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文章은 깊이 생각하고 끝없이 상상하는 힘에서 나온다... 李御寧 1 1. 設問조사 / 名士와 敎師 100명이 추천한 211개 한국의 名文... 趙成寬
◎ 개인별로는 趙芝薰(11표), 徐廷柱(9표), 咸錫憲 외 5人(6표) 順 ◎ 작품별로는 「메밀꽃 필 무렵」,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기미 독립선언서」順
◆ 名士와 논술교사가 말하는 좋은 문장을 쓰는 법
▷ 漢文을 배척해서는 名文이 나오지 않는다... 徐基源 ▷ 쉬운 글은 遇衆을 생산하는 혹세무민이 될 수도... 朴鍾萬 ▷ 사전을 곁에 두고 名文을 배껴라... 李萬基 ▷ 古典을 깊이 있게 읽어라... 이석록 ▷ 선진국의 글쓰기 교육 - 영국... 크리스 프라이스 ▷ 선진국의 글쓰기 교육 - 프랑스... 권지예
設問조사 - 한국의 名文 名士와 敎師 100명이 추천한 211개의 수필․논설․선언문․연설문․소설․ 시 名文을 읽으면 가슴은 뜨거워지고 머리는 맑아진다 趙 成 寬 月刊朝鮮 기자: maple@chosun.com 조사지원 李 相 姬 『너무 어렵다』/ 내용만 좋으면 과연 名文인가?
주요내용 『너무 어렵다』/ 내용만 좋으면 과연 名文인가? 金聖佑의 「돌아가는 배」 李御寧, 「山村餘情」 추천 黃順元-朴常隆-李文烈-崔明姬 洪命熹-金承鈺-趙世熙-李文求 趙芝薰의 志操論 徐廷柱의 自畵像 鄭浩承이 추천한 金洙暎의 詩 「눈」 李炯基의 落花 「山情無限」과 「畵帖紀行」 朴鍾鴻의 국민교육헌장 『金九의 「나의 소원」은 인류의 보편적 잣대』 李承晩의 논설문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 서울대 학생회의 4․19 선언문 / 名文 감상은 산림욕 효과 名文家 李御寧, 소설가 徐基源, 건축가 金洹의 名文 추천
月刊朝鮮은 5월 한 달 동안 각계의 名士(명사)와 전국의 유명 논술 교사(강 사)들을 대상으로 「20세기 한국의 名文(명문)」을 설문 조사했다. 名士 중 에서 추천 대상자를 선정한 기준은 자기 분야에서 일정 수준의 筆力(필력) 과 독서량을 인정받은사람을 중심으로 했다. 교사(강사)들의 경우 6大 도시 의 주요 고교와 학원과 방송 강좌(인터넷 웹사이트 운영 포함)를 통해 이름 이 알려진 사람을 선정했다. 이렇게 하여 200여 명을 선정, 이들에게 전화 나 팩스 혹은 이메일을 통해 詩 소설 산문 기행문 칼럼 서문 변론서 연설문 선언문 등 문학과 非문학을 총망라하여 평소 名文이라고 생각하여 즐겨 읽 었거나 지금도 읽는 대목을 세 개 이상 추천하고 간단하게 그 이유를 밝혀 달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반응이 나왔다. 이 설문지를 받은 이들 중 상당수가 『 너무 어렵다』거나 『도저히 못하겠다』고 했다. 어떤 시인은 『젊은 날 名文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다시 찾아 읽어보았는데 지금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면서 추천을 사양했다. 유력지의 칼럼니스트는 『여러 날 고민을 해보았는데 도저히 찾지를 못하겠더라』고 했다. 교사들도 못하겠다고 하기 는 마찬가지였다.
그랬다. 기자는 「名文 추천」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생각하는 名文을 추천한다는 행위는 독서의 깊이와 양, 그리고 교 양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기에 몹시 조심스럽고 쑥스러운 일이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名士 75명, 교사 25명 총 100명이 이번 조사에 응해 주었다(표 1, 2 참조).
이들이 수고스러운 작업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名文이 사라지고 非文과 誤文과 惡文이 판을 치고 있는 시대에 名文을 되살려 名文에 담긴 魂(혼)과 정신을 음미해 한국인의 정서를 순화시키자는 月刊朝鮮의 취지에 찬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일일이 書架(서가)를 뒤져가며 즐겨 읽는 구절을 찾아 보내주었다. 70代부터 30代까지 각기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 추 천한 名文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이 名文들이 젊은 날 자신에게 커다 란 감동을 주었고 오늘날까지 그 감동의 餘震(여진)이 정신 세계의 深淵(심 연)에서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 기사를 읽으면서 어떤 저명인사가 젊은 시절 어떤 글에 크게 영향을 받아 「오늘의 그」가 되었고, 「오늘의 그」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名文에 최소한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좋 은 글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의 삶은 말하고 있었다. 기자의 개인적인 所感(소감)을 덧붙이자면, 이제까지 많은 조사를 해보았지 만 이번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작업은 처음이었다는 것이다. 보내온 답안 을 이메일을 열거나 팩스로 받아볼 때 「이 사람은 과연 어떤 것을 명문으 로 생각하고 있나」하는 궁금증에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답을 보내준 名士 75명 중에는 공교롭게도 자신의 글이 다른 사람에 의해 추천된 사람이 더 러 있었다. 많은 名文家들이 故人이 되었지만 생존 인물 중에는 皮千得, 徐廷柱, 李御寧, 申榮福, 金聖佑씨 같은 사람이 여러 사람에 의해 중복 추천 된 경우였다.
안타까운 일은 皮千得, 徐廷柱, 申榮福씨로부터 名文을 추천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未堂은 생존 인물 중 한국 최고의 名文家라는 사실이 이번 조사를 통해 다시 확인되었다. 편지를 보내고 여러 차례 전화를 넣었지만 老患(노 환)으로 병석에 있는 未堂은 전화조차 받을 수 없는 형편이어서 아쉬움을 남겼다. 皮千得씨와 申榮福씨는 연락이 닿지 않아 추천을 받지 못했다. 조사 결과 시인 趙芝薰의 글을 추천한 사람이 11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 음이 徐廷柱로 9명으로부터 추천되었다. 그리고 종교가 咸錫憲, 독립 운동 가 金九, 시인 尹東柱, 철학자 朴鍾鴻, 소설가 李孝石, 시인 李箱의 글이 각각 6명으로부터 名文으로 추천되었다. 수필가 皮千得과 한국학의 개척자 崔南善의 글을 각각 다섯 명이 골랐다.
단일 작품으로 보면, 李孝石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이 여섯 명의 추천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咸錫憲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와 崔南善의 「기미독립선언서」가 다섯 명으로부터 추천되었다. 趙芝薰의 「지조론」, 金九의 「나의 소원」, 金聖佑의 「돌아가는 배」도 각각 네 명이 골랐다.
내용만 좋으면 과연 名文인가?
李光勳 경향신문 논설고문은 『美文(미문)보다는 글에 魂이 담겨 있느냐를 선정 기준으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까치글방 朴鍾萬 사장은 『소위 名文 이라고 알려진 것들 중에도 非文과 誤文이 많다』면서 『문장 형식에 맞춰 잘 쓴 것이라야 名文으로 본다』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30대 후반의 소설 가극작가인 朱仁錫(주인석한신대 교수)씨는 名文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名文은 大家(대가)의 몫이다. 범부가 때로 맛이 가서 꽤 빛나는 문장을 지어내 봤자 턱도 없다. 문장만으로 名文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는 말이다 . 名文의 언저리에는 저자의 이름 석 자가 후광처럼 어른거리고, 그 행간에 는 저자의 우뚝 선 생애가 네온처럼 반짝인다』
삼성경제연구소 崔禹錫 소장은 名文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밝혔다.
『좋은 글이란 내용도 좋아야 하지만 글 자체도 정확하고 분명해야 한다. 글의 장르나 대상 주제에 따라 문장 스타일은 달라질 수 있어도 기본은 마 찬가지일 것이다. 읽는 대상, 시대, 장소에 맞춰 的確(적확)한 힘과 어휘를 구사한 글이 좋은 글이며 글에 리듬이 있으면 더욱 좋다. 꾸준하게 좋은 글을 쓰는 사람도 있지만 쓸데없이 힘이 들어갈 땐 같은 분이라도 글이 떨 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보면 名文에 대한 定義(정의)가 설 것 같다. 名文이란 時空(시공)을 초월해 누가 읽어도 감동을 받는 글을 말한다. 80년 전에 나온 글도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본 것처럼 새롭고 신선하며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그런 글이 名文이다.
그렇다면 名文의 필요충분 조건은 무엇인가. 가장 기본적인 것은 문장이 文法(문법)에 맞게 완벽하고 어휘 사용이 的確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朱仁錫씨의 말대로 문장만으론 名文이 될 수 없다. 여기에 내용이 좋아야 하 고 글쓴이의 魂이 담겨 있어야 한다. 美文이라고 해서 전부 名文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여기 있다. 간혹 流麗(유려)한 문장을 읽으면서도 어딘가 허전 함을 느끼는 것은 바로 글에 깊이가 없고 魂이 스며 있지 않기 때문이다.
金聖佑의 「돌아가는 배」
다음은 장르별로 어떤 글이 누구에 의해 어떤 이유로 名文으로 선정되었는 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산문(수필) 분야에서 복수로 추천된 작품 위주로 살펴보자. 영문학자 이자 수필가인 皮千得(피천득)의 작품이 5명에 의해 추천되었다. 교과서에 도 실린 「인연」은 유영익(연세대 사학과 교수)씨와 윤갑희(경기 수리고 교사)씨가 골랐고, 「수필」은 이종덕(세종문화회관 총감독), 「산호와 진 주」는 소설가 박완서, 「맛과 멋」은 공명철(부산고 교사)씨에 의해 각각 추천되었다.
朴婉緖씨는 皮千得의 「산호와 진주」는 마음이 소박하고 군더더기 없이 단 순하지 않다면 절대로 쓸 수 없는 글이라고 설명했다. EBS논술강사인 윤갑 희 교사는 「인연」의 맨 끝 문장,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 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하고」부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金聖佑 한국일보 논설고문이 1999년에 펴낸 책 「돌아가는 배」의 경우 名士 네 사람의 추천을 받았다. 노재봉 전 국무총리, 최우석 삼성경제연구소 장, 송복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신봉승 방송작가가 그들이다. 盧在鳳 전 총리는 『이 책의 전체 문장이 전부 名文』이라고 말했다. 사극 작가이면서 현재 동해대 연극영화과 겸임교수로 있는 신봉승씨는 『한국어로 이렇게 아름다운 최고의 문장을 만들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감동적이었다』면서 『 글의 시작 처음부터 10페이지 정도까지는 너무 압권이어서 그 어느 부분을 발췌해도 모두 名文』이라고 했다.
法頂(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성공회대 경제학과 申榮福(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각각 세 사람의 추천을 받았다. 「무소유」의 경우 박종만(까치글방 대표), 권영민(서울대 국문과 교수), 김정환(광양제 철고 교사)씨가 골랐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나는 한 송이 펜지꽃이 부끄럽다」는 시인 강은교(부산 동아대 교수)씨, 「書道의 관계론 」은 박종만(까치글방 대표)씨, 「여름 징역살이」는 허섭(배재고 교사)씨 가 각각 추천했다.
李敭河(이양하)의 작품도 세 명이 추천했다. 건축가이자 도서출판 광장 대 표인 金洹(김원)씨는 「나무의 威儀」, 부산 배정고 교사 송차수씨는 「나 무」, 서울대 국문과 교수 권영민씨는 「경이 건이」를 각각 뽑았다. 알려 진 대로 「경이 건이」는 현 서울시장인 高建(고건)씨의 어린 시절 이야기 를 쓴 것이다. 高시장의 부친과 친구 사이였던 李敭河 선생이 친구의 아들 형제(경이와 건이) 이야기를 쓴 것이다.
문화부 장관을 지낸 李御寧씨의 산문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윤금 초, 이인화)와 「흙 속에 저바람 속에」(송복)가 세 사람의 추천을 받았다 . 시조시인 尹今初씨는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중에서 아래 부분을 특히 名文이라고 했다.
「의미- 그 의미란 무엇인가? 의미 이전의 세계 그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세계이다. 하지만 등에 언어의 혹을 메고 다니는 인간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없듯이 그런 세계로 들어갈 수는 없다. 음악만이 그 바늘귀로 자유로이 왕래한다」
수필가 金素雲(김소운)의 작품도 두 사람이 골랐다.「木槿通信(목근통신)」 은 러시아대사와 외무장관을 지낸 孔魯明(동국대 교수)씨가 추천했으며 「馬耳東風帖(마이동풍첩)」은 가곡 작곡가 李秀仁씨가 골랐다.
李御寧, 「山村餘情」 추천
교과서에 실린 閔泰瑗(민태원)의 「청춘예찬」도 논술교사 공명철씨와 서계 현씨 두 사람이 골라주었다. 여기서 잠깐 「청춘예찬」의 한 구절을 감상해 보자.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鼓動(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巨船(거선)의 汽罐(기관)과 같이 힘있다 .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이성은 투 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얼음이 있을 뿐이다…」 공명철 교사는 「청춘예찬」에 대해, 『적절한 비유와 표현과 함축적인 어 휘, 그리고 對句와 영탄법을 효과적으로 잘 사용한 명문장』이라고 설명했다. 「문장강화」를 쓴 소설가 李泰俊의 소설 「달밤」이 具常 시인에 의해 추 천되었다. 具常씨는 「달밤」에 대해, 『내용도 순수했지만 문장 자체가 서 정적이고 맑고 깨끗하다』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공병우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았다」(1989년, 대원사)는 외교통상부 본부대사 이동진씨가 골랐다. 시인 이문재는 한국일보 편집위원 김훈이 쓴 기행산문집 「풍경과 상처」를 선택했다.
이번 조사에서 천재 시인 李箱(이상)의 산문도 두 개 추천되었다. 하나는 잘 알려진 「倦怠(권태)」이고, 다른 하나는 李御寧씨가 고른 「山村餘情」 이다. 「성천기행」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산문은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다. 李御寧씨가 이 작품을 추천하면서 보내온 추천 이유는 뒤에 별도의 상자 기사로 처리했다.
소설에서는 李孝石(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단일 작품으로 여섯 명 의 추천을 받았다. 김준성(현 이수 그룹 회장, 前 경제부총리), 박근(현 한 양대 교수, 전 유엔대사), 박건호(시인․작사가), 김한빈(논술 사이트 운영 ), 이석록(화곡고), 윤갑희(경기 수리고)씨가 골랐다. 朴健浩씨는 『이 작 품은 분명 소설인데 詩的인 표현으로 넘쳐나는 작품』이라면서 『서정주의 「자화상」, 정비석의 「산정무한」과 함께 외우다시피 한다』고 설명했다. 소설가로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金埈成씨는 「메밀꽃 필 무렵」을 선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문체의 아름다움이나 작품 전체를 감싸 흐르는 짙은 서정성은 짧고 긴 문 장의 적절한 배치를 통해 한 점 풍경화를 연출해 낸다. 특히 달빛에 젖은 메밀꽃의 흰색과 붉은 메밀꽃 대궁, 콩잎과 옥수수 잎새의 푸른색, 그 속에 잠긴 채 걸어가는 남루한 차림의 장돌뱅이와 나귀의 대비는 현란한 생명의 약동을 펼쳐 보인다』 요절한 천재 시인 李箱의 경우 소설 두 작품(봉별기, 날개)과 산문 두 작품 이 추천되었다. 연세대 국문과 馬光洙 교수와 이화여대 국문과 이인화 교수 가 「逢別記」를, 서화가 김상옥씨와 경복고 이원희 교사가 「권태」를, 송 탄여고 이도희 교사가 「날개」를 골랐다.
EBS 논술강사이기도 한 이원희 교사는 「권태」에 대해, 『날카로운 감성과 정확한 언어 구사로 현대인의 무료한 삶의 외면과 내면을 똑 떨어지게 일 치시킨 名산문』이라고 했다. 이도희 교사는 소설 「날개」 중의 「…육신 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은 銀貨(은화)처럼 맑소…」 부 분을 특히 명문이라고 지목했다.
소설가 李光洙(이광수)의 작품도 네 개가 선정되었다. 安秉煜(안병욱) 숭실 대 명예교수는 「도산 안창호」와 「유정」을, 이인화 이화여대 교수(소설 가)는 「금강산유기」, 정진석 외국어대 신방과 교수가 각각 「민족개조론 」을 골랐다.
안병욱 교수는 두 작품 외에도 「동포에게 告하는 글」(안창호, 1924년)을 추천했는데 이 글도 사실은 이광수가 정리한 글이었다고 한다. 도산 安昌浩가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쓸 당시 그는 중국 北京에 있었다. 安昌浩 는 3․1 운동 이후 조국의 동포들이 크게 낙망한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동 포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심정으로 이 글을 썼다. 安昌浩는 北京의 한 여관에 장기 투숙하면서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춘원 李光洙를 오게 해 구술 정리한 것이 「동포에게 고하는 글」이다. 李光洙는 이 글을 동아일 보에 게재하려 했지만 日帝(일제)에 의해 좌절되었다고 한다. 甲子年(갑자 년)에 발표된 글이라고 해서 당시는 「甲子 논설」이라고도 불렸다. 安교수 는 『그 당시 이 글은 名文 중의 名文으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 향을 주었다』고 회상했다.
春園이 「도산 안창호」를 쓴 것은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조선일보 부 사장으로 있을 당시였다. 흥사단서 島山의 사상․인격․생애를 정리해달라 는 부탁을 받고 집필하여 완성한 것이다. 이 책은 해방 직후 지식인 사회에 서 애독서가 되었다.
「有情」은 春園 스스로가 「후세에 남기고 싶은 소설」이라고 한 작품이다 . 문학평론가들은 量에서는 「흙」 「무정」을 당할 수 없지만 質에서는 「 유정」에 비할 만한 소설이 없다는 평가를 한다. 安교수는 『정의, 아름다 움, 숭고함, 고마움을 잘 그렸고 한국 문학 중 최고의 감격을 준 작품』이 라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생전의 春園과 알고 지낸 安교수는 이런 에피소 드를 소개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선우휘 조선일보 논설위원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선우형, 우리나라 소설 중 어떤 것을 최고라고 생각해요」 그 랬더니 선우형이 「그야, 유정이지」라고 대답하더군. 「나도 그런데」 라 고 말하면서 서로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黃順元-朴常隆-李文烈-崔明姬
黃順元(황순원)씨의 작품도 네 사람이 선정했다. 崔禹錫 삼성경제연구소장 과 「달을 듣는 강물」의 저자 김진태 인천지검 특수부장이 「소나기」를, 소설가 이호철씨가 「목넘이 마을의 개」, 소설가 金埈成씨가 「나무들 비 탈에 서다」를 각각 골랐다. 金埈成씨는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선정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黃順元 문학의 절정기에 씌어진 이 작품은 전쟁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열 어보인 걸작이다. 단편소설 「소나기」에서 詩的인 문체로 두 어린 주인공 의 애잔한 심리를 생생하게 묘사해 낸 그는 이 작품에서 6․25와 4․19 이 후 좌절과 무기력에 빠진 젊은이들의 의식세계를 그려내며 역사와 인간, 전 체와 개인을 세밀하게 조명하고 있다』
李文烈(이문열)씨의 작품도 네 사람이 추천했다. 「시인」은 연세대 송복 교수, 「황제를 위하여」는 김광웅 중앙인사위원장, 「젊은 날의 초상」은 崔禹錫 삼성경제연구소장, 「금시조」는 金埈成 이수그룹 회장이 각각 골 랐다. 金埈成씨는 「金翅鳥」에 대해 이런 추천 이유를 밝혔다.
『李文烈의 문학에는 도도한 선비정신과 눈이 부실 정도로 유려한 문치, 그 기저에 흐르는 낭만주의적인 정신이 도처에서 드러난다. 그의 대표작 가운 데 하나이자 한국 중편 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금시조」는 이런 그의 문학 적 요인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朴常隆(박상륭)씨의 「죽음의 한 연구」는 시인 신현림, 시인 이문재, 한국 학원 강사 김진국씨에 의해 추천되었다. 신현림씨는 「죽음의 한 연구」를 펴고 아무 곳이나 읽을 때마다 이런 감정이 든다고 했다.
『껄쩍하니 술에 취한 듯, 계곡물처럼 콸콸 흐르는 듯 시적인 문체로, 뿌리 깊은 우리 언어의 육체를 보여주되 육체가 정신과 도저히 분리될 수 없이 옥박해 오니, 숨결로, 혼으로 나의 마음을 휘감아오니 오늘 내가 땅에 발을 처박고 한 그루 불두화로 피어나 생명으로 태어남을 감사하며 펑펑 울고 싶구나』金東里의 소설 「巫女圖」와 문학평론 「문학적 사상의 주체와 그 환경」도 세 사람이 골랐다. 같은 소설가인 李浩哲씨와 金埈成씨가 「무녀도」를, 역시 소설가인 李文求씨가 「문학적 사상의 주체와 그 환경」을 택했다. 金埈成씨는 『우리의 기층사상인 무속의 세계가 서구화의 바람 앞에 마치 저 녁 노을처럼 마지막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는 비장미를 풍기는 작품』이라면 서 『변화의 충격 앞에 힘겹게 버티고 서서 무속을 지켜내려는 삶의 비극적 고뇌가 잘 그려져 있다』고 했다.
최근 작고한 崔明姬(최명희)의 장편 대하소설 「혼불」은 두 사람에 의해 추천되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번역으로 알려진 번역가 겸 작가 김석희씨와, 「혼불」과 「로마인 이야기」를 펴낸 한길사 대표인 김언호씨가 이 작품을 선택했다. 김석희씨는 「혼불」을 택한 이유 를 다음과 같이 보내왔다.
『작가 스스로 말했듯이 「혼불」은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을 새긴」 각고의 산물이어서, 그 어디를 펼치든 그윽하고 청아하고 유려하고 심장한 글월이 아닌 것이 없다. 특히 제3권 115~116쪽 대목은 비유와 상징으로 조 탁한 문장에 동양 사상의 바탕까지 함축하고 있으니, 그 감동의 진폭을 어 찌 가두랴』 金彦鎬씨는 「혼불」을 가리켜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일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서와 정신을 가장 잘 새겨낸 글』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제 10권 제1장 「청사초롱」으로부터 시작해서 제10권의 마지막 장 「눈물의 비늘」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극채색으로 그려 내고 있다』고 평했다.
「濁流」의 작가 蔡萬植도 두 사람의 추천을 받았다. 「징소리」의 소설가 문순태씨(조선대 교수)와 박정백 교사(서울 잠신고)가 각각 「불효자식」 과 「태평천하」를 골랐다.
洪命熹-金承鈺-趙世熙-李文求
金承鈺의 「무진기행」도 소설가 金埈成씨와 사극 작가 辛奉承씨가 추천했 다. 辛奉承씨는 「무진기행」에 대해 『한글로 쓰는 문학 중에서도 소설 문 장으로는 가장 성공한 문장』이라고 평했다. 金埈成씨는 이 작품을 고른 이 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金承鈺의 대표작인 「무진기행」은 어두운 시절을 살아온 이 땅 지식인들 의 자화상과도 같다. 경제 우선주의에 밀려 무기력과 굴욕, 허무로 점철된 자유와 젊음의 표상이 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인지 모를 끝없는 불안, 방황, 머뭇거림, 부끄러움 등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짙은 안개와의 대비를 통해 이 작품이 발표될 당시의 시대 상황 을 잘 암시하고 있다』
趙世熙(조세희)의 대표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소설가 이순원 씨가 추천했다. 이순원씨는 대학 2학년 때 소설을 공부하면서 「소설적 문 장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으면 서 그 고정관념이 깨졌다고 했다.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單文으로 이뤄져 있다. 나는 그 단문에 매료되었다 . 아니, 그저 단순한 단문이 아니라 우리가 안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적 문 제에 대하여 단도처럼 핵심을 찔러 말하는 그의 글쓰기를 존경하게 되었다』李文求(이문구)의 소설집 「冠村隨筆(관촌수필)」는 문학평론가 申水晶씨에 의해 추천되었다. 申씨는 이 소설집에서 단편소설은 「空山吐月(공산토월 )」의 아랫 부분을 발췌했다.
「…어지간히 반성을 하고 보니 나는 남들의 근거 없는 짐작처럼 냉혹 잔인 난폭한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했고, 그런 짓을 두둔하거나 감싸준 적도 없 음이 뚜렷했다. 그러나 대인 관계만은 다소 별쭝스러웠으니, 냇자갈처럼 야 무지고 매끄러운 알로 깐 자와, 말많고 잔주접 잘 떠는 되다 만 인간, 단작 스럽고 근천맞은 좀팽이 따위에게 박절하게 대해 온 사실은 스스로 인정하 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申씨는 李文求 소설 중에서 특히 이 부분을 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채만식, 김유정에 이어 토속어의 세계를 그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구사하 고 있는 작가로 이문구를 들 수 있다. 그의 문장의 묘미는 무엇보다도 한학 의 전통에서 은연중 배어 나오는 간결미와 정확성, 우리 고유어의 정겨움, 그리고 일상적인 사물에 투영된 비유어의 생생함 등이다. 위 인용문 역시 그의 이러한 개성을 잘 보여준다. 「별쭝나다(별나다)」 혹은 「단작스럽 다(잇속을 차리다)」 등 이제는 거의 잊혀져 가는 단어들이 빚어내는 정감 어린 애수는 전통적인 농촌공동체의 몰락을 관조하기에 더없이 적절하며, 「냇자갈처럼 야무지고 매끄러운 인간」이라는 표현 속에는 자연의 심상에 익숙한 자만이 원활하게 구사할 수 있는 문장감각이 숨어 있다. 아마도 이 후의 우리 문학사에서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수공예품 문장임에는 틀림없다』 부산 동의대 張良守(장양수) 교수는 뛰어난 사실성이 돋보인다는 이유로 소 설가 洪命熹의 「임꺽정」을 추천했는데, 특히 「火賊篇 三」에서 당대 조 선 포도청 제일의 검사 연천령과 임꺽정의 칼싸움 장면(사계절刊, 임꺽정 제9권, 286~289쪽)이 압권이라고 덧붙였다.
趙芝薰의 志操論
詩 부문에서는 趙芝薰(11명 추천)과 徐廷柱(9명 추천)가 단연 두드러졌다. 특이한 점은 시인 趙芝薰이 詩를 포함한 산문과 논설, 그리고 연설문까지 두루두루 추천을 받았다는 점이다. 조지훈의 「僧舞(승무)」를 선택한 사 람은 시인 具常씨. 그는 『「僧舞」는 조지훈이 춤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승무를 승화된 표현으로 써내려가 즐겨 읽는다』고 말했다. 詩 「마음의 태양」은 부산 부경대 교수 姜南周(강남주)씨가 선택했다. 姜南周 교수는 「마음의 태양」과 처음 만난 것은 하동중학교 2학년 시절이 라고 했다. 6․25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도 지리산 공비가 출현해 토벌군이 진을 치고 있던 뒤숭숭하던 시절에 영어교사가 칠판 가득 적어놓은 詩가 바로 「마음의 태양」이라고 했다. 姜교수는 이런 소감을 밝혔다. 『그의 詩는 마치 최면제 같았다. 그때의 나에게 이보다 더한 세계 명작이 란 없었다. 어떤 名문장도 여기에 비할 수가 없었다. 암울한 소년 시절의 나에게 미래를 열어주고 꿈을 갖게 한 詩였다.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그랬 고 회갑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논설인 「志操論」을 선택한 사람은 경향신문 논설고문 이광훈씨, 맛칼럼니 스트 고형욱씨, 부산고 교사 공명철씨, 서울 화곡고 교사 이석록씨였다. 산 문 「돌의 미학」은 서울대 교수 권영민씨와 맛칼럼니스트 고형욱씨가 골랐 다. 소설가 박완서씨는 「放牛山莊記」를, 맛칼럼니스트 고형욱씨는 「나의 식도락」을 각각 추천했다.
朴婉緖씨는 수필 「放牛山莊記(방우산장기)」를 고르면서 『詩人으로 알려 져 있는 趙芝薰은 수필에서도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고 했다. 「방우산 장기」도 그 중 하나라는 것. 朴婉緖씨는 『그분의 수필을 읽으면 반듯한 문장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농담조로 내갈기는 문장이나 惡文이 범람하는 요즘 우리를 순화시켜줄 만한 글』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일보 金薰 편집위원은 고려대 문과대 교수이던 조지훈이 1950년 6월27 일 문과대학생들 앞에서 한 연설을 골랐다. 金씨는 『공산군이 미아리 고개 를 넘어 고려대 근처에서 국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 행한 30代의 젊은 교수의 생각이 놀랍다』고 말했다. 이 연설문은 나남출판사에 서 나온 「조지훈 全集」 1권에 수록되어 있다.
徐廷柱의 自畵像
未堂 徐廷柱는 「自畵像」 「국화 옆에서」「上里果園」 「無等을 보며」가 9명에 의해 천거되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대중에게도 친숙한 「국 화 옆에서」와 대중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自畵像」이 똑같이 세 사 람에 의해 선택되었다. 「상리과원」은 두 사람이었다. 먼저 「국화 옆에서」를 고른 사람은 소설가 金埈成씨, 민속학자 任東權씨 , 삼성경제연구소장 崔禹錫씨였고, 「自畵像」은 건축가 金洹씨, 대중가요 작사가 朴健浩씨, 부산학원 논술강사 강원용씨가 뽑았다.
金埈成씨는 「국화 옆에서」에 대해, 『미당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국 화 옆에서」는 불교의 윤회 사상을 밑바탕으로 자연계의 순환 원리를 설화 체 형식으로 쓴 것으로 현실의 무한한 아픔을 극복하려는 초인적 의지와 인 생의 무상함을 한 송이 국화꽃에 비유한 명작』이라고 말했다. 朴健浩씨는 『「自畵像」은 상식적 언어를 주관적으로 자유분방하게 해석한 것이 매력 』이라며 『특히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부분은 名文 중의 백미』라고 강조했다. 여기서 「自畵像」의 일부분을 잠시 음미 해 보자.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 만 하드라/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 치를 읽고 가나/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尹東柱의 「序詩」는 시인 金光林, 외국어대 교수 鄭晉錫씨, 무역협회장 金在哲씨가 각각 골랐다. 「별헤는 밤」은 연세대 교수 馬光洙씨, 인천지검 특수부장 김진태씨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인천 문일여고 교사 이 만기씨가 선정했다.
너무나 유명한 尹東柱의 「序詩」에 대해서 시인 金光林씨는 『사기, 협박 , 위선으로 얼룩진 사바세계에서 金力과 權力이 판을 치는 한 永遠(영원)한 良心(양심)의 소리로 남아 있을 듯하다』고 평했다.
