 개정론을 중심으로 무궁화에 대해 총체적으로 조명해 보려는 훌륭한 시도였다. 국화(國花)로서 무궁화가 합당한가, 무궁화가 과연 아름다운 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서부터 무궁화의 학문적 평가까지 사계(斯界)의 다양한 의견을 실음으로써 국화시비(國花是非)에 관한 세인(世人)과 식자(識者)의 관심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당시《동아일보》에 시리즈로 연재된 기사는 다음 과 같다.
◀독립기념관의 동아일보사 무궁화시비
국화논쟁 ①
무궁화가 국화인가. 무궁화가 국화라면 과연 누가 지정했는가. 국화로서 최적인가. 1956년 2월. 아직 바깥 바람은 차고 매웠다. 이 이른봄은 때마침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용(金昌龍)이 피격 절명된 때여서 헛소문과 속삭임이 거세게 번졌다. 화제의 소용돌이 속에 갑자기 무궁화 국화시비까지 곁들여진 봄이었다. 애당초 무궁화 시비의 발단은 수도‘서울’개칭 논의에서 비롯됐다. 당시 이승만(李承轉)대통령이 측근 몇몇에게“서울이란 본래 수도라는 뜻을 담고 있을뿐 아무 알맹이가 없는 명칭 아니냐, 그러면 다른 이름이 좋지 않겠느냐”는 견해툴 피력했다. 절대적인 권위와 힘으로 떠받들어지는 이(李)대 통령의‘분부’는 곧 담화로 공식화됐다. 그러나 찬반 어느 의견도 이렇다 할만한게 공식적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만 서로 눈치만 살피는 가운데 비공식 견해들만 무성하게 번졌다. 그리고는 엉뚱하게도 국화시비로 옮아갔다. “한국(韓國)의 국화(國花)인 무궁화가 국화식물(國花植物)로서 과연 적격인가 하는 문제는 해방 직후부터 자주 화제가 되어 왔다. 더는 몰라도 생물학계에 관계된 분들 사이에는 그리고 그때의 공통된 견해가 국화로는 부적합하다는 것으로 되어 왔다. 또 당 시 군정청(軍政廳)의 문교부 측에서도 국화 무궁화에 이의가 있었던지 이 꽃에 대치될 만한 다른 식물을 생물학회에 의뢰해 온 적이 있어서 학회에서는‘진달래(두견화)’를 후보화(候補花)로 제시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꽃과 소녀》,《꽃말》등 꽃에 관한 책을 많이 쓴 화훼연구가 조동화(趙東華)씨는 2월 3일자 일간지(한국일보)에 이같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조(趙)씨는“국기나 국가, 수도 명칭 같은 것은 원래‘정신적’인 것이므로 다소 불만이 있더라도 남북통일 전까지는 그대로 아무 말 않는 것이 상식으로 여겨져 왔으나 이번 대통령의 담화야말로 이런 불합리한 것들을 공론에 붙이는 좋은 계기가 됐다”고 주장했다. 해방 직후 국화 문제가 더 깊이 논의되지 못한것 도 말하자면 당시 혼란한 상황에서 정치적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조(趙)씨는 덧 붙였다. 조씨는 이어 무궁화가 국화로 여겨지게 된 데 대한 그 나름의 견해를 밝혔다. 즉 무궁화에 대한 관심은 갑오경장(甲午更張)이후 구미의 신문화가 이 땅에 밀려오면서 오얏꽃[架花〕의 이조(李朝)왕조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일제 침략기에는 일본의 벚꽃에 대한 상징화로 굳어져 갔다는 것이다. 일인들이 한국인의 무궁화 재배를 공공연히 방해하고‘눈에 피꽃’이라 는 터무니없는 모함까지 하는 바람에 무궁화는 오히려‘국화라는 명예로운 위치’에까지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趙)씨는 무궁화가 국화로는 부적합한 치명적인 결점이 있음을 지적한다. 조(趙)씨는 무궁화의 결점이야말로‘국화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실히 거짓말 같은 것’이라고 지적, 국화로서 재고(再考)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첫째, 무궁화는 38선 이남에 주로 피는 꽃이라는 것이다. 정태현(鄭台鉉)박사의《삼림도감(森林圖鍵)》에 의하면 무궁화는 전남북(全南北), 충남(忠南), 경기(京鍵), 경북(慶北), 황해도(黃海道)등 6도에만 자생하는 식물로 돼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지역적 한정성이야말로 국화가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을 갖추지 못한 샘이라는 주장이다.
둘째, 원산지가 우리 나라가 아닌 인도라는 것이다. 국화가 외래 식물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 진딧물이 많이 붙어 건강하거나 청결하지 못하고 단명한 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목근화일일영(木僅花一日榮)이라 하여 단명 허세(短命虛勢)의 표본으로 인용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넷째, 휴면기(觸期)가 너무 길어서 모든 꽃들이 움트는 봄에도 대추나무 못지 않게 그대로'죽은 듯 이 잠자는 태만한 식물’이며 꽃나무의 품(品)또한 빈궁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꽃피는 시기가 여름부터 가을까지이니 오래 피는 꽃 같지만 가을꽃 중에서도 꽃은 물론 잎까지도 제일 먼저 시드는‘실속없는 식물’이라는 것이다. 조씨는 또 무궁화가 이우는 모습 또한 불만이라고 했다.‘낙화상(落花相)이라도 좋았으면 하는데 산화(散花)도 아닌 병적으로 시들어 멀어지는 꽃잎의 추(簡)는 화랑(花郞)답지 못하다’는게 조(趙)씨의 지적이다. 그의 불만은 말미에 이르면서 절정에 달한다. 한국에 꽃피는 식물[開花植物〕이 2천종이 넘는 판에 하필 무궁화를 국화로 선택한 것은‘섬미안(審美眼)들이 열등하다는 얘기’며‘마치 아이를 버리고 태를 두였다 쓰는 격’이라고 통렬하게 꼬집었다. 더욱이 국토 전반에 널리 분포되지 않아 아직까지 악정에 시달리는 북녘 동포들은 무궁화란 식물이 실제의 것인 줄을 모르고 우화적(萬話的)인 것으로만 알고 있을 것이라는 주장까지 곁들였다. 조(趙)씨의 이의는 상당부분이 쉽사리 검증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이론과 시각의 차이에 따라 상당한 논란을 불러 일요킬 소지도 있었다. 해방 직후 잠시 거론됐던 국화시비가 10여 년만에 신문지상에 다시 올랐건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며칠 후···《동아일보》1982.7.30
국화논쟁 ②
식물학자 이민재(李敏載)씨가 나섰다. -무궁화가 국화로서 왜 적당하지 못한가 하는것은 대체로 조씨의 논지에 어긋남이 없으며 실제 식물학적으로도 정확한 것이고 또 해방 당초부터 우리들 사이에 일어온 논지와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 식물학도의 공의(共議)는 무궁화가 국화식물로는 부적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2월8일《조선일보》) 이(李)씨는 무궁화가 국화로서 부적합하다는 데 그치지 않고 한술 더 댔다. 무궁화가 국화냐는 것이다. 무궁화를 누가 국화로 지정이나 했으며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느냐. 그것은 참요로 중요하고 근원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이(李)씨의 말대로라면 무궁화는 교과서에서나‘우리 나라 꽃’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 국민적 합의 절차나 볍률규정 흑은 그에 준할 만한 과정을 거쳐 국화가 된 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모든 나라의 국화가 투표를 거치거나 법적 선언을 통해서만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전설에 의해서 혹은 국민의 애호에 의해 시간이 지나면서 굳어진 국화도 많다. 그런데 무궁화는 꽃의 장점이나 국민의 애호와는 달리 극히 타율적이고 모호한 과정을 통해 국화처럼 여겨지게 됐다는 것이 이(李)씨의 주장이다. 이(李)씨가 꼽는 국화의 전제조건은 다음과 같다. 국토 전역에 분포할 것 한국 원산종으로 민족을 상징할 수 있을 것 꽃모양, 이름이 아름다울 것 민족과 더불어 역사적 애환을 함께 했을 것 되도록 다른 식물보다 이른 계절에 필 것 등이다. 이(李)씨의 고향은 함북(成北), 이(李)씨는 서울 유학 이전에 단 한 번도 무궁화를 본 일조차 없었다. 이같은 개인적인 사정에서부터 식물학도로서의 심리적 취향에 이르기까지 무궁화는 국화로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이어 무궁화에 대치할 수 있는 식물을 제시했다. -옛날부터 우리 민족과 관계가 깊었다는 식물은 사대사상에서 오는 기호인지 모르나 대개 중국에서 물려받은 사군자〔梅蘭菊竹〕나 그 비슷한 모란(收蘭) 따위의 준군자식(準君子式)인 식물들이다. (2월8일《조선일보》) 그러나 이(李)씨는 이런 사군자류도 한국적 풍토에 비추어 국화로서의 자격이 충분치 않다고 지적했다. 무궁화가 아열대산 식물이어서 우리 국토에 맞지 않는 것처럼 이 사군자류 중에도 국화로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는 얘기였다. 그의 국화론은 진달래에 귀착했다. “어느 모로 보든지 진달래가 가장 알맞다”는 것이 었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김소월의 <진달래 꽃> 이처럼 민족정서와도 친화력을 가진 꽃이려니와 실생활 면에서도 우리와 밀착돼 있는 꽃이 진달래라는 이(李)씨의 주장이다.
