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속에 흐르는 피
임병식 rbs1144@daum.net
가끔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는 때가 있다. 물론 이름은 임병식이며 고향은 보성이고 혈액형은 A형이지만, 이것으로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는데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다 볼까. 태어난 출생지는 득량 마천 죽림이고 출생연도는 1946년생, 부친 임갑홍과 모친 김정임의 6남매 중 네째로 남자로는 둘째라면 좀더 구체성이 있을까.
그렇다고 내가 증명이 되는가?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물론, 내가 나를 말할 때는 그 정도로도 설명이 충분하다 싶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캄캄하게 여겨질 것 같다. 그래서 제 삼자가 보기에 ‘캄캄’한 것은 캄캄한 대로 묻어두고 내 자신이 나를 조명하는 입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기로 한다.
요즘 사람들을 보면 이름 앞에 성씨 표기를 두 개로 하는 경우를 더러 본다. 처음에는 그런 걸 대하면 뜨악하게 생각했는데 이즘은 이해를 한다. 양친으로부터 유전자를 똑같이 받고 태어났는데 한편을 배제한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것은 얼마나 가상한 일인가.
그 점에 착안하여 생각해 본다. 나는 호적상으로나 불리어지는 성이 林(임)씨다. 부계를 중심으로 이어온 성씨이다. 그렇다고 내가 온전한 임씨일까. 그점에 대해서는 선뜩 동의하기 어럽다.
나의 모친은 김해 김씨다. 그리고 조모님은 전주이씨이며 외조모님은 또 여산 송씨이다. 뿐인가. 증조모는 밀양 박씨이며 고조모는 또 전주이씨이다. 얼마나 피가 두루 섞인 것인가.
내가 태어난 고향 죽림마을은 18세기 중엽에 조성되었다. 이때는 조선 영조임금시대로 보성 가마실이라는 곳에서 이주해왔다. 그때 연안차씨 할머니가 외아들(덕채)를 대리고 들어왔다. 나는 할머니로부터는 9세손이 된다. 그 자손들이 퍼져서 한때는 자작일촌하여 50여 호의 적잖은 중촌 마을을 이루었다.
그때 심어놓은 당산나무가 지금은 우람한 노거수가 되어 마을의 정체성을 싱징하며 동구에 우뚝 서있다. 좀더 윗대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조양임씨 관향조가 되시는 분은 임세미 어른이다. 고려 멸망시기에 지금의 보성 조성 땅인 조양으로 터전을 잡게 되었다.
그래서 돌아가신 후에도 보성 벌교 백아산 아래에 잠들어 있다. 비문에 보면 부인은 원주 원씨로 정경부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윗대로 올라가 한국임씨 시조는 임팔급어른이다. 중국 당나라에서 신라 말에 평성땅인 지금의 평택으로 망명을 해왔다. 부인은 김포 공씨이다. 이렇게 보면 얼마나 피가 두루 섞인 것인가.
나는 한때 우리조상이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해서 우리는 한족의 일원인줄 알았다. 은나라 때에는 황족으로 살았는데 중국인으로 알았다. 그런데 역사학자들이 밝혀낸 것을 보면 은나라는 본래 동이족이며 한자로 그들이 만들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애초부터 우리조상은 한족(韓族)으로서 굳건하게 뿌리를 이어오지 않았는가 한다. 뿌리의 강고함은 얼마나 견실한 것인가. 그것은 하나의 지명으로도 증명이 된다. 우리조상이 중국에서 살던 고장은 팽성(彭城)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라로 건너와서 정착한 고을의 지명을 그대로 가져와 썼다. 그것이 지금은 평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근거를 따져 문중에서는 평택에다가 조상님의 동상을 새워서 기리고 있다.
역사를 더듬어 보면 병란과 환란, 질병과 기근을 허덕이지 않을 때가 없었다. 그런 시련을 헤쳐가면서 자손을 보존하고 살아온 조상님들의 고달픈 삶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우리 마을 뒷산에는 성황터가 있다. 읍내로 향하는 바람재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전에 읍내장을 보러가거나 대처로 나가 일을 보는 사람들이 그 고개를 이용했다. 지금은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전에는 주로 이용하는 통행로중의 하나였다.