柳致環의 詩도 네 사람의 추천을 받았다. 崔禹錫 삼성경제연구소장과 金炳局 고려대 교수가 「바위」를, 검찰총장을 지낸 鄭銶永(정구영) 변호사가 「깃발」을, 무역협회장 金在哲씨가 「행복」을 각각 선정했다. 鄭銶永 변호사는 『名文을 추천해달라』고 하자 즉각적으로 靑馬 柳致環의 「깃발」을 거명했다. 책상 머리에 붙여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보고 또 보 는 것이 「깃발」이라고 했다. 鄭변호사가 柳致環의 「깃발」과 처음 대면 한 것은 부산고등학교 1학년 때라고 한다. 鄭변호사는 이 詩를 읽을 때마다 『음미할수록 맛이 나면서 이렇게 간결하면서 또 멋진 문장도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젊은 시인으로는 베스트셀러 「연어」의 작가로 이름이 알려진 안도현씨의 詩 「너에게 묻는다」가 추천되었다. 세종문화회관 총감독 이종덕씨와 인 천 인성여고 교사 이한수씨가 이 詩를 선정했다. 「너에게 묻는다」는 단 세 줄이다. 이번에 名文으로 추천된 작품 중 가장 적은 글자수로 名文반열 에 오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金素月(김소월)도 세 사람의 추천을 받았다. 시인 具常씨가 「산유화」를, 가곡작곡가 李秀仁씨가 「진달래꽃」과 「산유화」를, 소설가 李文求씨는 김소월 詩 전체를 명문으로 뽑았다.
具常씨는 「산유화」를 추천한 배경에 대해, 『인간의 단독자적인 면과 더 불어서의 면을 잘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했다』면서 『일견 자연 서경 같으면서도 존재론적인 詩가 바로 산유화』라고 설명했다. 李文求씨는 「진달래꽃」과 관련, 『시대를 초월한 가장 대중적이고 아름다 운 작품』이라면서 이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했다.
『최근 연변 작가들을 만났는데 김소월 선생의 詩와 그분의 고향에 있는 詩碑(시비)를 화제로 삼았다. 역시 김소월 선생의 작품은 남북간 누구나 공감 할 수 있고 우리를 하나로 엮어주는 민족적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다』李殷相(이은상)의 「가고파」(이수인), 「성불사의 밤」(임동권), 「無常」 (구상)도 추천되었다. 「無常」은 노산이 동생의 부음을 접하고 인생의 무 상함을 쓴 산문이다.
鄭浩承이 추천한 金洙暎의 詩 「눈」
金洙暎의 詩는 세 사람이 뽑았다. 같은 시인인 鄭浩承(정호승)씨는 「눈」 을, 논술교사인 이광수(숭의여고)씨와 김한빈(논술 사이트 운영)씨가 각각 「시여, 침을 뱉어라」와 「폭포」를 골랐다. 鄭浩承씨가 특히 감동을 받은 부분은 「눈」의 마지막 연이라고 한다.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을 바라보며/밤새도록 고인 가 슴의 가래라도/마음껏 뱉자>
鄭浩承씨는 「눈」을 추천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1970년대 초 나는 20代였고 한창 詩를 공부할 때였다. 詩를 하는 사람들 에게는 앞 시대의 많은 詩들에서 영향을 받게 되는데 나에게는 김수영의 詩 가 그랬다. 나는 김수영 詩에서 詩的 洗禮(세례)를 많이 받았다』鄭씨는 특히 「가슴의 가래라도」라는 표현이 당시 충격적이었다고 고백했다.
『처음에는 순결의 파괴라고 생각했지만 점차 그의 표현에 있어 상징의 의 미를 이해해 갔다. 「가래」라는 것은 1970년대 유신 시대의 압박에서 詩人 만이 가질 수 있는 표현의 힘이라는 점에서 언제나 기억되는 문장이다』 1970년대 저항시인으로 알려졌던 김지하의 詩 「오적」 「황토」 「타는 목 마름으로」도 세 사람이 추천했다. 「황토」는 대성학원 강사 마상룡씨가, 「타는 목마름으로」는 강원과학고 유일환씨가 각각 선정했다. 「五敵」은 소설가 李文求씨가 골랐는데, 그는 앞서 소개한 것처럼 金東里 의 문학평론 「문학적 사상의 주체와 그 환경」도 명문으로 선정한 바 있다. 李씨는 「문학적 사상의 주체와 그 환경」은 『우리나라 본격 순수 문학에 있어 經典과도 같은 글』이라고 찬사했다. 또 「五賊」은 『문학의 영역을 넓히고 30년 동안 문인, 지식인의 민주화 운동과 현실 인식을 새롭게 하고 현실에 관심을 갖게 한 최초의 기폭제였고 단서였다』고 평가했다. 李씨는 자신이 반대적인 성격의 두 글을 名文으로 추천한 이유에 대해 『두 바퀴 가 잘 대응, 대비되며 문학사를 이끌어 오고 있고 각각의 성격에 있어 시작 이 되는 개념을 던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일환 교사는 「타는 목마름으로」를 골랐다. 그는 『이 작품이 암담한 현 실 속에서 민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절규를 서정적으로 잘 표현했다 』면서 『아울러 민족의 어두운 시대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시인의 파란만 장한 삶과 자유에 대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고 밝혔다.
李炯基의 落花
朴木月의 詩 「韓服(한복)」은 원로시인 金光林씨, 시문장 「체험적 실험」 은 서울대 교수 朴東奎씨가 각각 골랐다. 朴木月의 「韓服」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이다. <…그것은 입성이 아니다/비로소 돌아오는 질기고 너그러운/숨결이 베틀질 한 씀씀한 生活/肉身을 싸안아 肉身을/벗게 하는/무명 바지 저고리에 玉色 을 물들인 韓服 >(「韓服」의 末句)
金시인은 『우리나라 고유의 옷 한복을 이토록 絶唱(절창)한 노래를 일찍이 나는 보지 못했다』면서 『한복은 입성(옷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 아니라 육신을 싸안아 육신을 벗게 하는, 靈的(영적)으로 승화된 세계를 감싸는 것으로 發想(발상)된 이 놀라움』이라며 말을 잊지 못했다. 李相和(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건축가 김진애(서울포 럼대표)씨와 외국어대 교수 정진석씨가 골랐고, 李陸史(이육사)의 「曠野( 광야)」는 부산 동의대 교수 장양수씨와 경복고 교사 이원희씨가 골랐다. 李炯基의 시 「落花」는 두 명의 논술교사(이순희, 공명철)가 천거했다. 「落花」의 한 대목을 보면,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 다운가 」이다.
공명철 교사는 「落花」를 추천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떨어지는 꽃을 보며 가슴 아파하기보다는 열매를 맺기 위한 고통으로 생 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자연의 섭리는 인간사를 생각하게 한다. 새로운 만 남을 위한 헤어짐의 고통을 담담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수용하고 있다』 시인 高銀은 「白石 詩全集」을 추천했다. 「白石 시집」에 대해서는 『근 대 詩史에서 가장 빛나는 詩 중 하나』라면서 『모국어를 사용하여 사물과 대상을 관찰하는 정화된 시선이 놀랍다』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金光林 시인은 鄭芝溶의 「白鹿潭」 첫 句를 추천했는데 그 배경에 대해,
『백록담에 두 번 가봤지만 한라산에 오를 때마다 이 귀절을 되뇌이다 보면 피곤도 잊곤 한다』면서 『표현에 있어 상황 제시만으로 감정을 배경에 숨 겨놓은 名文』이라고 말했다.
소설가 겸 극작가인 朱仁錫(주인석) 한신대 교수는 만해 韓龍雲(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을 추천했다. 朱씨는 大家의 빛은 序文(서문)에서 발한다면서 「님의 침묵」의 서문인 「 군말」을 소개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衆生이 釋迦의 님이라면 철학 은 칸트의 님이다. 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戀愛가 自由라면 님도 自由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自由에 알뜰한 拘束을 받지 않더냐. 너 에게도 님이 있더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洋이 기루어서 이 詩를 쓴다>
「山情無限」과 「畵帖紀行」
「자유부인」으로 유명한 소설가 鄭飛石(정비석)의 경우, 소설보다는 그의 기행문 「山情無限」이 명문으로 추천되었다. 대중가요 작사가 朴健浩씨와 1996년 「달을 듣는 강물」(수월 스님 이야기)을 쓴 바 있는 김진태 인천 지검 특수부장이 「山情無限」을 골랐다. 朴健浩씨는 「山情無限」의 주요 대목을 거의 외우다시피한다고 했다. 김진태씨가 이 글에서 특히 명문이라 고 생각하는 부분이라며 발췌한 곳은 다음과 같다.
<…태자의 몸으로 麻衣(마의)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에 들어온 것은 천년 사 직을 망쳐버린 비통을 한몸에 짊어지려는 고행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 여잡는 낙랑공주의 섬섬옥수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 가 어떠했을까? 흥망이 在天이라, 天運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가 있으니 태자가 苦行으로 창맹에게 베푸신 두터운 자혜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년 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던가!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 애락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 움큼 腐土(부토)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 각하니, 의지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롭다…>
1998년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서울대 미대 金炳宗 교수의 「畵帖紀行(화첩 기행)」은 서울대 부총장 宋炳洛씨에 의해 추천되었다. 宋부총장은 특히 「 아리랑과 정선」 편이 名文이라고 추천했는데 그 이유를 『김병종은 한국 사람과 문화와 풍토의 특성을 꿰뚫고 있는데다 젊어서부터 글을 많이 써서 좋은 문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영남대 교수 兪弘濬씨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도 무역협회장 金在哲씨 와 성남고 교사 강호영씨가 천거했다. 강호영 교사는 특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의 「아!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부분이 白眉라고 했다. 「…만약에 감은사 답사기를 내 맘대로 쓰는 것을 편집자가 조건 없이 허락 해 준다면 나는 내 원고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쓰고 싶다. 아!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아! 감은사 ?」 강교사는 이 부분은 저자의 우리 문화재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라고 부연했다.
현재 무역협회장인 金在哲씨의 기행문 「거센 파도를 헤치고」도 저자에 의 해 自薦(자천)되었다. 동원산업의 창업자인 金在哲씨는 기업인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전부터 筆力을 먼저 인정받은 사람이다. 원양어선 선장 시 절 金회장이 쓴 글이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남태평양에서」), 중학교 2 학년(「바다의 寶庫」), 고등학교 2학년 교과서(「거센 파도를 헤치고」)에 실려 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의 세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海洋(해양) 기행문이다.
朴鍾鴻의 국민교육헌장
종교가이자 민권운동가 咸錫憲(함석헌)의 글이 6명의 추천을 받았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한승헌 변호사, 김재철 무역협회장, 이광훈 경 향신문 논설고문, 김언호 한길사 대표, 정진석 외국어대 교수로부터 선정되었으며, 「聖書 입장에서 본 한국 역사」가 장기홍 전 경북대 지질학과 교수에 의해 천거되었다. 장기홍씨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 역사」 중에 서 「해방」과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가 명문이라고 했다. 金彦鎬 대표는 『咸선생님의 글들은 그 사상뿐 아니라 어문일치도 그렇고 시적인 호소력으로 「현대 한국의 최고 명문」』이라면서 『여러 글들이 있 지만 특히 이것을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6․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이라는 副題(부제)가 붙은 이 글(생각하 는 백성이라야 산다)에서 咸錫憲은 이승만을 임진왜란 때 압록강가에서 감 상적인 울음을 운 宣祖(선조)에 빗대어서 비판했다. 李承晩(이승만)도 부산 에서 울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음은 鄭晉錫 교수가 뽑아온 부분이다. 「…울기만 하면 무엇해? 울려거든 민중을 붙잡고 울었어야지. 민중 잡아먹 고 토실토실 살찐 강아지 같은 벼슬아치들 보고 울어서 무엇해? 여우 같고 계집 같은 소위 측근자 비서 무리들 보고 울어 무엇해? 나라의 주인은 고 기를 바치다 바치다 쓰러지는 길거리에 쓰러지는 민중이지 벼슬아치가 아니 다?…」
철학자 朴鍾鴻(박종홍)의 글도 여섯 명의 추천을 받았다. 「학문의 길」은 소설가 문순태씨, 서울대 교수 권영민씨, 무학여고 교사 김대하씨가 각각 추천했고, 울산대 석좌교수 최정호씨는 「李退溪銅像銘文(이퇴계 동상 명 문)」, 연세대 교수 함재봉씨는 「국민교육헌장」, 서울대 박동규 교수는 「학문의 본질」을 각각 골랐다.
연세대 정외과 咸在鳳 교수는 「국민교육헌장」을 추천했다. 咸교수는 『엉 뚱하다고 생각지는 말아 달라』며 이런 소감을 밝혔다.
『朴鍾鴻 선생의 국민교육헌장은 우리 세대에게는 잊혀질 수 없는 「헌장」 이다. 얼마나 외웠던지 어디 가서 타자 연습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바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치곤 한다. 후에 내용만으로 볼 때 문제가 있다는 말도 많았으나 문장이 매끄럽고 문체에선 힘이 느껴진다』
『金九의 「나의 소원」은 인류의 보편적 잣대』
金九의 「나의 소원」도 여섯 사람이 추천했다. 洪思德 국회부의장(한나라 당․5選)은 白凡 金九의 「나의 소원」 중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한 편 을 名文으로 추천했다. 이 글은 李鍾德 세종문화회관 총감독과 건축가 金鎭愛씨, 정일학원 강사 박종씨의 추천에도 포함되는 것이다. 시인 高銀과 연 세대 사학과 柳永益 교수는 「백범일지」를 골라주었다. 高銀씨는 『2~3년 마다 「백범일지」를 한 번씩 읽고 눈물을 흘린다』고 말했다. 박종씨는 「나의 소원」은 주장의 명료성, 문장의 문법성, 현실인식의 명증 성, 그리고 문화에 대한 높은 이해 등이 돋보인다고 했다.
洪思德 국회부의장은 『좋은 글이 학벌이나 재주가 아니라 깊은 묵상에서 저절로 우러난다는 살아 있는 본보기』라며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나의 소원」은 배달민족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보편적인 잣대』라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韋菴 張志淵의 명논설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은 姜英勳 세종 재단 이사장, 李光勳 경향신문 논설고문, 鄭晉錫 외국어대 신방과 교수가 골랐다. 鄭교수는 「대호척필」도 이와 함께 추천했다. 「시일야방성대곡」 논설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직후 황성신문 사장이던 張志淵이 쓴 것이다 . 「是日也放聲大哭」은 한문투의 문장이기 때문에 한글로 번역된 것을 읽 어야 문장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姜이사장은 『이 사설은 全文에 민족정 기가 넘쳐 흐르고 겨레의 폐부를 찌르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어 추천한다』 고 밝혔다.
「大呼擲筆」(황성신문 1903년 2월5일자)은 황성신문의 경영이 어려운 것은 독자의 숫자가 적고 구독하는 사람들은 구독료를 떼어먹으니 더이상 신문 을 발행할 방법이 없어 「크게 소리 지르고 붓을 던진다」는 논설이다. 정 진석 교수가 보내온 이 논설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오호라, 본사는 영영 장님 귀머거리가 되었도다. 그러나 본사의 장님 귀 머거리됨을 비감함이 아니라, 全 국민의 장님 귀머거리됨을 분하고 한탄스 럽게 여겨 크게 소리지르고 둔한 붓을 던지노라」
이 논설이 나가고 나자 많은 독지가들이 성금을 신문사로 보내와 다시 신문 을 발간할 수 있었다고 한다.
李承晩의 논설문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초대 대통령 李承晩의 글도 두 사람이 천거했다 . 駐UN대사를 지낸 朴槿(한양대 교수)씨는 20세기 초(1904)에 나온 李承晩 의 「독립정신」을 추천했다.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 柳永益씨는 「독립정 신」과 「나라의 흥망은 운수보다 정치에」(제국신문, 1901.2.8 기고)를 택 했다. 「독립정신」은 현대 한글이 나오기 전인 조선조 말엽에 우리말로 쓰 여진 최초의 「순한글 논술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朴씨는 추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이 책은 현대 한국 정치사상의 거대한 저수지와도 같다. 거기에는 오늘날 에 우리 정치 사회 외교가 직면하는 현안들의 거의 모두가 직간접으로 거론 되고 문제 삼고 있을 뿐 아니라 나라를 상실하던 무렵의 우리 민족 역사에 관한 살아 있는 증언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의 문장도 논리 전개 방식이 나 직유법의 구사에서 그 후에 나온 어떤 학술 서적이나 논술보다 뛰어난 면을 지녔다고 믿는다. 예술에서 추상화가 타락하면 칠장난이 되는 것처럼 요즘 우리들 젊은 세대간에는 「현대성」과 「진보성」의 탈을 쓴 글과 말 의 장난이 난무하고 있다. 우남의 「독립정신」은 이 같은 말의 장난병을 치유할 수 있는 좋은 약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李承晩 연구의 권위자인 柳永益 교수는 「나라의 흥망은 운수보다 정치에」 라는 논설에 대해 이런 평을 했다.
『이 글에서 청년 이승만은 나라의 흥망성쇠란 운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정 치, 즉 국민들의 의지와 노력에 달렸다는 점을 어려운 한문 용어들을 명쾌 하게 구사하면서 설득력 있게 논파하고 있다. 언론인 이승만이 남긴 여러 名文 가운데 하나로서 내용이나 문장의 기교면에서 우리나라 개화기의 명사 들이 남긴 논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백미라고 간주할 수 있다』柳永益 교수는 20세기 초반의 名文으로 이것과 함께 朴容萬(박용만)이 191 0년 1월, 李承晩의 책 「독립정신」의 추천사로 쓴 「後序(후서)」를 들었다.
『이 글은 1900년대 초에 이승만과 한성 감옥서 囹圄(영어) 생활을 같이 하 면서 이승만과 결의 형제까지 되었던 박용만(1881~1928)이 이승만이 옥중에 서 저술한 「독립정신」의 원고를 미국으로 비밀리 반출하여 LA에서 발간할 때 집필한 일종의 추천사이다. 이 글은 「한국의 양계초가 되려고 마음먹 었던 청년기 박용만의 높은 문장력을 잘 드러내는 글이다』 언론인시인 李興雨(이흥우)씨는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崔淳雨의 「한국미 술의 참모습」과 「바둑이와 나」를 뽑았다. 「한국미술의 참모습」은 崔淳雨 전집 1권에, 「바둑이와 나」는 5권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
건축가 金鎭愛씨와 배재고 교사 허섭씨도 崔淳雨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 에 서서」를 꼽았다. 金鎭愛씨는 특히 이 책의 첫 문장을 名文 중의 白眉라 고 했다.
<조국의 강토를 하늘에서 굽어보면 그림같이 신기한 밭이랑 논이랑의 무늬 진 아름다움과 순한 버섯처럼 산기슭에 오종종 모여서 돋아난 의좋은 초가 지붕의 정다움이 가슴을 뭉클하게 해 줄 때가 있다. 그리 험하지도 연약하 지도 않은 산과 산들이, 그다지 메마르지도 기름지지도 못한 들을 가슴에 안고 그리 슬플 것도 복될 것도 없는 덤덤한 살림살이를 이어가는 하늘이 맑은 고장, 우리 한국사람들은 이 강산에서 먼 조상 때부터 내내 조국의 흙 이 되어가면서 순박하게 살아왔다>
2000년 IPI 선정 언론영웅으로 선정된 崔錫采의 논설 「호헌 구국운동 이외 의 다른 방법은 없다」(조선일보 1960.3.17)와 「일부 군인들의 탈선 행동 에 경고한다」(조선일보, 1963. 3.16)는 언론학자 鄭晉錫 교수가 골랐다. 前者는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 이틀 후에 쓴 사설로 4․19의 도화선이 되 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이 鄭교수의 설명이다. 後者는 崔錫采가 수도 경비사 장병 80여 명이 최고회의 앞에서 軍政(군정) 연장을 요구하며 벌인 데모에 격분하여 단숨에 써냈다고 한다.
연세대 정외과 咸在鳳 교수는 金容沃(김용옥)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를 추천하기도 했다. 책 전체가 名文이기도 하지만 특히 序文(서문)이 名文이라는 것이 咸교수의 설명이다.
연세대 국제대학원 柳永益 교수는 현대의 名文으로 역사학자 李基百(이기백 )의 「한국사신론」의 序章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 서울대 교수 金暻東 의 「근대화론」, 宋復의 「동양적 가치란 무엇인가」의 머리말, 역사학자 이기동의 「북한 역사학의 전개과정」, 소설가 崔仁浩의 「나는 스님이 되 고 싶다」, 고려대 교수 徐之文의 「어느 쾌락주의자의 고행길」, 수필가 皮千得의 「인연」 등을 천거했다. 柳교수는 『간결하고 평이한 필치로써 논지를 분명히 세웠다는 점에서 모범이 되는 글』이라고 추천 이유를 설명했다. 서강대 李根三 교수는 외국어대 鄭晉錫 교수가 엮은 「일제시대 민족지」 1권 중 706쪽의 「시대와 인생」(조선일보 논설․필자 미상)을 추천했다. 李교수는 『논설이면서도 그 시대 젊은이의 사고와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글 』이라고 말했다.
在美 정치평론가 金相基(남일리노이대 교수)씨는 『기억에 남는 名文이 수 없이 많으나 다른 분들이 추천할 것으로 생각하므로 다른 분들이 빠뜨릴지 도 모를 책을 추천하고 싶다』며 책 세 권을 권했다. 철학가 閔丙山(민병산 )의 수필집 「철학의 즐거움」, 신문특집기사 모음집인 전 한국일보 논설위 원 芮庸海(예용해)의 「인간문화재」, 철학가 曺街京(조가경)의 「실존철학」이다. 언론인 千寬宇(천관우)가 쓴 「言官史官(언관사관)」에 수록된 「신문의 자 유」가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에 의해 추천됐다. 시인 高銀은 千寬宇의 「 한국 고대사」를 골랐다.
崔禹錫 삼성경제연구소장은 미국 南일리노이大 교수 金相基, 연세대 교수 宋復, 전 고려대 교수(駐日 대사) 崔相龍, 서강대 교수 金秉柱씨의 신문 칼 럼을 名文으로 천거했다.
서울대 학생회의 4․19 선언문 / 名文 감상은 산림욕 효과
선언문 중에서는 崔南善(최남선)이 기초한 「기미독립선언서」가 가장 많은 여섯 명의 추천을 받았다. 소설가 서기원, 연세대 교수 유영익, 외국어대 교수 정진석, 동의대 교수 장양수, 작사가 박건호씨 그리고 경기도 수리고 교사 윤갑희씨가 이 선언서를 골랐다. 서울 경복고 교사 이원희씨는 서울대 학생회의 「419 선언문」을 추천했 다. 이원희 교사는 추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성과 양심의 목소리로 자유를 찾아 나서는 결연한 의지를 밝힌 명문장 이다. 차분할 정도의 논리와 단정하다 할 수준의 어조가 오히려 강한 힘을 느끼게 한다. 글이란 행동으로 실천되는 양심이 바탕이 되어야 힘을 얻는 다는 진리를 절감케 한다. 적어도 반세기 이상 민족의 지향점을 선언한 글 이라고 본다』
金亨錫(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1970년대 유신 선포 직후에 나온 故 金在俊(김재준) 목사가 쓴 「기독교 연합회 성명서」를 名文으로 추천했다. 기자는 金在俊 목사가 썼다는 이 유신 반대 성명서를 구해보려고 노력했으 나 아쉽게도 구할 수가 없었다.
국무총리를 지낸 姜英勳(강영훈) 세종재단 이사장은 도산 安昌浩(안창호)의 연설 일부를 추천했다. 姜이사장은 島山(도산)이 꿈꿔 온 理想村(이상촌) 설립 계획에 즈음한 연설 가운데 일부를 추천했다.
<…법치적으로 국법을 준수하고, 민주적 자치의 능력이 있고, 도덕적으로 허위에서 벗어나고, 이기심을 절복하여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되고, 경제 적으로 부채 없이 문화생활을 自營(자영)할 재산을 가지고, 자녀는 교육을 받고, 성인은 모두 독서하는 부락이 될 것이오…>
姜英勳씨는 이 연설이 『오늘날 우리 사회 현실에 비춰 음미해 볼 수 있는 말씀이기에 늘 잊지 않고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고 말했다. 朴正熙 전 대통령의 연설을 선정한 사람도 세 명이었다. 소설가 徐基源씨가 박정희의 대통령 선거 유세(1967년 4월17일), 소설가 이인화씨가 박정희의 전역식 연설(1963년 8월30일), 박근 전 유엔대사가 날짜 미상의 연설문을 각각 골랐다. 朴씨가 고른 연설문은 새마을연수원 벽에 걸려 있는 『먼 훗 날 우리 후손들이 우리가 1960년대에 무엇을 하였는가고 물었을 때 우리는 「조국 근대화의 신화에 살고 신화에 죽었다」고 대답할 것이다』라는 구절이다. 감사원장을 역임한 韓勝憲(한승헌) 변호사는 법조인답게 朴元淳(박원순) 변 호사가 쓴 「문익환 목사 방북 변론서」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최후진술 」을 추천했다. 조선대 총장을 지낸 李敦明(이돈명) 변호사는 「金載圭의 상고이유서」를 추천했는데, 그는 『한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역사적인 문 건』이라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최후 진술」은 金光雄 중앙인사위원장도 천거했다.
성철 스님의 전기를 쓴 바 있는 소설가 李淸(이청)씨는 性徹(성철) 스님이 쓴 「百日法門」 중 「見性의 본질」을 선택했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깨친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마음을 깨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교외별전을 표방하는 선종에서는 이것을 견성성불이 라고 합니다. 곧 自性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成佛)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 하는 견성이라는 것은 중생의 自性, 즉 불성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見性이 즉 成佛이고 성불이 즉 견성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견성을 한 후 성불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선종에서 말하는 견성성불이 아닙니다. … > 李淸씨는 추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성철 스님의 禪 수행과 불법 참구의 모든 내용이 집대성되어 있는 이 책 은 원시불교에서부터 중관, 유식, 열반, 천태, 화엄, 선종사상에 이르기까 지 불교의 모든 사상이 포함되어 있고, 그 모든 사상을 하나로 꿰뚫는 것이 바로 「中道」임을 천명한 글이다.
내용이 도도, 웅장하고, 문장이 힘이 넘친다. 또한 논리에 빈틈이 없고, 비 유와 인용이 적절하며 군더더기 없이 곧바로 핵심을 찌르는 방법이 날카롭 다. 그러므로 그 뒤로 한국 불교 저술과 법문의 교범이 되었다. 상․하 양 권으로 된 책의 모든 부분이 名文이라 생각하나 특히 선종 사상 편의 「見性의 본질」 서두에 나오는 구절은 성철 스님이 주장하는 돈법사상의 진수 를 명쾌하게 밝혀주는 대목으로 빛이 난다』
수월 스님 이야기인 「달을 듣는 강물」의 저자로 불교에 조예가 있는 김진 태 인천지검 특수부장은 법화경(불경)의 제바달다품 중 일부를 추천했다. 金검사가 추천한 「제바달다품」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三千大千世界 無有如芥子許非是菩薩 捨身命處 爲衆生故(삼천대천 세계에는 보살이 중생을 위해 몸과 목숨을 버리지 않은 곳이라곤 겨자씨만큼도 없다)>
名文 감상은 산림욕 효과
이상으로 간략하게 名文으로 천거된 것들 중에서 어떤 글이 누구에 의해 무 슨 이유로 추천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전 유엔대사 朴槿씨는 『미술에서 추상화가 타락하면 칠장난이 되는 것처럼 요즘 우리들 젊은 세대간에는 「현대성」과 「진보성」의 탈을 쓴 글과 말의 장난이 난 무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글과 말이 장난질 치 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화 바람은 오로지 속도 만 을 강조해이 장난질을 부채질한다. 100명이 정성을 다해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귀한 글을 골라준 데는 이런 세태에 대한 안타까움이 넘쳤기 때문이 아닐까. 이들 名文 중에서 많이 추천된 것을 중심으로 全文 또는 일부를 名文 감상 편에 싣는다. 여기에 소개된 名文들을 읽다보면 소음과 공해로 가득한 대 도시에서 벗어나 거대한 山林浴場(산림욕장)을 산책하는 것처럼 머리가 맑 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名文家 李御寧, 소설가 徐基源, 건축가 金洹의 名文 추천
구호와 같은 관념적인 한국의 산문에 처음으로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불어넣 은 사람, 감성과 이성이 한데 어울린 은유의 축제를 통해서 생각하는 즐거 움과 느끼는 쾌감을 동시에 창조해 준 사람, 그리고 뱀같이 땅바닥에 붙어 다니는 우둔한 산문을 코브라처럼 머리를 치켜세우게 하고 음악에 맞춰 춤 추게 한 사람 - 그것이 바로 李箱이다. 그리고 그의 詩 소설 그리고 수필을 모두 통합해 놓은 글이 그의 「山村餘情(산촌여정)」이다. 실제로 「山村餘情」에는 詩와 일기와 편지글로 되어 있어 마치 그의 글 솜씨를 총체적으로 보여준 전시장이라 할 수 있다. 글의 양식만이 아니라 글의 내용에 있어서도 도시적인 체험과 전원의 자연 체험이 통합적으로 담겨져 있다. 그래서 「도시와 자연」 「근대와 전통」 을 異種配合시킨 포스트 모던적인 감각마저 느끼게 된다.
그것이 청동호박이 열린 것을 보면서 한식 날 호박꼬자리의 무시루떡 냄새 를 맡고 좇아오는 증조할아버지의 시골뜨기 망령과 럭비공을 받고 뛰는 젊 은 용사의 굵직한 팔뚝을 동시에 연상하는 특이한 은유들이다. 모든 비유가 그와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그 자신이 성천의 자연을 묘사한 그 글을 더블 렌즈의 카메라로 촬영한 스틸이며 그 映寫(영사)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은 묘사문이면서도 그 전체의 구성이 밤에서 시작하여 다음날 밤으로 끝나는 원형의 서사구조로 되어 있다. 시작과 끝이 없이 순환하고 있는 非 선형적인 글이라는 것도 그의 유니크한 구성력이다. 외래어와 토착어의 자 연스러운 배합 장식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을 통합하는 기능적인 비유, 그리 고 문장을 꿰매가는 구성력이 모두 남이 모방할 수 없는 섬세한 감성과 풍 부한 상상력에 의해서 표상된다. 한마디로 山村餘情은 20세기 한국의 수많 은 묘사 가운데 가장 높은 마루를 차지하고 있는 名文 중의 名文이라고 할 것이다.