옛부터 전해 오는 3월 3일의 화전(花煎)놀이도 떡에 진달래의 분홍 꽃잎을 넣어 그 빛깔과 향길ㄹ 즐겼으며 많은 시인들이 찬미함으로써 민족정서에 촉매제 역할을 한 꽃이라는 것이었다.
진달래는 또 철쭉과에 속하는 식물로 우리 나라에만 37종이 이나 분포하고 세계적으로도 3백여 종이 넘게 퍼져 있는 꽃이다.
국내 분포도 백두산에서 한라산에 이르는 전역에 걸쳐있으며 그 양 또한 풍성해 제철이 되면 이 진달래로 해서 아름다운 우리 강산이라는 인상이 더 강해지게 하는 꽃이라는 이(李)씨의 주장이었다.
꽃아 꽃아 진달래 꽃아 육지 평지 다 버리고 촉촉 부위에 너 피었냐.
육지 평지 내사 싫고 촉촉 바위에 본색일세 장성지방 민요
남도지방의 민요가락에도 나타나듯이 우리 나라의 어느 곳에도 분포하는 진달래는 '참꽃', 같은 과의 철쭉은'개꽃'으로 불리며 친숙해진 꽃들이다.
식물학 사전에 따르면 영어로‘로더덴드런’으로 불리는 철쭉은 원래 강원도 해변과 야산에에 자생하는 것이다. 이 꽃을 동해안에서 발견하여 원예종으로‘유럽’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러시아 해군의‘슐리펜 바하’였다는 것. 그래서 철쭉의 학명도‘슐리펜 바하’가 됐다는 것이다. 영어로는 철쭉과 진달래가 구별되지 않은 채 모두‘로더덴드런’으로 불리고 있으므로 같은 철쭉과의 이 두 식물이 이 땅에 오랜 역사를 가진 것으로 인정해도 틀림없다는 견해가 많다. 하여간 이(李)씨는“진달래야말로 품(品)이 담담하고 청초한 느낌을 주는 것이 좋고 봄이 되면 다른 식물들이 잠자고 있는 사이 마치 선구자처럼 제일 먼저 찬바람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부지런함이 좋다”고 극찬해 마지않으며 국화 후보로 제청했다. 그러면 무궁화는 어떤 꽃인가. 조동화(趙東華), 이민재(李敏載)씨의 주장처럼 과연 국화로서 부적격하기만 한 식물인 것인가. 《동아일보》1982.7.31
국화논쟁 ③
누가 이 땅의 무궁화를 욕하랴. 그 아름다움과 기품을 깎을 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무궁화 예찬의 전설은 멀리 중국의 한대(漢代)에까지 미친다. 전설은 이렇다. -한대(漢代)어느 지방에 절세의 미인이 있었다. 그녀는 시문(詩文)에 능하고 가창 또한 빼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장님 남편과 결혼하게 됐다. 그래도 그녀는 뭇 남자의 꾐에 넘어가지 않고 남편만을 사랑했다. 그녀를 연모(戀흙)한 성주가 있었다. 성주는 그녀를 꾀다 못해 부하를 시켜 강제로 붙잡아 갔다. 미녀는 끝까지 복종을 거부했다. 화가 난 성주는 마침내 그녀의 목을 베었다. 슬픈 전설은 계속된다. -미녀는 죽음에 앞선‘최후 진술’에서 한 가지 소원을 말했다.“내가 죽거든 남편의 집 뜰에 묻어 달라”고. 그녀는 소원대로 묻혔다. 얼마 후 그녀의 무덤에서 꽃이 피어났고 금새 집을 빙 둘러싸 버렸다. 마치 정절(貞節)의 넋이 피어나 남편을 감싸는 듯했다. (중국〈울타리꽃의 전설〉)
중국에서는 지금도 많은 지역에 무궁화를 울타리 꽃으로 심어 온다. 울타리에 만발한 무궁화의 새하얀 꽃잎과 붉디붉은 꽃 속에서 순절한 미인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이 피어난다는 전설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시문(詩文)의 무궁화 찬송은《시경(詩經)》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안여순화(願如舞華) 여름날 아침 울타리에 흐드러지게 피어 이슬을 머금은 청초하고 단아한 무궁화의 기품. 이 자태가 여자의 아름다움에 비해졌던 것이다. 물에 비친 달의 아름다움에 빠져 익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당대(居代)의 시선(詩仙) 이백(李白)의 노래를 옮겨 보자. - 뜰의 꽃들은 향기를 다투고 연못가 풀들은 봄빛 을 자랑하나 어찌 무궁화를 따를 수 있으랴. 섬돌 결의 순결하고 아리따움을.
“園花笑芳草 池草聽春色 猜不如僅化 輝婚玉階則” 원화소방초 지초염춘엑 유불여근화 선연옥계측
당대(曺代) 백거이(白居易)의 시도 있다.
-소나무는 천년을 자라 마침내 썩고 무궁화는 짧은 하루에도 스스로 영화를 누린다. “松樹千年 終日之朽 僅花一日 自爲榮” 송수천년 종일지후 근화일일 자위영 백거이의 이 시는 해석상의 논란을 빚어 왔다. 소나무의‘긴 숨’과 무궁화의‘반짝임’을 대구(對句)로 썼을 뿐 시인 자신은 어느 쪽을 더 선호(選好)한 것도 아니라는 설이 있다. 그 양편에 혹은 무궁화를, 혹은 소나무를 기린 다는 설이 맞서고 있다. 그러나 무궁화 예찬론자들은 어찌됐건 백거이의 이 글이 목근화일일영(木僅花一日榮)이라 하여 단명허세의 표본처럼 왜곡 해석되어 온 것은 천만 부당하여 오히려 무궁화를 부추겼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송대(宋代) 양만리(楊萬里)의 찬미를 듣자.
-아침에 화려한 손무(孫武)의 진(陣)처럼 피어 저녁 바람따라 녹주(綠珠)처럼 지도다. “曉觀欲開孫武陣 免一瓚體鐵辯寶” 효염욕개손무진 만일거수록주루 이른 아침 활짝 피는 무궁화란 전쟁터의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압도했던 손무(係武)의 진(陣)에 그리고 저녁에 지는 꽃은 절세미인 녹주(綠珠)의 아름다움에 비겼던 것이다. 이 땅의 유명한 무궁화 예찬론자는 호암 문일평(湖岩 文一平)과 영문학자 이양하(李敬河).
호암(湖岩)은 그 빼어난 박학으로 고금의 문집에 나타난 예찬을 모으고 자신의 감흥까지를 곁들여 이렇게 적었다.
