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오피니언 입력 2023-03-14 21:30
‘일본의 양심’ 오에 겐자부로 잠들다[횡설수설/장택동]
장택동 논설위원
1960년대 일본 문학계에서는 ‘엄청난 재능을 지닌 작가가 나타나서 작가 지망생들이 붓을 꺾었다’는 말이 돌았다. 그 주인공이 199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다. 1950년대 후반 등단해 ‘만연원년(万延元年·1860년)의 풋볼’ 등 세계적 명작들을 남긴 그가 타계했다고 일본 언론이 13일 전했다. 오에를 추모하는 이들은 대문호로서의 명성 못지않게 ‘일본의 양심’으로 그를 기억한다.
▷“일왕이 사람의 목소리로 말한다는 것에 놀랐고 실망했다.” 오에는 1945년 8월 15일 라디오로 일왕의 항복 선언 연설을 들었던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1935년 태어나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던 그는 어릴 적 “일왕은 신비한 하얀 새와 비슷할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런데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일왕 역시 사람임을 깨달은 것이다. 당시 느꼈던 충격과 미 군정 체제에서 경험한 민주주의가 오에의 세계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58년 소설 ‘사육’으로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최연소 수상하며 필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63년 아들이 중증 장애를 안고 태어나면서 그의 삶은 크게 바뀐다. 낙담한 오에는 생후 한 달 된 아들을 병원에 놔둔 채 히로시마로 떠났다. 하지만 원폭 피해자들을 돌보던 의사에게서 ‘아픈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말을 듣고선 “너무나 부끄러웠다”고 미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도쿄로 돌아와 아들을 돌보며 쓴 소설 ‘개인적 체험’ 등은 그의 대표작이 됐다. 그는 “아들과 공동 집필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오에는 평소 조용하고 배려심이 깊은 인물이었다. 한국인들이 자택으로 찾아온다고 하면 문패 위에 한글로 이름을 써서 붙여놨을 정도였다고 윤상인 전 서울대 교수는 전했다. 하지만 폭력, 특히 국가의 폭력에는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에세이에서 “권력이 쌓아올리는 사실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적으로 저항하는 목소리를 한결같이 계속 내는 길밖에 없다”고 썼다. 그리고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
▷오에는 “일본은 아무리 사죄해도 충분하지 않을 만큼 엄청난 범죄를 한국에 저질렀다”며 지속적으로 일본 정부에 사과를 요구했다. 그는 신사참배에 반대하고, 일왕이 주는 문화훈장을 거부했다는 이유 등으로 극우세력에게서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다. 협박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지인들과는 전화 대신 팩스로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노년까지 집회에 참여해 “평화헌법을 지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준 일본의 지식인이 또 한 명 귀천했다는 소식이 안타깝다.
* 가정 화목1 (종교예화, 최형락신부저, p21)
어느 동네에 두 집이 이웃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한집은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대가족이었고 한 집은 젊은 부부만 사는 단란한 가정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대가족을 이룬 가정은 항상 화목하여 웃음꽃이 피었는데 부부만 사는 가정은 항상 부부싸움이 잦았다. 그래서 두 부부는 이웃집의 화목한 모습을 보고 크나큰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우리는 둘만 사는데도 매일 싸워야 하고 이웃집은 여럿이 함께 모여 사는데도 저토록 화목한 것일까? 그래서 젊은 부부는 어느 날 술 한 병을 사들고 이웃집을 찾아갔다. 술을 나누며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댁의 가정은 대가족이신데도 웃음이 떠날 줄 모르고 우리는 둘이 사는데도 매일 싸움만 하는데, 선생님 댁이 그렇게 화목하게 지내시는 비결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이웃집 주인은 대답했다. “아, 네! 그것은 당신네 두분은 모두 훌륭하시고 우리 가족은 모두 바보들이기 때문이죠!” 그 말을 들은 젊은 부부는 되물었다. “아니 그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주인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입니다. 내가 출근하다가 물을 엎질렀습니다. 그때 나는 내 아내에게 내 부주의로 물을 엎질러 미안하다고 하며, 용서를 청했지요. 그랬더니 내 아내는 ‘아니오’ 하면서 생각이 모자라 물그릇을 그곳에 놓아 두었으니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며 오히려 나에게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계시던 저의 어머니께서는 ‘아니다’ 나잇살이나 먹은 내가 그것을 보고도 그대로 두었으니 내가 잘못이다 하셨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해 바보가 되려고 하니 싸움을 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후 그 젊은 부부는 이웃집의 그런 이야기를 듣고 크게 깨달아 화목하게 살았다.
* 가정의 화목2 (종교예화, 최형락신부저, p21)
어느 가난한 노동자의 부인이 남편의 바지가 다헤지자 품삯을 받는 날 바지를 하나 샀다. 일터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입어보라고 주었더니, 허리는 맞는데 바지 길이가 너무 길어서 두 치 정도는 잘라야 맞을 것같았다. 그러나 부인은 너무도 고단하여 잠이 들었다. 이때 시어머니가 내일 출근할 때 입으라고 두 치정도를 잘라내 버렸다. 그것을 모르고 밖에 나가 있던 시누이도, 아침 일찍 일어난 부인도 남편을 생각하고 각각 두 치 정도씩 잘라내었다.
출근길에 남편이 바지를 입어 보더니 어안이 벙벙해졌다. 두 치 정도만 잘라내야 할 바지가 여섯치나 짧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이제 여름이 곧 오는데 반바지를 입는 계절이 아니겠소? 잘 잘랐소.” 하고 말하였다.
손해가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기에 서로 솔선해 주려는 그 아름다운 마음씨가 흐뭇한 이야기다.
* 가정은 행복의 원천3 (종교예화, 최형락신부저, p21)
옛날에 자기 작품에 항상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화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움을 찾아 그리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러나 어느 곳도 자기가 찾고자 하는 아름다운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결혼식을 끝마치고 나오는 신부(新婦)를 붙들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신부는 주저함 없이 “사랑이오.” 하고 대답했다.
화가는 실망했다. 그후 군인을 만났다. 그 군인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군인은 평화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다시 실망했다. 그후 어느 성직자에게 또 물었다. 그 성직자는 믿음이라고 대답했다. 화가는 사랑, 평화, 믿음을 어떻게 그릴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아름다운 것을 찾고자 하는 희망을 포기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왔을 때, 반기는 부인에게서 신부의 사랑을 찾았으며, 가정의 따스함에서 평화를 찾았고 아빠를 기다리던 어린이들의 순수함 속에서 믿음을 발견하였다.
드디어 화가는 자기자신의 가정에서 이제까지 찾아 헤맨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세상의 모든 것은 가까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