소설가 徐基源의 名文 추천
▲기미독립선언서
침략자 일본을 비난 배척하는 데 쏠리지 않고 민족은 자주 평화 공존공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논지가 더욱 빛나는 격조 높은 문장. ▲梅泉 黃玹의 유작詩
(한말 재야학자 황현이 한일병탄 후 자결하면서 남긴 4편의 詩 가운데 제3작)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기침륜)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새와 짐승들도 슬피 울고 바다 또한 찡그리네/무궁화 이 나라가 이미 물 속으로 가라앉네/가을의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를 되새기니/사람으 로 태어나 지식인이 되기가 이다지도 어렵구나 )
나는 특히 후반의 두 줄 詩句(시구)에 감동을 느낀다. 亡國(망국)에 지식인 의 책임도 있다는 自省(자성)이 오늘날에도 그 뜻을 잃지 않고 있다.
▲朴正熙 대통령의 선거 유세(1967년 4월17일)
정치가의 演說(연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선동형과 설득형(혹은 說破型)이 다. 1967년은 제1차 5개년계획이 성공리에 끝나는 시점이다. 집권자로서의 자신과 신념이 밑받침된 쉽고도 조리 있는 설득이다. 이때 연설은 그 자신 이 구상한 내용이란 점에서 그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미사여구나 大言壯談(대언장담)과는 거리가 멀다. 實事求是(실사구시)의 철학이 生動(생동 )하고 있다. 건축가 金洹의 名文 추천-「나무의 威儀」 등
20세기 한국의 名文 첫째로는 어쩔 수 없이 未堂 徐廷柱의 詩 가운데서 고 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한국말의 아름다움을 未堂만큼 탁월하게 독창 적으로 다듬어낸 경우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중에서도 내 개인적으로는 未堂의 詩 「自畵像」 중에서 특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는 문장을 꼽는다. 팔할이 바람이라는 이 표현은 20세기 한국 名文을 대표함 에 손색이 없을 만큼, 가슴이 미어지게 슬픈 표현이면서 동시에 눈물이 쏟 아질 만큼 아름답다.
두 번째로는 詩나 소설처럼 아름다운 문장보다도 철학과 사색을 담은 수필 類에서 李敭河(이양하) 선생의 「나무의 威儀」를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서양식으로 공부를 한 분이면서도 나무를 보는 생각의 근본은 동양의 자연 관에 닿아 있고 그 중에서도 홍대용이나 박지원 등이 품었던 人物均(인물균 )의 철학과 일맥상통하고 있으며 나아가 현대적 의미에서 환경 문제까지도 통찰하고 훗날에 찾아온 우리의 개발논리를 질타하고 있음을 보고 놀랍게 여긴다. 세 번째 名文으로는 1974년 정치적 암흑기의 「언론자유수호선언」과 「민 주회복국민선언」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 선언문들은 문장으로서 특출한 名文이라기보다 우리의 가장 처절했던 독재시대에 긴급조치, 국가보안법, 사형선고, 납치와 고문 등 무시무시한 탄압 속에서 끓어오르는 절규를 피맺 힌 목소리로 뱉어냄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를 깨우친 점에서 길이 길이 기억해야 할 名文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문장을 쓰려면 - 서기원
漢文을 배척해서는 名文이 나오지 않는다 徐 基 源 소설가
漢文과 한글의 차이
名文이라 할 만한 문장을 쓰지 못한 처지여서 名文에 관한 얘기를 한다는 것이 어쩐지 쑥스럽긴 하지만, 평소의 생각을 두서없이 적을까 한다. 나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漢文章(한문장)과 한글 문장의 차이 같은 것을 막 연히 느끼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文筆(문필)에 종사하면서 글을 많이 읽 지 못한 엷은 知見(지견)으로 그런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만용에 속할 것이다. 名文도 워낙 종류가 많기에 무작정 뭉뚱그려 말할 수는 없다.
가령 漢文이라면 詞(사) 策(책) 論(논) 등으로 대충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왕조 시대의 科擧(과거) 시험에선 대개 詞와 策 두 가지를 출제했으나 때에 따라 어느 한쪽만 요구하는 수도 있었다.
중종 때 趙光祖(조광조) 같은 이는 『근래의 과거시험이 詞에 치우쳐 선비 들이 身邊雜事(신변잡사)나 吟風弄月(음풍농월)을 일삼고 있다』고 개탄했 다. 그의 가치기준으로 말하면 그런 문장은 名文의 범주에 넣지 않는 것이 었다. 지금도 名文 혹은 명문장이라 하면 策과 論 혹은 그에 가까운 문장을 일컫는 경향이 농후하다. 요새 문학의 개념으론 서정시와 서사시의 차이를 뜻하면서 後者(후자)의 경우도 테두리를 좁힌 것이라고 할까.
가령 陶淵明(도연명)의 歸去來辭(귀거래사, 넓게는 詞에 속할 수도 있지만 ), 諸葛亮(제갈량)의 出師表(출사표) 등을 들 수 있다.
조선도 한문에 의존한 나라였으므로 숱한 名文이 나왔음은 당연한 일이다. 밑천이 짧은데다 이런 경우 다소 편협한 나로서 굳이 들자면, 李舜臣(이순 신)의 장계, 閔泳煥(민영환)의 유서 등이 나의 가슴속 한 모서리를 차지하 고 있다. 가슴을 울리고 인생과 운명을 생각케 한다.
임진란에 李舜臣은 모함을 받아 서울에 붙들려와 국문(고문)을 당한 끝에 白衣從軍(백의종군)으로 남해안에 내려간다. 그 사이 李舜臣의 직책을 대신 한 元均(원균)이 일본 수군에게 대패하여 겨우 패잔선 12척만 남았다. 다시 三道(삼도) 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에게 『조선의 수군은 이제 없 는 것과 같다. 패잔병들을 추스려서 육군으로 편입하여 전투를 계속하라』 는 명령이 내렸다.
이에 대해 이순신은 장계에서 『지금 신에겐 아직도 12척의 戰船(전선)이 있습니다. 죽음을 다하여 나가 싸우면 사세를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있습 니다. 수군을 없애, 왜군이 전라도로 침입하고 수도 서울을 공격하는 것을 신은 두려워 합니다. 비록 아군의 전선은 몇 안되지만 변변치 못한 신이 죽지 않는 한 왜군은 우리나라를 감히 없신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今臣戰船尙有12(금신전선 상유12)」
나의 가슴을 친 구절이다. 괜한 大言壯語(대언장어)가 아니다. 鳴梁(명량) 해전에서의 기적적인 대승이 한 자도 틀림없이 증명하고 있다.
심금을 울리는 글을 접하지 못하는 이유
閔泳煥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배를 갈라 자결했다. 죽기 전 「한국인 민동포에게 경고하노라」하는 유서를 남겼다.
「…명심하라. 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사 는 법이다. …영환이 한번 죽어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에게 깊이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기어이 九天地下(구천지하)에서 동포 여러분을 도울 것이다」 安重根 의사와 함께 그나마 亡國(망국)의 치욕을 조금이라도 달래준 문장이었다. 近代(근대)에 들어와서는 역시 3․1 독립선언서일 것이다. 길기 때문에 인 용은 피한다. 첫마디부터 격조높은 大宣言(대선언)이다.
쓰다보니 한문 얘기만 한 것 같다. 한글 문장 이를테면 되도록 한자어를 피 하고 우리말에 충실한 글(기실 순우리말만으론 불가능하지만)과 대조하며 우열을 가리자는 것이 아니다. 名文의 개념을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물론 한글전용의 글 가운데 특히 詩나 소설에 名文이 수두룩한 것이 사실이 다. 하지만, 나의 감수성이 낡았는지 몰라도 심금을 울리고 삶에 충격을 주 는 글을 그다지 많이 접하지 못했다. 한문을 외국어라고 배척하는 사람들은 名文의 예를 들기가 그리 간단치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한문과 우리말의 언어적 속성과 성격이 다른 데서 나왔을 것이지만 이것까지 건드리는 것은 나의 주제 넘는 일이다.●
좋은 문장을 쓰려면 - 박종만
쉬운 글은 愚衆을 생산하는 혹세무민이 될 수도 朴 鍾 萬 까치글방 대표
名文의 세 가지 조건
名文 중의 名文이라는 성서의 「전도서」에서는 『하늘 아래 새 것이 있을 리 없다』고 한마디로 단언했지만, 나는 자신이 글을 쓰는 첫째 목적은 물 론이고 남의 글을 읽는 첫째 목적도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라고 감히 말하겠다. 「새로운 것」 하면 으레 지식과 정보를 생각하겠으되, 남의 삶 을 체험할 수 있는 기록과 상상의 문학도 포함된다. 자신이 가보지 못한 여 로의 삶과 가지지 못한 사상과 미치지 못한 상상과 지식이 생생하게 어우러 진 내용의 글을 읽는 것은 곧 자신이 새로워지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것을 구할 수 있는 글이라고 하더라도, 정확하고 진 실하지 않으면, 차라리 읽지 않는 것만 못하다. 부정확한 지식과 거짓 경험 과 졸렬한 상상력은 언젠가는 그 글을 읽는 사람을 낭패하게 만들고 배신감 을 느끼게 만들게 마련이다. 그리고 흔히 사람과 글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용이 정직하고 솔직한 글은 우선 훌륭한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사람의 윤리가 아니라 글의 내용의 진실성인 것이다. 하늘 아래 완벽 한 인격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l솔직한 사람은 겸허하고 당당한 글을 쓴다. 孔子(공자)가 詩經(시경)의 詩 300편의 내용에 대해서 말씀한 『생 각(하는 마음)이 사악함이 없다(思無邪)』를 詩를 쓰는 마음의 자세에 대한 것이라고 확대 해석한다면, 나의 지나친 견강부회인가? 지금 名文으로 대 접받고 있는 글들 중에서 위선적 감정 과잉의 우국충정과 殉愛譜(순애보)의 글들은 없는가?
새롭고 확고한 지식과 진실한 심정을 그렸다고 하더라도, 어휘가 부정확하 고 문장이 번잡하고 단락이 불명확하다면, 글쓴이의 의도와 목적이 바르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특히 정확한 어휘를 쓰는 것(正名)은 그것이 가리키 는 실체의 正體性(정체성)과 관계된다. 좋은 음식 재료도 숙수의 솜씨와 깨 끗하고 반듯한 그릇이 있을 때에야 제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의 기본 요건을 갖춘 글이 가지런하게 마름질되었을 때, 곧 스스 로 질서와 체계를 만들며 경제적으로 정리되었을 때, 나는 일단 名文의 자 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장황하고 까닭 없이 길고 두서가 없는 글은 非 경제적인 글이다.
모르는 단어를 찾는 즐거움
「어문일치」의 뜻을 오해하고 글은 쉬운 단어와 쉬운 문장으로 물 흐르듯 이 써야 한다는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말과 글이 일 치할 수 있을까? 글은 눈으로 들어오는 「그림」이고 말은 귀로 들어오는 「소리」이다. 쉬운 어휘라고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물론이고 읽는 사 람마다 지식과 사고와 경험의 수준이 저마다 서로 다르게 마련이다. 「물 흐르는 듯한」 쉬운 문장이라고 하되, 드넓은 천리 長江(장강)도 다양 하고 무수한 細流(세류)들이 한데에 합수한 것이고 산을 만나면 휘어져야 하고 큰 비가 지나간 뒤에는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더구나 수심이 깊을수 록 물밑에는 사공이 예상하지 못한 암초가 있을 수 있다. 관개수로식 문장 이야말로 글을 쓸 때 경계해야 할 또하나의 함정이다.
쉬운 글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진정한 민중주의가 아니라 도리어 愚衆(우중 )을 생산하는 惑世誣民(혹세무민)의 주장이 되기 쉽다. 자신이 모르는 단어 들과 지식들이 간혹 나타나서 사전을 찾는 글 읽기야말로 가난한 행복의 작 은 어려움이고 지식의 창고를 채워 주는 작은 노고이다. 그렇게 무지한 사 람도 이제 없으며, 그렇게 책 읽기가 경제적, 시간적 부담이 되는 시대도 아니다. 사전의 부피는 문화의 변천과 문명의 발전에 비례한다. 또하나 덧붙이고 싶은 나의 주장은 준말의 무분별한 사용이 글의 품위를 떨 어뜨리고, 꼭 필요한 주어의 생략이나 탈락이 그리고 시제의 불일치가 불필 요하게 시선을 행간에서 우왕좌왕하게 만들어 글읽기의 집중도를 떨어뜨리 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하늘 아래 완벽한 것이 있을 리 없다』는 경고만 큼 새삼 경청해야 할 완벽한 경고도 없을 것 같다. 글의 경우, 완벽의 추구 가 감동의 실현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 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詩로서는 발상이 별로 비범하지 못하고 구문이 상당히 길고 또한 번거롭지 만,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님의 침묵」이 겸허하게 인도하는, 알 수 없는 초절의 길을 순간적이나마 나를 「차마 떨치고」 갈 수 있을 것이다.●
논술교사의 논술 秘法/표현력을 기르는 방법
사전을 곁에 두고 名文을 베껴라 - 李 萬 基 인천 문일여고 교사(EBS 강사)
三多 옛말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이를 논술에 적용하여 보면 아무리 사고력이 뛰어나고, 배경 지식이 풍부하다고 하더라 도 제대로 표현을 못하면 독자를 설득해야 하는 논술의 기본적인 소임을 다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표현력이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 주위에 똑같 은 유머를 전달해도 배꼽 빠지도록 재미있게 전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 썰렁하게 전달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바로 말하는 표현력의 차이이다. 잘 쓴 논술문이란 필자의 생각과 느낌, 주장이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표현력이 좋은 글을 말한다. 좋은 글이 되기 위해서는 충실성, 독창성, 성 실성, 일관성을 갖추어야 하고, 명료성, 정확성 등을 가져야 한다. 표현이 잘된 글이 좋은 글이라면 사고력, 창의력을 향상시키는 것과 동시에 표현 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표현력의 주요 요소는 적절한 개념이나 용어의 구 사, 매끄러우면서도 간결하고 정확한 문장, 체계적인 구성, 적절한 분량 등 이 있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논술은 상대방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글이다 . 그러므로 분명한 주제(내용)를 가지고, 알맞은 체재(형식)로 쉽고 정확 하게 전달(표현)하면 성공이다.
「옛말 그른 것 없다」 라는 말이 있다. 조상들의 체험의 결과이니 또 하나 의 옛말을 생각해 보자. 좋은 글쓰기 공부로 많은 사람들은 옛사람인 歐陽修(구양수)의 옛말 「三多(삼다)」를 굳게 믿고 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는 多讀(다독), 多作(다작), 多商量(다상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먼저 多讀이다. 이는 다른 모든 작업이나 기술과 마찬가지로, 글을 쓰는 데 도 남의 글을 많이 읽음으로써 배우는 바가 많다는 것이다. 주어진 글을 이 해할 수 있는 능력은 조리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다음으로 多作은 논술 능력이란 스스로 많이 써 보는 등의 자신의 꾸준한 연습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多商量은 사물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력과 예민한 감수성을 평소에 꾸준히 기르라는 뜻이다. 이 세 가지는 곧 논술에 필요한 배경지식, 사고력, 표현 력을 기르는 첩경이다.
표현력을 기르기 위해서 우선은 어휘력에 주목해야 한다. 한 편의 글은 언 어로 표현되는 언어 단위이다. 가장 작은 언어 단위인 낱말로부터 문장, 문 단을 거쳐 서론, 본론, 결론이라는 단위로, 하나의 완성된 언어 단위로서의 글이 된다. 그러니 낱말의 사용에 가장 큰 초점을 맞추어 어휘력을 향상시 키는 길이 표현력을 높이는 최우선 과제이다. 어휘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은 부단히 국어 사전을 찾는 길이 가장 효과적이다. 더불어 속담사전이나 관 용어사전, 상징사전, 유의어사전, 갈래사전, 역순사전, 용례사전, 뉘앙스사 전, 반의어사전, 형용사사전 등 특수사전을 이용한다면 더욱 좋다. 이런 사 전들에는 어느 것이나 훌륭한 용례가 실려 있어 이를 암기하는 것만으로도 글쓰기 공부가 된다.
일단 무엇이든지 써라!
이런 사전들에 힘을 입어 적재적소에 的確(적확)한 어휘를 사용한다면 그야 말로 표현이 잘 된 글이 될 것이다. 토박이말을 쓸 자리에 한자어나 외국어 를 쓴다거나, 비속어를 사용하게 되면 글의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래서 논술 답안의 평가에서 어휘의 적절성을 따지는 것이다.
둘째로 표현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자주 써보아야 한다. 즉, 多作이 필요하 다. 초보자는 주제나 분량, 글의 의도 등을 주어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서 헤매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작문에 막연한 부담감이랄지 공포감을 지니 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는 데에 많은 글을 써보는 것처럼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우선 한 문장을 정확하게 써보는 연습을 해야 하고. 그런 다 음에는 한 문단을 중심 문장과 뒷받침 문장으로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연습 을 해야 한다. 그러한 후에 글 전체를 서론, 본론, 결론으로 체계적으로 구 성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다.
무작정 글을 쓰라면 더욱 막연하다. 그래서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일기를 쓰 자는 것이다. 출발은 메모로부터 하고 점차 글의 분량을 늘려 가는 것이다 . 별 다른 부담 없이 하루의 일을 두서없이 적어 나가다 보면 상상하지 못 할 효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무엇보다 좋은 표현력을 기르는 글쓰기 연습은 名文을 모방하여 쓰 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도 흔한 말이지만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는가. 名文을 자주 대하고, 옮겨 적다가 보면 자연히 어휘력도, 문 장력도, 구성력도 늘게 된다. 더군다나 교과서에 실린 名文을 그대로 옮겨 적으면 맞춤법도 자연스레 익히게 된다. 이른바 一石二鳥(일석이조)다.●
논술교사의 논술秘法/효율적인 독서 방법
古典을 깊이 있게 읽어라 - 이 석 록 서울 화곡고 교사(EBS 논술 강사)
최근의 논술 경향
『책 읽지 말고 제발 공부 좀 해라. 너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렇게 책 만 읽으니 어떻게 대학에 가겠니?』
우리 독서에 대한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모의 잔소리이다. 그러나 논술을 쓰는 데 독서가 가장 필요한 능력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이야기는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논술에서 제시되는 문제들을 보면 제 시문을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논점을 잡아내는 능력이 핵심이라는 점을 쉽게 느낄 수가 있다.
논술의 본래 목적 중의 하나는 학생들의 독서 습관을 생활화하고 깊이 있게 사색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과 창의력을 기르도록 하는 데 있다. 그 러므로 논술에서는 기발한 착상이나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기보다 는 평소에 폭넓은 독서와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하여 인간의 삶에 대한 나름 대로의 知的(지적) 통찰력을 갖추어야 한다. 여기서 논술문은 단기간의 학 습으로는 효과를 거두기가 어렵고 평소에 폭넓은 독서와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해서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특히 최 근의 논술의 경향을 보면 고전 텍스트를 제시문으로 활용해 현대 사회의 문 제를 성찰하도록 하는 문제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독서력을 길러 두는 것이 논술 능력 향상에 지름길이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면 논술 능력도 향상시키고 올바른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한 효율적인 독 서의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독서를 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은 東西古今(동서 고금)의 名文을 중심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인내를 가지고 깊이 있게 생각하 면서 정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古典(고전)은 인류사에 빛나는 높은 정신 세계를 담고 있는 작품을 의미한다. 문학, 철학, 역사, 사회, 과 학, 예술 등의 각 영역에서 당시대 정신의 진수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두 고두고 음미할 수 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작품들이다. 따라서 古典을 우 리의 문제 의식에 맞추어 읽다보면 오늘의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열리게 된다. 여기서 대표적인 古典의 작품이 무엇인지 하는 선택이 쉽지 는 않다. 처음에는 대개 학교의 교과 과정에서 다루거나 언급하고 있는 작 품을 중심으로 읽으면 무난하다. 이러한 책들을 마치 광부가 坑道(갱도)를 파들어 가듯이 잡념을 버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읽는 것이 중요하다.
줄거리 중심으로 읽지 말라!
그리고 독서와 관련하여 논술에서 요구되는 중요한 능력은 글에 대한 해석 능력이다. 제시된 내용을 단순하게 줄거리 중심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수박 겉핥기 식의 독서이기 때문에 논술에서 요구되는 사고력 향상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을 읽을 때에는 철저하게 전략적으로 독서를 해야 한다. 어떤 문제 의식이 담겨 있고, 필자는 어떤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지 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 다음 書評(서평) 형태의 독후감을 써보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 독후감이 단순한 감상문 형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책 속에 담긴 사상이나 교훈을 일목 요연하게 논리적으로 정리하다 보면 책의 내용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지고 논술의 과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탁월 한 보약이 될 것이다.
또한 책을 읽고 난 후에는 그 내용을 나름대로 음미해 보고, 자신의 생각은 어떤지 정리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히 줄거리만 알거나 어떤 내용이 전개되었다는 정도를 아는 데에 그치면 충분한 독서의 효과를 얻을 수 없 다. 논술에서는 독해력은 내용을 충분히 이해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추리 상상하거나 비판할 것을 요구하므로 읽은 책에 대해 다양하게 해석하는 능 력을 길러 두어야 한다.
그리고 단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그것을 깊고 철저하게 읽는 태도가 중요 하다. 이렇게 읽다보면 독서를 통해 기를 수 있는 독해 능력과 사고력, 창 의성 계발이라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先人(선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책 속에 인생의 지혜가 담겨 있고, 삶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 담긴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 보다 진지한 독서를 할 때 논술 능력도 자연스럽게 향상될 것이다.●
영국의 문장 교육
모든 국가시험은 에세이가 필수 크리스 프라이스 디지틀조선 영문뉴스 에디터 (영국 랑카스터대학 졸업)
文法은 초보적인 수준만
영국에서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언어 교육은 출생과 함께 시작된다. 영 국의 부모들은 유난히 아이들의 의사소통 능력을 중시하고 쓰기와 읽기를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강조하기 때문에, 정식 교육이 시작되는 네 살이나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이미 어린이들은 어느 정도 읽기와 쓰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일단 학교에 들어가면, 영어에 중점을 두고 의사소통 능력을 다방면으로 발 전시킨다. 내가 다녔던 퍼블릭스쿨(실제는 사립학교)에서는 글짓기가 필수 과목이었다. 글짓기의 주제는 역사에서 지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가 포 함되었다. 다른 모든 과목에서도 정확하게 기록하는 훈련이 강조되었다. 과 학시간에는 교과서에 나와 있는 대로 실험을 했지만, 그때도 그 결과를 기 록하는 일이 중요시되었다.
영어시간은 文法과 文學(문학)으로 구분되었지만, 대부분은 한 선생님이 가 르쳤다. 문법시간에서는 동사변화 같은 것보다는 역사적인 근원 같은 것에 더 중점을 두었다. 영어에는 불규칙동사가 많고, 예외가 많아서 그 규칙을 모두 배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문법 시간에는 구두점 같은 초보적인 분야를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정도로 그쳤다. 動名詞(동명사 ) 같은 것은 제대로 쓸 줄 알기만 하면, 그 정의가 무엇인지 알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영어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물론 영어를 母國語(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는 것은 당연하다 . 그러나 非영어권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영국인들은 교육을 역사에 관한 에세이나 지리에 관한 과제, 과학실험에 대한 기록 등, 일상 생활에서 기록된 형태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의 학생들은 非영어권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영어사용 능력 을 갖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문학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위대한 작품에 대한 비평이나 해석을 하도록 하고 있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필수과목이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맥 베스」, 「햄릿」, 「한여름 밤의 꿈」 등 세 가지만 공부했다. 공부 시간 에는 학급 전체가 참가하는 낭독회가 열린다. 학생들에게 배역을 주고, 큰 소리로 대사를 읽게 한다. 낭독이 끝나면 선생님이 평가를 하고, 학생들에 게 당시 셰익스피어가 관객들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주제가 무엇이었느냐고 질문한다. 이밖에도 우리들은 방랑시인이나 현대작가의 작품도 필수적으 로 읽어야 했다.
장편 詩 암송 대회 열려
대부분의 퍼블릭 스쿨에는 정기적으로 저명한 작가의 장편 詩를 암송하는 대회를 연다. 학생들은 필수적으로 이 대회에 참가해야 한다. 암송하다가 머뭇거리거나 단어를 빠뜨리면, 교장선생님이 종을 때리고, 참석했던 학 생들이 일제히 야유를 보낸다. 무척 괴로운 시련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무 척 도움이 된 훈련이었다.
에세이를 쓰는 훈련도 중요한 교육과정이다. 에세이를 쓸 때는 각자가 선 택한 주제이건, 공동의 주제이건 창조성이 가장 강조된다. 우수한 에세이 가 나오면 학급에서 낭독을 하고, 다른 학생들이 비평을 하게 한다. 그러 는 가운데 학생들은 좋은 글을 쓰는 법을 배우게 된다. 매년 적어도 한번 은 전국 및 지방 단위의 글짓기대회가 열린다. 그 학교 출신의 유명한 작 가가 자기 이름으로 대회를 여는 경우도 많다. 이런 대회가 열리면 여러 기 업체나 지방단체가 스폰서가 되어 상패나 상품을 제공한다. 그중에는 단순 한 상장도 있고 대학까지 장학금을 대주는 것도 있다. 이런 대회에서 A급 판정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된다.
16세가 되면 모든 학생은 국가시험을 본다. 이 시험에 합격해야 다음 학년 으로 진급할 수 있다. 이 국가시험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에세 이식으로 답을 써야 했다. 이 때문에 학교에서 영어교육의 상당 부분은 학 생들이 시험관이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들의 견해를 발표하고, 효과적 으로 의사를 전달하도록 하는데 집중되고 있다.
어디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도서관도 영어교육에서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다. 영국에는 세계적인 작가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의 작품은 도서관에 모두 보관되어 있다.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모아놓은 창고가 아니라, 수시 로 세미나를 열어서 토론을 한다. 이렇게 고전과 현대의 다양한 작품을 읽고, 저자가 전달하려고 하는 내용 을 파악하는 교육을 받고, 끊임없이 글을 쓰는 훈련을 하게 되면 작가가 될 수 있는 기초적인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글짓기는 따분한 일이 아니 라 훌륭한 전달수단이다. 떠돌아다니는 아이디어를 영원한 형태로 정착시키 는 수단이다. 이런 훈련과정을 통해서 아이들은 영어에 대해서 광범위한 지 식을 얻게 되고, 다양한 사고와 표현방식을 알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의 문장 교육
푸줏간집 주인도 편지 쓸 때 同意語 사전을 뒤적거린다 -권 지 예 소설가(파리 7대학 문학박사)
초등학교 1학년이 외는 詩
문장을 쓴다는 것이 레이몽 크노의 詩처럼 「한 개나 두 개의 낱말을 집어 계란 삶듯 삶는」 그런 단순한 기술만은 아니다.
한국서 영문학을 전공했던 내가 한국 근대소설을 텍스트로 삼아 佛語(불어 )로 박사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기까지, 어쨌든 나는 늘 佛語 쓰기에 많은 고초를 겪어 왔다. 기껏 애를 먹고 쓴 논문의 문장들을 同語(동어)반복이 많다며 교수는 김매듯이 무자비하게 솎아내는 적이 많았다. 한국 학생들의 문장은 대체로 논리적이지 못하며 반복이 심하고 思考(사고)가 독창적이지 못하다는 지적도 자주 했다. 그렇다면 저들 문장의 「논리적」이고 「독창 적」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중학교 과정부터는 물론 대입학력고사에 主과목으로 철학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나라. 四肢選多(사지선다)형 시험문제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 세계문 학을 주도하는 찬란한 文學史(문학사)를 가진 나라. 하지만 그런 나라에서 숨만 쉰다고 모두 철학자나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알고 보면 그들의 문장 수업은 자연스럽게, 그러나 철저하게 早期(조기)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거리에 나가 여섯 살이나 일곱 살쯤 먹은 프랑스 아이 를 아무나 붙들고 詩 한 수를 읊으라 그래보라.
아직 佛語 문장을 쓸 줄도 모르는 초등학교 1,2학년생의 입에서 文學史에 빛나는 시인의 詩를 듣기는 어렵지 않다.
프랑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해 佛語를 쓸 줄도 모르는 딸애도 詩를 외워가야 만 했다. 그것이 유일한 숙제였다. 「포에지(시)」 노트엔 선생님이 詩를 복사한 걸 노트 왼편에 붙이고, 오른쪽 흰 여백엔 아이가 詩의 이미지를 포 착해 정성껏 그림을 그려넣었다. 겨우 만 여섯 살이 넘은 딸애는 노트를 나 에게 맡기고 작은 입으로 詩를 暗誦(암송)했다. 눈을 감기도 했고 선생님이 감정을 넣어 읽던 걸 흉내를 내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詩 암송은 5년간 의 초등학교 과정 내내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동안 기라성 같은 시인들의 詩들이 딸의 입에서 무수히 흘러나왔고, 또 가슴을 적시고 갔다. 위고, 베 를렌느, 모리스 카렘, 랭보, 모파상, 발레리, 아폴리네르, 프레베르, 레이 몽 크노, 데스노스….
비유나 표현 자체도 독창적이고 아름답지만 脚韻(각운)을 맞추는 절제된 형 식을 통해 더욱 더 풍부한 언어감각을 훈련시키기에는 詩 암송이야말로 최 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오는 가을 저녁, 베를렌느의 「가을」이나 아폴 리네르의 「미라보다리」같은 詩를 어린 딸의 입을 통해 듣노라면 감개가 무량해지곤 하였다.
母國語에 대한 애정
詩 암송 외에도 「작문」이라는 정확하고 논리적인 표현력을 훈련시키는 과 목도 인상적이었다. 문법 공부와는 별도로 중간에 이야기를 덧붙이거나 문 장의 인과관계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詩를 통해 배운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언어표현과 철학적 사고로 무장된 논리보다 나를 더 감동시키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母國語(모국어)에 대한 그들의 애정이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던 定着(정착) 초기에 급한 편지 쓸 일이 있으면 나 는 동네 푸줏간 주인인 제르맹씨에게 부탁하곤 했다(프랑스에선 모든 업무 를 서신을 통해 하는 경우가 많다.) 한두 번 써주더니 아예 사전까지 가게 에다 갖다놓았다. 나는 그가 고기를 썰던 크고 뭉툭한 손으로 볼펜을 들고 꾹꾹 눌러 불어 문장을 쓰는 걸 보면 공연이 가슴이 뭉클해지곤 했다. 그 는 집을 짓듯 한 문장 한 문장을 써내려가고는 혹시 쓸데 없는 말, 되풀이 되는 말, 적합하지 않은 단어가 없나, 또 문장들끼리 아름답게 조화가 되는 지 새 문장을 쓸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읽어내려가곤 했다. 그는 일반 사전 외에도 同義語(동의어)사전도 가지고 있었다. 그건 그가 무식해서가 아니 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의 작문은 수준급이었다.