-고대 중국 전국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지리서《산해경(山海經)》에 쓰인“君子國(군자국)···有薰花草(유훈화초)朝生幕死(조생모사)”는 군자의 나라에 무궁화가 있어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진다는 뜻이니 조생모사(朝生幕死)는 조개모위(朝開홉委)라고 함이 가할 것이며··· 《호암전집(湖岩全集)》 -따라서 악화 없는 것이 이 꽃의 특징의 하나로 볼 수 있거니와 어쨌든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어지는 것은 영고무상(榮括無常)한 인생의 원리를 보여 주는 동시에 여름에 피기 시작하여 가을까지 계속적으로 피는 것은 자강불식(自輝不息)등 이는 군자의 이상을 보여 주는 바다. 《호암전정(湖岩全集)》 그의 독특한 시각과 해석은 꽃이 펴고 지는 모습에 대한 찬미에 그치지 않고 존재본적인 당위에 까지 미치는듯하다. -화기(花期)의 장구한 것은 화품(花品)의 청아 한 것과 아울러 이 꽃의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것인 바 조선인의 최고 예찬을 받는 이유도주로 여 기 있다 할 것이다···. 《호암전집(湖岩全集)》 그는 또《산해경(山海經)》,《지봉유설(효峰類說)》과 이규보(李奎報)의 문집 등에 나타나는 표현들을 일일이 열거하고“국화(國花)로 삼은 것이 이런 사적(史的)인 유구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고 결론지었다. 이양하(李敬河)는 영문학자 특유의 부드러운 감성과 관찰력을 보여 준다. 그래서인지 그의 예찬 은 호암(湖岩)처럼‘무궁화 칭찬’으로 줄달음 치지 못했다. 섭섭하고 아쉬운 구석까지도 숨김 없이 적고 있는 것이다. -하루 아침 문득 푸른 잎사귀 사이로 보이는 한 송이 흰 무궁화는 감탄 없이는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무궁화는 흰 무궁화라야 한다. 우리의 선인(仙人)이 취한 것도 흰 무궁화임에 틀림이 없다. 백단섬(白싼心)이라는 말이 있을 뿐 아니라 흰빛은 우리가 항상 몸에 감는 빛이요 화심(花心)의 빨강은 또 우리의 선인(先人)들이 즐겨 쓰던 단청(丹靑)의 빨강이다.- 《무궁화》 -꽃은 수줍고 은근하고 겸손하다. 그러나 자신은 없지 아니하다. 왜 그러냐 하면 피기 시작하면 꽃 한 송이 한 송이는 대개 그날 밤사이에 시들어 쉬 말라 버리고 말지만 다음날 새 송이 잇대어 피고 있는 것이 8월이 가고 9월이 가고 10월에 들어서도 어떤 때는 아침저녁 산들바람에 흰 무명바지 저고리가 차가울 때까지 끊임없이 핀다. 그동안 피고 지는 꽃송이를 센다면 대체 몇 천 송이 몇 만 송이가 핀 것일까. 그의 절찬은 여기서 멈춘다. 쉽게 이우는 무궁 화 꽃잎처럼 그는 곧 실망한다. 《동아일보》l982.8.2
국화논쟁 ④
무궁화 꽃에 대한 이양하의 아쉬움은 이렇게 시작된다. -앵두꽃이 피고, 살구·복숭아가 피고 져도 무궁화는 아직 메마른 가지에 잎을 장식할 줄 모른다. 잎이 움트기 시작하여도 물 올라가는 나무뿌리 가까운 그루터기에서 시작되는 것이어서 온뜰이 푸른 가운 데 유독 지난해의 마른 꽃씨를 달고 있는 나무가 오랫동안 눈에 거슬린다.
(이양하의〈무궁화〉) 그는 이어“라일락이 피고, 장미가 피고 나서야 비로소 잎을 갖추는 것도 그렇지만 꽃이 피는 것도 무척 더디다”고 안타까와 했다. -보라에 가까운 빨강, 게다가 대낮 햇살을 이기지 못하여 시들어 오므라지고 보니 빛은 한결 생채를 잃어 문득 창기(姐娘)의 입술을 연상케 한다. 〈무궁화〉 -그러면 잎의 아름다움이라도 있나 하고 들여다보고 들여다봐야 거세고 검푸른 것이 꽃잎이라기보다 나뭇잎이었다. 〈무궁화〉 그의 상심은 이쯤에서 극을 이룬다. 그리고서는 다른 나라 국화에 비해“우리의 무궁화는 아무래도 우리 선인의 선택이 생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완곡하게 부정적인(?)견해까지 곁들였다. 한마디로 그는 무궁화에 대해 사랑과 상심의 감정을 덧붙여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전체적인 문맥으로 미루어 그의 상심은 지나친 사랑과 관심 그리고 문학도다운 파토스 때문이었다고나 할까. 거슬러 올라가 조선 세종(世宗)때의 기록에도 무궁화에 관한 것이 있다. 강희안(姜希願)이 저술한 이 땅 최고(最古)의 꽃나무에 관한 책《양화소록(養花小錄)》.이 책에서 무궁화를 소홀히 취급했던 당대의 선비 강희안(姜希頭)은 한‘무명의 선비’로부터 따끔한 질책을 받았다. 그는 선비 안사형(安士亨)의 서면질책과 자신의 회답을 이렇게 적었다. 먼저 안사형(安士亨) -옛《시경(詩經)》에 예쁜 얼굴이 순화같이 생겼다 했는데 이는 목근(木樓)·무궁화를 이름한 것이지요. 우리 나라는 단군께서 개국하실 때 목근화(木樓花)가 비로소 나왔기 때문에 중국에서 동방을 일컫되 반드시 근역(樓域)이라 하였으니 근화는 옛부터 우리 동토(東土)의 봄을 장식하였음이 분명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무궁화의 내력으로부터 운을 땐 안사형(安士亨)은 가시 돋친 질책을 시작한다. -목근(木僅)은《시경(詩經)》에 수록되어 누구든지 그 꽃의 귀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꽃이 귀하의 책에서 빠진 것은 매화가 초(楚)나라의《이소경(離騎經)》에 쓰이지 않은 것과 다를게 없으나 귀하가 어찌 그 꽃의 귀함을 몰라서 그랬으리오. 반드시 소홀히 생각하여 빠뜨린 것이리라. 종려는 귀로 듣기만 하고 드물게 보는 꽃이요, 근화는 눈으로 흔히 보되 드물게 듣는 꽃입니다. 속담에‘듣는 것을 귀하게 생각하고, 보는 것은 천하게 생각한다’함은 속인들의 집요함을 지적한 것이니 귀하의 고명하신 소견으로 어찌 이렇게 말하리오. 앞에서의‘속됨을 면치 못했다’함이 이런것 아니겠습니까. 이어 안사형(安士亨)은 지식과 견문을 토대로 한가닥‘가르침’을 곁들였다. -목근화(木僅花)는 홍·백 두 가지가 있는데 흰 것은 화판과 빛깔이 백작약과 같으니 귀하께서 촉 흰 것을 보시지 못하였기에 책에 넣지 아니했는지요···. 6, 7년 전 제가 충주(忠州)지방에서도 흰 근화(僅花)를 본 일이 있습니다. 강희안(姜希賴)은 이에 다소 당황한 듯하다. -나는 그 흰 근화(樓花)를 알지 못하고 다만 분홍색만 알 뿐 목면화와 비슷하여 황(黃)도 아니고 적(赤)도 아닌 것이므로 천히 여겨 버리곤 하였지만 매양 그 가지와 잎이 귀하게 생겨 얼핏 보면‘계륵(助鎬,닭갈비)’과 같은 것이 아깝다 해왔는데 이제 꽃이 흰 근화가 있음을 알게 되니 이것이 바로 순화(무궁화의 옛말)로서 옛날 우리 나라의 봄을 상징했다는 가 르침을 깨닫고 이제야 비로소 우물 안에서 나와 하늘 을 보았다 하겠습니다. 강희안(姜希願)은 역시‘큰선비’였다. 변명조로 운을 뗏으나 곧 자신을‘우물안 개구리’에 비유하여 승복했다. 그리고는 충주에 흰 근화가 있다는 안(安)의 지적 을 두고“지금부터 뜻과 생각이 충주로 달리지 않을 때가 없으니···”라고 자신을 낮추었다. 그리고 또 덧 붙였다. “어찌 이 꽃을 우등의 영역으로 끌어올리지 않겠습니까”라고. 조선 인조(仁祖)때의 이수광(李 光)이 기록한《지봉유설(芝峰類說)》에 인용된《고금주(古今註)》에 이같이“군자의 나라 천리 곳곳에 무궁화가 많이 핀다”는 귀절이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 고려(高麗) 신종(新宗), 강종(康宗)연간의 천재 시인 이규보(李奎報)가 이 꽃을 논한 부분도 있다. 그의 친우 중에 문(文)과 박(朴)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은 그 꽃이름을 무궁(無罷)이 옳다고 하고 한 사람은 무궁(無宮)이 옳다고 고집하다 마침내 결론에 이르지 못하여 제각기 근화시(僅花詩) 한편씩을 지어 이규보에게 화답케 하였다는 것이다. 류달영,염도의 저《나라꽃 무궁화》 이같은 기록으로 미루어 근역(僅域), 근화향(僅花椰)등으로 이 땅이 지칭된 이후 근화가 무궁화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적어도 고려 신종 이전부터 였다는 것이 무궁화 예찬론자들의
聆揚甄? 그러면 무궁화가 오늘날처럼 나라꽃(國花)으로 굳어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또 무궁화는 식물학적우로 어떤 꽃일까. 《동아일보》1982.8.3
국화논쟁 ⑤
무궁화. 꽃말은 영원 또는 일편단심. 아욱과 식물로 식물학상의 학명은‘히비스커스 시 리아커스’다. 히비스는 이집트의 신으후‘히비스커스’는‘신과 같다’‘신에게 바치는 꽃’의 뜻으로 풀이된다. ‘시리아커스’는 시리아가 원산지라는 뜻. 이름처럼 실제로 인도, 소아시아의 아르메니아, 중국 등지가 원산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최근 학설에 따르면 원산지로 알려진 중앙 아시아와 시리아에서는 자생하지 못하고 북부 인도로부터 중국 남부는 물론 북부까지 널리 퍼져 살고 있다. 중국의 무궁화 자생 지역은 호남(湖南), 복건(福建), 광서성(廣西省)등지. 고금의 중국 중원(中原)시인·묵객이 그 아름다움에 탄복해 빼어난 미인의 용모에 빗대어 온 부용(芙蓉)은‘히비스커스 므타리비스’로 꽃모양과 특성이 무궁화와 매우 비슷하나 속(屬)이 같을 뿐 엄밀한 의미에서 각기 다른 꽃이다. 하와이 방문객을 감탄케 하고 그곳 주화(州花)로 까지 지정된 명물인 속칭 하와이 무궁화 '히비스커 스로사넨시스’도 마찬가지다. 무궁화와 같은 속으로 한국인 여행객이 흔히 무궁화와 같은 꽃인줄 착각하지만 다른 종류의 꽃이다.
