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수필/ 어느 學士를 사랑한 老兵
난 신앙생활을 한 지 얼만 안 된다. 부산 금곡 성당에서 영세(領洗)를 한 게 2004년이니 13년 남짓이다. 아는 것도 턱없이 부족하다. 사랑 실천은 더더욱 그렇다. 그래도 부산이며 경남의 성당에는 수십 군데 가 봤다. 다만 노인 학교 수업을 했을 뿐이니, 미사 참례 횟수가 그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주도 ‘서귀포 성당’과 인연을 맺은 지 2년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부산 초량 ‘시각장애 복지관’은 더 거슬러 올라가 발을 들여 놓았었던 데다. 기차를 타고 올라오면 ‘삼랑진 오순절 평화의 마을’엔 정말 자주 갔다. 그 동네는 내가 자란 마을이니 , 떠날 때 불자였던 내가 금의환향(?)한 셈이고말고! 3년 동안 한 달에 두어 번씩 드나들었다.
여기 오자마자 나는 삼가동 성당에 적을 두었었다. 나름대로 기도며 미사 참례를 열심히 했던 터라, 거기가 항상 그립다. 서너 해 전에는 괌의 한인 성당에 들른 적이 있고 그 카페에도 졸고를 두어 번 실었다.
나는 역마살이 낀 것처럼 그렇게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동백 성요셉 성당으로 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마치 본능인 것처럼 인천의 청각장애인 성당인 청언성당의 문을 두드렸으니 말이다. 교우들과 미사를 같이 올리기도 했고말고. 나아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알려진 하우현 성지(성당) 카페에도 들어가 내 이름으로 신앙 수필을 쓰게 되었다. 인천에 있는 한국가톨릭문화원의 문도 기웃거려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양주에 있는 26사단 불무리 성당이 내게는 최고의 본당(?)이다. 딱 반세기 전 제대할 때는 터도 안 닦았었던 그곳에, 덩그렇게 사령부 성당이 서 있으니까. 꿈에서도 잊지 못할 그곳에 나는 부지런히 오르내렸었다.
하우현 성지를 빼고 나서는 다 가 보았다. 나머지 본당이나 시설에는 월 1만원에서 1만 5천원까지 후원금을 내고 있다. 생색을 내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1년 통틀면 1백 수십 만 원이다. 전부 자동이체이고, 무기한(종신)으로 하기로 했으니 20년 산다면 2천 수백 만 원이 된다. 우체국 직원이 2035년 4월까지, 그러니까 20년으로 하자고 해서 해 본 계산이다. 그날 우린 가가대소했다. 참, 하우현 聖址엔 곧 한 번 들르기로 날짜를 잡고 있다.
다시 이야기를 원위치로 돌린다.
지난 몇 년 나는 정말 불무리 성당 덕분에 행복했었다. 미사에 참례하거니 성사를 보기 위해 거기 들르면, 항상 학사(님)를 만날 수 있어서였다. 특히 이번에 제대한 최**학사와는 정말 친할아버지와 친손자처럼 지냈다. 진입로를 걸어 들어가면 그가 내게 거수경례를 올려붙인다. ‘공격!’ 그 구호가 나는 항상 좋았다. 나는 대신 절을 한다. 물론 그런 예의는 뒤바뀔 때도 있다. 나는 학사로 그를 대하고, 그는 할아버지로 나를 대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는 나를 간부인 하사로, 나는 일병에서 병장으로 지내온 그를 한갓 병사로 여겨오기도 했다는 뜻이다.
근래 그를 두 번 만났다. 제대하는 날 사령부 바로 앞의 성당에 일부러 올라가 그로부터 신고를 받았다. 나는 그를 안았다. 그는 큰 절로 내게 답했고.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영등포역에서 그와 해후했다. 그가 필리핀으로 어학연수 겸 봉사를 떠난다 해서 전송하기 위해서였다.
60년 전통의 중국집에서 그와 나는 탕수육과 짜장면을 시켜 놓고 환담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또 고백했다. 정말 사랑했노라고. 그도 내게 친할아버지처럼 여겨왔고 앞으로도 그러겠다고 얘기했다. 떨어져 있는 6개월 동안 기도 중에 서를 기억하자며 손을 잡고 헤어졌다. 카카오톡으로 문자를 주고받기로도 약속했고. 며칠 뒤, 거기 현지에서 동료 학사들과 어울려 사진을 찍어 보냈는데,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참으로 많은 걸 잃고 낯선 땅에 올라와 방황할 때, 그는 어느 신부(님)만큼 내게 위로를 해 주었다. 나는 그의 군 생활 특히 내무반에서의 예측되는 어려움까지 들먹이며 그를 다독였다. 나는 그에게 하지 못하는 말이 없었다. 그도 파격적으로 세상사에 대해 내게 묻곤 하였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공동선은 ‘그가 최고의 사제가 되는 것’이고말고.
그런 그가 없으니 머리카락을 잘린 삼손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여섯 달만 지나면 귀국하니 8월말을 손꼽아 기다린다. 우리 관계를 아는 그의 부모와 공항에서 조우할지 모른다는 설렘으로 겨우 정신을 차려나간다. 노병은 어느 학사를 사랑해서 행복했고, 앞으로도 행복하리라.
*‘학사(님)’이라 쓴 것은 壓尊法을 무시할 수 없어서다. 주님 앞에서, 학사에게 존칭을 쓰면 그게 바로 ‘압존법’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주님께 대한 예의가 아니다. 예 하나.
할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묻는다 치자.
“얘야, 아직 아비 안 들어왔느냐?”
대답은 이걸로 끝내야 한다.
“예, 아버님. 좀 늦는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만약
“예, 아버님, 좀 늦게 들어온다고 하셨어요.”
고 했다면 이게 틀린다는 것이다.
어느 주교님의 말씀을 전한다.
“미사에 참례하다 보면 그 압존법이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교회(성전)는 하느님이 계신 곳이다. 거기서 무턱대고 아무에게나 경어를 쓴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첫댓글 어제 학사로부터 필리핀에서 간단한 사연과 사진이 왔더군요. 그곳 요셉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구요.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저의 전우이자 군후배이며 장차 사제가 될 학사--.8월 말에 귀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