이런 작문의 태도는 그후 내가 만난 프랑스 사람들 대부분에게서 공통적으 로 볼 수 있었다. 詩人이 아니어도 작가가 아니어도, 푸줏간 주인도 청소부 도 편지 하나를 쓰기 위해 동의어 사전을 뒤적거리며 고심을 한다. 고기중에 가장 맛있는 살점을 떼내듯이, 쓸고 또 닦아내어 말갛게 속이 보 일 때까지 그들이 문장을 고르는 걸 보면 프랑스문학과 예술의 위대함을 낳 은 것은 결코 위대한 예술가들의 재능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제르맹씨의 모 습 속엔 詩를 외우던 소년이 항상 살아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문장교육을 생각할 때마다 詩畵(시화)가 그려진 詩 노트를 살짝 접고 꿈꾸듯 詩를 암 송하던 딸애의 모습이 떠오른다.●
▶ 수필
한국의 명문(수필)- 길
◈길 / 金 起 林
1908~? 시인․문학평론가․영문학자. 호는 片石村. 함북 성진 출생. 일본대 학 문학예술과 졸업. 조선일보 학예부장. 1933년 九人會 결성.
편집자 注 :1936년 「朝光」 3월호에 발표되었고, 金起林의 수필집 「바다 와 육체」에 실려 있다. 金聖佑씨 추천.
나의 소년 시절은 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喪輿(상 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젓 때없이 그 길을 넘어 江가로 내려갔다가 도 노을에 함북 자주 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江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 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 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 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 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한국의 명문 (수필) - 山村餘情 ◈山村餘情 - 成川1) 紀行 中의 몇 節
李 箱 1910~1937. 시인 소설가. 서울 출생. 본명 金海卿. 1929년 경성고등공업 학교 건축과 졸업.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원. 1931년 「이상한 가역반응」등 으로 데뷔.
편집자 注:이 글은 작자가 평남 성천에서 여름 한 달 가량 머문 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문에 연재(1935년 9월27일~10월11일)한 것이다. 원문은 문학 사상사에서 나온 「이상문학전집 3」 1998년 판을 사용했다. 李御寧씨 추천
① 향기로운 MJB2)의 미각을 잊어버린 지도 20여 일이나 됩니다. 이곳에는 신 문도 잘 아니 오고 遞傳夫(체전부)3)는 이따금 「하도롱」4)빛 소식을 가져 옵니다. 거기는 누에고치와 옥수수의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사는 일가 때문에 愁心(수심)이 생겼나 봅니다. 나도 都會(도 회)에 남기고 온 일이 걱정이 됩니다. 건너편 팔봉산에는 노루와 멧도야지가 있답니다. 그리고 祈雨祭(기우제) 지 내던 개골창까지 내려와서 가재를 잡아먹는 「곰」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동물원에서밖에 볼 수 없는 짐승, 산에 있는 짐승들을 사로잡아다가 동물 원에 갖다 가둔 것이 아니라, 동물원에 있는 짐승들을 이런 산에다 내어 놓 아준 것만 같은 착각을 자꾸만 느낍니다. 밤이 되면 달도 없는 그믐 漆夜( 칠야)에 팔봉산도 사람이 寢所(침소)로 들어가듯이 어둠 속으로 아주 없어 져 버립니다.
그러나 공기는 수정처럼 맑아서 별빛만으로라도 넉넉히 좋아하는 「누가」 복음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참 별이 도회에서보다 갑절이 나 더 많이 나옵니다. 하도 조용한 것이 처음으로 별들의 운행하는 기척이 들리는 것도 같습니다.
객주집 방에는 석유등잔을 켜 놓습니다. 그 도회지의 夕刊(석간)과 같은 그 윽한 내음새가 소년시대의 꿈을 부릅니다. 鄭형! 그런 석유등잔 밑에서 밤 이 이슥하도록 「호까(연초갑지)」 붙이던 생각이 납니다. 벼쨍이가 한 마 리 등잔에 올라앉아서 그 연두빛 색채로 혼곤한 내 꿈에 마치 영어 「티」 자를 쓰고 건너 긋듯이 類(유)다른 기억에다는 군데군데 「언더라인」을 하 여 놓습니다. 슬퍼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도회의 여차장이 차표 찍는 소리 같은 그 聲樂(성악)을 가만히 듣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또 이발소 가 위 소리와도 같아집니다. 나는 눈까지 감고 가만히 또 자세히 들어봅니다. 그리고 비망록을 꺼내어 머루빛 잉크로 산촌의 詩情(시정)을 기초합니다.
그저께신문을찢어버린
때묻은흰나비 봉선화는아름다운애인의귀처럼생기고 귀에보이는지난날의기사
얼마 있으면 목이 마릅니다. 자리물-深海(심해)처럼 가라앉은 냉수를 마십 니다. 石英質 鑛石(석영질 광석) 내음새가 나면서 폐부에 寒暖計(한난계)5 ) 같은 길을 느낍니다. 나는 백지 위에 그 싸늘한 곡선을 그리라면 그릴 수 도 있을 것 같습니다.
靑石(청석) 얹은 지붕에 별빛이 나려쪼이면 한겨울에 장독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납니다. 벌레 소리가 요란합니다. 가을이 이런 시간에 엽서 한 장 에 적을 만큼式 오는 까닭입니다. 이런 때 참 무슨 才操(재조)로 光陰(광음 )을 헤아리겠습니까? 맥박 소리가 이 방 안을 房채 시계로 만들어 버리고 長針(장침)과 短針(단침)의 나사못이 돌아가느라고 양짝 눈이 번갈아 간질 간질합니다. 코로 기계 기름 내음새가 드나듭니다. 석유등잔 밑에서 졸음이 오는 기분입니다.
「파라마운트」 회사 상표처럼 생긴 도회 소녀가 나오는 꿈을 조곰 꿉니다 . 그리다가 어느 도회에 남겨 두고 온 가난한 식구들을 꿈에 봅니다. 그들 은 포로들의 사진처럼 나란히 늘어섭니다. 그리고 내게 걱정을 시킵니다. 그러면 그만 잠이 깨어 버립니다.
죽어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여 봅니다. 壁(벽) 못에 걸린 다 해어진 내 저 고리를 쳐다봅니다. 潟千里(서도천리)를 나를 따라 여기 와 있습니다그려 !
한국의 명문 (수필) - 山村餘情
②
등잔 심지를 돋우고 불을 켠 다음 비망록에 鐵筆(철필)로 군청빛 「모」를 심어갑니다. 불행한 인구가 그 위에 하나하나 탄생합니다. 調密(조밀)한 인구6)가-.
내일은 盡終日(진종일) 화초만 보고 놀리라, 脫脂綿(탈지면)에다 「알코올 」을 묻혀서 온갖 근심을 문지르리라, 이런 생각을 먹습니다. 너무도 꿈자 리가 뒤숭숭하여서 그리는 것입니다. 화초가 피어 만발하는 꿈 「그라비아 」7) 원색판 꿈 그림 책을 보듯이 즐겁게 꿈을 꾸고 싶습니다. 그리면 간단 한 설명을 위하여 爽快(상쾌)한 시를 지어서 7 「포인트」 활자로 배치하는 것도 좋습니다.
도회에 화려한 고향이 있습니다. 활엽수만으로 된 산이 고향의 시각을 가려 버린 이 산촌에 팔봉산 허리를 넘는 鐵骨(철골) 전신주가 소식의 제목만을 符號(부호)로 전하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볕에 시달려서 마당이 부스럭거리면 그 소리에 잠을 깨입니다. 하루 라는 「짐」이 마당에 가득한 가운데 새빨간 잠자리가 병균처럼 활동입니다 . 끄지 않고 잔 석유등잔에 불이 그저 켜진 채 소실된 밤의 흔적이 낡은 조 끼 「단추」처럼 남아 있습니다. 昨夜(작야)를 방문할 수 있는 「요비링」 8)입니다. 지난밤의 체온을 방 안에 내어던진 채 마당에 나서면 마당 한 모 퉁이에는 화단이 있습니다. 불타오르는 듯한 맨드라미꽃 그리고 봉선화. 지하에서 빨아 올리는 이 화초들의 정열에 호흡이 더워오는 것 같습니다. 여기 처녀 손톱 끝에 물들을 봉선화 중에는 흰 것도 섞였습니다. 흰 봉선화 도 붉게 물들까― 조금 이상스러울 것 없이 흰 봉선화는 꼭두서니 빛9)으로 곱게 물듭니다.
수수깡 울타리에 「오렌지」 빛 여주10)가 열렸습니다. 당콩넝쿨과 어우러 져서 「세피아」11)빛을 배경으로 하는 한 폭의 병풍입니다. 이 끝으로는 호박넝쿨 그 소박하면서도 대담한 호박꽃에 「스파르타」식 꿀벌이 한 마리 앉아 있습니다. 녹황색에 반영되어 「세실․B․데밀」12)의 영화처럼 화려 하며 황금색으로 사치합니다. 귀를 기울이면 「르넷산스」 응접실에서 들리 는 선풍기 소리가 납니다.
야채 「사라다」에 놓이는 「아스파라가스」 잎사귀 같은 또 무슨 화초가 있습니다. 객주집 아해에게 물어 봅니다. 「기상꽃」―기생화란 말입니다. 무슨 꽃이 피나―진홍 비단꽃이 핀답니다.
先祖(선조)가 指定(지정)하지 아니한 「조셋트」13) 치마에 「외스트민스터 」 卷煙(권련)14)을 감아놓은 것 같은 도회의 기생의 아름다움을 연상하여 봅니다. 박하보다도 훈운한 「리그레추윙껌」15) 내음새 두꺼운 장부를 넘 기는 듯한 그 입맛 다시는 소리― 그러나 아마 여기 필 기생꽃은 분명히 蕙園(혜원)16) 그림에서 보는 것 같은― 혹은 우리가 소년시대에 보던 떨떨 인력거에 紅日傘(홍일산) 받은 지금은 지난날의 삽화인 기생일 것 같습니다
청둥호박이 열렸습니다. 호박꼬자리17)에 무 시루떡― 그 훅훅 끼치는 구수 한 김에 좇아서 증조할아버지의 시골뜨기 망령들은 정월 초하룻날 한식날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국가백년의 기반을 생각케 하는 넓적하고도 묵 직한 안정감과 침착한 색채는 「럭비」구를 안고 뛰는 이 「제너레숀」18) 의 젊은 용사의 굵직한 팔뚝을 기다리는 것도 같습니다.
유자가 익으면 껍질이 벌어지면서 속이 비져 나온답니다. 하나를 따서 실 끝에 매어서 방에다가 걸어둡니다. 물방울져 떨어지는 豊艶(풍염)한 미각 밑에서 연필같이 瘦瘠(수척)하여가는 이 몸에 조곰式 조곰式 살이 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야채도 과실도 아닌 「유모러스」한 容積(용적)에 향기가 없습니다. 다만 세숫비누에 한겹씩 한겹씩 해소되는 내 도회의 肉香(육향)이 방 안에 배회할 뿐입니다.
한국의 명문 (수필) - 山村餘情 ③ 팔봉산 올라가는 草俓(초경) 입구 모퉁이에 최××송덕비와 또 ×××× 아 무개의 永世不忘碑(영세불망비)가 항공우편 「포스트」처럼 서 있습니다. 듣자니 그들은 다 아직도 생존하여 계시다 합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교회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에루살렘」 성역을 수만 리 떨어져 있는 이 마을의 농민들까지도 사랑하는 신 앞에서 회개하고 싶었습니다. 발길이 찬송가 소리 나는 곳으로 갑니다. 「포푸라」 나무 밑에 「염소」 한 마리 를 매어 놓았습니다. 구식으로 수염이 났습니다. 나는 그 앞에 가서 그 총 명한 瞳孔(동공)을 들여다봅니다. 「세루로이드」로 만든 정교한 구슬을 「 오브라―드」19)로 싼 것같이 맑고 투명하고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桃色 (도색) 눈자위가 움직이면서 내 三停(삼정)20)과 五岳(오악)21)이 고르지 못한 貧相(빈상)을 업수여기는 중입니다.
옥수수밭은 일대 觀兵式(관병식)입니다. 바람이 불면 甲冑(갑주)22) 부딪치 는 소리가 우수수 납니다. 「카―마인」23)빛 꼭구마가24) 뒤로 휘면서 너 울거립니다. 팔봉산에서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장엄한 예포소리가 분명합니 다. 그러나 그것은 내 곁에서 小鳥(소조)의 간을 떨어뜨린 공기총 소리였습 니다. 그리면 옥수수밭에서 백, 황, 흑, 회, 또 백, 가지각색의 개가 퍽 여 러 마리 열을 지어서 걸어 나옵니다. 「센슈알」한 계절의 흥분이 이 「코 삭크」25) 觀兵式을 한 층 더 화려하게 합니다.
산삼이 풀어져 흐르는 시내 징검다리 위에는 白菜(백채) 씻은 자취가 있습 니다. 풋김치의 청신한 미각이 안약 「스마일」을 연상시킵니다. 나는 그 화성암으로 반들반들한 징검다리 위에 삐뚤어진 N자로 쪼그리고 앉았노라면 시야에 물동이를 이고 주저하는 두 젊은 새악시가 있습니다. 나는 미안해 서 일어나기는 났으면서도 일부러 마주 보면서 그리로 걸어갑니다. 스칩니 다. 「하도롱」빛 피부에서 푸성귀 내음새가 납니다. 「코코아」빛 입술은 머루와 다래로 젖었습니다. 나를 아니 보는 동공에는 정제된 창공이 「간 쓰메」26)가 되어 있습니다.
M백화점 「미소노」27)화장품 「스위―트 껄」이 신은 양말은 이 새악시들 의 피부색과 똑같은 소맥빛이었습니다. 빼뜨름히 붙인 초유선형 모자 고양 이 배에 「화―스너」28)를 장치한 갑붓한 「핸드빽」―이렇게 도회의 참신 하다는 여성들을 연상하여 봅니다. 그리고 새벽 「아스팔트」를 구르는 창 백한 공장소녀들의 회충과 같은 손가락을 연상하여 봅니다. 그 온갖 계급의 도회여인들 연약한 피부 위에는 그네들의 貧富(빈부)를 묻지 않고 온갖 육 중한 지문을 느끼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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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그러나 가난하나마 무명같이 튼튼한 피부 위에 오점이 없고 「추잉껌」 「 초콜레이트」 대신에 응어리는 빼어먹고 달절지근한 꼬아리29)를 불며 숭굴 숭굴한 이 시골 새악시들을 더 나는 끔찍이 알고 싶습니다. 축복하여 주고 싶습니다. 교회는 보이지 않습니다. 도회인의 교활한 시선이 수줍어서 수 풀 사이로 숨어버리고 종소리의 여운만이 근처에 내음새처럼 남아서 배회하 고 있습니다. 혹 그것은 안식을 잃은 내 혼이 들은 바 환청에 지나지 않았 는지도 모릅니다.
조밭 한복판에 높은 뽕나무가 있습니다. 뽕 따는 새악시가 電工夫(전공부) 처럼 높이 나무 위에 올랐습니다. 純白(순백)의 가장 탐스러운 과실이 열렸 습니다. 둘이서는 나무에 오르고 하나이 나무 밑에서 다랭이를 채우고 있습 니다. 한두 잎만 따도 다랭이가 철철 넘는 민요의 舞臺面(무대면)입니다. 조이삭은 다 말라 죽었습니다. 「콜크」처럼 가벼운 이삭이 근심스럽게 고 개를 숙였습니다. 오―비야 좀 오려무나 海綿(해면)처럼 물을 빨아들이고 싶어 죽겠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禁(금)한 듯이 구름이 없고 푸르고 맑고 또 부숭부숭하니 깊지 못한 뿌리의 SOS가 암반 아래를 흐르는 지하수에 다 다르겠습니까.
두 소년이 고무신을 벗어들고 시냇물에 발을 잠가 고기를 잡습니다. 지상의 怨恨(원한)이 스며 흐르는 靜脈(정맥)―그 불길하고 독한 물에 어떤 어족 이 살고 있는지―시내는 대지의 身熱(신열)을 뚫고 벌판 기울어진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을의 風說(풍설)입니다.
가을이 올 터인데 와도 좋으냐고 쏘근쏘근하지 않습니까. 조이삭이 初禮(초 례)청 신부가 절할 때 나는 소리같이 부수수 구깁니다. 노회한 바람이 조잎 새에게 爛熟(난숙)을 최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의 마음은 푸르고 焦燥 (초조)하고 어립니다.
조밭을 어지러뜨린 자는 누구냐―기왕 한될 조여든―그런 마음으로 그랬나 요 몹시 어지러뜨려 놓았습니다. 누에―戶戶(호호)에 누에가 있습니다. 조 이삭보다도 굵직한 누에가 삽시간에 뽕잎을 먹습니다. 이 건강한 미각은 왕 후와 같이 지존스러우며 侈奢(치사)스럽습니다. 새악시들은 뽕심부름하는 것으로 몸의 마지막 광영을 삼습니다. 그러나 뽕이 떨어졌습니다. 온갖 幣帛(폐백)이 동이 난 것과 같이 새악시들의 정열은 허둥지둥하는 것입니다.
야음을 타서 새악시들은 輕裝(경장)으로 나섭니다. 얼굴의 홍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뽕나무에 우승배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로만 가면 되는 것입니 다. 조밭을 짓밟습니다. 자외선에 맛있게 끄실른 새악시들의 발이 그대로 조이삭을 무찌르고 「스크람」30)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에 닿을 지성이 천 고마비 蠶室(잠실) 안에 있는 성스러운 귀족 가축들을 살찌게 하는 것입니 다. 「코렛트」 부인31)의 「牝猫(빈묘)」32)를 생각케 하는 말캉말캉한 「 로맨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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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간이학교 곁집 길가에서 들여다 보이는 방에 틀이 떠들고 있습니다. 편발處女(처녀)33)가 맨발로 기계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계는 허리를 스 치는 가느다란 실이 간지럽다는 듯이 깔깔깔깔 大笑(대소)하는 것입니다. 웃으며 지근대이며 名産(명산) ××명주가 짜여나오니 열대자 수건이 성묘 갈 때 입을 때때를 만들고 시집살이 설움을 씻어주고 또 꿈과 꿈을 말소하 는 쓰레받기도 되고―이렇게 실없는 내 幻戱(환희)입니다.
담배가게 곁방 안에는 오늘 황혼을 미리 가져다 놓았습니다. 침침한 몇 「 가론」34)의 공기 속에 생생한 침엽수가 울창합니다. 황혼에만 사는 이민 같은 異國(이국)초목에는 순백의 갸름한 열매가 무수히 열렸습니다. 고치― 귀화한 「마리아」들이 최신 지혜의 과실을 端麗(단려)한 맵시로 따고 있습 니다. 그 아들의 불행한 최후를 슬퍼하며 「크리스마스 츄리」를 헐어 들어 가는 「피에다」35) 화폭 全圖(전도)입니다.
학교 마당에는 「코스모스」가 피어 있고 생도들은 글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간단한 산술을 놓아 그들의 정직과 순박을 지혜와 狡猾(교 활)로 換算(환산)하고 있습니다. 탄식할 利息算(이식산)이 아니겠습니까. 족보를 찢어 버린 것과 같은 흰 나비가 두어 마리 백묵내음새 나는 화단 위 에서 飜覆(번복)이 무상합니다. 또 연식 「테니스」공의 마개 뽑는 소리가 음향의 흔적이 되어서는 等高線(등고선)의 각점 모양으로 남아 있는 것 같 습니다. 이 마당에서 오늘 밤에 금융조합 선전 활동사진회가 열립니다. 활 동사진? 세기의 총아―온갖 예술 위에 군림하는 「넘버」 제8예술의 승리. 그 고답적이고도 蕩兒的(탕아적)인 매력을 무엇에다 비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활동사진에 대하여 한낱 동화적인 꿈을 가진 채 있습니다. 그림이 움직일 수 있는 이것은 참 紅毛(홍모) 오랑캐의 요술을 배워가지고 온 것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동포의 부러운 재간입니다.
활동사진을 보고 난 다음에 맛보는 담백한 허무―莊周(장주)의 호엽몽이 이 러하였을 것입니다. 나의 동글납짝한 머리가 그대로 「카메라」가 되어 피 곤한 「따불렌즈」36)로나마 몇 번이나 이 옥수수 무르익어가는 初秋(초추 )의 정경을 촬영하였으며 영사하였던가―「후래슈빽」37)으로 흐르는 엷은 애수―도회에 남아 있는 몇 고독한 「팬」에게 보내는 단장의 「스틸」38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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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밤이 되었습니다. 초열흘 가까운 달이 초저녁이 조금 지나면 나옵니다. 마 당에 멍석을 펴고 전설 같은 시민이 모여듭니다. 축음기 앞에서 고개를 갸 웃거리는 북극 「펭귄」 새들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짧고도 기다란 인 생을 적어 내려갈 便箋紙(편전지)―「스크린」이 薄暮(박모) 속에서 「바이 오그래피」39)의 豫備表情(예비표정)입니다. 내가 있는 건너편 객주집에 든 도회풍 여인도 왔나 봅니다. 사투리의 合音(합음)이 마당 안에서 들립니다 시작입니다. 부산棧橋(잔교)가 나타납니다. 평양 모란봉입니다. 압록강 철 교가 역사적으로 돌아갑니다. 박수와 갈채―泰西(태서)의 명감독이 바야흐 로 顔色(안색)이 없습니다. 10분 휴게시간에 조합이사의 通譯附(통역부) 연 설이 있었습니다.
달은 구름 속에 있습니다. 금연―이라는 느낌입니다. 연설하는 이사 얼굴에 전등의 「스폿트」도 비쳤습니다. 산천초목이 다 경동할 일입니다. 전등― 이곳 촌민들은 ××行 자동차 「헷드라이트」 외에 전등을 본 일이 없습니 다. 그 눈이 부시게 밝은 광선 속에서 창백한 이사는 降壇(강단)하였습니다 . 우매한 백성들은 이 이사의 웅변에 한 사람도 박수치지 않았습니다.―물 론 나도 그 愚昧(우매)한 백성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만은―. 밤 열한 시나 지나서 영화감상의 밤은 「해피엔드」였습니다. 조합원들과 영사기사는 이 촌 유일의 음식점에서 위로회를 열었습니다. 나는 객사로 돌 아와서 죽어가는 등잔심지를 돋우고 독서를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웃방 에 묵고 계신 노신사께서 내 懶楕(나타)와 우울을 훈계하는 뜻으로 빌려주 신 幸田露伴博士40)의 지은 바 「人의 道」라는 珍書(진서)입니다. 개가 멀 리서 끊일 사이 없이 이어 짖어댑니다. 그윽한 「하이칼라」 芳香(방향)을 못 잊어 군중은 아직도 헤어지지 않았나 봅니다.
구름이 걷히고 달이 나왔습니다. 버래가 舞踏會(무답회)의 창문을 열어놓은 것처럼 와짝 요란스럽습니다. 아지 못하는 路傍(노방)의 人을 사모하는 도 회인적인 향수가 있습니다. 신간잡지의 표지와 같이 신선한 여인들―「넥타 이」와 동갑인 신사들 그리고 창백한 여러 동무들―나를 기다리지 않는 고 향―도회에 내 나체의 말씀을 飜案(번안)하여 보내주고 싶습니다. 잠―성경 을 採字(채자)하다가 엎질러 버린 인쇄직공이 아무렇게나 주워담은 지리멸 렬한 활자의 꿈 나도 갈갈이 찢어진 使徒(사도)가 되어서 세 번 아니라 열 번이라도 굶는 가족을 모른다고 그립니다.
근심이 나를 除(제)한 세상보다 큽니다. 내가 閘門(갑문)41)을 열면 廢墟( 폐허)가 된 이 육신으로 근심의 조수가 스며들어 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메소이스트」 병마개를 아직 뽑지는 않습니다. 근심은 나를 싸고 돌며 그리는 동안에 이 육신은 風磨雨洗(풍마우세)로 저절로 다 말라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밤의 슬픈 공기를 원고지 위에 깔고 창백한 동무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 속 에는 자신의 부고도 동봉하여 있습니다.
한국의 명문 (수필) - 山村餘情
주석 1)성천:평안남도 성천군의 군청 소재지. 2)MJB:커피의 일종. 3)체전부:우편 집배원. 4)하도롱:hard―rolled paper. 다갈색의 종이로서 봉투, 포장지를 만듦. 여 기서는 다갈색 편지 봉투에 쓰인 내용을 말함. 5)한난계:온도를 재는 기계. 6)조밀한 인구:비망록에 쓰인 글씨들. 7)그라비아:gravure. 사진 제판에 응용하는 凹판 인쇄법. 8) 요비링:초인종의 일본어. 李箱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불러내는 기능으로 요비링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9)꼭두서니 빛:꼭두서니풀을 원료로 하여 만든 빨간 물감 빛. 꼭두서니는 풀 이름. 10)여주:박과에 딸린 한해살이 덩굴풀. 여름․가을에 노란꽃이 피고, 길고 둥근 열매는 붉노랗게 익는다. 11)세피아:sepia. 암갈색. 주로 수채화에 쓰이는 産頁料(안료) 12)세실․B․데밀:미국의 유명한 영화 제작자(1881~1959). 대형 스펙터클 영화를 잘 만들었음. 「십계」․「삼손과 데릴라」 등을 제작. 안소니 퀸의 장인. 13) 조셋트:지금의 쉬펀과 비슷한 우아한 여름 옷감. 14)외스트민스터 卷煙:웨스트민스트 卷煙. 영국의 良質(양질)의 紙卷煙(지 권연) 15)리그레추윙껌:리그레추잉검. 미국의 껌 이름. 16)蕙園:조선 후기의 풍속화가인 申潤福(신윤복․1758~?)의 호. 작품은 주 로 妓女(기녀)․巫俗(무속)․술집의 색정적인 장면 등을 그려, 인간주의적 인 욕망을 표현하려는 의도가 엿보임. 17)호박꼬자리:호박을 썰어서 말린 것. 18)제너레숀:generation. 世代(세대). 19)오브라―드:oblato. 전분으로 만든 얇은 원형의 簿片(부편). 그냥 먹기 어려운 약을 싸는 데도 쓰임. 투명한 전분지. 20)三停:머리와 이마의 경계(上停), 코끝(中停), 턱끝(下停). 21)五岳:이마․코․턱, 좌우 관골. 22)갑위:갑옷과 투구. 23)카―마인:carmine. 카아민을 잘못 발음한 것. 연지벌레에서 뽑아 낸 紅色(홍색) 안료. 24)꼭구마:원표기는 「꼬꼬마」, 군졸이 벙거지에 꽂던 붉은 털. 25)코삭크:Cossack. 카자흐(Kazakh)의 영어식 이름. 카스피 해의 북동쪽,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대에 위치함. 26)간쓰메:통조림의 일본어. 27)미소노:1930년 무렵의 일제 화장품 이름. 28)화―스너:fastener. 분리되어 있는 것을 잠그는 데 쓰는 기구의 총칭. 지퍼․클립․척 등 29)꼬아리:꽈리 30)스크람:scrum. 여럿이 팔을 꽉 끼고 뭉치는 것. 31)코렛트 夫人:Sidonie Gabrielle Colette(1873~1954). 프랑스의 여류 소 설가. 정확한 발음은 콜레트. 「클로디느 이야기」․「방랑하는 여인」․「 지지」․「암고양이」 등이 있음. 32)빈묘:암고양이. 여기서는 코레트 여사의 작품명. 33)편발處女:머리를 땋아 내린 처녀. 34)가론:gallon. 용량의 단위. 35)피에다:Pieta. 예수의 시체를 안고 슬퍼하는 마리아像(상). 36)따불렌즈:double lens. 二重(이중) 렌즈. 37)후래슈빽:flashback. 영화에서 과거의 회상 장면을 말함. 38)스틸:still. 영화 중의 한 장면을 보통 사진기로 찍어 확대․인화한 사 진. 선전용으로 쓰임. 39)바이오그래피:biography. 傳記(전기). 40)幸田露伴博士:고우다 로한(1867~1947). 일본의 소설가. 41)閘門:수문.
한국의 명문 (수필) - 倦怠
◈倦怠
李 箱
편집자 注:이 글은 1963년 문원각에서 나온 「한국수필문학전집」의 李箱편 에서 일부 발췌했다. 金相沃씨 추천.
어서, 차라리 어둬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僻村(벽촌)의 여름날은 지리 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東에 八峰山(팔봉산). 曲線(곡선)은 왜 저리도 屈曲(굴곡)이 없이 단조로운 고?
西를 보아도 벌판, 南을 보아도 벌판, 北을 보아도 벌판, 아아 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限이 없이 늘어 놓였을고?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 록색 하나로 되어 먹었노?
農家(농가)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左右로 한 10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壁,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 은 호박넝쿨,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대싸리나무, 오늘도 보는 金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흰둥이, 검둥이. 해는 100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내려쪼인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炎署(염서) 계속이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그러나, 무작정 널따란 白紙(백지) 같은 「오늘」이라 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記事(기사)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 된 다. 그럼―나는 崔서방네집 사랑 툇마루로 將棋(장기)나 두러 갈까? 그것 좋다. 崔서방은 들에 나갔다. 崔서방네 사랑에는 아무도 없나보다. 崔서방의 조카 가 낮잠을 잔다. 아하, 내가 아침을 먹은 것은 열 時나 지난 後니까, 崔서 방의 조카로서는 낮잠 잘 시간에 틀림없다.
나는 崔서방의 조카를 깨워 가지고 將棋를 한판 벌이기로 한다. 崔서방의 조카와 열 번 두면 열 번 내가 이긴다. 崔서방의 조카로서는, 그러니까 나 와 將棋 둔다는 것 그것부터가 倦怠(권태)다. 밤낮 두어야 마찬가질 바에는 안 두는 것이 차라리 나았지---그러나, 안 두면 또 무엇을 하나? 둘밖에 없다. 지는 것도 倦怠어늘 이기는 것이 어찌 倦怠 아닐 수 있으랴? 열 번 두어서 열 번 내리 이기는 장난이란 열 번 지는 이상으로 싱거운 장난이다. 나는 참 싱거워서 견딜 수 없다.
한 번쯤 져 주리라. 나는 한참 생각하는 체하다가 슬그머니 위험한 자리에 將棋 조각을 갖다 놓는다. 崔서방의 조카는 하품을 쓱 한번 하더니, 이윽 고 둔다는 것이 딴전이다. 으레 질 것이니까, 골치 아프게 수를 보고 어쩌 고 하기도 싫다는 思想(사상)이리라.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將棋를 갖 다 놓고는, 그저 얼른얼른 끝을 내어 져줄 만큼 져주면 이 常勝將軍(상승장 군)은 이 압도적 倦怠를 이기지 못해 제출물에 가버리겠지 하는 思想이리라 . 가고나면 또 낮잠이나 잘 작정이리라.