‘로사넨시스’란 중국 장미라는 뜻. 영국 등지에서까지‘차이니즈 로즈(중국장미)’라는 일반명으로 불린다. 요즘 유럽에서 쓰이는 무궁화의 영어 이름‘히비스커스 시리아커스’는 한때‘알데아 로세아(Althea Rosea)’로 불린적이 있다. ‘알데아’는 라틴어의‘치료한다’는 뜻으로 뿌리, 껍질 등이 유럽에서도 위경련, 복통, 설사 등의 치료 약재로 쓰인데서 연유하는 말이다. 우리 나라를 비롯한 동양권에서 뿌리와 껍질, 꽃(특히 흰 꽃)등을 응달에서 말려 위장장애, 장출혈, 토사곽란 등에 듣는 약재로 써온 것과 상통한다. 일명‘로즈 오브 샤론’ 성지(聖地) '샤론' 의 장미라 하여 낙원의 꽃을 연상하는 말로 가장 널리 쓰이는 무궁화의 또 다른 이름의 하나다.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을 거쳐 유럽에까지 전해진 탓으로‘페르시언 라일락’,‘폴리호크’등 으로도 불렸으나‘로즈 오브 샤론’이 통칭이다. 무궁화의 키는 2~4m 가량.
겨울을 나는〔耐寒性〕닥엽관목으로 남만주(南滿洲), 캐나다 같은 지역에도 자랄 수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꽃피는 시기는 7월부터 9월까지 1백여일. 정원수로 많이 길러지고 울타리용으로 심는 꽃으로도 유명하다. 나무껍질은 회백색이며 가지를 많이 친다. 잎모양은 달갈모양 혹은 마름모꼴의 알〔卵〕형이고 잎은 같은 속(屬)의 다른 꽃에 비해 작고 표면은 회녹색이다. 꽃은 새 가지의 잎 겨드랑이에 핀다. 짧은 꽃대가 있고 꽃의 직경은 5~7cm이며 꽃잎은 다섯 개로 퍼져 있다. 수술은 한 개〔單體〕인 수가 많으며 암술은 끝이 다섯 갈래로 갈라진다. 꽃빛깔은 백색, 분홍, 홍자(紅業)색 등 갖가지가 있고 꽃 깊은 부분에는 각각의 짙은 빛깔 얼룩점이 있고 꽃잎 쪽으로 가느다란 줄맥을 친다. 세계적으로 3백여 종이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 교배 육성을 통해 나온 것도 1백20여 종 에 달하며 국내 육성종도 80여 종이나 된다. 무궁화는 이같이 종(種)으로서의 안정성이 없어 개량하면 훌륭하고 아름다운 꽃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반면 내버려두면 자연히 볼품이 없어지게 된다 (서울대 식물과 정영호(鄭榮昊)교수의 말). 현재 미국의 켈리포니아 디즈니랜드 곳곳에 무궁화가 심어져 관광객의 눈길을 모으고 있으며 워싱턴의 미 국립식물원과 뉴욕 식물원에도 무궁화 회원이 설치돼 연구 육성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미국 농무성도 이 꽃에 큰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하고 있는 것. 무궁화는 꺾꽂이로 번식시킬 수 있으며 비교적 튼튼한 수목이어서 재배는 손쉬운 편이다. 꺾꽂이는 움트기 전에 전년생(前年生)흑은 전전년생(前前年生)의 충실한 가지를 15~20cm 길이로 잘라 3분의l 내지 2분의1 정도를 습기가 많은 흙에 꽂아 두었다가 이듬해 봄에 심는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무궁화의 모든 것이다. 그런데 식물학사전, 식물도감, 국어사전 등 국내외의 모든 무궁화에 관한 문헌 기록은 이같은 사설과 더불어 꼭 '한국의 국화’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무궁화가 요즘 쓰이는 의미의 국화로 굳어지게 된 경위는 무엇일까.
《동아일보》1925년 10월
21일자〈조선 국화무궁화의 내력〉을 살펴보자.
-아마 지금부터 25년 전 즉 조선에도 개화풍(開化風)이 불게 되어 양인(洋人)의 출입이 빈번하게 되 자 그때에 선진(先進)이라고 하던 윤치호씨 등의 발의로···양악대(辯離)도 세우고 국가도 창작할 때 ··부속되어 생겼다고 하는(?)애국가의 후렴인‘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이 끼일 때 비로소 근화(僅花)즉 무궁화를 무궁화(無窮花)라고 쓰기 시작한 듯 하다 합니다. -그리고 이와 전후하여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선생 등이 맹렬히 민족운동 즉 국수(國輕)운동을 일으킬 때 조선을 무궁화에 비겨 청산 같은 웅변을 현하같이 토할 때마다‘우리 무궁화 동산은···’하고는 주먹이 깨어질 듯이 책상을 두들기고 연단이 부서질 듯이 발을 굴렀습니다.- 이어《동아일보》는··· 《동아일보》1982.8.4
국화논쟁 ⑥
《동아일보》의 무궁화 국화 역사는 이렇게 맺어진다. 아마 이러한 자극과 동기-A개화기 선구자들의 애국가 후렴에‘무궁화’를 넣은 것과 4안창호 등 의‘무궁화 동산’이라는 표현 등-로 근화(僅花)가 무궁화로 변하여 그때에 국수(國輕)라고 하던 사람들의 귀에 이어지고 입에 오른 듯합니다. 1925년 당시《동아일보》로서도 우리 나라꽃의 역사와 유래를 명쾌하게 밝히기는 어려웠던 것일까. 그렬 수밖에 없다. 오늘의 식물학자, 꽃연구가 등은 거의 단언한다. 왜냐하면 어느 나라의 국화건 연원이나 국화 결정 시기가 명백한 것은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각국중 국화를 갖지 않은 나라가 드물다. 그러나 명쾌하고도 확실하게 어느날 아침 갑자기‘이 꽃이 국화다’고 정하고 나선 경우는 거의 없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대체로 19세기의 격동하는 세계 속에서 자기 나라 세력을 넓혀 가거나 보전키 위해 자체 결속과 단결을 부르짖는 민족주의의 역사와 국화의 그것이 일치한다는 데 모아지고 있다. 민족주의는 민족적 결속과 화함이라는 미덕과 더 불어 불가피하게 타민족과의 마찰을 빚는 악덕을 갖는다. 19세기 전후의 세계사는 열강과 약소민족 동(東) 과 서(西),제국(帝國)과 쇄국(銷國)의 얽히고 설킨 공격, 방어, 마장의 악순환을 보여 준다. 이같은 소용돌이 속에 국기와 국가 그리고 국화 같은 개념이 강조되고 이미 그것을 가진 나라는 더욱 더 강조하고, 갖지 않은 나라는 새롭게 만들어 가면서까지 민족적 단결의 구심점 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와 국화와의 관계는 우리의 경우 더욱 두드러진다. 무궁화가 강조된 시기도 일제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와 일치할 뿐 아니라 상징적 의미 또한 배일(排日)감정과 더불어 깊어졌던 것이다. 우선《동아일보》가 밝힌 것처럼 한말(韓末)이전 에는 무궁화를 민족의 상징이라 할‘국화’로 보지는 않았던 것이다. 민족적 위기가 닥치고서야 비로소 선구적 지식인과 반일 세력들에 의해 무궁화가‘한민족의 얼’을 상징하는 꽃으로 부각됐다는 사실이다. 이 무렵 일인들도 무궁화를 한국의 국화로 여겨 배척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한일합방 전야. 이토 히로부미〔伊顧博文〕, 마스야 아라스케〔曾弼冠 뾰助〕, 모리 오노리〔森大來〕, 이완용등 합방의 주역들이 함령전(成寧觀)뜰에서 숨을 마시고 합작시를 읊었다. ‘단비가 내려 만인을 적시니’(伊顧) ‘부상(持業·일본에 분포하는 히비스커스)과 근역(樓域. 한국)을 어찌 논하리오.’(曾弼) ‘함령전 위에 노화(露華)가 새로울 것이니’(森) ‘두 땅이 한 집안같이 천하가 봄이로다’(李) 이 매국(買國)과 매국(賣國)의 합작시에도 이 땅이 무궁화로 상징되는 역설이 빚어지고 있다.
