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마적산 이정형 나무
-산천은 유구하나 인걸은 간데없네
중종 2년(1507) 종5품 사직서령을 지낸 경주 이씨 이탕(李宕 1507~1584)이 1584년 평택시 가재동 막곡 마을 뒤 사당골에 정착하였다. 이탕은 정종 임금 7남 수도군 이덕생의 고손녀인 전주 이씨를 잃고 첨지중추부사 김응진의 딸인 의성 김씨에게 정함, 정암, 정형, 정담, 정분, 정온, 정혐, 정봉 등 아들 8명과 딸을 낳았다. 그의 장, 차, 삼남의 공적 등 후손 17명이 임진란 공신에 올라 훗날 영의정 겸 오산 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장남 이정함(1534~1599)은 임진왜란에 군량미 공급으로 오위장을 제수받았으며 후손이 없어 둘째 아우 이정암(1541~1600)의 셋째 아들인 이준(1570~1599)을 양자로 삼았고 그 후손이 현재까지 평택 방혜동에서 고향을 지키고 있다.
둘째 이정암은 임진왜란 초기의 황해도 연성대첩의 영웅이다. 당시 항복을 권하는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에게 ‘너희는 병(兵)으로 싸우지만 우리는 의(義)로 싸운다. 불의로 의를 치려 함이니 너희가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라며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왜의 기세를 처음으로 꺾었다.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은 문신 이정암을 ‘키와 몸집이 작고 가냘파 제 옷의 무게도 이기지 못할 듯한 사람이었다.’라고 하였으나, 오늘 우리는 그가 지덕용을 갖춘 진정한 장수임을 알게 한다. 또 이항복(1556~1618)은 이때의 일을 연성대첩비에 ‘내가 오늘 죽을 곳을 얻었도다.… 쌓아놓은 풀더미에 앉아 아들 준(濬)에게 분부하기를 성(城)이 함락되면 네가 풀더미에 불을 붙이라고 하였다.’라고 썼다.
셋째 이정형(1549~1607)은 명종 22년(1567) 사마시, 이듬해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평시서직장이 되었다. 1576년 개성부경력으로 일 처리를 잘해 부민의 신뢰를 받아, 당시 개성 유수 심의겸은 ‘나이는 적으나 문학지사’라고 칭찬하였다. 1589년 형조참의를 거쳐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터지자, 4월 30일 우승지로 왕을 호종하여 한양을 떠나 개성에 이르렀다. 5월 2일이다. 이조참의였으나 늙은 어머니와 가족 걱정으로 왕을 호종하는 대신 개성 풍덕으로 피란했던 형 이정암이 찾아왔다. 선조의 명으로 한양 도성을 살피러 가는 신립의 형 신잡을 우연히 만나 동생 이정형이 개성유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온 것이다.
하지만 5월 3일 물밀 듯 밀려오는 왜군에 선조는 평양으로 가고 이정형은 형과 함께 의병을 모아 개성 성거산과 장단, 삭녕 등지에서 왜와 싸웠다. 그 공으로 경기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를 지내고 1595년에는 대사헌에 이어 4도도체찰부사로 군권을 담당했다. 또 1597년 2월 선조가 이순신을 한양으로 압송하고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할 때 ‘이순신이 왜군을 선제공격하지 않고 한산도를 지킨 것은 옳은 선택입니다. 통제사를 바꾸면 안 됩니다.’라고 정탁과 함께 유일하게 이순신을 옹호했다.
이정형은 1600년 강원도관찰사, 1602년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북인이 남인 이원익, 이항복 등을 쫓아내자 양주 송산 두천리로 물러나 대사성·호조참판으로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1606년 삼척부사로 나갔으나 이듬해 임지에서 죽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에 이정형의 묘를 쓴 것은 여기 파주 지역이 이정형 부인의 고향이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또 그의 호 지퇴당은 퇴계 이황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으나, 존경의 의미이다.
또 이정형의 사당이 춘천에 있는 것은 광해군 집권 초기에 후손이 춘천으로 이거 했기 때문이다. 춘천 신북읍 마적산 아래 그의 사당을 찾으니, 인걸은 간데없고 산천만 유구하였다. 마적산을 나와 소양강으로 가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숲을 흔들고 나그네의 마음은 쓸쓸했다.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춘천 마적산 이정형 나무 – 호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