나는 부득이 또 이긴다. 인제 그만 두잔다. 물론, 그만 두는 수밖에 없다. 일부러 져 준다는 것조차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왜 저 崔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영 放心狀態(방심상태)가 되어버릴 수가 없나? 이 질식할 것 같은 倦怠 속에서도 細(자세)한 승부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는 없나? 내게 남아 있는 이 치사스러운 人間利慾(인간이욕)이 다시없이 밉다. 나는 이 마지막 것을 免(면)해야 한다. 倦怠를 인식하는 神經마저 버리고, 완전 히 虛脫(허탈)해 버려야 한다.…(下略)
◈수필
皮 千 得 1910~. 시인수필가. 호는 琴兒. 서울 출생. 상하이 후장대학 영문과 졸업 . 서울대 사범대와 서울대 영문과 교수 역임. 편집자 注 :이 글은 샘터社에서 나온 수필집 「인연(因緣)」 2000년판에서 옮겨왔다. 李鍾德씨 추천.
수필은 靑瓷(청자) 硯滴(연적)이다. 수필은 蘭(난)이요, 鶴(학)이요, 淸楚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女人(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平坦(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 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靑春(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情熱(정열)이나 深奧(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를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 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散策(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頹落( 퇴락)하여 醜(추)하지 않고, 언제나 溫雅優美(온아우미)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 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懶怠(나태)하지 아니하고, 束縛(속박)을 벗어나고서도 散漫(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優雅(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의 재료는 생활경험, 자연관찰, 또는 인간성이나 사 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무엇이나 다 좋을 것이다. 그 題材(제재)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 에서 나오는 液(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막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저자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行路(행로)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거와 같은 이 문학은 그 芳香(방향)을 갖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필은 獨白(독백)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 보 아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폴로니아스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 필가 램은 언제나 찰스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 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 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 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破格(파격)이 수필인가 한 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 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가 그런 여유를 갖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 여 나의 마지막 십분지 일까지도 숫제 焦燥(초조)와 煩雜(번잡)에 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
한국의 명문 (수필) - 인연
◈인연 -皮 千 得
편집자 注:이 글은 샘터사刊 수필집 「인연」 2000년판에서 옮겨왔다. 柳永益씨 추천.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 여자 대학에 가 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出講(출강)한 일이 있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 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년 전, 내가 열 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도쿄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M선생 댁에 留宿(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쿠(芝區)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 도 書生(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朝子)는 처 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 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一年草(일년초) 꽃도 많 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트 피를 따다가 화병에 담아, 내 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스위트 피는 아사코 같이 어리고 귀여 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 여학원 소학교 일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까지 있는 가톨릭 교육 기관으 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 코는 자기 신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도쿄를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빰에 입을 맞추고 ,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 후, 십년이 지나고 삼사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학교 일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도쿄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도쿄역 가까운 데 여관을 정하 고 즉시 M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令孃(영양)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 꽃과도 같이. 그 때, 그는 성심 여학원 영문과 3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 코는 나와의 再會(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存在(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보를 나갔다. 그리고, 계획 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져 갔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 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코 신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 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 던 그 우산을 聯想(연상)한다.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 게 좋아한 것도 아사코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코와 나는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 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2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우리 나라가 解放(해방)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통에 어찌 되지나 않았나, 남편이 戰死(전사)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도쿄에 들러 M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 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M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韓國(한국)이 獨立(독립)이 되어서 무엇보다도 잘 됐다고 致賀(치하)하였다. 아사코는 전쟁 이 끝난 후, 맥아더 司令部(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 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가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未亡人(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 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 로 안내해 주었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아사코 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 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 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 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 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進駐軍(진주군 ) 將校(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 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 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 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週末(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景致(경치)가 아 름다울 것이다.
한국의 명문 (수필) - 나무
◈나무 - 李 敭 河 1904~1963. 영문학자수필가. 평남 강서 출생. 東京대 영문과 졸업. 1951 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연구.「포켓영한사전」 편찬.
나무는 德(덕)을 가졌다. 나무는 주어진 分數(분수)에 滿足(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厚薄(후박)과 불만족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에 눈 떠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진 달래를 내려다보되 깔보는 일이 없고, 진달래는 소나무를 우러러보되 부러 워하는 일이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 로 스스로 족하다.
나무는 고독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 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날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옴짝 않 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달 한밤의 고독도 안 다. 그러나,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또 고독 을 즐긴다.
나무에 아주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달이 있고, 바람이 있고, 새가 있다 . 달은 때를 어기지 아니하고 찾고, 고독한 여름밤을 같이 지내고 가는 의 리 있고 다정한 친구다. 웃을 뿐 말이 없으나, 이심전심 의사가 잘 소통되 고 아주 비위에 맞는 친구다. 바람은 달과 달라 아주 변덕 많고 수다스럽고 믿지 못할 친구다. 그야말로 바람잡이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 올 뿐 아니라, 어떤 때는 쏘삭쏘삭 알랑대고 어떤 때는 난데없이 휘갈기고 , 또 어떤 때는 공연히 뒤틀려 우악스럽게 남의 팔다리에 생채기를 내 놓고 달아난다.
새 역시 바람같이 믿지 못할 친구다. 역시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오고, 자기 마음 내키는 때 달아난다. 그러나, 가다 믿고 와 둥지를 틀고, 지쳤 을 때 찾아와 쉬며 푸념하는 것이 귀엽다. 그리고, 가다 흥겨워 노래할 때 , 노래 들을 수 있는 것이 또한 기쁨이 되지 아니할 수 없다. 나무는 이 모 든 것을 잘 가릴 줄 안다. 그러나, 좋은 친구라 하여 달만을 반기고, 믿지 못할 친구라 하여 새와 바람을 물리치는 일이 없다. 그리고, 달을 유달리 후대하고 새와 바람을 박대하는 일도 없다. 달은 달대로 새는 새대로 바람 은 바람대로 다같이 친구로 대한다.
그리고, 친구가 오면 다행하게 생각하고, 오지 않는다고 하여 불행해 하는 법이 없다. 같은 나무, 이웃 나무가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두말할 것이 없다. 나무는 서로 속속들이 이해하는 진심으로 동정하고 공감한다. 서로 마주보기만 해도 기쁘고, 일생을 이웃하고 살아도 싫증 나지 않는 참 다운 친구다.
그러나, 나무는 친구끼리 서로 즐긴다느니보다는 제각기 하늘이 준 힘을 다 하여 널리 가지를 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 더 힘을 쓴 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항상 감사하고 찬송하고 묵도하는 것으로 일삼 는다. 그러길래, 나무는 언제나 하늘을 향하여 손을 쳐들고 있다. 그리고, 온갖 나뭇잎이 숲을 찾는 사람이 거룩한 전당에 들어선 것처럼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자연 옷깃을 여미고, 우렁찬 찬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나무에 하나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천명을 다한 뒤에 하늘 뜻대로 다시 흙과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가다 장난삼아 칼로 제 이름을 새겨보고 흔히는 자기 소용 닿는 대로 가지를 쳐가고 송두리째 베 어가고 한다. 나무는 그래도 원망하지 않는다.
새긴 이름은 도리어 그들의 원대로 키워지고 베어간 재목이 혹 자길 해칠 도끼자루가 되고, 톱 손잡이가 된다 하더라도 이렇다 하는 법이 없다. 나무 는 훌륭한 견인주의자요, 고독의 철인이요, 安分知足(안분지족)의 현인이다 . 불교의 소위 윤회설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무슨 나무가 될까?」 이미 나무를 뜻하였으니 진달래가 될까, 소나무가 될까는 가리지 않으련다.
한국의 명문 (수필) - 딸깍발이
◈딸깍발이 - 李 熙 昇
1896~1989. 어문학자. 경기 개풍 출생.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 졸업. 동아 일보사장. 어문교육연구회 회장 등 역임. 저서 「국어대사전」 등 저서 다 수.
편집자 注:이 글은 1952년 「협동」 제37호에 실린 것으로, 1976년 범우사 에서 문고본으로 출간된 것을 원문으로 사용했다. 공명철 교사 추천.
「딸깍발이」란 「남산골 샌님」의 별명이다. 왜 그런 별호가 생겼느냐 하 면, 남산골 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쳐서 딸깍딸깍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 요새 청 년들은 아마 그런 광경을 구경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좀 상상하기에 곤란할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日人(일인)들이 「게다」를 끌고 콘 크리트 길바닥을 걸어 다니는 꼴을 기억하고 있다면 「딸깍발이」라는 명칭 이 붙게 된 까닭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산골 샌님이 마른 나막신 소리를 낸다고 해서 그다지 얘깃거리 가 될 것은 없다. 다만 그 소리와 아울러 그 모양이 퍽 초라하고, 유별난 窮狀(궁상)이 문제인 것이다.
인생으로서 한 고비가 겨워서 머리가 희끗희끗할 지경에 이르기까지, 변변 치 못한 벼슬이나마 한 자리 얻어 하지 못하고(그 시대에는 소위 양반으로 서 벼슬 하나 얻어 하는 것이 유일한 욕망이요, 영광이며, 사업이요, 목적 이었던 것이다), 다른 일 특히 생업에는 아주 손방이어서, 아예 손을 댈 생 각조차 아니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극도로 궁핍한 구렁텅이에 빠져서 글자 그대로 三旬九食(삼순구식)의 비참한 생활을 해가는 것이다. 그 꼬락 서니라든지 차림차림은 여간 장관이 아니다.
두 볼이 야윌 대로 야위어서, 담배 모금이나 세차게 빨 때에는 양 볼의 가 죽이 입 안에서 서로 맞닿을 지경이요, 콧날은 날카롭게 오똑 서서 꾀와 이 지만이 내발릴 대로 발려 있고, 사철 없이 말간 콧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 진다. 그래도 두 눈은 氣(기)가 풀리지 않고 영채가 돌아서, 무력이라든지 낙심의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아래윗입술이 쪼그라질 정도로 굳게 다 문 입은 그 의지력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많지 않은 아랫수염 이 뾰쪽하니 앞으로 향하여 휘어 뻗쳤으며, 이마는 대개 툭 소스라져 나오 는 편보다 메뚜기 이마로 좀 편편하게 버스러진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이다. 이러한 화상이 꿰맬 대로 꿰맨 헌 망건을 도토리같이 눌러 쓰고, 대우가 쪼 글쪼글한 헌 갓을 좀 뒤로 젖혀 쓰는 것이 버릇이다. 서리가 올 무렵까지 베중이 적삼이거나 伏(복)이 들도록 솜바지 저고리의 거죽을 벗겨서 여름살 이를 삼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자락이 모지라지고, 때가 꾀죄죄하게 흐르는 도포나 중치막을 입은 후, 술이 다 떨어지고, 몇 동강을 이은 띠를 흉복통에 눌러 띠고, 나막신을 신었을망정, 行纏(행전)은 잊어 버리는 일이 없이 치고 나선다. 걸음을 걸어도 日人들 모양으로 경망스럽게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느럭느럭 갈지자 걸음으로, 뼈대만 엉성한 호리 호리한 체격일망정 그래도 두 어깨를 턱 젖혀서 가슴을 뻐기고, 고개를 휘 번덕거리기는 새레 곁눈질 하나 하는 법 없이 눈을 내리깔아 코끝만 보고 걸어가는 모습, 이 모든 특징이 「딸깍발이」란 속에 전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샌님들은 그다지 출입하는 일이 없다. 사랑이 있든지 없든지 방 하나를 따로 차지하고 들어앉아서, 弊袍破笠(폐포파립)이나마 의관을 整齊(정제)하고, 대개는 꿇어앉아서 사서 오경을 비롯한 수많은 유교 典籍(전 적)을 얼음에 박 밀 듯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내리외는 것이 날마다 그의 과업이다. 이런 친구들은 집안 살림살이와는 아랑곳없다. 가다가 굴뚝에 연기를 내는 것도, 안으로서 그 부인이 전당을 잡히든지 빚을 내든지, 이웃 에서 꾸어 오든지 하여 겨우 연명이나 하는 것이다. 그러노라니 쇠털같이 허구한 날, 그 실내의 고심이야 형용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런 샌님의 생 각으로는, 淸廉介潔(청렴개결)을 생명으로 삼는 선비로서 재물을 알아서는 안 된다. 어찌 감히 이해를 따지고 가릴 것이랴. 오직 예의, 염치가 있을 뿐이다. 仁(인)과 義(의) 속에 살다가 인과 의를 위하여 죽는 것이 떳떳하 다. 百夷(백이)와 叔齊(숙제)를 배울 것이요, 岳飛(악비)와 文天祥(문천상 )을 본받을 것이다. 이리하여 마음에 陰邪(음사)를 생각하지 않고, 입으로 재물을 말하지 않는다. 어디 가서 取貸(취대)하여 올 주변도 못 되지만, 애초에 그럴 생각을 염두에 두는 일이 없다.
겨울이 오니 땔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동지 雪上(설상) 삼척 냉돌에 변 변치도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으니, 사뭇 뼈가 저려 올라오고, 다리팔 마디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몸이 곱아 오는 판에, 사지를 웅크릴 대 로 웅크리고 안간힘을 꽁꽁 쓰면서 이를 악물다 못해 이를 박박 갈면서 하 는 말이, 『요놈, 요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만,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하고 벼르더란 이야기가 전하지만 , 이것이 옛날 남산골 「딸깍발이」의 성격을 단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이 야기다. 사실로 졌지만, 마음으로 안 졌다는 앙큼한 자존심, 꼬장꼬장한 고 지식,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을 안 쬔다는 지조, 이 몇 가지가 그들의 생 활 신조였다.
실상 그들은 假明人(가명인)이 아니었다. 우리 나라를 小中華(소중화)로 만 든 것은 어줍지 않은 관료들의 죄요, 그들의 허물이 아니었다. 그들은 너무 강직하였다. 목이 부러져도 굴하지 않는 기개, 사육신도 이 샌님의 부류요 , 三學士(삼학사)도 「딸깍발이」의 전형인 것이다. 올라가서는 圃隱(포은 ) 선생도 그요, 근세로는 閔忠正(민충정)도 그다. 國號(국호)와 왕의 계승 에 있어서 明(명)․淸(청)의 응낙을 얻어야 했고, 曆書(역서)의 연호를 그 들의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역대 임금의 諡號(시호)를 제대로 올리고, 행정면에 있어서 내정의 간섭을 받지 않은 것은 그래도 이 샌님 魂 (혼)의 덕택일 것이다. 국사에 통탄할 사태가 벌어졌을 적에, 직언으로써 지존에게 直訴(직소)한 것도 이 샌님의 족속인 유림에서가 아니고 무엇인가 . 壬亂(임란) 당년에 국가의 운명이 旦夕(단석)에 迫到(박도)되었을 때, 각 지에서 봉기한 의병의 두목들도 다 이 「딸깍발이」 氣魄(기백)의 구현인 것을 의심할 수 없다.
구한국 말엽에 단발령이 내렸을 적에, 각지의 유림들이 맹렬하게 반대의 상 서를 올려서, 『이 목은 잘릴지언정 이 머리는 깎을 수 없다』(此頭可斷 此髮不可斷)고 부르짖고 일어선 일이 있었으니, 그 일 자체는 迷惑(미혹)하기 짝이 없었지만, 죽음도 개의치 않고 덤비는 그 의기야말로 본받음직하지 않은 바도 아니다.
이와 같이 「딸깍발이」는 온통 못생긴 짓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훌 륭한 점도 적지 않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쾨쾨한 샌님이라고 넘보고 깔 보기만 하기에는 너무도 좋은 일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인은 너무 약다. 전체를 위하여 약은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 자기 본 위로만 약다. 백년 대계를 위하여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일, 코 앞의 일에만 아름아름 하는 姑息之計(고식지계)에 현명하다. 廉潔(염결)에 밝은 것이 아니라 극단의 이기주의에 밝다. 실상 이것은 현명한 것이 아니 요, 우매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제 꾀에 제가 빠져서 속아 넘어갈 현명이 라고나 할까. 우리 현대인도 「딸깍발이」의 정신을 좀 배우자.
첫째 그 義氣(의기)를 배울 것이요, 둘째 그 강직을 배우자. 그 지나치게 청렴한 미덕은 오히려 분간하여 가며 배워야 할 것이다.
한국의 명문 (수필) - 木槿通信
◈木槿通信 - 金 素 雲
1907~1981. 시인 수필가번역문학가. 본명은 敎重. 경남 창원 출생. 19 20년 일본으로 건너감. 1923년부터 작품 활동. 1952년 첫 수필집 「마이동 풍첩」 발표.
편집자 注 : 이 글은 「목근통신」 中 「일본에 보내는 편지」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원문은 「한국수필문학전집」(문원각 刊)에서 옮겨 싣는다 . 공로명씨 추천.
「선데이 每日」의 기자가 묻습니다. 『한국의 도시나 촌락에서 掠奪(약탈)을 당한 그런 흔적은 없던가요?』 『글쎄요, 한국에 약탈을 당할 만한 무슨 財産(재산)이 애당초에 있었던가 요? 그토록 빈한합니다. 이 나라는 ----』
UP기자의 이 대답에는 「掠奪의 대상이나 되었으면 제법이게---」하는, 또 하나의 暗意(암의)가 풍기어 있습니다. 사실인즉, 戰火(전화)로 인해서 입 은 직접피해 外에도 한국의 국민들은 허다한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우 리가 「재산」이라고 하는 물자며 세간들은 있는 이의 눈으로 볼 때, 소꼽 장난의 부스러기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약탈의 대상도 못 되리 만치 빈곤하다는 이 辛辣(신랄)한 비평을 그러한 의 미에서 감수합니다. 그러나, 看過(간과)치 못할 또 하나의 문제가 여기 있 는 것 같습니다. 한국은 36년 동안을 日本이 다스리던 나라입니다. 「一視同仁(일시동인)」의 일본의 정치가 마침내 한국을 이 빈곤에 머물게 했다는 사실은 別로 일본의 자랑이 못 될 것입니다. 〈「센징(鮮人)의 주택은 더럽다」고, 쓰는 것보다 「센징의 집은 돼지우리 같다」고 쓰는 편이 문장 표현으로는 더 효과적이다〉
20년 전 東京 三省堂에서 발행된 敎材書(교재서)의 한 구절입니다. 현명하 고 怜悧(영리)한 귀국 국민에도 제 욕을 제가 하는 이런 바보가 있었습니다 . 이런 천진한 바보의 귀에는 掠奪감도 못된다는 외국기자의 한국평이 통쾌 하고, 고소했을는지 모릅니다마는, 마음 있는 이는 아마 또 하나의 반성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의 「미제라블」(悲慘)은 한국의 수치이기 前 에 實로 일본의 德性(덕성)의 「바로미터」라는 것을―.
敗戰國(패전국)이라던 일본이 천국이요, 36年의 桎梏(질곡)에서 벗어났다는 한국이 지옥이란 것은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가 위치를 顚倒 (전도)한 것 같은 신통하고도 재미있는 후세의 이야깃거리입니다. 전쟁에 지면 사내란 사내는 모조리 아프리카로 끌려가서 강제노동의 노예가 된다던 일본, 그 일본은 점령군 사령부의 寬厚(관후)한 庇護(비호) 아래 문화를 재건하며, 시설을 다시 回復(회복)하여 着着으로 戰前(전전)의 면모를 도로 찾아가고 있습니다. 거기 대비할 때, 연합국의 일원이요, 당당한 승리자인 중국은 그 광대한 영토를 버리고 대만으로 밀려가고, 해방의 기쁨에 꽹과 리를 울리며 좋아 날뛰던 한국은 국토를 양단당한 채, 지난 1년 동안에는 두 번이나 수도 서울을 敵手(적수)의 유린에 맡기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事實---, 가장 냉엄해야 할 「歷史」도 알고 보니 익살맞고 짓궂은 장난꾸 러기입니다.
행여나 誤解(오해)치 마십시오. 우리는 일본의 불행을 바라는 者가 아닙니 다. 일본의 행복을 嫉視(질시)하는 者가 아닙니다. 비록 「地獄」의 대명사 를 가지도록까지 일찍이 상상치도 못한 艱難(간난)과 塗炭(도탄)을 겪고 있 다고는 하나,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지녀나가야 할 최후의 德性(덕성) 하나 를 쉽사리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개인에 연령이 있는 것처럼 민족에도 민족의 연령이 있을 것입니다. 젊으면 경솔하고 순진하고, 늙으면 신중하고 狡狡(교교)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生理(생리)의 약속입니다.
같은 민족끼리도 문화의 차이는 현저합니다. 東京을 중심으로 한 關東과 京都를 표준으로 한 「가미가타」(上方)의 기질이며, 지방색을 비교해 본다면 , 여러분 자신이 이 사실을 수긍할 것입니다. 중국은 이미 늙은 나라입니다 . 일본은 동양삼국 중에서 가장 어리고 젊은 나라입니다. 그리고, 한국은 민족의 연륜으로 보아 바로 그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일본인의 민족성은 조급하나 경솔한 것이 자랑입니다. 대(竹)를 가른 것처 럼 꼿꼿하다는 形容(형용)을 여러분의 나라에서는 곧잘 씁니다.
우리는 그것을 과신했기에 만일 일본이 패전한다면, 군인은 모조리 자살해 버리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실로 一場(일 장)의 넌센스입니다. 일본이 그렇게 柔順(유순)하게 승리자 앞에 무릎을 꿇 고 그의 귀염까지 받으리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던 일입니다.
한국은 문화에 있어서 적어도 10여 세기를 일본에 앞선 나라입니다. 中國의 年輪(연륜)에는 미치지 못하나, 일본보다는 더 長成(장성)한 나라입니다. 따라서 사교성과 御人術(어인술)이 일본보다는 能해야 할 나라인데도 나타 난 결과는 正히 그와 반대입니다.
大川周明 博士는 전범자로 在監中(재감중)에 발광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 그의 기고만장한 저술 「일본 2600년史」에 대해서 일찍이 나는 「婦人公論」에 글 하나를 쓰고 削除(삭제)를 당한 일이 있습니다. 그 저서 중 「蘇我氏」에 언급한 1절에 조선으로부터 도래한 귀화인의 예를 들어, 우리 민 족성을 교활하고 간악한 최고의 표본으로 내세운 한 대문이 있습니다. 만일 , 그가 발광하지 않고 정신이 성했다면, 한번 다시 물어보고 싶은 일입니다 .― 오늘날의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서 과연 어느 쪽이 더 순진한 민족이더 냐? 어느 쪽이 더 능란하고 교활한 민족이더냐를.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狂者(광자)입니다. 살아 있다 손치더라도 그는 이 설문에 대답할 의무를 거 부할 것입니다.
교활이니 純眞(순진)이니 하는 쉬운 한 마디 말로 어느 民族性(민족성)을 斷定(단정)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일개인에도 정반대로 대립되는 양 면의 성격이 있거든, 하물며 일국 일민족을 들어 어느 한 쪽으로 규정지어 버린다는 것은 될 말이 아닙니다. 이 과오는 이미 大川 博士가 犯했거니와 , 그 전철을 또 한번 이 글이 踏襲(답습)한다는 것도 우스운 노릇입니다. 일본이 순진하든 한국이 교활하든 그것은 대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 오늘날의 결과로 보아서 한국은 그 전통의 美와, 민족의 숨은 정서를 백 에 하나 나타내지 못하고, 외국 기자의 입으로 「지옥」이란 별명을 듣도록 쯤 되었습니다. 반대로 戰時(전시)에는 美․英을 「鬼畜(귀축)」이란 冠詞 (관사)로 부르던 일본이 그네들에게 도리어 「천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한국인된 우리 자신이 반성할 허다한 문제가 잠재해 있는 것은 물론 입니다. 우리는 불가피한 역사의 불행만을 구실삼자는 것이 아닙니다. 인위 적으로도 우리는 적지않은 불행을 제조해 왔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우리 자신이 우리가 뿌린 씨를 거두어야 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별문제로 패전국 일본이 「천국」이 된 그 연유나 경로는 우리가 알고 싶은, 알아두어야 할 또하나의 흥미 있는 과제입니다.
서양주택에 중국요리, 게다가 일본 아내를 거느린 자는 세계 최대의 행운아 란 말이 있습니다. 由來(유래)로 일본의 「서비스 스피릿」이란 그토록 유 명합니다. 이것은 우리로서도 배움직한 미덕의 하나입니다.
進駐軍(진주군)에 대해서 이 「서비스 스피릿」이 얼마나 철저하게 충실하 게 발휘되었던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들은 바가 아니나, 전해오는 소문만으로도 짐작하기에 충분했 습니다.
내가 못하는 일을 남이 하면 으레 탈을 잡아보고 싶고, 티를 뜯어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의 이 「미덕」에 대해서 감히 입을 대이지 못합니다. 일찍이 「마담 버터플라이」 하나를 내지 못하고, 시모 다(下田)의 「오키치」 하나를 가지지 못한 우리로서는 흉내를 낼래야 낼 수 없는 노릇입니다.
UN軍이 지나갈 때, 입을 벌리고 황홀히 쳐다보며 「야아, 참 키도 억세게 크다」 「그 친구 되게 검네」하고, 탄복을 마지않는 것이 대한민국의 가두 풍경입니다. 사교성과 접대술에 이렇게 우둔한 민족이 「서브」의 종가라고 하는 일본 같은 나라와 지리적으로 이웃해 있다는 것이, 이를테면 우리들 의 불운입니다. 하필 일본과 비교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우리의 사교성은 확 실히 낙제입니다. 山설고 물 다른 만리이역에 와서, 더욱이 신명을 바쳐 戰野(전야)를 달리는 이들에게 한국이 지옥으로 비친다는 것도 생각해 보면 무리가 아닙니다.
새 역사가 가져온 우리들의 비극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서민문학의 주인공인 「春香(춘향)」의 절개를 자랑하던 민족입니다. 倭將(왜장)의 허 리를 끌어안고 南江(남강)의 푸른 물에 잠긴 「論介의 義」를 羨慕(선모)하 던 백성입니다. 우리들이 아끼고 위하는 이런 고귀한 정신은 「紅毛碧眼(홍 모벽안)」의 외국 손님들 앞에는 하나의 「빵빵 걸」의 매력에도 당하지 못 합니다.
그들은 한국의 전통이나 문화를 연구하러 온 학자․예술가가 아닙니다. 그 들이 흘린 「피」의 희생에 대한 報酬(보수)는 다만 「승리」일 뿐입니다. 승리 하나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 그들에게 「春香」의 절개, 「論介의 義」를 이해하라는 것이 도대체 지나친 기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면 혹시 오해를 살지 모릅니다마는, 일본의 천국설이 「빵빵 」文化, 娼婦(창부)의 서브에 유래한 것이라고 결론할 것이라면, 애당초에 이런 글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戰後(전후) 일본의 새 유행인 소위 아프 레게에르와 당신네들의 그 봉사정신의 미덕을 같은 촌수로 따지도록까지, 그렇게 일본에 對해서 나는 몰이해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화자찬 격입니다 마는, 나는 「源氏物語(원씨물어)」를 原文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萬葉(만엽)」의 詩心(시심)을 「바쇼」(芭蕉)․「부손」(蕪村)의 경지를 내딴에는 이해한다는 자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일본을 천국이라고 하는 어느 외국기자, 어느 進駐군인에 뒤떨어질 바 아닙니다. 잘한 일인지, 못 한 일인지 그 결산은 별문제로 하고, 나는 내 過半生(과반생)의 에네르기를 기울여 일본을 알고 일본을 배우고, 일본의 그릇된 방만과 자존 앞에 내 향토의 문화와 전통의 美를 矜示(긍시)함으로써 임무삼던 자입니다. 일본이 지닌 「惡」을 한국의 어느 애국자 못지않게 나는 압니다. 동시에 일본의 「善」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고 자부하는 자입니다.…(後略)
한국의 명문(수필) - 짝 잃은 거위를 哭하노라
◈짝 잃은 거위를 哭하노라 - 吳 相 淳
1893~1963. 시인․수필가. 호는 空超. 서울 출생. 1920년 「폐허」 동인. 편집자 注:원문은 글벗사刊 「한국의 영원한 수필 명작」 1994년 판을 사용 했다. 신봉승씨 추천.