이완용은 그후‘상근동근(桑根同根)’이라 하여‘한일(韓日)은 한 뿌리’라는 망발을 일삼기도 했다는 설 이었다. 일제(日帝)는 또 1926년 2월 27일자《시대일보 (時代日報)》를 통해‘근역(僅域)은 일본의 이칭(異稱)’이라는 제목의 엉뚱한 주장을 내세워 무궁화에 대한‘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무궁화는 어쨌든 일인(日人)들의 눈에도 바로 이 땅의 상징이었고 따라서 수난을 면키 어려웠다.
영국 민요〈올드 랭 사인〉의 곡에 맞춰 불려지던 애국가의 후렴이 널리 퍼지자 일제(日帝)는 심한 무궁화 박해를 시작했다. 전국토의 무궁화를 보는 대로 캐내 버리고 소학교 어린이들을 상대로‘무궁화을 쳐다보면 눈에 핏발이 선다’,‘부스럼이 옮는다’는 등의 모함을 시작했다. 이에《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한 한서(輪西) 남궁 억(南宮憶)선생은 강원도(江原道)홍천군(洪川那) 서면(西面) 모곡리(耗穀里)에 있는 노고산 기슭에 은둔하며 무궁화 묘목을 길렀다.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해 이곳에서 뽕나무밭 속에 무궁화를 번식시켜 전국에 퍼뜨렸다. 국사도 배울 수 없고 국기도 볼 수 없으며 애국가도 부를 수 없었던 만큼 무궁화만이라도 널리 퍼뜨려 해마다 자라고 꽃을 피게 해 우리 국민으로 하여금 민족얼을 잃지 않게 하고 조국 독립을 염원케 했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그가 한말(韓末)에 칠곡부사(浚谷府使)로 있을때 윤치호(尹致昊)와 상의해서 무궁화를 국화로 정했다고도 하나,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아무튼 그의 무궁화에 대한 정성은 대단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배재학당 재직시에도 여학생들에게 명주에 우리 지도를 그리고 각 도마다 무궁화 한 송이씩을 수놓게 하여 애국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후 1933년 11월 4일. 홍천(洪川) 모곡(후갑)학교에 검거선풍이 일어나 교장이었던 남궁 억(南宮憶)은 물론 교사들도 구금됐고 무궁화 묘포도 없어졌을 뿐 아니라 묘목들도 모조 리 불갈라 버렸다. 이 사건 이후 각급학교 교정에 비밀리에 심어졌던 무궁화까지도 모조리 뽑히는 참극을 당했다는 것이다. 무궁화가 오늘날‘국화’로 여겨지게 된 이면에는 이처럼 수많은 사연과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는 것이 다.그러면 외국의 국화는 어떤가. 《동아일보》1982.8.6
국화논쟁 ⑦
나라를 상징하는 각국의 국화는 대체로 아름답고 보기 좋은 꽃들이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영국의 국화는 대체로 장미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장미는 영국 중에서도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꽃일 뿐이다〔원예학자 류달영(柳達永)박사〕. 웨일즈를 대표하는 꽃은 수선화며, 에이레는 세잎 클로버, 스코틀랜드는 엉경퀴를 선택했다.
장미는 지구상의 적도 이북에만 2백80여 종이 분포하고 지금도 끊임없이 변종(數重)이 쏟아져 나와 문학도들 사이에 그 종류가 밤하늘의 별만큼 많다고 묘사되기도 하는 꽃이다. 영국 왕실은 오래전부터 장미의 아름다움과 탐스러움을 취해 휘장으로 삼아 왔는데 그 전통이 잉글랜드의 국화로 굳어지고 마침내 영국 전체를 대표하는 꽃으로 인식되기까지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웨일즈는 원래 달래과에 속하는 부추가 국화였는데 나중에 수선화로 바뀌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 이유는 부추를 씹으면 마늘냄새 비슷한 독특한 냄새가 풍겨 영국 사람을은 보통‘굴욕-을 참는다’는 표현을‘부추 씹는다(Eat the Ieek)’고 하는 관용어를 구사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에이fp의 클로버는 그 세 갈래 잎이 아름답게 균형 잡혀 있는 것을 기독교 교리의 성자, 성부, 성신 (聖子,聖父,聖神) 삼위일체의 상징으로 여겨 섬기게 됐다는 전설이 있다. 국화에 얽힌 전설 가운데서도 최고 걸작은 스코틀랜드의 영경퀴. 중세기 스코틀랜드는 바다 건너 덴마크와 전쟁이 잦았다. 쌍방의 공격과 방어가 뒤엉킨 치열한 전투중에 기묘한 사건이 벌어졌다. 침략해 온 덴마크 군이 스코틀랜드 장병들을 공격하기 위해 요-로에 매복했다. 그런데 매복 장소에 공교롭게도 영경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매복했던 덴마크 군은 마침내 영경퀴 가시에찔리다 못해 비명을 지르고 뛰쳐나와 버렸다. 이 바람에 매복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스코틀랜드 장병들은 대승을 거두었다는 일화가 있다. 영겅퀴는 가시 많고 볼품도 없는 식물이다. 성서(聖書)에서조차 좋은 뜻으로 쓰여지는 꽃이 아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 준 이‘구국의 꽃’을 두고두고 기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국화는 항상 아름다워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역사적, 문화적 특성과 연고에 따 라 정해지는 것이다. 멕시코의 선인장이나 그리스의 올리브 등은 말하자면 심미적 측면보다 지역성, 역사성 등을 강조한 ‘나라의 상징’들이다. 독일 국화 센토레아(Centourea)는 독일 황제와 관련있는 꽃이어서‘황제의 꽃’으로 불려 오다 그대로 국화로 굳어진 채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프랑스의 국화는 흔히 백합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붓꽃의 일종인 아이리스를 도안한 것이 널리 휘장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는 루이 왕조의 문장(救章)으로 프랑스의 권위의 상징이었다는 것.〔류달영(柳達 永),염도의(廣道義)저《나라꽃무궁화》〕 미국의 경우 아직까지 50개 주의 합중국을 대표하는 국화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 다만 각주를 대표하는 주화(州花)가 정해져 있는데 그것도 시대에 따라 바뀌는 수가 있다. 주화(州花)중 우리 귀에 익은 이름난 개나리(엘라배마), 선인장(애리조나), 양귀비(캘리포니아), 해바라기(캔자스), 들장미(아이오와), 오랑캐꽃(위스콘신), 귤꽃(플로리다), 사과꽃(미시간)등으로 개나리와 오랑캐꽃은 그 밖의 다른 주에서도 주화(州花)로 지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국화는 벚꽃과 국화(菊花). 국화는 원래 황실(皇室)을 상징하는 꽃이었으나 2차대전 때의 패전 이후 우표와 돈 등에 그려 넣기 시작하면서부터 벚꽃 과 대등한 위치로 올라서 이제는 제2의 국화(國花)로 굳어졌다. 은방울꽃은 스웨덴의 국화이면서 동시에 이웃 핀란드의 국화. 