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15. 주일예배설교
잠언 16장 21~24절
이렇게 말을 하게 하소서!
■ 저는 주로 말로 사는 사람이니 말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말을 듣기도 하지만, 말을 해야 하는 일이 많은 편이니, 말로 인한 사연이 한 톤은 넘는 것 같습니다. 두 톤?
반성컨대, 젊은 시절의 저는 말을 조심하지 않았습니다. 거칠기도 했고, 과격도 했습니다. 즉흥적인 면도 강했고요. 별로 무서운 것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여하튼 정제하지 않았고, 직설적인 면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말 사고가 꽤 있었습니다. 가족들에게도 그렇고, 이웃들에게도, 성도들에게도 그랬습니다. 생각날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그래서 저는 기억을 잃은 듯 사는 것일까요?
지금은 겁이 많아져서 그런지, 가급적 말을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해야 할 상황이면, 잘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원고를 준비합니다. 원고 없이 말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이 멋져 보이는 것은 알지만, 원고를 보는 것으로 덜 실수하는 쪽을 택합니다. 아마 그래서 대중적인 지지를 못 받는 것 같기는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말이 어떤 효과와 역사를 일으키는지, 말의 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언어 행위가 좀 더 성숙해지고 은혜롭기를 바랍니다.
■ 사실 잠언은 앞부분과 뒷부분을 빼고는 한 절 단위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몇 절이 한 주제의 메시지를 담는 경우가 적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적은 경우에 해당합니다. ‘말’을 주제로 한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지혜로운 사람은 말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며, 어떤 말을 쓰는지에 대해 안내합니다. 그리고 말이 내는 결론을 설명하면서 말의 위력을 일러줍니다.
방금 읽기는 했지만, 본문인 21~2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명철하다 일컬음을 받고, 입이 선한 자는 남의 학식을 더하게 하느니라. 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것이 징계가 되느니라.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의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의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잠언은 지혜와 지혜자에 대해 그 어떤 성경보다도 풍성하게 설명하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을 지혜자를 중심으로 읽고 이해하면 됩니다. 본문에서 지혜자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한 하나님의 뜻 전달자’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지혜자가 될 것을 주문합니다.
이러한 소중한 지혜자 책무를 지닌 그리스도인은, 언어 행위에 있어, 알아야 하고 주의해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품위 있는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21절입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명철하다 일컬음을 받고, 입이 선한 자는 남의 학식을 더하게 하느니라.” 이 말씀이 지적하시는 바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명철함을 인정받습니다. 통찰력에 의한 사리 분별에 밝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중요한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입이 선해야 명철함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입이 선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기본적으로, 좋은 말, 착한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상대에게 좋을 말이라는 것이지, 아첨이나 아부는 아닙니다. 그리고 상대가 잘될 말을 하는 것이기에, 아무렇게나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입이 선하다는 것은 상대에게 좋은 말을 하는 것이고, 상대가 잘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이 선하다는 것에는 말이 부드럽고, 말이 친절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거칠고, 예의나 버릇이 없는 말은 입이 선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그가 누구든 거칠고 예의나 버릇이 없는 말은 별로 관심 없지 않습니까? 혹여 거짓말이라도, 부드럽고 친절한 말은 진실처럼 들립니다.
결국 이러한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 상대에게 좋은 말, 착한 말은 품위 있는 말입니다. 말하는 사람의 기품과 위엄을 인정받게 되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사람에게는 다른 이들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입이 선한 자는 남의 학식을 더하게 하느니라.”(21하반절) 저절로 존경심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지혜자의 책무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품위 있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언어 행위여야 합니다.
둘째는, 참된 지성이 드러나는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22절입니다. “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것이 징계가 되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명철”은 단지 똑똑하고 예리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된 지성을 의미합니다. 바르게 깨닫고, 정확하게 익힌 지식을 일컫습니다. 이러한 참된 지성인 명철은, 자신에게든 누구에게든 “생명의 샘”이 됩니다. 살리는 명철이 됩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미련한 자의 “미련함”은 참되지 않은 지성이기에, 자신에게도 그렇지만 누구에게든 “징계”가 됩니다. 즉 진땀을 흘리며 생고생을 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미련한 자”는 ‘도덕적 결함을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결함을 가지 자의 미련한 말은 그 결국이 징계요, 파멸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혜자의 책무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참된 지성을 쌓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거짓 정보나 그럴듯한 지식을 가려내고, 바른 지식, 정확한 지식을 쌓아야 합니다. 이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쌓은 참된 지성으로 말을 할 때, 살리는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자의 책무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참된 지성을 쌓기 위해 애써야 하고, 이것이 드러나는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셋째는, 신중하게 말을 가려야 합니다. 23절입니다.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의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의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 여기서 “입을 슬기롭게 한다”는 것은 ‘말을 신중하게 가려서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입술에 지식을 더한다”는 말은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분명한 지식을 더욱 습득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런 태도를 마음이 너그럽고 슬기로워 덕행이 높다는 의미인 ‘어질다’고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상대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말을 신중하게 가리는 것은 너무도 필요한 언어 행위입니다. 소위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하고 싶어도 참고, 할 수 있어도 다시 한번 새김질하고, 해야 할 때는 지체하지 않는 태도가 신중한 태도입니다. 이 태도는 어진 태도입니다.
더욱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상대를 살리는 말인지 곱씹고 나서야 내는 말이어야 합니다. 참으로 지혜자의 책무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말은 신중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설득력을 더하는 지식 쌓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이 지식 쌓기에는 마땅히 성경 공부가 있습니다. 성경 공부를 비롯해 성경적 지식 쌓기에 우리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일에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선한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24절입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여기서 “선한 말”은 앞서도 설명했지만, ‘다정스러운 말’이고, ‘부드러운 말’이고, ‘친절한 말’입니다. 그래서 24절은 “꿀송이 같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선한 말은, 누구나 좋아하는 말이자, 모두에게 에너지를 주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정하고, 부드럽고, 친절한 말은 누구라도 행복하게 하는 말입니다. 마음을 달게 하는 말입니다. 더욱이 “뼈에 양약”이 됩니다. 이는 실제로 몸에 활력을 주되, 당장 활력을 주는 말입니다. 그러니 쑤시는 뼈를 낫게 해줍니다. 뼈에 양약이 되는 말은, 다정하고, 부드럽고, 친절한 선한 말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계속 또는 간혹이라도, 정없고, 거칠고, 예의없는 말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다정하고, 부드럽고, 친절한 말을 하시겠습니까? 죽이는 말을 하시겠습니까, 살리는 말을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말을 하실지 망설이실 것이 있을까요? 기억하십시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 하나님은 야고보서를 통해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3장 8~10절입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야고보서의 지적은 고통스럽습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분명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말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심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신 말씀을 따라, 품위 있는 말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참된 지성이 드러나는 말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선한 말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신중하게 말을 가려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어진 말을 내놓아 찬송하는 입으로 인정받아야 할 것입니다. 저주는 절대 안 됩니다!
■ 바라기는, 여러분의 언어 행위에 거룩한 기름부으심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말에 분별력과 생명력이 넘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과 이웃, 그리고 교회공동체에 여러분의 말로 인해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