내 일찍이 고독의 몸으로서 적막과 무료의 消遣法(소견법)으로 거위 한 쌍 을 구하여 자식 삼아 정원에 놓아 기르기 十個星霜(십개성상)이거니 올 여 름에 천만 뜻밖에도 우연히 맹견의 습격을 받아 한 마리가 비명에 가고, 한 마리가 잔존하여 극도의 고독과 회의와 비통의 나머지, 음식과 수면을 거 의 전폐하고 비 내리는 날, 달 밝은 밤에 여윈 몸 넋 빠진 모양으로 넓은 정원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동무 찾아 목메어 슬피우는 斷腸曲(단장곡)은 차마 듣지 못할러라. 죽은 동무 부르는 제 소리의 메아리인 줄은 알지 못 하고, 찾는 동무의 소린 줄만 알고 홀연 긴장한 모양으로 조심스럽게 소리 울려 오는 쪽으로 천방지축 기뚱거리며 달려가다가는 寂寂(적적) 無聞(무 문), 동무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때 또다시 외치며 제 소리 울려 오는 편 으로 쫓아가다가 결국은 암담한 절망과 회의의 답답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 서는 꼴은 어찌 차마 볼 수 있으랴. 말 못하는 짐승이라 때묻은 말은 주고 받고 못하나 너도나도 모르는 중의 一脈(일맥)의 진정이 서로 사이에 통하 였는지, 10년이란 기나긴 세월에 내 홀로 적막하고 쓸쓸하고 수심스러울 제 환희에 넘치는 너희들의 약동하는 생태는 나에게 무한한 위로요 감동이었 고, 四圍(사위)가 적연한 달 밝은 가을 밤에 너희들 자신도 모르게 무심히 외치는 애달픈 향수의 노랫소리에는, 나도 모르게 천지 적막의 향수를 그 윽이 느끼고 긴 한숨을 쉰 적도 한두 번이 아니러니―고독한 나의 愛物(애 물)아, 내 일찍이 너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친 能(능)이 있었던들 이 내 가 슴속 어리고 서린 한없는 서러운 사정과 情曲(정곡)을 알려 들리기도 하고 호소도 해보고, 기실 너도나도 꼭같은 한없는 이 설움 서로 공명도 하고 같이 통곡도 해보련만, 이 지극한 설움의 순간의 통정을 너로 더불어 한 가 지 못하는 영원한 遺恨(유한)이여―
외로움과 설움을 주체 못하는 순간마다 사람인 나에게 술과 담배가 있으니 , 한 개의 瀟湘斑竹(소상반죽)의 煙管(연관)이 있어 무한으로 통한 청신한 대기를 속으로 빨아들여 오장육부에 서린 설움을 창공에 뿜어내어 紫煙(자 연)의 선율을 타고 굽이굽이 곡선을 그리며 허공에 사라지는 나의 애수의 자취를 넋을 잃고 바라보며 속 빈 한숨 길게 그윽이 쉴 수도 있고, 한 잔의 술이 있어 위로 뜨고 치밀어오르는 억제 못할 설움을 달래며 九曲肝腸(구 곡간장) 속으로 마셔들여 속으로 스며들게 할 수도 있고, 12絃(현) 가야금 이 있어, 감정과 의지의 첨단적 표현 기능인 열 손가락으로 이 줄 저 줄 골 라 짚어, 간장에 어린 설움 골수에 맺힌 한을 음률과 운율의 선에 실어 찾 아내어 기맥이 다하도록 타고 타고 또 타, 절실한 이 내 가슴속 감정의 물 결이 열두 줄에 부딪쳐 몸부림 맘부림 쳐 가며 운명의 신을 원망하는 듯, 호소하는 듯 밀며, 댕기며, 부르며, 쫓으며, 잠기며, 맺으며 풀며, 풀며 맺 으며, 높고 낮고 길게 짧게 굽이쳐 돌아가며, 감돌아 가며, 감돌아 들며, 미묘하고 그윽하게 구르고 흘러 끝가는 데를 모르는 심연한 선율과 운율과 여운의 영원한 調和美(조화미) 속에 줄도 있고 나도 썩고 陶然(도연)히 취 할 수도 있거니와―그리고 네가 만일 학이라면 너도 응당 이 곡조에 취하고 화하여 너의 가슴속에 가득 답답한 설움과 한을 잠시라도 잊고 춤이라도 한번 덩실 추는 것을 보련마는―아아, 차라리 너마저 죽어 없어지면 네 얼 마나 행복하며 네 얼마나 구제되랴. 이 내 애절한 심사 너는 모르고도 알리 라. 이 내 무자비한 심술 너만은 알리라.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말 못 하는 짐승이라 꿈에라도 행여 가벼이 보지 말지니, 삶의 기쁨과 죽음의 설 움을 사람과 꼭같이 느낌을 보았노라. 사람보다도 더 절실한 느낌을 보았노 라. 사람은 산 줄 알고 살고, 죽은 줄 알고 죽고, 저는 모르고 살고, 모르 고 죽는 것이 다를 뿐, 저는 生(생)․死(사)․運命(운명)에 무조건으로 절 대 충실하고 순수한 순종자―사람은 아는 것을 자랑하는 우월감을 버리고 운명의 반역자임을 자랑 말지니, 엄격한 운명의 지상 명령에 歸一(귀일)하 는 결론은 마침내 같지 아니한가.
너는 본래 본성이 솔직한 동물이라 일직선으로 살다가 일직선으로 죽을 뿐 , 사람은 금단의 지혜의 과실을 따 먹은 덕과 벌인지 꾀 있고 슬기로운 동 물이라 직선과 동시에 곡선을 그릴 줄 아는 재주가 있을 뿐, 10년을 하루같 이 나는 너를 알고 너는 나를 알고 起居(기거)와 動靜(동정)을 같이하고 喜怒愛樂(희로애락)의 생활 감정을 같이하며 서로 사이에 일맥의 진정이 통해 왔노라. 나는 무수한 인간을 접해 온 10년 동안에 너만큼 순수한 진정이 통하는 벗은 사람 가운데서는 찾지 못했노라. 견디기 어렵고 주체 못할 파 멸의 비극에 직면하여 술과 담배를 만들어 마실 줄 모르고 거문고를 만들어 타는 곡선의 기술을 모르는 솔직 단순한 너의 숙명적 비통을 무엇으로 위 로하랴. 너도나도 죽어 없어지고 영원한 망각의 사막으로 사라지는 최후의 순간이 있을 뿐이 아닌가. 말하자니 나에게는 술이 있고, 담배가 있고, 거 문고가 있다지만 애닯고 안타깝다. 말이 그렇지, 忘憂草(망우초) 태산 같고 술이 억만 잔인들 한없는 운명의 이 설움 어찌하며 어이하랴. 가야금 12현 인들 골수에 맺힌 무궁한 이 怨(원)을 만분의 일이나 실어 날 수 있으며, 그 줄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타 본들 이 놈의 한이야 없어질 기약 있으랴. 간절히 원하거니 너도 잊고 나도 잊고 이것저것 다 없다는 본래 내 고향 찾아가리라. 그러나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이것저것 다 있는 그대로 그곳이 참 내 고향이라니 답답도 할사 내 고향 어이 찾을꼬, 참 내 고향 어이 찾 을꼬. 창 밖에 달은 밝고 바람은 아니 이는데, 뜰 앞에 오동잎 떨어지는 소 리 가을이 완연한데, 내 사랑 거위야, 너는 지금도 사라진 네 동무의 섧고 아름다운 꿈만 꾸고 있느냐.
아아, 이상도 할사. 내 고향은 바로 네로구나. 네가 바로 내 고향일 줄이야 꿈엔들 꿈꾸었으랴. 이 일이 웬일일까. 이것이 꿈인가. 꿈 깨인 꿈인가. 미칠 듯한 나는 방금 네 속에 내 고향 보았노라. 千秋(천추)의 감격과 감사 의 기적적 순간이여, 이윽고 벽력 같은 기적의 경이와 환희에 놀란 가슴 어 루만지며, 枕頭(침두)에 세운 가야금 이끌어 타니, 오동나무에 鳳(봉)이 울 고 뜰 앞에 학이 춤추는도다. 모두가 꿈이요, 꿈이 아니요, 꿈 깨니 또 꿈 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만상이 적연히 부동한데 뜰에 나서 우러러보니 봉도 학도 간 곳 없고 드높 은 하늘엔 별만 총총히 빛나고, 땅 위에는 신음하는 거위의 꿈만이 그윽하 고 아름답게 깊었고녀― 꿈은 깨어 무엇하리.
한국의 명문 (수필) - 방망이 깎던 노인
◈방망이 깎던 노인 -尹 五 榮
1907~1976. 수필가, 서울 출생. 양정고보 졸업. 보성고교서 20년간 교편 생활. 「수필문학입문」 등 저서 다수.
편집자 注:이 글은 글벗사刊 「한국의 영원한 수필 명작」 1994년 판에서 全文을 옮겨 왔다. 김상옥씨 추천.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가 갓 세간난 지 얼마 안 돼서 의정부에 내려가 살 때다. 서울 왔다가는 길에, 청량리 역으로 가기 위해 동대문에서 일단 전 차를 내려야 했다. 동대문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방망이를 깎아 파는 노인 이 있었다. 방망이를 한 벌 사 가지고 가려고 깎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 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방망이 하나 가지고 에누리 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더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 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 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사실 차 시 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깎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차 시간이 없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 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담아 피우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방망이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준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방망이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 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동대문 지붕 추녀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그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이고,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 집에 와서 방망이를 내놨더니, 아내는 이쁘게 깎았다고 야단이다. 집에 있 는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 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 보니, 배가 너무 부르면 옷감을 다 듬다가 치기를 잘하고 같은 무게라도 힘이 들며, 배가 너무 안 부르면 다듬 잇살이 펴지지 않고 손에 헤먹기 쉽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 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竹器(죽기)는 혹 대쪽이 떨어지면 쪽을 대고 물수건으로 겉을 씻고 곧 뜨거운 인두로 다리면 다시 붙어서 좀체로 떨어지지 않는다 . 그러나 요새 竹器는 대쪽이 한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竹器에 대를 붙일 때, 질 좋은 부레를 잘 녹여서 흠뻑 칠한 뒤에 볕에 쪼여 말린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한 뒤에 비로소 붙인다. 이것을 소라 붙인다고 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접착제를 써서 직 접 붙인다. 금방 붙는다. 그러나 견고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소라 붙일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藥材(약재)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熟地黃(숙지황)을 사면 보통 것은 얼 마, 윗길은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九蒸九日暴(구증구포)한 것은 세 배 이 상 비싸다. 구증구포란 아홉번 쪄내고 말린 것이다. 눈으로 봐서는 다섯 번 을 쪘는지 열 번을 쪘는지 알 수가 없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 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아홉 번 씩 찔 이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세 배씩 값을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 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물건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아름다운 물건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 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공예미술품을 만들어 냈다.
이 방망이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젊은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 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물건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상경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 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 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동대문의 지붕 추녀를 바라다보았다. 푸른 창 공에 날아갈 듯한 추녀 끝으로 흰 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때 그 노 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방망이 깎다가 우연히 추녀 끝의 구 름을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採菊東籬不 (채국동리불)다가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도연명의 시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집에 들어갔더니 며느리가 북어 자반을 뜯고 있었다. 전에 더덕․북 어를 방망이로 쿵쿵 두들겨서 먹던 생각이 난다. 방망이 구경한 지도 참 오 래다. 요새는 다듬이질하는 소리도 들을 수 없다. 「萬戶衣聲(만호도의성) 」이니, 「위군추야도의성(爲君秋夜 衣聲)」이니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 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40년 전 방망이 깎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 른다.
한국의 명문 (수필) - 바둑이와 나
◈바둑이와 나 崔 淳 雨 1916~1984. 미술사학자미술평론가. 경기도 개성 출생. 1946년 국립개성박 물관 근무.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 역임. 저서 「한국미술사」.
편집자 注:이 글은 1992년 학고재에서 출간된 「崔淳雨 전집」에 실려 있다 . 李興雨씨 추천.
6․25 사변이 일어난 이듬해 3월 서울이 다시 수복되자 비행기 편에 겨우 자리 하나를 얻어 단신으로 서울에 들어온 것은 비바람이 음산한 3월29일 저녁 때였다. 기약할 수 없는 스산한 마음을 안고 서울을 떠난 지 넉 달이 됐던 것이다.
멀리 포성이 으르렁대는 칠흑 같은 서울의 한밤을 어느 낯 모르는 민가에서 지샌 나는 우선 戰禍(전화) 속에 남겨두고 간 박물관의 피해 조사에 온하 루 동안 여념이 없었다. 부산에 보낼 첫 보고서를 군용 비행기 편으로 써 보내고 난 그 다음날 오후 비로소 나는 마음의 여유를 얻어 경복궁 뒤뜰에 남겨두고 간 나의 사택을 방문하기로 했다. 평시와 다름없이 그대로 문을 꼭 닫아두고 떠났던 나의 서재 그리고 독마다 담아놓고 간 싱그러운 보쌈 김치 같은 것들이 그 보금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 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떼어 놓고 간 우리 바둑이의 가엾은 운명이 생각키워 마음이 언짢았던 것이다.
메마른 잡초가 우거진 경복궁 뒤 옛 뜰엔 전과 다름없이 따스한 봄볕이 짜 릿하게 깃들이고 있었지만 인기척이 없는 마른 풀밭에선 굶주린 고양이가 놀라 뛰고 있었다. 풀밭길을 걸으며 일찍이 우리 집 해묵은 기왓골이 보일 무렵에 나의 마음은 야릇한 감상에 젖어 「옛 고향의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순화된 감정이 되어 있었다. 나의 시선이 천천히 다가오는 나의 집 대 청과 건넌방 쪽마루를 우선 더듬었을 때 나는 뜻하지 않은 일에 소스라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쪽마루 위엔 두고 간 우리 바둑이가 늘 즐겨 서 앉아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납작하게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바둑이 는 자기를 버리고 간 매정스러운 주인의 빈 집을 지키다가 굶주림에 지쳐 죽어간 것이라는 생각이 번개같이 나의 머리를 스쳐갔다.
그러나 나는 어느 사이에 내가 늘 밖에서 돌아올 때면 바둑이를 위하여 불 던 휘파람을 『휘휘 휘요-』하고 불고 있었다. 이때 뜻밖에도 마구 구겨진 걸레조각처럼 말라 널브러져 보이던 바둑이는 머리를 기적처럼 번쩍 들고 는 비틀거리는 다리로 단숨에 나에게 달려왔다. 내 발 밑에서 데굴데굴 구 르고 사뭇 미친 듯싶어 보였다. 나도 왈칵 눈시울이 더워와서 그를 덥석 껴 안았지만 그때 바둑이도 함께 울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그의 눈은 나의 눈 길을 간단없이 더듬었고 그의 메마른 입은 사정없이 그리고 그칠 줄 모르고 내 얼굴을 마구 핥고 있었다.
나는 마치 옛 애인에게라도 하듯이,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어』하면서 그 를 달래 주었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그를 버리고 갔던 자신이 부끄러웠고 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다시는 너를 떼놓지 않으리라고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 넉 달 전 그를 버리고 서울을 떠나던 날은 바로 이웃 I씨에게 서울에 남 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우리 바둑이를 좀 돌보아 달라고 몇 말의 먹이를 맡 겨두고 나서 마치 바둑이가 말귀를 알아듣기나 하듯이 『집을 잘 보고 있으 면 머지 않아 다시 돌아오마, 응』하면서 그를 타이른 나였다. 그후 이웃 I씨도 불과 일주일 만에 서울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 넓은 고궁 속, 춥고 시장한 한겨우내, 공포만이 깃들인 어둡고 외로운 밤들을 우리 바둑 이는 과연 무슨 수로 살아남아 준 것일까.
나는 바둑이를 안고서 단숨에 거리로 나왔다. 우선 굶주려 지친 바둑이가 어서 무엇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세종로 네거리에 나와서도 핼쑥한 아주머 니가 초콜릿이니 양담배 부스러기니 하는 따위들을 길가에 손바닥만큼 펴 놓고 텅빈 거리를 지키고 있을 뿐 바둑이가 먹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도 그 다음날도 바둑이는 밥을 주어도 먹지 못했다. 굶주 림에 지친 그의 내장은 대번에 곡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틀이 지나서야 겨우 조금씩 먹기 시작한 바둑이는 그림자처럼 한 시도 내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텅 빈 서울 장안에서 안전한 숙 소가 없던 당시 인기척도 없는 덕수궁 안 빈 집(미술관장 사택)에서 혼자 자야 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때 만약 바둑이가 없었던들 그 어둡고 무거 운 밤들을 아마 나 혼자 감당하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바둑이는 원래 버릇대로 방 안에는 못 들어오는 것으로 각오하고 있었다. 내가 혼자 덩그러니 어둔 방 안에서 먼 포성을 들으면서 뒤척거리고 있으면 바둑이는 내가 벗어 놓은 군화 위에 웅크리고 앉아서 숨소리를 쌔근대면서 방 안을 살피곤 했다. 때때로 문을 열고 회중전등으로 얼굴을 비춰 주면 바둑이는 웅크린 채 꼬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좋다고 한다. 방석을 주어도 밤마다 그는 내가 벗어 놓은 군화 위에만 올라 앉아 불편한 잠자리를 길들 이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밤 사이만이라도 떨어져 자야 하는 그리운 주인의 체취를 즐 기려는 속셈이었는지 또는 겉으로는 다정한 체하면서 정 급할 때는 「나 몰 라라」하고 死地(사지)에 자기를 버리고 가버렸던 믿지 못할 이 사나이가 밤 사이에라도 또 잠든 틈을 타서 그 군화를 신고 그때처럼 어디론지 훌쩍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4월 하순의 어느 날 중공군의 제1차 춘기 공세가 서울 변두 리에 다가왔다. 한밤내 우레 같은 포성이 쉴 사이 없고 귀를 기울이면 시청 앞을 지나는 군용 차량들은 줄곧 남쪽으로 달리는 듯싶었다.
그날 저녁 서울은 무거운 암흑 속에 산너머의 섬광이 번뜩이는 가운데 온통 피난 때문에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바둑이는 그동안 나와 함께 두 끼를 굶고도 그림자처럼 나를 따르고 있었다 . 결코 이번만은 너를 놓칠 수 없노라는 듯싶어 보였다. 가마니에 병자를 싣고 질질 끌고 가는 처절한 여인들의 모습, 그리고 나를 태워달라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는 젊은 아낙네의 울음소리가 가슴을 에는 듯한데 나는 바둑이를 안고 최후의 철수 열차에 연결한 우리 화차에 올랐다. 어두운 역 두에서 방금 눈물을 닦으며 작별한 늙은 수위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바둑이와 나는 오래 응시하고 있었다.
수십 개의 소개화차를 연결하느라고, 한밤내 열차는 앞걸음질 뒷걸음질을 치며 난폭한 충격을 우리 화차에까지 주고 있었다. 그때마다 바둑이는 한 번 덴 가슴에 놀라서 동요했고 가까워진 포성과 폭격의 우레소리가 그를 자 극해서 바둑이는 내 가슴에 안긴 채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훤히 날이 밝은 새벽 또 한번 큰 충격이 우리 화차에 오자 바둑이는 脫兎( 탈토)같이 내 가슴을 벗어나서 벌써 레일 위를 남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나도 화차에서 뛰어내려 바둑이를 따라 달렸다. 나의 숨이 턱 에 닿도록 지쳐서야 겨우 바둑이는 발랑 누워서 나에게 용서를 빌었다. 기 관차는 까마득히 먼데 기적은 연거푸 울리며 우리를 부르는 듯했다. 그때 기차가 우리를 버리고 떠날까봐 우리는 바로 기차가 올 레일 위를 달 리고 있었다.
기관사는 이 판국에 개 한 마리가 다 무어냐고 고함을 쳤지만 나는 사과할 겨를도 기운도 없었다. 그는 불쌍한 바둑이를 내가 또다시 이 死地에 버리 고 서울을 떠날 수 없는 심정을 알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바둑이의 그후
6․25 난리 속에서 일어났던 의리 깊은 우리 바둑이와 나 사이의 이야기가 중학교 국정교과서에 실린 후 여러 지방 소년소녀들로부터 자주 편지를 받 게 되었다. 그 다정한 편지들 사연 속에는 그후 그 바둑이가 어찌 되었는지 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다.
벌써 30년이나 지난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으므로 그 바둑이가 저승으로 돌 아간 지도 이미 오래됐고 바둑이의 아들딸들의 이야기도 좀 아리송해졌지만 생각나는 대로 그후의 이야기를 조금 써 두고자 한다.
굶주림과 추위와 절벽 같은 외로움 속에서 꼭 100날을 우리 바둑이는 눈에 덮인 경복궁 뒤뜰 나의 집(박물관 사택)을 지키면서 내가 돌아올 날을 기 다려 준 개였다. 100일 만에 다시 만났을 때 바둑이는 지칠 대로 지쳐서 마 치 걸레뭉치처럼 쪽마루 위에 늘어진 뼈와 가죽뿐이었다. 부산으로 안고 내 려간 후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했지만 한 반 년 지나면서 귀여운 모습이 되살아나서 수캐들이 늠실거리기 시작했고 바둑이는 머지 않아 자기를 닮 은 첫 새끼들을 거느린 어미개가 되었다.
바둑이의 아들 하나는 동료이며 술친구인 K박사가 데려가더니 그의 피난살 이 집 뜰에 손수 개장을 지어 주어 호강을 하게 되었다.
K박사는 그 개집에 金德狗씨 부산 별장이라 문패를 달아 주었고 우리들에게 는 그것이 피난 시름을 달래는 밝은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 아들개는 그후 주인과 함께 한 많은 부산 별장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에 올라왔다. 그때 마침 서울에 환도한 경무대 발바리개 암컷이 그 배필을 구하고 있었으 므로 우리 바둑이의 아들개는 경무대 발바리개의 배필로 들어갔고 이 이야 기는 이미 K박사의 수필로 유명해진 이야기가 되었다.
또 딸개 하나는 젖도 채 떨어지기 전에 경주박물관 C박사에게 보내졌는데 어쩌다가 내가 경주에 가게 되면 어찌 나를 알아보는지 오줌을 찔끔찔끔, 데굴데굴 구르면서 미친 듯이 내 얼굴을 핥고는 했다.
C박사와 술자리를 벌이면 으레 옆에 와 앉아서 귀염을 떨었는데 너도 한 잔 같이 하자 하고 개 입에 술을 한 잔 먹여 주면 그 술기가 돌아서 비실대는 모습이 그리도 즐거웠다. 어쨌든 우리 어미 바둑이는 그후에도 셋방살이 이웃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어서 귀여움을 받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해 보니 홀연히 온데간데 없어져서 집사람이 울상을 하고 있었다. 이웃 사람들의 말로는 바로 이웃방에 셋방살이하는 젊은이가 우리 바둑이를 그토록 탐내서 납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들 했다. 맛있는 것으로 우리 바둑이를 꾀기 시작한 지 벌써 오래되었으며 전날 저녁 때 그 청년이 싫다 는 바둑이를 억지로 안고 택시에 올라타더라는 말도 있었다.
우리 바둑이가 또 기구한 운명에 놓여졌구나 해서 마음이 언짢았다. 그 젊 은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닷새째 되던 날 우리 바둑이는 거지꼴이 되 어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집사람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안아들였지만 말 못 하는 바둑이의 눈길에서 우리는 그 호소를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납치되어 간 집에서 바둑이는 결사적으로 탈출해서 그리운 집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후에 그 저주스러운 청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지만 우리 셋방으로부터 30 리나 떨어진 釜山市 西面 자기 부모집으로 데리고 가서 매두었더니 사흘째 가서야 비로소 밥을 먹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안심해서 풀어주었더니 풀어 주는 순간 거리로 뛰쳐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가 살던 미아산 밑 토성동 셋방까지는 서면에서 복잡하고도 먼 거리였는데 우리 바둑이는 택 시에 태워져서 어둠 속에 끌려간 그 길을 어찌 찾아왔는지 나는 그때 개만 도 못한 놈이라고 입 안에서 중얼거리는 것으로 그 뻔뻔스러운 납치자에 대 한 분노를 삭였다.
그로부터 우리 바둑이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저주할 사람의 짓거리가 더할 수 없이 노여웠고 그 복잡하고 낯선 길을 집까지 찾아오느 라고 겪은 마음과 몸의 고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부부는 이 가엾 은 바둑이를 가축병원에 데리고 갔다. 병원에서 살아날 가망이 없지만 입원 시켜 보는 것이 좋겠다 해서 입원시켰더니 나흘 만에 끝내 숨을 거두었다. 사람도 사람 나름이고 개도 개 나름이겠지만 사람보다 더 의리 깊은 개도 있고 개만도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우리 바둑이는 194 8년 2월 나의 친구 H군의 사랑받는 개의 외동딸(한 마리만 낳았다)로 태어 났다.
우리 친구도 개를 그리 좋아해서 이 귀여운 무남독녀 개를 너에게 맡기기로 했다고 해서 나도 그를 대견히 알아서 주먹만한 어린 것을 오버코트 주머 니에 넣고 집에 돌아왔던 것이다. 1952년 가을 부산 가축병원에서 죽어갈 때까지 4년 반 동안의 짧은 인연이었지만 죽은 우리 바둑이에 대한 생각은 어느 한 사람에게 서린 추억 못지않게 내 마음속에 지금도 따스하게 살아 있다. 지금 기르고 있는 우리 집 착한 바둑이의 얼굴을 가끔 유심히 들여다보고 앉아 있노라면 죽은 바둑이의 환생인 양 싶어질 때도 있고 그러노라면 개의 눈동자가 무슨 간절한 호소를 하는 듯 느껴질 때도 있다. 사람들의 욕 중 에 개 같은 놈이니 개만도 못한 놈이니 하고 개욕을 도매금으로 해 넘기는 경우가 많지만 개는 그렇게 부도덕한 짐승이 아닌 것만 같다.
한국의 명문 (수필) - 淸貧禮讚
◈淸貧禮讚 -金 晋 燮 1903~? 수필가독문학자. 호는 청천. 이하윤 등과 함께 「해외문학」 발간 . 수필집 「생활인의 철학」 등 다수. 6․25 당시 拉北
편집자 注 : 1930년 「母頌論(모송론)」을 발표하며 본격 수필문학 데뷔. 주로 철학적․사색적 수필을 많이 썼다. 이 글은 1963년 문원각에서 나온 「한국수필문학전집」에서 옮겨 싣는다. 신봉승씨 추천.
이는 또 무어라 할 窮相(궁상)이 똑똑 흐르는 사상이뇨 하고, 독자 여러분 은 크게 놀라실지도 모른다. 확실히 사람이 이 황금만능의 천하에서 淸貧( 청빈)을 예찬할 만큼 곤경에 빠져 있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이 왕 부자가 못된 바에는 貧窮(빈궁)은 도저히 물리칠 수 없는 일이니, 사람 이 청빈을 極口禮讚(극구예찬)함은 우리들 선량한 貧者(빈자)가 이 世上을 살아가는 데 있어 그것은 절대로 필요한 한 개의 힘센 무기요, 또 위안이다. 혹은 부유라 하며, 혹은 빈곤하다 말하나, 대체 부유는 어디서 시작되는 것 이며, 빈곤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이냐? 사람이 부자이기 위해서는 대체 얼 마나 많이 가져야 되고, 사람이 가난키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적게 가져야 되느냐? 그러나, 물론 이것을 아는 이는 없다. 보라! 이 세상에는 부자임 에도 불구하고, 실로 대단한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가난하다 생각하 며, 사실에 있어 또 이 느낌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徒輩(도배)는 허다하지 않은가?
그들은 어느 날에 이르러도 자족함을 알지 못하고, 전연히 필요치 않은 많 은 것을 요망한다. 말하자면, 위에는 위가 있다고 할까, 도달할 수 없는 상 층만을 애써 쳐다보곤, 아직도 자기에게 없는 너무나 많은 것을 헤아리는 것이다. 포만함을 알지 못하고 「충분타」하는 아름다운 말을 이미 잊은 바 , 그러한 徒輩를 사람은 도와줄 도리가 없다.
그런데, 또 보라! 이 세상에는 극도로 어려운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넉넉타 생각하며, 사실에 있어 또 이 느낌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사 람은 허다치 않은가? 이 사람들에겐 명색이 재산이라 할 만한 것이 없음은 물론이요, 대개는 손으로 벌어서 입으로 먹는 생활이 허락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은 정말로 필요한 것조차를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고, 말하자면 밑에는 밑이 있으니까, 밑만 보고 또 이 위에도 더욱 가난할 수 있을 모든 경우를 생각하고,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切迫(절박)한 곤궁 속에 주리고 있는가 생각한다. 이리하여, 이 위안의 名流(명류)들은 마치 그들이 그들의 힘과 사랑을 어딘지 다른 곳에다 두는 듯한 느낌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원래가 빈부의 객관적 표준은 있을 수 없으므로, 빈궁의 문제를 쉽사리 규정하여 버릴 수는 없다. 문제는 오직 조그만 주머니가 곧 채워질 수 있음에 대하여, 구멍난 大囊(대낭)이 결코 차지 않는 물리적 이 유에만 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빈부의 최후의 결정자는 그 사람 자신일 뿐이요, 주위에 방황하는 제3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또한 사람이 참된 부유를 자손을 위 하여 남기려거든, 드디어 한이 있는 물질보다는 밑을 보는 才操(재조)와 缺乏(결핍)에 사는 기술을 전함에 지남이 없을 것이다. 자족의 취미와 자기의 역량을 어딘지 다른 곳에다 轉置(전치)할 수 있는 정신적 재능이야말로 사 람을 부자이게 하는 바 2대 요소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는 과연 빈궁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여기 두 가지 종류의 빈궁을 지적할 수가 있다. 그 하나는 물질적 빈궁이 라 할 수 있으니, 이제 벌써 할 일이 없고, 그러므로 쓸데없는 존재가 된 사람이 그보다 밑바닥에 있는 사람은 없는 까닭으로 활동과 생존에 대한 권 리를 이미 잃고, 여기는 영구히 자족과 質素(질소)의 어떠한 예술도 적용될 수 없을 때, 실로 그때 그는 참으로 가난하며, 실로 거기 참된 빈궁은 있다. 다른 하나는 정신적 빈궁이라 할 수 있으니, 그것은 사람이 그의 참된 역량 과 그의 참된 사랑을 바칠 수 있는 하나의 정당하고, 또 아름다운 「다른 곳」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치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다른 곳 」을 어리석은 나로서 嘲笑(조소)하므로 의하여 자기 자신을 無用(무용)의 長者(장자)로 뿐만 아니라, 그의 생존과 활동이 의미를 상실할 때, 이 결 핍을 맛보라 하지 않고, 지향없이 탐욕만 추구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 로 다른 의미에서 가난한 자라 아니할 수 없으며, 또 우리는 이곳에 다른 하나의 참된 빈궁을 발견치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여기 우리가 가장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제2유형의 빈자 가 냉담하고 倨慢(거만)한 태도로 제1유형의 빈자 옆을 지나친다는 사실이 다. 일찍이 디오게네스는 그의 조그만 통 속에서도 극히 쾌활하게 살았다. 그러나, 알렉산더에겐 이 세상 전체가 한없이 작은 것이었다. 여기 만일에 사람이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富를 더욱 큰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면, 그의 청빈은 확실히 적은 「재산」은 아니다.
편집자 注:1971년 3월 「현대문학」으로 데뷔. 수필집 「무소유」는 1976년 범우사에서 나왔다. 박종만씨 추천.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 두 盆(분)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 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茶崍軒(다래헌)으로 옮겨 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 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애들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 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스인가 하는 비료를 구해오기도 했었다. 여름철 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그 애들을 위 해 실내 온도를 내리곤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초를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耘虛老師(운허노사)를 뵈러 간 일 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우었다. 아차! 이때서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 어다 축여 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 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 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僧家의 遊行期)에도 나그네 길 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을 못했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盆을 안 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아갈 듯 홀가분한 해 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有情(유정)」을 떠나 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 해 無所有(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한국의의 명문 (수필) -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李 御 寧
1934~. 문학평론가수필가교육자. 충남 온양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 이화여대 교수, 문화부 장관 등 역임.
편집자 注:이 글은 문학사상사에서 출간된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1997년 판에서 「에필로그」 부분을 옮겨온 것이다. 윤금초씨 추천.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하나의 공간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조 그만 이파리 위에 우주의 숨결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왜 내가 혼자인가를 알았다. 푸른 나무와 무성한 저 숲이 실은 하나의 이파리라는 것을… 제각기 돋았다 홀로 져야 하는 하나의 나뭇잎, 한 잎 한 잎이 동떨어져 살고 있는 고독의 자리임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그 잎과 잎 사이를 영원한 세월과 무한한 공간이 가로막고 있음을.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왜 살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다. 왜 이처럼 살고 싶은가를, 왜 사랑해야 하며 왜 싸워야 하는가를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생존의 의미를 향해 흔드는 푸른 행커치프… 태 양과 구름과 소나기와 바람의 證人(증인)… 잎이 흔들릴 때, 이 세상은 좀 더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의 욕망에 눈을 떴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들었다. 다시 대지를 향해서 나뭇잎은 떨어져야 한다. 어둡고 거칠고 색채가 죽어 버린 흙 속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본다.