유명한 에델바이스도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두 나라에서 모두 국화로 삼고 있다. 국회는 대체로 자연환경, 역사적·문화적 특수성 에 따라 은연중 정해지는 수가 많지만 법으로 정하는 경우도 있다. 1929년 중국이 국화 모란을 매화로 바꾸어 법으로 정한 경우를 비롯해서 콜롬비아는 1937년 양란의 일종인 캐틀레아를 대통령의 포고를 통해 국화(國花)로 만들었고 베네수엘라는 1948년 이 나라 특산식물 타베비아를 농림부, 문교부 합동으로 국화(國花)로 만들었다. 그밖의 국화로는 네덜란드의 튤립, 인도의 양귀비, 이집트와 스리랑카의 연꽃, 오스트레일리아의 아카시아꽃, 캐나다의 단풍나무, 폴란드의 제비꽃, 벨기에의 아켈리아, 스페인의 오렌지꽃 등이 널리 알려 져 있다. 각국의 국화가 그 유래의 걸고 짧음에 관계없이 모두 현대적 의미의‘내셔널 플라워’로 굳어지고 강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19기 전후의 일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말하자면 각국이 세계를 무대로 외교적, 상업적 국익을 추구하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야기되는‘상대국과의 마찰이나 위기로부터 자국의 이익을 수호하고 민족적 단합을 꾀하는 수단으로 국화(國花) 라는 상징물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다시 이 땅의 무궁화 얘기로 돌아가자. 무궁화를 예찬하는 이들은 미학적 수사(修蘇)를 떠나 어떠한 과학적 증언과 검증으로 비판론자들을 논박하는가. 《동아일보》1982.8.7
국화논쟁 ⑧
‘무궁화가 국화로 못마땅하다는 말인가.’ 예찬론자들의 반론은 강하다. 첫째, 원산지가 외국이라는 설(說)에 대해. -원산지가 우리 나라라고 단언할 수 있는 꽃은 어떤 꽃인가. 식물의 자생시기나 연원은 식물학이나 원예학의 주된 연구분야지만 어떤 식물이 확실하게 언제부터 어디에 뿌리 내렸다고 규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과학적인 자료와 분석을 토대로 한 통 설이라는 것이 있을 뿐이다. [서울대 원예학과 염도의(薦道義)교수)〕 식물학사전에 무궁화의 원산이 시리아라고 적혀 있다 해서‘외래의 꽃’이라고 분류하고 국화로서 부적합 하다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기록상으로도 최소한 1천년 이전에 무궁화(僅花)가 자생한 것으로 밝혀지고 근역(僅域), 근화향(樓花椰)등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토착화된 식물로 치면 됐지 새삼스럽게 원산지를 따질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다. -이를테면 목화(木花)처럼‘고려(高麗)공민왕(恭愍王)때 문익점(文益漸)이 원(元)나라에서 들여왔다’는 등의 원산지를 구분할 수 있는 옛 기록이 있는 것 도 아니고 오히려 고려(高麗) 신종(新宗)이전에 무궁화라는 꽃이 자생했음이 드러나 있는데 사전상의 원산지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무궁화 애호운동회 김석겸(金碩議)회장〕 둘째,북위 38도선 이북지방에 자생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캐나다에 여행하면서도 무궁화가 훌륭하게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토양이나 여건은 다소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캐나다 같은 위도에서 꽃 핀다면 38선 이북이라고 불가능할 것도 없다. 또 굳이 야생이라야 국화가 된다는 법도 없으므로 공들여 가꾸면 되는 것이다〔류달영(柳達永)박사〕. 비록 이북지방에 분포돼 있지 않더라도 기후에 맞는 종(種)을 육성하고 번식시켜 가꾸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또 국화는 전 국토에 분포돼야 이상적이지만 꼭 전 국적으로 자생할 수 없으면 안된다는 이론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이나 중공 같은 방대한 국토를 커버할 수 있는 꽃은 없다시피 해 국화 선정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진딧물이 많다는 주장에 대해. -무궁화는 5월부터 새싹이 나오기 시작해 7월 중순경 줄기의 생장(生長)이 멈추고 꽃이 피기 시작한다. 진딧물은 새싹이 나올 때 극성을 부리고 꽃이 활짝 피는 시기에는 점점 줄었다가 10월경에 다시 늘어난다. 초봄에 살충제(디포테텍스)를 한두 차례만 뿌리면 방제되므로 진딧물이 흉이 될 것은 없다〔류달영 (柳達永)박사〕. 꽃나무마다 병충해가 전혀 없는 꽃은 없으며 화훼 방제를 위해 농약 등을 한두 차례 뿌리는 것은 상식으로 돼 있어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반론이다. 또 단심(丹心)이라는 교배 육성종 무궁화는 진딧물에 특히 강해 이 무궁화를 선택해 심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얘기다. 넷째, 꽃모양과 펴는 시기 낙화상 등에 대해. -무궁화는 미국 농무성이나 큰 식물원 등에서도 아음답고 휼륭한 꽃으로 지목해 연구개량에 힘쓰고 있다. 재래종 무궁화를 개량해 가꾸면 얼마든지 다양하고 탐스러운 형형색색의 무궁화를 창조할 수 있다. 현재 국내에 피는 육성종 등의 꽃 핀 모습을 보고 아름답지 않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염도의(廣道義) 교수〕. 피는 시기와 낙화상(落花相)등에 대한 지적은 주관적인 심미안의 차이일 뿐이다. 꽃 피는 시기가 봄이어서 좋고 여름이어서 나쁘다고 할 까닭이 있는가. 진달래처럼 봄에 반짝 피었다 간 져버리고 여름, 가을, 겨울을 멋적게 지나기보다 는 한여름 1백여 일을 무성한 잎과 함께 수십 송이씩 잇달아 피는 것이 훨씬 아름답다. 낙화(落花)하는 모습에 대한 눈도 마찬가지다. 꽃이 피었다가 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또 그 꽃이 아침에 피어 저녁에 기울고 며칠뒤 떨어지는 것은 다른 꽃의 생태와 별 차이가 없다 .피는 시간, 지는 시간을 따지고 지는 모양이 나쁘다는 것은 트집이 될 수 없다. 다섯째, 민족적·역사적 친화력이나 꽃으로부터 느끼는 국민적 감정에 대해. -국화라는 전제조건이 역사적으로 깊은 연고를 가져야 하고 민족의 애환을 함께 했어야 한다면 무궁화야말로 으뜸이다. 한일(韓日)합방이라는 민족의 위기와 더불어 민족의 대명사가 됐고 일제치하의 피어린 민족적 수난을 함께 했으며 광복의 기쁨과 환호 속에 무궁화와 태극기 그리고 애국가가 거리를 휩쓸지 않았는가〔김석겸 (金碩議)회장〕. 여섯째, 무궁화를 국화로 정한 법이나 정부 차원의 선언(宣言)이 없다는 데 대해.
-외국의 나라꽃도 법으로 정한 것보다는 일정기간 동안 국민의 사랑과 애호를 받고 많은 시민들로부터 나라를 상징하든 꽃으로 불리면서 국화로 굳어진 것들이 더 많다. 정부에서 휘장 등으로 사용하고 학교 교과서에서 ‘우리 나라꽃’요로 규정하는 이상의 별도‘선언’등 은 거칠 필요조차 없다. 무궁화 수종 개량에 힘쓰고 보급과 의미 부여에 앞장서 온 이들의 반론 또한 만만할 리 없다.