전에 보면 그곳에 쌓인 돌들은 색깔이 조금씩 달랐다. 아래쪽은 좀 더 검고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황토색깔을 띄었다. 그것만 보아도 어느 돌이 오래된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전에 그것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나는 오늘의 원행길이 무사하기를 빌었을 것 같고, 다른 하나는 후손들의 안녕을 빌어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어 그것을 볼 때마다 그 쌓인 돌들이 예사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 돌중에는 나의 직계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길도 묻어 있을 터이다. 그러니 얼마나 정한이 묻어난 것들인가.
나는 전에 섬 근무를 하면서 특별히 느낀 것이 있다. 대부분이 같은 성바지가 모여사는 특징도 보이지만 성씨가 다르다고 하여 남들이 아닌 것이었다. 외가네 이모네 고모네 하여 거의가 친인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니 성씨가 다르다고 하여 남의 흉을 보는 일은 극히 삼가야만 했다.
이를 확대해서 생각해 보면 내 몸만 하더라도 이처럼 피가 얽혀있는데 다른 사람이 남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흔히 하는 말로 아무리 모르는 사람도 너 댓 사람만 건너뛰면 그 사람을 알수 있다했는데, 몇 대만 거슬러 오르면 인척정도의 인연이 얽히지 않을까.
흔히 사람들 중에는 집안이 명문가임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집안에 불천위를 모시고 있으며 윗대에 정승판서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한미한 가정도 내세울 것이 있지 않을까. 조선시대 왕비를 배출한 안변한씨, 곡산강씨, 여흥민씨를 비롯해 청송심씨, 안동권씨, 파평윤씨, 그중에서도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 자손들은 전주이씨와 함께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뿌리가 함께 이어졌다.
그러니 피가 섞이지 않는 가문이 어디 있겠는가. 나만 해도 전주이씨 할머니가 두 분이고 밀양 박씨에다 그 흔한 김해김씨 피까지 섞여있다. 은나라 황족의 피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고 보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두루두루 한 핏줄이라는 것이 아닐까. 멀리 보면 동이족, 세분하면 한족, 머리 검고 눈이 약간 찢어지고 검으며 코납작이가 특징인 황색피부의 인종이 아닐까.
그러니 특별할 것도 없고, 이 땅에 살면서 부디 나라가 편안하고 다른 나라에 시달림을 받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이 아닌가한다. 그런 피가 소박하게 흐르고 있는 대중속의 한 개체가 아닌가 한다. (2025)
첫댓글 임선생님 家系는 兆陽林氏 피가 主流이겠지만 그간 김해김씨. 전주이씨, 여산송씨, 밀양박씨,
연안차씨, 원주원씨, 김포공씨가 亞流로 흐르고 있으니 여러 姓氏가 섞여 있는 듯 합니다.
저도 생각해 보니 모친 장수황씨, 조모 밀양박씨, 증조모 달성서씨, 고조모 남평문씨, 5代祖母 행주기씨
그 위 조양임씨, 해주오씨, 파평윤씨, 김해김씨, 전주이씨가 우리 가문 金寧金氏를 이루웠습니다.
현재 아내는 조양임씨, 자부는 해주오씨
몸 속에 흐르는 피를 想考하니 이 땅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가까이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서로 피로 엮여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흑인이나 백인이 될수 밖에 없고 황인종으로서 눈이 째지고
코가 납작하고 머리가 검은 인종으로 남아있지 않을수가 없었겠지요.
심심파적 삼아 몸속에 흐르는 피를 대략적이나마 추적해 보았습니다.
근친혼을 철저히 배격해온 법도에 따라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민족은 한민족 즉 한 가족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부계를 내세운 풍속으로 인해 성씨니 집안이니 하고 족보가 이어져온 것일 뿐이지요 그야말로 우리가 남이가 라는 말 그대롭니다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성심껏 대하고 서로 배려하며 살아가야겠다 싶습니다 얼마 전의 보도를 보니 우리나라가 동아시아 최초의 다민족국가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근래들어 외국인과 혼인하는 비율이 부쩍 많아진듯 합니다.
여수만 해도 베나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들이 많이 보입니다.
타성받이와 결혼하는 풍습은 희귀병을 막는다는 측면에서
매우 잘한 선택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