피가 뜨거워도 죽는 이유를 나뭇잎들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생명의 아픔 과, 생명의 흔들림이, 망각의 땅을 향해 묻히는 그 이유를… 그것들은 말한 다. 거부하지 말라,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대지는 더 무거워진다. 눈 에 보이지 않는 끈끈한 引力(인력)이 나뭇잎을 유혹한다. 언어가 아니라 나 뭇잎은 이 땅의 리듬에서 눈을 뜨고 눈을 감는다. 별들의 運行(운행)과 나 뭇잎의 파동은 같은 질서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우리들의 마음도 흔들린다. 온 우주의 공간이 흔들린다.
한국의 명문 (수필)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申 榮 福
1941~. 성공회대 경제학과 교수.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투옥, 20년20일 복역. 1988년 출소.
편집자 注:1977년 4월15일에 저자가 쓴 편지다. 서한을 한데 모은 「감옥으 로부터의 사색」은 1988년에 출간되었다. 이 글은 「서도의 관계론」을 옮 겨온 것이다. 박종만씨 추천.
아버님께 제가 書道(서도)를 운위하다니 堂拘(당구)의 吠風月(폐풍월) 짝입니다만 엽 서 위의 片言(편언)이고 보면 條理(조리)가 빈다고 허물이겠습니까.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비뚤어 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 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 합니다. 이것은 물론 지우거나 改漆(개칠)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획이 다른 획을 만나지 않고 어찌 제 혼자서 「字(자 )」가 될 수 있겠습니까. 획도 흡사 사람과 같아서 獨存(독존)하지 못하는 「반쪽」인 듯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자」가 잘못된 때는 그 다음 자 또 는 그 다음다음 자로써 그 결함을 보상하려고 합니다. 또한 「行(행)」의 잘못은 다른 행의 배려로써, 「한 聯(연)」의 실수는 다른 연의 구성으로써 감싸려 합니다. 그리하여 어쩌면 잘못과 실수의 누적으로 이루어진, 실패 와 보상과 결함과 사과와 노력들이 점철된 그러기에 더 애착이 가는 한 폭 의 글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얻은 한 폭의 글은 획, 자, 행, 연들이 대소, 강약, 太細(태세), 遲速(지속), 濃淡(농담) 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양보 하며 실수와 결함을 감싸주며 간신히 이룩한 성취입니다. 그중 한 자, 한 획이라도 그 생김생김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와르르 열 개가 전부 무너질 뻔 한, 심지어 落款(낙관)까지도 전체 속에 융화되어 균형에 한몫 참여하고 있 을 정도의 그 피가 통할 듯 농밀한 「상호연계」와 「통일」 속에는 이윽고 묵과 여백! 흑과 백이 이루는 대립과 조화. 그 「대립과 조화」 그것의 통 일이 창출해 내는 드높은 「質(질)」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규격 화된 자, 자, 자의 단순한 양적 집합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남남끼리의 그저 냉랭한 群棲(군서)일 뿐 거기 어디 악수하고 싶은 얼굴 하나 있겠습니까.
유리창을 깨뜨린 잘못이 유리 한 장으로 보상될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의 수고가, 인정이 배제된 일정액의 화폐로 代償(대상)될 수 있다는 생각만큼 이나 쓸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획과 획 간에, 자와 자 간에 붓을 세우듯 이. 저는 묵을 갈 적마다 人(인)과 인 間(간)의 그 뜨거운 「연계」 위에 서고자 합니다.
춥다가 아직 덥기 전의 4월도 한창 때, 좋은 시절입니다.
한국의 명문 (수필) - 귀향, 화해 그리고 새 출발을 위하여
◈귀향, 화해 그리고 새 출발을 위하여 -정 운 영
1944~. 경기대 경제학부 교수.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역임. 편집자 注:이 글은 한겨레신문 1989년 9월12일자에 실린 칼럼이다. 박종만 씨 추천.
추석은 귀향이다. 그러나 그 귀향이 『새는 옛 숲을 그리워하고 고기는 옛 못을 생각한다(覇鳥戀舊林 池魚思故淵)』는 陶潛(도잠)의 감상으로 흘러서는 안된다. 또한 그것은 『흥청한 나룻배에 올라고향으로 간다/갈 곳은 붉은 노을에 잠을 깨 었고』라는 스테판 게오르게(Stefan George) 류의 오만한 「귀향」으로 나 타나서도 안 된다. 고향은 언제나 우리에게 영원한 「힘의 샘」이기 때문이 다. 어디엔가 돌아갈 거처가 있다는 사실은 분주한 문명에 찌든 도회인들에 게 분명히 넓고 깊은 위안이 된다. 고향은 언제나 그 넉넉한 가슴으로 우리 를 맞으면서도 구태여 그 대가를 기다리지 않기에, 아파트의 면적이나 승용 차의 배기량으로 서열이 정해지는 도시의 각박한 인심으로 오염시키지 않도 록 우리 모두 굳게 다짐해야 한다. 비록 화물 트럭의 뒤칸에서 밤새 시달리 며 달려 왔어도, 비록 해진 양복 주머니 속에 빳빳한 지폐 다발이 들어 있 지 않더라도 다만 그동안 정직한 삶과 건강한 모습을 가지고 고향의 부모와 형제와 친지와의 반가운 재회를 기대할 수만 있다면 굳이 우리의 「빈손」 을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흙에 지친 어머니의 투박한 손길처럼 우 선 겸손해지는 일, 그것이야말로 귀향에 앞서 우리의 가슴에 준비해야 할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추석은 결실이다. 겨우내 터졌던 손등이 아물기도 전에 언 땅에 씨를 뿌렸고, 그리고 잔등에 모닥불을 피워대던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자식처럼 키워낸 그 수고와 권 태의 결실들이 마침내 이 추석에 진열된다. 그러니 허리띠를 풀자. 추수감 사절에 감사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은 節食(절식)하는 녀석뿐이란 서양의 익 살이 있지 않던가? 혹시 과잉소비를 걱정하는 정부관리나 생산의 차질을 불 평하는 기업가들이 여기 끼어들어 시비하거든 그들의 궁둥이를 한번 힘껏 걷어차 주자. 이미 옛적에 기름진 땅을 찾아 흉노족은 대륙을 넘어 대이주 를 감행했으며, 이웃 나라의 금붙이를 약탈하기 위해 무적함대는 바다를 누 볐지만, 지금 한반도에서 전개되는 민족 대이동에는 수확의 고마움을 조상 에게 전하고 그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눈다는 숭고한 뜻이 담겨져 있다. 결 국 모든 결실은 흙과 노동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하나를 주면 반드시 하나 이상을 돌려주는 그 흙과 노동의 정직한 계산으로부터 우리는 추석의 절기를 마련한 자연의 섭리를 깨달아야만 한다.
추석은 화해이다.
모든 새로운 잉태는 투쟁으로 비롯되지만 마침내 화해로 끝나야 하기 때문 이다. 추석 귀향단을 모집하는 안내문들이 어지러운 대학 게시판의 한 모퉁 이에서 「수확의 계절 가을에 사소한 부주의로 포로가 되어 이렇게 무기력 하게 그들의 관용이나 바라는 처지가 된 지금의 내 모습이 측은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어느 자리에 있건 민중의 대의에 어긋나지 않게 당당 히 생활할 작정이다. 이곳 구치소 생활은 물질적으로는 그렇게 어려운 편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많은 인내와 방황과 고민을 요구하는 곳이기도 하 다」로 이어지는 어느 젊은이의 공개된 편지를 읽으면서, 정치적 신조와 판 단이 다소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숱한 사람들을 철창 안에 가두어 둔 채, 햇 곡식과 햇과일로 드리는 제사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잠시 생각이 무척 혼란스러웠다. 실로 제사의 참뜻이 사람과 사람의 화해에 있다면 추 석은 마땅히 그 진정한 화해의 계기가 되어야 할 텐데….
추석은 대비이다.
가을을 거두고 나면 다시 혹독한 겨울의 시련이 다가온다. 그러므로 가을의 추수는 그만큼 더 충실해야 한다. 이 가을 밤 그대를 생각하고 쓸쓸한 하늘을 쳐다보며 거니네. 적막한 산중에 솔방울이 떨어지는데 숨어사는 그대 나로 하여 잠 못 드는가.
懷君屬秋夜 散步昑凉天 山空松子落 幽人應未眠
나 또한 그대로 인해 잠 못드는 이 밤, 머지 않아 찾아올 그 겨울에의 대비 를 서둘러야겠다. 지금부터 먹을 갈고, 촛대를 닦고, 책장을 정돈한다면 이 번 겨울은 아주 호사스럽게 지내게 될지 모르겠다. 그래서 추석은 재회와 화해의 시기이고, 또한 결실과 대비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명문 (수필) - 돌아가는 배
◈돌아가는 배 金 聖 佑
1934~. 한국일보 논설고문. 경남 통영 출생.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한국일 보 駐佛특파원․편집국장 등 역임. 저서 「돌아가는 배」 등 다수.
편집자 注:이 글은 1999년 「삶과 꿈」에서 출간된 「돌아가는 배」의 맨 마지막 章을 옮겨온 것이다. 노재봉씨 추천.
나는 돌아가리라. 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리라. 출항의 항로를 따라 귀항 하리라. 젊은 시절 수천 개의 돛대를 세우고 배를 띄운 그 항구에 늙어 구 명보트에 구조되어 남몰래 닿더라도 귀향하리라. 어릴 때 황홀하게 바라보 던 滿船(만선)의 귀선, 색색의 깃발을 날리며 꽹과리를 두들겨대던 그 칭칭 이소리 없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빈 배에 내 생애의 그림자를 달빛처 럼 싣고 돌아가리라.
섬의 선창가에서 소꿉놀이하며 띄워보낸 오동나무 종이 돛배의 남실남실한 걸음으로도 四海(사해)를 좋이 한바퀴 돌았을 세월이다. 나는 그 종이 돛 배처럼 그 선창에 가닿을 것이다.
섬을 떠나올 때, 선창과 떠나는 배에서 서로 맞잡은 오색 테이프가 한 가닥 씩 끊기는 아픔이었다. 그러나 나는 얼마든지 늘어지는 고무줄처럼 평생 끊 기지 않는 테이프의 끝을 선창에 매어둔 채 세상을 주유했다. 선창에 닻을 내린 채 닻줄을 풀며풀며 방랑했다. 이제 그 테이프에 끌려 소환되듯, 닻 줄을 당기듯, 작별의 선창으로 도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온 세상은 내가 중심이다. 바다가 아무리 넓어도 내 가 태어난 섬이 바다의 중심이다. 나는 섬을 빙 둘러싼 수평선의 원주를 일 탈해왔고 이제 그 중심으로 복귀할 것이다. 세상을 돌아다녀보니 나의 중심 은 내 고향에 있었다. 그 중심이 중력처럼 나를 끈다.
내 귀향의 바다는 離鄕(이향)의 그 바다일 것이다. 불변의 바다, 불멸의 바 다. 바다만큼 만고청청한 것이 있는가. 山川依舊(산천의구)란 말은 옛 시인 의 虛辭(허사)일 수 있어도 바다는 변색하지 않는다. 그리고 不老(불로)의 바다, 不朽(불후)의 바다. 늙지 않고 썩지 않고 항상 젊다. 내게는 세상에 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변하지 않은 친구가 있다. 그것이 바다다. 그 信義 (신의)의 바다가 나의 竹馬故友(죽마고우)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파도의 유희와 더불어 자랐다.
어느 즐거운 음악이 바다의 단조로운 海潮音(해조음)보다 더 오래 귀를 기 울이게 할 것인가. 어느 화려한 그림이 바다의 푸른 單色(단색)보다 더 오 래 눈을 머물게 할 것인가. 바다는 위대한 單調(단조)의 세계다. 이 단조가 바다를 불변, 불멸의 것이 되게 한다. 그 영원한 古典(고전)의 세계로 내 가 간다.
섬에 살 때 머리맡에서 밤새도록 철썩이는 바다의 물결소리는 나의 자장가 였다. 섬을 처음 떠나왔을 때 그 물결소리를 잃어버린 소년은 얼마나 많은 밤을 不眠(불면)으로 뒤척였는지 모른다. 이제 거기 나의 安眠(안면)이 있 을 것이다.
고향을 두고도 실향했던 한 浪子(낭자)의 귀향길에 바다는, 어릴 적 나의 襁褓(강보)이던 바다는 그 갯내가 젖내음처럼 향기로울 것이다. 그 정결하 고도 상긋한 바다의 香薰(향훈)이 내 젊은 날의 氣息(기식)이었다. 塵網(진 망) 속의 塵埃(진애)에 찌든 눈에는 해풍의 청량이 눈물겹도록 시릴 것이다 .가서 바닷물을 한 움큼 떠서 마시면 눈물이 나리라. 왈칵 눈물이 나리라. 물이 짜서가 아니라 어릴 때 헤엄치며 마시던 그 물맛이므로.
소금기가 있는 것에는 신비가 있다던가. 눈물에도 바다에도. 바다는 신비뿐 아니라 내게 무한과 영원을 가르쳐준 가정교사다. 海鳴(해명) 속에 神(신 )의 綸音(윤음)이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으러 간다.
나의 바다는 나의 공화국. 그 황량한 廣大(광대)가 나의 영토다. 그 풍요한 자유가 나의 主權(주권)이다. 그 공화국에서 나는 자유의 깃발을 공화국의 국기처럼 나부끼며 자유를 심호흡할 것이다. 바다는 자유의 공원이다. 씨 름판의 라인처럼 섬을 빙 둘러싸서 나를 가두고 있던 수평선. 그 수평선은 젊은 날 내 부자유의 울타리더니 이제 그 안이 내 자유의 놀이터다. 나의 부자유는 오히려 섬을 떠나면서 시작되었다. 수평선에 홀려 탈출한 섬에 귀환하면서 海鳥(해조)의 자유를 탈환할 것이다. 수평선의 테를 벗어난 내 인생은 반칙이었다.
섬은 바다의 집이다. 大海(대해)에 지친 파도가 밀려밀려 안식하는 귀환의 종점이다. 섬이 없다면 파도는 그 무한한 표류를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 희뜩희뜩한 파도의 날개는 광막한 황해의 어느 기슭에서 쉴 것인가. 섬은 파도의 고향이다. 나는 파도였다. 나의 일생은 파도의 일생이었다. 바다는 인간의 무력함을 느끼게 하는 허무의 광야, 파도는 이 허무의 바다 를 건너고 건너서 섬에 와 잠든다. 나의 인생도 파도처럼 섬의 선창에 돌아 와 쉴 것이다.
나는 모든 바다를 다 다녔다. 태양계의 惑星(혹성) 가운데 바다가 있는 것 은 지구뿐이라 더 갈 바다가 없었다. 육대양을 회유한 나는 섬에서 태어난 영광과 행복을 찾아 돌아가야 한다. 모든 생명의 어머니인 바다의 모태 속으로. 바닷물은 증발하여 승천했다가 비가 되고 강물이 되어 도로 바다로 내려온 다. 나의 귀향은 이런 환원이다. 바다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면서도 스스 로 더럽혀지지 않는다. 고향은 世塵(세진)에 더럽혀진 나를 정화시켜 줄 것이다. 바다는 年輪(연륜)이 없다. 山中無歷日(산중무역일)이라듯 바다에도 달력은 없어 내 오랜 不在(부재)의 나이를 고향 바다는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그 리고 섬은 이 蕩兒(탕아)의 귀환을 기다려 주소 하나 바꾸지 않고 그 자리 에 있을 것이다.
고향은 집이다.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집이다. 쉬지 않기 위해 집을 나서고 쉬기 위해 찾아온다. 나는 꼭 만 18세의 성년이 되던 해 고향 의 섬을 떠나왔다. 내 인생의 아침이었다. 이제 저녁이 된다.
모든 입항의 신호는 뱃고동소리다. 내 출항 때도 뱃고동은 울었다. 인생이 란 때때로 뱃고동처럼 목이 메이는 것. 나는 그런 목메인 船笛(선적)을 데 리고 귀항할 것이다.
돌아가면 외로운 섬에 두고 온 내 고독의 원형을 만날 것이다. 섬을 떠나면 서부터 섬처럼 고독하게 세상을 떠다닌 나의 평생은 섬에 돌아가면 옛애인 같은 그 원판의 고독과 더불어 이제 외롭지 않을 것이다.
고향은 앨범이다. 고향에는 성장을 멈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빛바랜 사진 속처럼 있다. 모래성을 쌓던 바닷가에서, 수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다는 것 을 알아버리고 돌아온 옛 소년은, 잃어버린 童話(동화) 대신 세상에서 주워 온 寓話(우화)들을 조가비처럼 진열할 것이다.
아침녘의 넓은 바다는 꿈을 키우고 저녁녘의 넓은 바다는 욕심을 지운다. 어린 시절의 내 몽상을 키운 바다는 이제 萬慾(만욕)을 버린 내 노년의 무 엇을 키울 것인가.
사람은 무엇이 키우는가. 고향의 산이 키우고 시냇물이 키운다. 그 나머지 를 가정이 키우고 학교가 키운다. 그러고도 모자라는 것을 우유가 키우고 밥이 키운다. 사람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하면서 고향에 대 해서는 보답하는 덕목을 모른다. 내게 귀향은 歸依(귀의)다. 나의 뼈를 기른 것은 8할이 멸치다. 나는 지금도 내 고향 바다의 멸치 없이 는 밥을 못 먹는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먹은 주식은 내 고향 욕지도의 명산인 고구마다. 그 때는 그토록 실미나더니 최근 맛을 보니 꿀맛이었다. 내가 자랄 때 가장 맛있던 것은 밀감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나지 않아 값비싸고 귀하던 것이 지금은 이 섬이 주산지가 되어 있다. 나는 어릴 때 먹던 멸치와 고구마와 밀감을 먹으러 돌아간다. 내 少時(소시 )를 양육한 滋養(자양)이 내 노년을 保養(보양)할 것이다.
영국 작가 조지 무어의 소설 「케리드 川(천)」을 읽으라. 「사람은 필요한 것을 찾아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고향에 와서 그것을 발견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내가 찾아헤맨 파랑새는 고향에 있을 것이다.
세상은 어디로 가나 결국은 외국. 귀향은 귀국이다. 모국어의 땅으로 돌아 오는 것이다.
내 고향 섬을 다녀온 한 지인의 말이, 섬 사람들의 말투가 어디서 듣던 것 이다 싶어 생각해 보니 내 억양이더라고 한다. 떠난 지 50년이 되도록 鄕語 (향어)의 어투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영원한 鄕人(향인)이다. 물은 위대한 조각가다. 나는 파도의 조각품이다. 파도가 바닷가의 바위를 새기듯 어릴 때의 물결소리가 내 표정을 새겼다. 이것이 내 인생의 표정이 되었다. 한 친구가 나에게 「海巖(해암)」이란 雅號(아호)를 권한 적이 있 다. 나는 섬의 바닷바위 위에 石像(석상)처럼 설 것이다.
돌아가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는가. 그림을 그리리라. 고향의 美化(미화)보 다 더 아름다운 일이 있겠는가. 나는 알프스 산맥의 몽블랑도 그려왔고 융 프라우도 그려왔다. 어릴 적 물갓집의 벽에 걸렸던 「시용성」 그림의 배경 이 알프스 산맥이었다. 이 눈 쌓인 고봉들을 물가에 갖다놓고 이제 바다를 그리리라. 섬을 떠난 나의 出遊(출유)는 위로 위로의 길이었다. 나는 표고 4000여 m까지 상승한 증표를 가지고 도로 바다로 하강한다. 어느 화가가 내 서툰 그림의 과욕이 걱정되는지 바다를 잘못 그리면 풀밭이 된다고 했다 . 그런들 어떠랴, 바다는 나의 大地(대지)인 것을.
해면을 떠나면서부터의 나의 登高(등고)는 이륙이었고 이제 착륙한다. 인생 은 공중의 곡예다. 해발 0m에서 출발한 나는 해발 0m로 귀환한다. 無에서의 시발이었고 無로의 귀결이다.
인생은 0이다. 사람의 일생은 토막난 線分(선분)이 아니라 圓(원)이라야 한 다. 『자기 인생의 맨 마지막을 맨 처음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 말한 괴테는 나를 예견하고 있었다. 고향에 돌아와 자신이 태어난 방에 서 입적한 석가의 제자 舍利弗(사리불)처럼, 그것은 원점으로 회귀하는 일 이다.
나는 하나의 라스트신을 상상한다. 한 사나이가 빈 배에 혼자 몸을 싣고 노를 저어 섬의 선창을 떠난다. 배는 돛도 없고 발동기도 없고 정처도 없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아무 것도 싣 지 않았다. 한바다로 나간 뒤에는 망망대해뿐 섬도 육지도 보이지 않는다. 이 배의 최후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빈 배라도 띄울 선창을 나는 찾아간다. 물결은 정지하기 위해 출렁인다. 배는 귀항하기 위해 출항한다. 나의 年代記(연대기)는 航海日誌(항해일지)였다.
소설
한국의 명문 (소설) - 달밤
◈달밤 李 泰 俊
1904~? 소설가. 강원 철원 출생. 휘문고보 졸업. 일본 상지대 졸업. 1950년 월북. 「소련기행」등 발표. 편집자 注:이 단편소설은 1934년 7월에 발표되었다. 깊은샘刊 「李泰俊전집 1」 1988년판에서 소설의 일부를 발췌했다. 具常씨 추천. - [前略] 그는 이튿날 저녁, 집을 알고 오는데도 아홉시가 지나서야
『신문 배달해 왔습니다』 하고 소리를 치며 들어섰다.
『오늘은 왜 늦었소?』 물으니
『자연 그럽죠』 하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는 워낙 이 아래 있는 삼산 학교에서 일을 보다 어떤 선생하고 뜻이 덜 맞아 나왔다는 것, 지금은 신문 배달을 하나 원배달이 아니라 보조 배달이 라는 것, 저희 집엔 양친과 형님 내외와 조카 하나와 저희 내외까지 식구가 일곱이란 것, 저희 아버지와 저희 형님의 이름은 무엇무엇이며, 자기 이름 은 황가인데다가 목숨 수자하고 세울 건자로 황수건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노랑수건이라고 놀리어서, 성북동에서는 가가호호에서 노랑수건 하면 다 자 긴 줄 알리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다가, 이날도 『어서 그만 다른 집에도 신문을 갖다 줘야 하지 않소?』 하니까 그때서야 마지못해 나갔다. 우리 집에서는 그까짓 반편과 무얼 대꾸를 해가지고 그러느냐 하되, 나는 그와 지껄이기가 좋았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열심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고, 그와 는 아무리 오래 지껄이어도 힘이 들지 않고, 또 아무리 오래 지껄이고 나도 웃음밖에는 남는 것이 없어 기분이 거뜬해지는 것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중만 아니면 한참씩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어떤 날은 서로 말이 막히기도 했다. 대답이 막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고 막히었다. 그러나 그는 늘 나보다 빠르게 이야깃거리를 잘 찾아냈다. 오뉴월인데도『꿩고기를 잘 먹느냐?』고도 묻고, 『양복은 저고 리를 먼저 입느냐, 바지를 먼저 입느냐?』고도 묻고, 『소와 말과 싸움을 붙이면 어느 것이 이기겠느냐?』는 둥, 아무튼 그가 얘깃거리를 취재하는 방면은 기상천외로 여간 범위가 넓지 않은데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나는 『평생 소원이 무엇이냐?』고 그에게 물어 보았다. 그는 『그 까짓 것쯤 얼른 대답하기는 누워서 떡먹기』라고 하면서, 평생 소원은 자기 도 원배달이 한번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남이 혼자 배달하기 힘들어서 한 이십 부 떼어 주는 것을 배달하고, 월급이 라고 원배달에게서 한 삼원 받는 터이라, 월급을 이십여 원을 받고 신문사 옷을 입고, 방울을 차고 다니는 원배달이 제일 부럽노라 하였다. 그리고, 방울만 차면 자기도 뛰어다니며 빨리 돌 뿐 아니라 그 은행소에 다니는 집 개도 조금도 무서울 것이 없겠노라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럴 것 없이 아주 신문사 사장쯤 되었으면 원배달도 바랄 것 없고 그 은행소에 다니는 집 개도 상관할 배 없지 않겠느냐?』 한즉, 그 는 뚱그레지는 눈알을 한참 굴리며 생각하더니 『딴은 그렇겠다』고 하면서 , 자기는 경난이 없어 거기까지는 바랄 생각도 못하였다고 무릎을 치듯 가 슴을 쳤다.
그러나 신문사 사장은 이내 잊어버리고 원배달만 마음에 박혔던 듯, 하루는 바깥마당에서부터 무어라고 떠들어대며 들어왔다.
『이선생님? 이선생님 계ᄇ쇼? 아, 저도 내일부턴 원배달이올시다, 오늘밤 만 자면입쇼…』 한다. 자세히 물어보니, 성북동이 따로 한 구역이 되었는데 자기가 맡게 되 었으니까, 내일은 배달복을 입고 방울을 막 떨렁거리면서 올 테니 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이란 게 그리게 무어든지 끝을 바라고 붙들어야 한다』 고 나에게 일러주면서 신이 나서 돌아갔다. 우리도 그가 원배달이 된 것이 좋은 친구가 큰 출세나 하는 것처럼 마음속으로 진실로 즐거웠다. 어서 내 일 저녁에 그가 배달복을 입고 방울을 차고 와서 쭐럭거리는 것을 보리라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그는 오지 않았다. 밤이 늦도록 신문도 그도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신문도 그도 오지 않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야, 이날은 해도 지 기 전인데 방울 소리가 요란스럽게 우리 집으로 뛰어들었다. 『어디 보자!』
하고 나는 방에서 뛰어나갔다. 그러나 웬일일까, 정말 배달복에 방울을 차고 신문을 들고 들어서는 사람은 황수건이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이다.
『왜 전엣사람은 어디 가고 당신이오?』 물으니 그는 『제가 성북동을 맡았습니다』 한다. 『그럼 전엣사람은 어디를 맡았소?』 하니 그는 픽 웃으며 『그까짓 반편을 어딜 맡깁니까? 배달부로 쓸랴다가 똑똑치가 못하니까 안 쓰고 말었나 봅니다』 한다. 『그럼 보조 배달도 떨어졌소?』 하니 『그럼요. 여기가 따루 한 구역이 된 걸요』 하면서 방울을 울리며 나갔다.
이렇게 되었으니 황수건이가 우리 집에 올 길은 없어지고 말았다. 나도 가 끔 문 안엔 다니지만, 그의 집은 내가 다니는 길 옆은 아닌 듯 길가에서도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까운 친구를 먼 곳에 보낸 것처럼, 아니 친구가 큰 사업에나 실패하 는 것을 보는 것처럼 못 만나는 섭섭뿐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기도 하였다. 그 당자와 함께 세상의 야박함이 원망스럽기도 하였다.한데 황수건은 그의 말대로, 노랑수건이라면 온 동네에서 유명은 하였다. 노랑 수건하면, 누구나 성북동에서 오래 산 사람이면 먼저 웃고 대답하는 것을 나는 차츰 알았다.
내가 잠깐씩 며칠 보기에도 그랬거니와 그에겐 우스운 일화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삼산 학교에 급사로 있을 시대에 삼산 학교에다 남겨 놓고 나온 일화도 여 러 가지라는데, 그중에 두어 가지를 동네 사람들의 말대로 옮겨 보면 역시 그때부터도 이야기하기를 대단 즐기어 선생들이 교실에 들어간 새 손님이 오면 으레 손님을 앉히고는 자기도 걸상을 갖다 떡 마주 놓고 앉는 것은 물론, 마주 앉아서는 곧 자기류의 만담삼매로 빠지는 것인데, 한번은 도학 무국에서 시학관이 나온 것을 이따위로 대접하였다. 일본말을 못하니까 만 담은 할 수 없고, 마주 앉아서 자꾸 일본말을 연습하였다.
『센세이 히, 오하요 고사이마쓰까… 히히, 아메가 후리마쓰 유끼가 후리마 쓰까, 히히… (선생 히, 안녕하십니까… 히히, 비가 옵니다. 눈이 옵니까, 히히…)』 시학관도 인정이라 처음엔 웃었다. 그러나 열 번 스무 번을 되풀이하는 데
는 성이 나고 말았다. 선생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종소리가 나지 않으니까, 한 선생이 나와 보니 종칠 것도 잊어 버리고 손님과 마주 앉아서 『오하요 유끼가 후리마쓰까…』하는 판이다. 그날 수건이는 선생들에게 단단히 몰리고 다시는 안 그리겠노라고 했으나,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해서 그예 쫓겨나오고 만 것이다.
그는『너의 색시 달아난다』
하는 말을 제일 무서워했다 한다. 한번은 어느 선생이 장난엣말로
『요즘 같은 따뜻한 봄날엔 옛날부터 색시들이 달아나기를 좋아하는데, 어 제도 저 아랫말에서 둘이나 달아났다니까 오늘은 이 동리에서 꼭 달아나는 색시가 있을걸…』
했더니, 수건이는 점심을 먹다 말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는 어서 바삐 하학을 시키고 집으로 갈 양으로, 오십 분 만에 치는 종을 이십 분 만에, 삼십 분 만에 함부로 다가서 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後略]
한국의 명문 (소설) - 메밀꽃 필 무렵
◈메밀꽃 필 무렵 李 孝 石
1907~1942. 소설가. 호는 可山. 강원도 평창 출생.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졸업. 1925년 데뷔.
편집자 注:이 작품은 1936년 「朝光」 제12호에 발표되었다. 본문 중의 < >는여러 추천자들이 특히 名文이라고 적시한 부분임. 金埈成씨 추천.
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 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 사람들은 거지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무꾼 패가 길거리에 궁싯거 리고 있으나, 석유병이나 받고 고깃 마리나 사면 족할 이 축들을 바라고 언 제까지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춥춥스럽게 날아드는 파리 떼도 장난꾼 각다귀들도 귀치 않다. 얼금뱅이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생원은 기어이 동업의 조선달을 나꾸어 보았다.