요컨대 무궁화 개량에 힘쓰고 과학적인 재배방식만 도입한다면 어느 나라 국화 못지않게 훌륭한 국화가 될 것이며 무궁화보다 더 적합한 국회는 없다는 주장인 것이다. 《동아일보》1982.8.9
국화논쟁 ⑨
무궁화를 예찬하는 이들 중에서도 더러 무궁화의 단점을 솔직히 시인한다. 국내 전역에 자생(自生)하지 않으며 진딧물이 많이 붙고 재래종의 경우 꽃모양이 그다지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점등은 확실히 단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예찬론자들은 어떤 꽃이나 장점과 단 점을 동시에 갖기 마련이라고 주장한다. 즉 장미가 아름답고 탐스러우며 향기 또한 짙지만 날카로운 가시가 있듯이 꽃은 양면성을 갖기 마련이 라는 것이다. 따라서 무궁화의 단점을 과학적으로 보완하고 종(種)을 가꾸어 나가면 얼마든지 훌륭한 꽃으로 보절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또 무궁화에 대한 일반의 잘못된 인식 또한 바뀌어야 된다고 주장한다. 일인(日人)들의 모함 과 비방에 의해 부정(不貞)한 식물로 여겨지거나가 꿀 만한 가치가 없는 꽃으로 치부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얘기다. 지금까지 개진된 무궁화 애호가들의 옹호론은 조동화(趙東華), 이민재(李敏載)씨 등의 국화재고론(國花再考論)과 엄밀한 의미에서 시기적으로 말하지 않는 부분도 많다. 논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전개되지 않고 단속적(斷續的)이었다는 점에서는‘명대결’의 범위를 벗어난다고 볼수도 있다. 그러나 국화논쟁이 구체화된 당시나 지금이나 논의의 진전은커녕 원점을 맴돌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가뜩이나 분단(分斷)의 국가현실 또는 이산(離散)의 사회분위기 등으로 구심(求心)의 회복이 절실한 오늘날 국화정립의 필요성이나 실익(實益)은 엄청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국화논쟁을 새삼 되풀이하는 이 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여깐 조(趙), 이(李)씨의 이의로 시작된 당시 국화시비의 결말은 다음과 같이 싱겁게 끝났다.
정확히 調 조(趙)이(李)씨 등의 시론(時論)이 발표된지 20여 일이 지난 56년 2월 28일 C지에 언론인 주요한(朱鍵輪)씨가 글을 실었다. "무궁화는 과연‘국화’인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만일 국화라는 것을 형식상 법령으로 제정된 것이란 뜻으로 해석한다면 우리 기억에 그런 제정이 있었다고 들은 일이 없다. 그렇게 보면 국화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국화라는 것은 반드시 법으로 제정해야만 되는것도 아닌것 같다.오랜 전통으로 자타가 인정하면 그렇게 인정된 예가 다른 나라에도 많다. 이번 경우에 그것은 차라리‘국민화’나‘민족화’라고 함이 정확할 것 이다.” 주(朱)씨는 이같은 자신의 국화론을 밝히고 이어 “하여간 무궁화는 국화라고 법령화된 것은 아니지만 대소자전과 교과서 등을 들춰보면 우리 나라 꽃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으므로‘나라꽃’이라고 말해 무방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주(朱)씨는 또 나름대로‘국화 후보’를 추천하기 도했다. “나의 개인 취미로 말하자면 진달래보다 개나리를 취하고 싶다. 개나리는 봄에 노랑꽃이 줄줄이 달리는 영춘화(迎春花), 영어로는 골든 로드(황금 막대기)라는 꽃이다. 진달래는 정열적인 대신 번뇌상(煩惱相)이 있는데 개나라는 오직 명랑 쾌할해서 좋다. 그리고 또한 가지에 줄줄이 피어나는 것이 우리에게 항상 협동의 정신을 가르쳐 주는 것 같다.” 주(朱)씨는 개나리뿐 아니라 봉선화도 후보로 꼽기도 했다. 주(朱)씨는 또 국화와 더불어 국가(國歌)도 문제라고 지적했다.“애국가‘동해물과 백두산이···’는 엄격히 국가(國歌)가 아니요 애국가다. 아직 국가의 지정 또는 제정이 없기 때문에 애국가를 국가처럼 부르고 있다. 그러면 애국가를 국가로 정식 지정할 것이냐 또는 새로운 국가를 제정할 것이냐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朱)씨는 결론 부분에 이르면서 서서히 원점으로 돌아서 버렸다.‘아직 연구 정도로 두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나아가자면 이미 조(趙)씨가 지적한 바와 같이 국기에 관한 문제도 일어나고 심지어는 국호에 관한 논의나 기년(紀年)의 문제 등도 재연(再戰)될수 있다. 이런 모든 문제는 조(趙)씨가 말한 바와 같이 다소의 불만이 있더라도 남북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그대로 두는 것이 일반 국민의 상식처럼 되어 있었던 것이 아직도 사실이요, 이를 재연(再戰)시킬 환경은 아닌 것 같다. 서울의 명칭을 바꾸자는 것을 기회로 국화문제를 다시 검토할 필요를 느낀다고 하였지마는 필자로서는 거꾸로 생각하여 남북통일되기 전까지는 서울의 명칭문제 같은 일도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을 것으로 믿는다. 학자들이 사사로이 연구하여 후생에게 참고로 남겨 두는 것은 좋을 것이나 바쁜 일이 많은 때에 국운(國運)에 크게 관계없는 지명이니 국화니 승격하는 등의 문제로 정력을 허비케 함은 피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사견(私見)이다.” 주(朱)씨의 논지(論旨)는 완전히 원점으로 돌아가 ‘그대로 덮어두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朱)씨의 소론을 마지막으로 국화논쟁은 결국 한치의 진전이나 소득도 남기지 못한 채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무궁화 애호가들은 오늘도 다수 국민들이 무궁화를 국화로 믿고 있다고 확신하며 보급과 육종(育種) 등 선양(宣揚) 활동에 힘을 쏟고 있다. 반면 아직도 무궁화가 국화로 정해진 것이 아니며 국화로서 마땅치 못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상당수에 이른다. 국화가 민족적·국가적 단결의 구심점 으로서의 역할이 큰 만큼 하루 속히 정립되고 육성해야 할 것 같다. 막연하게‘통일의 그날’만을 기다리며 외면할 문제만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적지 않다. 《동아일보》1982.8.10
이‘국화논쟁’의 결론은 우리 모두가 새롭게 정립(定立)해 볼 국화 무궁화의 사회일반적 인상과 그 위상(位相)에 있어 명확한 해답과 그 해결책을 주기에 는 다소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았다.
이에’82년 8월《동아일보》에 명대결이라는 시리즈 가운데〈국화논쟁〉을 맡아 취재, 집팔했던 담당 기자 김충식의 변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요즘 아침마다 마포 로터리를 스쳐가면서 민주당사 앞쪽 교통초소 주변에 핀 벚송이의 무궁화와 마주하게 된다. 어린시절 국민학교 담장에 피었던 소담한 모습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재래종 무궁화 꽃, 다섯개로 퍼진 분홍 꽃잎 그리고 초록빛 잎새 등이 삼십년의 세월 저편에 숨어 버린 고향의 한모습을 되살려내고 있다. 그렇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무궁화의 빛깔과 분위기가 시공(時호)의 벽을 넘어 이 어지럽고 복잡한 서울 거리에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작은 추억을 되살려 놓는 무궁화를 지켜 보면서 곧 어떤 아쉬움에 빠져든다. 생각의 갈파는 이윽고 우리국화 무궁화가 왜 제철인 이즈음에도 그리 보기 힘든 것인가 등 사회적 관심으로 접어는다. 기자란 어쩔수 없는 직업인가보다. 나는’82년 8월《동아일보》에 무궁화에 관한 글 을 연재한 적이 있다. 명대결이라는 시리즈 가운데 무궁화가 국화로서 제격이냐 아니냐 하는〈국화논쟁〉을 맡아 취재 접필했던 것이다.
그때의 취재 기억을 더듬어 보면 무궁화가 피는 시기는 7월부터 9월까지 약 1백여 일이다. 그렇다면 요즘이야말로 제철인 셈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관청이나 고궁, 아파트 단지 혹은 길거리에서 무궁화와 자주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 가령 중앙청 자리였던 국립박물관 터나 세종로 거리, 과천 정부청사 같은 곳에서 아름답게 핀 무궁화를 보는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할까. 무궁화가 국화로서 알맞느냐 하는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돼 갈 수 있겠다. 그리고 보다 아름답고 제격의 국화를 새로 정한다 해서 나쁠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무궁화는 국화 연구가나 국민들 사이에 움직일 수 없는 나라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나라꽃에 대한 관리와 정책이 모자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민간 차원의 선양운동도 그다지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고 할 수 없겠다. 내가 무궁화에 관해 취재하면서 인상 깊게 느낀 대목은 이 꽃은 개량하면 할수록 예쁘게 피워 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종(種)으로서의 안정성이 없어 개량하면 훌륭하고 예쁜 꽃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반면 내버려두면 자연히 볼품이 없어지게 되는 꽃이 바로 무궁화라는 것이다. 당시’88년 여름, 내가 수원에서 무궁화 수종개량 에 힘쓰던 염도의 교수(서울대 원예학과 교수였으나 교통 사고로 작고했다)와 함께 시험재배장에서 개량종 무궁화를 보면서 그 아름다운 빛깔과 모양에 감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개량종들이 관청이나 고궁의 꽃밭을 가득 채 운다면 얼마나 보기 좋을 것인가. 또 외국인들에게 얼마나 좋은 자랑거리가 될 것인가. 자라나는 후계 세대들에게는 얼마나 훌륭한 교육자료가 될 것인가. 나라꽃으로서의 무궁화의 유래는 어떤 국화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국화라는 것이 어떻게 정해졌느냐 하는 데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는 대체로 19세기 격동하는 세계 속에서 자기 나라의 세력을 넓혀 가거나, 민족을 보전 키 위해 결속과 단결을 부르짖는 민족주의 운동과 맥 을 같이 한다는 데 모아지고 있다. 그 무렵의 셰계사는 열강과 약소민족, 동과 서, 제국과 쇄국의 얽히고 설킨 공격 방어 마장의 소용돌이를 보여 준다. 이같은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기와 국가 그리 고 국화 같은 개념이 민족운동의 구심점으로 강조되고 그런 상징을 갖지 못했던 나라나 민족도 새롭게 정해 가면서까지 스스로의 결속을 다짐했다는 것이다. 민족운동과 국화와의 관계는 우리의 경우도 두드러진다. 무궁화가 강조된 시기도 외세 및 일제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와 일치할 뿐 아니라 상징적 의미 또한 배일 감정과 더불어 깊어져 왔던 것이다. 1925년 10월 21일자《동아일보》에 실린〈조선국화 무궁화의 유래〉를 살펴보자. 한말 개화바람이 불어닥치고 서양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하게 되면서 양악대도 생기고 국가도 만들었는데 그때 애국가의 후렴으로‘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이라는 구절이 들어가면서 바로소 무궁화가 국화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 그무렵 도산 안창호 선생 등이 민족운동을 부르짖고 다닐 때‘우리의 무궁화 동산은···’이라는 표현을 거듭하면서 나라꽃으로 상징되는 관념이 굳어 졌다는 얘기.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가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법칙d,러 설명했듯이, 무궁화도 몇몇 민족운동가들 이 인위적으로 국화로 제창해서 정해지고 국민들의 가슴속에 자리 잡게 된 것만은 아니다. 일제의 탄압과 박해가 있었기에 더욱 뜻깊은 꽃이 되고 이룰 수 없는 상징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3·1 독립운동이 이 땅을 휩쓸고 난 뒤부터 일제는 민족운동의 땅을 짓밟기 위해 전국의 무궁화를 보는 대로 캐내 버리고 소학교 학생들을 상대로‘무궁화를 쳐다보면 눈병이 옮는다’는 흑설을 퍼뜨리는 등 모진 정책을 실행했다. 이 때문에《황성신문》을 창간했던 남궁 억 선생 같은 이는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노고산 기슭에 은둔하며 무궁화 묘목을 숨어 기르며 몰래 퍼뜨렸다. 그는 일제 당국의 눈을 피해 뽕나무 밭에 무궁화 묘목을 감춰 기른 것으로 유명하다. 그분은 국사도 배울 수 없고 태극기도 볼 수 없으며 애국가도 부를 수 없는 시절인 만큼 무궁화만이라도 널리 퍼뜨려 민족얼을 잃지 않게 하고 독립을 염원했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바로 그가 한말 칠곡부사로 있을 때 윤치호 등과 상의해서 국화로 정했다고 하나 확인되진 않고 있는데 어쨌든 그의 무궁화에 관한 접념은 대단했던 것 같다. 그는 배채학당 재직시에도 여학생들에게 명주에 우리 지도를 그리게 하고 각 도마다 무궁화 한 송이 씩을 수놓게 해서 애국을 가르친 얘기로도 유명하다. 1933년 l1월 모곡학교에 검거 선풍이 일고 교장이었던 남궁 억은 물론 교사들까지 구금되고 무궁화 묘 포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묘목들도 모두 불살라져 버렸다. 이 사건 이후 각급 학교 교정에 몰래 심어졌던 무궁화까지도 모조리 뽑히는 참극이 있었다고 한다.
무궁화가 오늘날 나라꽃으로 당당히 여겨지기까지에는 이처럼 수많은 사연과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는 것이다. 더러는 지금도 무궁화가 나라꽃으로 제격이 아니 라는 이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국내 분포지역이 한 정적이고,병충해에 강하지 않고, 꽃 모양이 최선이 아니라는 등의 논리를 내세운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생각으로는 지금의 무궁화를 더욱 아끼고 개량종을 발전시켜 나라꽃으로 훌륭히 피워내는 게 가장 바람직한 일이 아닌가 한다. 예쁘다 예쁘지 않다고 논란에 대해선 이렇게 반박하고 싶다. 가령 멕시코의 선인장, 그리스의 올리브, 캐나다의 단풍나무 같은 것은 꽃이라고 할 수 조차 없는데도 그 나라의 상징으로 그 국민이나 외국 민이 인정하고 또 귀하게 여기는 현실 아닌가. 또 스코틀랜드 같은 곳에서는 그 애국주의적인 전설 하나 때문에 엉경퀴 같은 독특한 식물을 국화로 사랑하지 않는가. 중세기 덴마크 군대가 침략했을 때 스코틀랜드의 영겅퀴 숲에 매복했다가 그 가시에 찔려 패퇴한 유래 하나만으로도 지역과 민족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부질없는 논란에서 벗어나 우리의 것 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궁화를 보살펴야 할 때가 아닐까. 먼 훗날 우리의 아득한 후손들이 또 다른 꽃을 국화로 삼는 날이 온다손 치더라도 우리 당대의 영광과 오욕이 담긴 꽃 ,무궁화를 훌륭히 피워 내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할 것 같다. 서울에서건 지방 어느 곳에서건 요즘 같은 철에 흐드러지게 핀 무궁화 꽃밭을 자주 만나고 싶다.
우리 민족의 광복은 곧 무궁화에도 광복이었다. 민족정신이 다시 숨쉬고 민족이 급히 도약해야 할 때 에 무궁화란 더 큰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광복의 기쁜 마음으로 무궁화 동산을 만들어야 함에도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일제로부터의 독립이 완전한 의미의 광복이 되지 못했듯이 무궁화는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 여전히 광복을 맞이하지 못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무관심 속에서 무궁화는 잊혀 져 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단절(斷折)과 왜곡, 갈등과 대립을 겪어 오면서 민족정신은 일본의 압제(壓制)아래서 그러했듯이 수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암울한 근대사(近代史)를 딛고 민족정신은 다시금 우리 민족 최상의 가치가 되고 있다. 물밑의 흐름처럼 서서히 준비되고 있던 민족정신의‘부활’은 언제나 그랬듯이 무궁화와 함께였다. 모질게도 살아 남아 민족을 상징했던 무궁화란 이제 보이지 않는 손길과 평생에 걸친 사랑과 보호를 넘어 민족 구성원 모두의 가슴에, 생활에 깊이 그리고 화려하게 자리잡아야 한다.
첫댓글 역시나 무궁화에 대한 그 어떤 근거가 없다는~
이런 장황 한 글이,근화를 무궁화라고 할 어떤 근거도 안됨,
중국 울타리 꽃이 전설에서 근화를 울타리 나무로 소개 하였다면
근화는 무궁화일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왜냐하면 울타리로 사용되는
나무 중에 꽃이 피는 나무는 무궁화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근화는 무궁화 꽃으로 보입니다.
근화(槿花). 목근(木槿). 순화(舜華). 화노(花奴). 근화(槿花). 목근(木槿). 순화(舜華). 화노(花奴) 이것이 무궁화의 별칭 이라 하더라구요.여기서 중요한것은 중국어사전에 윗단어의 해당되는 꽃이 무엇인것이며?몇년도 부터 그렇게 불려져 왔는가?이런것이 전재가 된다면? 근역이라는 신라의 영토를 추정하는것도 모두 가능해진다란 것이지요.그러나 아시다 시피 중국어 사전과 무궁화가 그렇게 불려진 기록에 대해 말하시는 분들이 없기에,근역으로 영토추정을 하지 않는 것이구요.
순임금의 나라라는 뜻이 무궁화에 담겨있는 듯 보입니다..순화(舜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