『그만 거둘까?』 『잘 생각했네. 봉평장에서 한 번이나 흐뭇하게 사본일 있을까? 내일 대화 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오늘 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걸』 『달이 뜨렷다?』
절렁절렁 소리를 내며 조선달이 그날 산 돈을 따지는 것을 보고 허생원은 말뚝에서 넓은 휘장을 걷고 벌여놓았던 물건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무명필 과 주단바리가 두 고리짝에 꼭 찼다. 멍석 위에는 천 조각이 어수선하게 남 았다. 다른 축들도 벌써 거진 전들을 걷고 있었다. 약빠르게 떠나는 패도 있었다. 어물장수도, 땜쟁이도, 엿장수도, 생강장수도, 꼴들이 보이지 않았 다. 내일은 진부와 대화에 장이 선다. 축들은 그 어느 쪽으로든지 밤을 새 며 육칠십 리 밤길을 타박거리지 않으면 안된다. 장판은 잔치 뒷마당같이 어수선하게 벌어지고 술집에서는 싸움이 터져 있었다. 주정꾼 욕지거리에 섞여 계집의 앙칼진 목소리가 찢어졌다. 장날 저녁은 정해 놓고 계집의 고 함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생원, 시침을 떼두 다 아네. …충주집 말야』 계집 목소리로 문득 생각난 듯이 조선달은 비죽이 웃는다. 『화중지병이지. 연소패들을 적수로 하구야 대거리가 돼야 말이지』 『그렇지두 않을걸. 축들이 사족을 못 쓰는 것두 사실은 사실이나, 아무리 그렇다군 해두 왜 그 동이 말일세. 감쪽같이 충주집을 후린 눈치거든』 『무어 그 애숭이가? 물건 가지고 나꾸었나부지, 착실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그 길만은 알 수 있나… 궁리 말구 가보세나 그려. 내 한 턱 씀세』 그다지 마음이 당기지 않는 것을 쫓아갔다. 허생원은 계집과는 연분이 멀었다. 얼금뱅이 상판을 쳐들고 대어설 숫기는 없었으나, 계집 편에서 정을 보낸 일도 없었고, 쓸쓸하고 뒤틀린 반생이었다. 충주집을 생각만 하여도 철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발밑이 떨리고 그 자리에 소스라쳐 버린다. 충주집 문을 들어서서 술좌석에서 짜장 동이를 만났을 때에는 어찌 된 서슬인지 발끈 화가 나 버렸다. 상 위에 붉은 얼굴을 쳐들고 제법 계집과 농탕치는 것을 보고서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녀석이 제법 난질꾼인데, 꼴사납다. 머리 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낮부터 술 처먹고 계집과 농탕이야. 장돌뱅이 망신 만 시키고 돌아다니누나. 그 꼴에 우리들과 한몫 보자는 셈이지. 동이 앞에 막아서면서부터 책망이었다. 걱정두 팔자요 하는 듯이 빤히 쳐다보는 상기 된 눈망울에 부딪칠 때, 결 김에 따귀를 하나 갈겨 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 었다. 동이도 화를 쓰고 팩하게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허생원은 조금도 동색 하는 법 없이 마음먹은 대로는 다 지껄였다.
『어디서 주워먹은 선머슴인지는 모르겠으나, 네게도 아비 어미 있겠지. 그 사나운 꼴 보면 맘 좋겠다. 장사란 탐탁하게 해야 되지, 계집이 다 무어야 나가거라, 냉큼 꼴 치워』
그러나 한 마디도 대거리하지 않고 하염없이 나가는 꼴을 보려니 도리어 측 은히 여겨졌다. 아직도 서름서름한 사인데 너무 과하지 않았을까 하고 마음 이 섬짓해졌다. 주제도 넘지 같은 술손님이면서두 아무리 젊다구 자식 낳게 된 것을 붙들고 치고 닦아셀 것은 무어야 원. 충주집은 입술을 쫑긋하고 술 붓는 솜씨도 거칠었으나, 젊은 애들한테는 그것이 약이 된다고 하고 그 자리는 조선달이 얼버무려 넘겼다. 너 녀석한테 반했지, 애숭이를 빨면 죄 된다. 한참 법석을 친 후이다. 담도 생긴데다가 웬일인지 흠뻑 취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허생원은 주는 술잔이면 거의 다 들이켰다. 거나해짐 을 따라 계집 생각보다도 동이의 뒷일이 한결같이 궁금해졌다. 내 꼴에 계 집을 가로채서는 어떡헐 작정이었누 하고, 어리석은 꼬락서니를 모질게 책 망하는 마음도 한편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지난 뒤인지 동이가 헐레벌떡거리며 황급히 부르러 왔을 때에는, 마시던 잔을 그 자리에 던지 고 정신없이 허덕이며 충주집을 뛰어나간 것이었다.
『생원 당나귀가 바를 끊구 야단이에요』 『각다귀들 장난이지 필연코』 짐승이도 짐승이려니와 동이의 마음씨가 가슴을 울렸다. 뒤를 따라 장판을 달음질하려니 거슴츠레한 눈이 뜨거워질 것 같다.
『부락스런 녀석들이라 어쩌는 수 있어야죠』
『나귀를 몹시 구는 녀석들은 그냥 두지 않을걸』 반평생을 같이 지내온 짐승이었다. 같은 주막에서 잠자고 같은 달빛에 젖으 면서 장에서 장으로 걸어다니는 동안에 이십 년의 세월이 사람과 짐승을 함 께 늙게 하였다. 가스러진 목 뒤 털은 주인의 머리털과도 같이 바스러지고 , 개진개진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꼽을 흘렸다. 몽당비처럼 짧게 슬리운 꼬리는 파리를 쫓으려고 기껏 휘저어 보아야 벌써 다리까지는 닿지 않았다. 닳아 없어진 굽을 몇 번이나 도려내고 새 철을 신겼는지 모른다. 굽은 벌써 더 자라나기는 틀렸고 닳아버린 철 사이로는 피가 빼짓이 흘렀 다. 냄새만 맡고도 주인을 분간하였다. 호소하는 목소리로 야단스럽게 울며 반겨한다.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니 나귀는 코를 벌름거리고 입을 투르르거렸다. 콧물이 튀었다. 허생원은 짐승 때문에 속도 무던히는 썩었 다. 아이들의 장난이 심한 눈치여서 땀 밴 몸둥아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좀 체 흥분이 식지 않는 모양이었다. 굴레가 벗어지고 안장도 떨어졌다. 요 몹 쓸 자식들, 하고 허생원은 호령을 하였으나 패들은 벌써 줄행랑을 논 뒤요 몇 남지 않은 아이들이 호령에 놀래 비슬비슬 멀어졌다.
『우리들 장난이 아니우, 암놈을 보고 저 혼자 발광이지』 코흘리개 한 녀석이 멀리서 소리를 쳤다. 『고 녀석 말투가』
『김첨지 당나귀가 가 버리니까 온통 흙을 차고 거품을 흘리면서 미친 소같 이 날뛰는걸. 꼴이 우스워 우리는 보고만 있었다우. 배를 좀 보지』 아이들은 앙돌아진 투로 소리를 치며 깔깔 웃었다. 허생원은 모르는 결에 낯이 뜨거워졌다. 뭇 시선을 막으려고 그는 짐승의 배 앞을 가리워 서지 않 으면 안되었다.
『늙은 주제에 암샘을 내는 셈야. 저놈의 짐승이』 아이의 웃음소리에 허생원은 주춤하면서 기어코 견딜 수 없어 채찍을 들더 니 아이들을 쫓았다.
『쫓으려거든 쫓아보지. 왼손잡이가 사람을 때려』 줄달음에 달아나는 각다귀에는 당하는 재주가 없었다. 왼손잡이는 아이 하 나도 후릴 수 없다. 그만 채찍을 던졌다. 술기도 돌아 몸이 유난스럽게 화 끈거렸다.
『그만 떠나세. 녀석들과 어울리다가는 한이 없어. 장판의 각다귀들이란 어 른보다도 더 무서운 것들인걸』 조선달과 동이는 각각 제 나귀에 안장을 얹고 짐을 싣기 시작하였다. 해가 꽤 많이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드팀전 장돌림을 시작한 지 이십 년이나 되어도 허생원은 봉평장을 빼논 적 은 드물었다. 충주, 제천 등의 이웃 郡(군)에도 가고, 멀리 영남지방도 헤 매기는 하였으나 강릉쯤에 물건 하러 가는 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군내를 돌아다녔다. 닷새만큼씩의 장날에는 달보다도 확실하게 면에서 면으로 건 너간다. 고향이 청주라고 자랑삼아 말하였으나 고향에 돌보러간 일도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 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 반날 동안이나 뚜벅뚜벅 걷고 장터 있는 마을에 거의 가까웠을 때, 거친 나귀가 한바탕 우렁차게 울면 더구나 그것이 저녁 녘이어서 등불들이 어둠 속에 깜박거릴 무렵이면, 늘 당하는 것이건만 허생 원은 변치 않고 언제든지 가슴이 뛰놀았다.
젊은 시절에는 알뜰하게 벌어 돈푼이나 모아 본 적도 있기는 있었으나, 읍 내에 백중이 열린 해 호탕스럽게 놀고 투전을 하여 사흘 동안에 다 털어 버 렸다. 나귀까지 팔게 된 판이었으나 애끊는 정분에 그것만은 이를 물고 단 념하였다. 결국 도로아미타불로 장돌림을 다시 시작할 수밖에는 없었다. 짐 승을 데리고 읍내를 도망해 나왔을 때에는, 너를 팔지 않기 다행이었다고 길가에서 울면서 짐승의 등을 어루만졌던 것이었다. 빚을 지기 시작하니 재 산을 모을 염은 당초에 틀리고, 간신히 입에 풀칠하러 장에서 장으로 돌아 다니게 되었다. 호탕스럽게 놀았다고는 하여도 계집 하나 후려보지도 못하 였다. 계집이란 쌀쌀하고 매정한 것이었다. 평생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신 세가 서글퍼졌다. 일신에 가까운 것이라고는 언제나 변함없는 한 필의 당나귀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꼭 한번의 첫일을 잊을 수는 없었다. 뒤에도 처음에도 없는 단 한번의 괴이한 인연! 봉평에 다니기 시작한 젊은 시절의 일이었으 나 그것을 생각할 적만은 그도 산 보람을 느꼈다.
『달밤이었으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지금 생각해두 도무지 알 수 없어』 허생원은 오늘 밤도 또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는 것이다. 조선달은 친구가 된 이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렇다고 싫증을 낼 수도 없었으나 , 허생원은 시치미를 떼고 되풀이할 대로는 되풀이하고야 말았다.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
<조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 였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 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 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 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 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確的(확적)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서운한 제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주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 나 마찬가지지.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 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 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팔자에 있었나부지』 아무렴! 하고 응답하면서 말머리를 아끼는 듯이 한참이나 담배를 빨 뿐이었 다. 구수한 자줏빛 연기가 밤 기운 속에 흘러서는 녹았다.
『날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달리 기다리는 놈팽이가 있은 것 두 아니었네. 처녀는 울고 있단 말야. 짐작은 대고 있으나 성서방네는 한창 어려워서 들고 날 판인 때였지. 한집안 일이니 딸에겐들 걱정이 없을 리 있겠나? 좋은 데만 있으면 시집도 보내련만 시집은 죽어도 싫다지. 그러나 처녀란 울 때같이 정을 끄는 때가 있을까! 처음에는 놀라기도 한 눈치였으 나 걱정 있을 때는 누르러지기도 쉬운 듯해서 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었네…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지. 제천인지로 줄행랑을 놓은 건 그 다 음날이렸다. 다음 장도막에는 벌써 온 집안이 사라진 뒤였네. 장판은 소문 에 발끈 뒤집혀 오죽해야 술집에 팔려가기가 상수라고 처녀의 뒷공론이 자 자들 하단 말이야. 제천 장판을 몇 번이나 뒤졌겠나? 하나 처녀의 꼴은 꿩 궈먹은 자리야. 첫날밤이 마지막 밤이었지. 그때부터 봉평이 마음에 든 것 이 반평생을 두고 다니게 되었네. 평생인들 잊을 수 있겠나』
『수 좋았지. 그렇게 신통한 일이란 쉽지 않어. 항용 못난 것 얻어 새끼 낳 고 걱정 늘고, 생각만 해두 진저리가 나지… 그러나 늙으막바지까지 장돌뱅 이로 지내기도 힘드는 노릇 아닌가? 난 가을까지만 하구 이 생애와두 하직 하려네. 대화쯤에 조그만 전방이나 하나 벌이구 식구들을 부르겠어. 사시장 천 뚜벅뚜벅 걷기란 여간이래야지』
『옛 처녀나 만나면 같이나 살까…. 난 거꾸러질 때까지 이 길 걷고 저 달 볼 테야』
산길을 벗어나니 큰길로 틔어졌다. 꽁무니의 동이도 앞으로 나서 나귀들은 가로 늘어섰다. 『총각두 젊겠다, 지금이 한창 시절이렸다. 충주집에서는 그만 실수를 해서 그 꼴이 되었으나 설게 생각 말게』
『처, 천만에요. 되려 부끄러워요. 계집이란 지금 웬 제격인가요. 자나깨나 어머니 생각뿐인데요』
허생원의 이야기로 실심해 한 끝이라 동이의 어조는 한풀 수그러진 것이었다.
『아비 어미란 말에 가슴이 터지는 것도 같았으나 제겐 아버지가 없어요. 피붙이라고는 어머니 하나뿐인 걸요』
『돌아가셨나?』
『당초부터 없어요』
『그런 법이 세상에…』 생원과 선달이 야단스럽게 껄껄들 웃으니, 동이는 정색하고 우길 수밖에 없었다.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으랴 했으나 정말이에요. 제천 촌에서 달도 차지 않 은 아이를 낳고 어머니는 집을 쫓겨났죠. 우스운 이야기나,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버지 얼굴도 본 적 없고 있는 고장도 모르고 지내와요』 고개가 앞에 놓인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내렸다. 둔덕은 험하고 입을 벌 리기도 대견하여 이야기는 한동안 끊겼다. 나귀는 건뜻하면 미끄러졌다. 허 생원은 숨이 차 몇 번이고 다리를 쉬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개를 넘을 때마 다 나이가 알렷다. 동이같이 젊은 축이 그지없이 부러웠다. 땀이 등을 한바 탕 쭉 씻어 내렸다. 고개 너머는 바로 개울이었다. 장마에 흘러버린 널다리가 아직도 걸리지 않 은 채로 있는 까닭에 벗고 건너야 되었다. 고의를 벗어 띠로 등에 얽어매고 반벌거숭이의 우스꽝스런 꼴로 물 속에 뛰어들었다. 금방 땀을 흘린 뒤였 으나 밤 물은 뼈를 찔렀다.
『그래 대체 기르긴 누가 기르구?』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의부를 얻어가서 술장사를 시작했죠. 술이 고주래 서 전망나니예요. 철들어서부터 맞기 시작한 것이 하룬들 편할 날 있었을까 . 어머니는 말리다가 채이고 맞고 칼부림을 당하고 하니 집꼴이 무어겠소. 열여덟 살 때 집을 뛰쳐나서부터 이 짓이죠』
『총각 낫세론 동이 무던하다고 생각했더니 듣고 보니 딱한 신세로군』 물은 깊어 허리까지 찼다. 속 물살도 어지간히 센데다가 발에 채이는 돌멩 이도 미끄러워 금시에 훌칠 듯하였다. 나귀와 조선달은 재빨리 거의 건넜으 나 동이는 허생원을 붙드느라고 두 사람은 훨씬 떨어졌다.
『모친의 친정은 원래부터 제천이었던가?』
『웬걸요. 시원스리 말은 안해 주나 봉평이라는 것만은 들었죠』
『봉평? 그래 그 아비 성은 무엇이구?』
『알 수 있나요. 도무지 듣지를 못했으니까』
『그, 그렇겠지』하고 중엉거리며 흐려지는 눈을 까물까물 하다가 허생원은 경망하게도 발을 빗디었다.
앞으로 고꾸라지기가 바쁘게 몸째 풍덩 빠져버렸다. 허비적거릴수록 몸은 걷잡을 수 없어 동이가 소리를 치며 가까이 왔을 때에는 벌써 퍽이나 흘렀 었다. 옷째 쫄딱 젖으니 물에 젖은 개보다도 참혹한 꼴이었다. 동이는 물 속에서 어른을 해깝게 업을 수 있었다. 젖었다고는 하여도 여윈 몸이라 장 정 등에는 오히려 가벼웠다.
『이렇게까지 해서 안됐네. 내 오늘은 정신이 빠진 모양이야』
『염려하실 것 없어요』
『그래 모친은 아비를 찾지는 않는 눈치지?』
『늘 한 번 만나고 싶다고는 하는데요』
『지금 어디 계신가?』
『의부와도 갈라져 제천에 있죠. 가을에는 봉평에 모셔 오려고 생각중인데 요. 이를 물고 벌면 이럭저럭 살아갈 수 있겠죠』
『아무렴, 기특한 생각이여. 가을이랬다?』 동이의 탐탁한 등어리가 뼈에 사무쳐 따뜻하다. 물을 다 건넜을 때에는 도 리어 서글픈 생각에 좀더 업혔으면도 하였다.
『진종일 실수만 하니 웬일이오? 생원』 조선달은 바라보며 기어이 웃음이 터졌다.
『나귀야, 나귀 생각하다 실족을 했어. 말 안했던가? 저 꼴에 제법 새끼를 얻었단 말이지. 읍내 강릉집 피마에게 말일세. 귀를 쫑긋 세우고 달랑달랑 뛰는 것이 나귀새끼같이 귀여운 것이 있을까! 그것 보러 나는 일부러 읍내 를 도는 때가 있다네』
『사람을 물에 빠치울 젠 딴은 대단한 나귀새끼군!』 허생원은 젖은 옷을 웬만큼 짜서 입었다. 이가 덜덜 갈리고 가슴이 떨리며 몹시도 추웠으나 마음은 알 수 없이 둥실둥실 가벼웠다.
『주막까지 부지런히들 가세나. 뜰에 불을 피우고 훗훗이 쉬어. 나귀에겐 더운 물을 끓여주고, 내일 대화장 보고는 제천이다』
『생원도 제천으로…?』
『오래간만에 가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 신같이 눈이 어둡던 허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해깝고 방울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도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한국의 명문 (소설) - 나무들 비탈에 서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 黃 順 元
1915~. 소설가. 평남 대동 출생. 숭실중학교와 와세다대 영문과 졸업. 193 1년 재학중 詩로 문단 데뷔. 편집자 注:이 작품은 1960년 「사상계」에 발표된 장편소설이다. 이 글은 소설가 金埈成씨가 발췌해 보내온 부분이다. 金埈成씨는 『6․25와 4․19 이후 좌절과 무기력에 빠진 젊은이들의 의식세계를 그려내며 역사와 인간, 전체와 개인을 세밀하게 조명하고 있다』고 추천배경을 설명했다.
이건 마치 두꺼운 유리 속을 뚫고 간신히 걸음을 옮기는 것 같은 느낌이로 군. …산 밑이 가까워지자 낮 기운 여름 햇볕이 빈틈없이 내리부어지고 있 었다. 시야는 어디까지나 투명했다. 그 속에 초가집 열여덟 채가 무거운 지 붕을 감당하기 힘든 것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전혀 전화를 안 입어 보이는데 사람은 고사하고 생물이라곤 무엇 하나 살고 있지 않는 성싶게 주위가 너무 고요했다. 이 고요하고 거침새 없이 투명한 공간이 왜 이다지 도 숨막히게 앞을 막아서는 것일까. 정말 이건 두껍디 두꺼운 유리속을 뚫 고 간신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느낌인데. 다시 한번 동호는 생각했다.
한국의 명문 (소설) - 三代
◈三代 廉 想 涉 1897~1963. 소설가. 1920년 「폐허」 동인.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등단 . 서라벌 예대 학장 등 역임. 편집자 注:이 글은 1921년 「개벽」지를 통해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문 단에 나온 작가의 장편 대표작이다. 아래 글은 김진국 교사가 발췌한 것이 다. 김교사는 이 글이 『여러 문장 같으면서 사실은 한 문장으로 이뤄진 기 막힌 글』이라고 했다.
…덕기는 안마루에서, 내일 가지고 갈 새 금침을 아범을 시켜서 꾸리게 하 고 축대 위에 섰으려니까, 사랑에서 조부가 뒷짐을 지고 들어오며 덕기를 보고,
『얘, 누가 찾아왔나 보다. 그 누구냐? 대가리꼴 하고…. 친구를 잘 사귀어 야 하는 거야. 친구라고 찾아온다는 것이 왜 모두 그 따위뿐이냐?』 하고 눈살을 찌푸리는 못마땅하다는 잔소리를 하다가, 아범이 꾸리는 이불 로 시선을 돌리며, 놀란 듯이 『얘, 얘, 그게 뭐냐? 그게 무슨 이불이냐?』 하며 가서 만져 보다가,
『당치 않은 삼동주 이불이 다 뭐냐? 주속이란 내 낫세나 되어야 몸에 걸치 는 거야. 가외 저런 것을, 공부하는 애가 외국으로 끌고 나가서 더럽혀 버 릴 테란 말이냐? 사람이 지각머리가…』
하며, 부엌 속에 죽치고 섰는 손주며느리를 쏘아본다.…
한국의 명문 (소설) - 불효자식
◈불효자식 蔡 萬 植
1904~1950. 소설가. 전북 옥구 출생.숭실중학교와 와세다대 영문과 졸업. 1931년 詩로 문단 데뷔. 장편 「태평천하」 등 다수.
편집자 注:작가는 한창 카프계열의 좌익 문학이 전성을 이루던 1920년대 후 반기에 「불효자식」과 「세길로」로 문단에 나왔다.「사상계」에 수록된 장편소설이다. 아래 글은 소설가 文淳太씨가 원작에서 발췌해 보내온 소설 의 일부이다.
…칠복이가 입옥하기 전 얼마 동안의 그의 육체는 산 사람의 살이라기에는 너무나 썩은 송장에 가까웠었다. 그의 사지와 몸뚱이는 전부가 흉측스럽게 찌그러지고 아무러진 검푸른 목은 종처와 불그레하니 툭 솟은 꼭 녹두알같 이 노랗게 곪은 세 종처와 시꺼먼 때묻은 고약 조각으로 덮어버리고 말았었 다. 더욱이 그 보기만 하여도 진저리가 나는 다리를 걷어치고 앉아 날카롭 게 깎은 성냥개비로 눅씬 곪아서 멀눙멀눙한 종처를 땟작땟작하다가 신문지 조각을 대고 꾹 누르면 푹 솟쳐 나오는 녹두빛 같은 누런 고름과 검붉은 피며 삼복 염천에 송장 썩는 것 같은 그 고약스런 냄새…
한국의 명문 (소설) - 霧津紀行
◈霧津紀行 金 承 鈺 1941~. 소설가. 서울대 불문과 졸업.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현 세종대 교수.
편집자 注:「무진기행」은 1964년에 발표된 단편소설이다. 아랫 글은 소설 의 일부로 소설가 金埈成씨가 名文으로 추천한 부분이다. 金씨는 이 부분을 발췌한 이유를, 『무엇 때문인지 모를 끝없는 불안, 방황, 머뭇거림, 부끄 럼움 등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안개와의 대비를 통해 이 작품이 발표될 당시의 시대 상황을 잘 암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 처럼 안개가 무진을 뺑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 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있었다. 안개 는 마치 이승에 恨(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女鬼(여귀)가 뿜어 내놓 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 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 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 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 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한국의 명문 (소설) - 죽음의 한 硏究
◈죽음의 한 硏究 -朴 常 隆 소설가. 전북 장수 출생. 서라벌 예대 졸업. 1975년 캐나다 이민. 현 민족 문학작가회의 자문위원.
편집자 注:작가는 1963년 「사상계」로 데뷔, 1975년 이 작품을 발표했다. 이 글은 「죽음의 한 硏究」에서 추천자인 시인 신현림이 발췌한 것이다.
…나는 어찌하여, 햇볕만 먹고도 토실거리는 과육이 못 되고, 이슬만 먹고 도 노래만 잘 뽑는 귀뚜라미는 못 되고, 풀잎만 먹고도 근력만 좋은 당나귀 는 못 되고, 바람만 쐬이고도 혈색이 좋은 꽃송이는 못 되고, 거품만 먹고 도 굳어만지는 진주는 못 되고, 凋落(조락)만 먹고도 생성의 젖이 되는 겨 울은 못 되고, 눈물만 먹고도 살이 찌는 눈 밑 사마귀는 못 되고, 수풀 그 늘만 먹고도 밝기만 밝은 달은 못 되고, 비계없는 신앙만 먹고도 만년 비대 해져가는 神(신)은 못 되고, 똥만 먹고도 피둥대는 구더기는 못 되고, 세월 만 먹고도 성성이는 백송은 못 되고, 각혈만 받아서도 곱기만 한 진달래는 못 되고, 쇠를 먹고도 이만 성한 녹은 못 되고, 가시만 덮고도 후꾼해하는 장미꽃은 못 되고, 때에 덮여서야 맑아지는 골동품은 못 되고, 나는 어찌 하여 그렇게는 못 되고, 나는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유정 중에서 영장 이라고 내 자부했던 사람, 허나 어찌하여 나는 흙 속의 습기 속으로만 파고 드는 지렁이도 흘리지 않는 눈물을 흘려야 하는가.…
한국의 명문 (소설)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趙 世 熙
1942~. 소설가. 서라벌 예대 문창과 졸업.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 작품 「뫼비우스의 띠」 등 다수. 현 「당대비평」 주간.
편집자 注:소외계층의 문제를 파헤친 연작소설의 일부. 작가는 이 작품으로 제1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아래 글은 소설가 이순원씨가 원작에서 발 췌해 보내온 것을 그대로 실었다. 李씨는 『대학 2학년 때 처음 이 작품을 접하고 그의 單文에 매료되었다』면서 『발췌한 부분은 이 구절을 읽은 이 래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번도 내 머리속에서 까먹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사랑에 기대를 걸었었다. 아버지 가 꿈꾸는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그 세계의 지배 계층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했었다. 인간이 갖는 고 통에 대해 그들도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호화로운 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친 부의 축적을 사랑의 상실로 공인하고 사랑을 갖지 않는 사람네 집에 내리는 햇 빛을 가려 버리고, 바람도 막아 버리고 전깃줄도 잘라 버리고, 수도선도 끊 어 버린다. 그런 집 뜰에서는 꽃나무가 자라지 못한다. 날아 들어갈 벌도 없다. 나비도 없다.
한국의 명문 (소설) - 혼불
◈혼불 崔 明 姬 1947~1998. 소설가. 전북대 국문과 졸업.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1981년 동아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혼불」 당선. 편집자 注:이 글은 「혼불」(한길사 刊) 제3권 115~116쪽에서 옮겨온 것이 다. 김석희씨 추천.
탁, 타닥, 타악. 촛불 심지 타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촛불 아래 누운 청암부인의 누렇게 바랜 노안에, 흔들리는 불 그림자가 일 룽거린다. 그래서 두드러져 뼈가 솟은 곳은 메마른 나무를 깎아 놓은 것 같 고, 움푹 패어 그림자가 고이는 곳은 적막한 골짜기 같았다. 사람의 얼굴을 두고 이마와 코, 그리고 턱이며 양쪽 광대뼈를 일러 五嶽(오악)이라 한 말 이 참으로 옳은 것을 알겠다. 이미 오래 전에 살을 다 벗어버리고 介潔(개 결)한 뼈로만 남은 듯한 청암부인의 얼굴은 말 그대로 산악처럼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그네의 얼굴은 露根(노근)처럼도 보인다. 대저 뿌리란 그 몸을 땅 속에 숨기어 묻는 것이 이치이다. 그러나 노근은 지상으로 솟아오른 뿌 리이다. 제 뿌리를 뻗고 있는 산의 지질이 비옥하여 흙이 두터운 곳에 사는 나무는 그럴 리가 없지마는, 천인단애 까마득한 낭떠러지나 만중철벽 척박 한 땅에 서서, 그 뿌리가 암석의 틈바구니에 끼이고, 흙을 깎는 물살에 씻 기어 제 둥치를 지탱하기 어려운 나무는, 처절한 젊은 날을 보내고 노목이 되면, 이제 그 뿌리의 뼈가 땅 위로 울툭불툭 불거져 드러나니. 그 모습은 모질고 끈덕진 세월을 다 肉脫(육탈)하고, 세상을 벗어버린 초연한 기상을 느끼게 한다.
한국의 명문 (소설) - 눈길
◈눈길 李 淸 俊 1939~. 소설가. 전남 장흥 출생. 서울대 문리대 졸업. 월간 「소설문예」 주간. 소설 「당신들의 천국」 「눈길」 등 다수.
편집자 注:이 글은 소설가 金埈成씨가 「눈길」 中에서 名文이라고 발췌해 보내온 것을 그대로 실었다. 金씨는 『「고향」과 「어머니」의 문제를 정 면으로 다루며 과거의 전통과 근원을 현실과 교직시켜 다뤘다』고 추천이유 를 밝혔다.
…눈길을 혼자 돌아가다 보니 그 길엔 아직도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지나 간 사람이 없지 않겄냐. 눈발이 그친 그 신작로 눈 위에 저하고 나하고 둘 이 걸어온 발자국만 나란히 이어져 있구나. …그 몹쓸 발자국들이 아직도 도란도란 저 아그의 목소리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 산비 둘기만 푸르륵 날아가도 저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되돌아오는 듯 놀라 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저 아그 모습이 튀어나올 것만 싶었지야. 하다 보니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 길 을 저 아그 발자국만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 것 혼자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울 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디뎌 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 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하게 지내거라.
한국의 명문 (소설) - 金翅鳥
◈金翅鳥 -李 文 烈 1948~. 경북 영양출생. 서울대 국어과 수학. 1979년 데뷔. 소설 「사람의 아들」 「詩人」 「변경」 등 다수.
편집자 注:소설 「金翅鳥」는 이문열이 1985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이 글은 소설가 金埈成씨가 발췌해 보내온 부분이다. 金埈成씨는 『눈이 부실 정도 로 유려한 문체, 그 기저에 흐르는 낭만주의적 정신이 도처에 드러난다』고 했다.
금시조가 날고 있었다. 수십 리에 뻗치는 거대한 금빛 날개를 퍼득이며 푸 른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날개짓에는 魔軍(마군)을 쫓고 사악 한 용을 움키려는 사나움과 세참의 기세가 없었다. 보다 밝고 아름다운 세 계를 향한 화려한 비상의 자세일 뿐이었다. 무어라 이름할 수 없는 거룩함 의 얼굴에서는 여의주가 찬연히 빛나고 있었고, 입에서는 화염과도 같은 붉 은 꽃잎들이 뿜어져 나와 아름다운 구름처럼 푸른 바다 위를 떠돌았다. … 갑자기 금시조가 두둥실 솟아오른다. 세찬 바람이 일며 그의 몸이 한 곳으 로 쏠려 깃털 한올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점점 손에서 힘이 빠진다. 아아… 깨고 보니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