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1일 고향 칭고덜하고
낙산(駱山)과 창경궁(昌慶宮)을 산책함시로 공부해 본 사진덜이구만이라.
창경궁(昌慶宮)
숙종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장희빈을 처형한 일과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일 등 큰 궁중 비극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며, 임진왜란, 이괄의 난, 순조 때의 화재등으로 부서지고 불에 타서 수차례 재건했고, 급기야 일제강점기 때는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었으며 이왕가 박물관이 들어서면서 담이 헐리고 내전 건물의 바닥은 모두 마루로 바뀌어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었고, 남쪽에 동물원과 북쪽에 식물원 등이 설치되어 일반인에게 놀이터로서 개방되는 등 궁궐 중에 가장 많은 수난을 겪고 나서, 1963년 1월에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었고, 1983년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이름도 창경궁으로 되찾아서 최근 어느 정도 복원된 모습으로 오늘 우리를 맞이하는 창경궁(昌慶宮)은 참으로 역사 박물관이라 할 수 있으리라.
창경궁(昌慶宮)은 세종대왕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고자 1418년에 지은 수강궁(壽康宮)이 그 전신이다. 이후 성종 14년(1483년)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왕후 세 대비를 모시기 위해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을 짓고 창경궁이라 명명했다. 창경궁은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상호보완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래서 창덕궁과 더불어 동궐(東闕)로 불리기도 하였다.
창경궁의 정문은 홍화문이고, 그 안으로 법전(法殿)인 명정전(明政殿)이 있다.
명전전은 중층으로 된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과 달리 단층에 아담한 규모이나 왕의 존엄을 나타내고 각종 의식을 치르는, 이 궁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법전이 명정전이다.
문정전(文政殿).
명정전 남쪽 방향으로 바로 옆에 창경궁의 편전(便殿)인 문정전(文政殿)이 있다
편전은 임금의 집무실로 신하들과 어전회의를 하고 주요 업무 보고도 받고 소견하고 경연을 여는 곳으로
궁궐 자체가 동향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문정전은 남향으로 지었으며 명전전과 문정전 사이에 복도를 설치해
비를 맞지 않고 여러 건물을 왕래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누군가는 한국의 아름다움으로 새하얀 버선에 살짝 빗겨 올라간 버선 콧날과 그처럼 공중에 살짝 치켜 올라간 추녀 끝에 아름다움이 압권이라 말했듯이 궁궐 곳곳의 선들은 정말 아름다웠다.
숭문당 현판은 영조대왕의 어필이고 숭문당 안에 어필들이 있다는데 문은 잠겨있어서 보지는 못했다.
이 문을 나서면 궁궐에 내전들이 펼쳐진다.
담 너머로 보이는 전각은 창덕궁의 궁궐들로 통명정 옆에 창경궁과 창덕궁이 이어지는 문이 있다..
창경궁(昌慶宮)의 내전(內殿)
숭문당 오른편 빈양문(賓陽門)을 넘어서면 왕과 왕비의 기거 활동 공간인 내전이 펼쳐는데 경춘전(景春殿)과 환경전(歡慶殿), 통명전(通明殿)과 양화당(養和堂), 자경전(慈慶殿), 그리고 후궁들의 거처인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 등의 내궐이 있고 정자인 함인정(涵仁亭)과 커다란 연못인 춘당지(春塘池)가 있다.
통명정(通明殿)
이곳 창경궁(昌慶宮) 통명정(通明殿)은 경복궁(景福宮)의 교태전(交泰殿),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殿)과 함께 용마루가 없는 곳으로 왕비가 거처하는 곳이라 왕권을 이을 원자(元子)와 대군을 생산해야 하는 곳이므로 용마루에 용의 기에 눌려 잉태에 해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 하고, 같은 연유로 왕의 침전인 경복궁 강녕전(康寧殿)에도 용마루가 없는 바 지붕위의 용마루가 땅의 용인 왕이 잠자는 동안에 해가 될 것을 꺼린 이유라 한다.
풍기대(風旗臺)와 해시계
그리고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재던 기구인 풍기대(風旗臺)와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모조품)가 있는데 이처럼 궁궐 안에 자격루(自擊漏), 측우기(測雨器), 그리고 관천대(觀天臺)의 간의(簡儀) 등과 같은 과학 기구가 많이 설치되어 있었던 연유는 국왕이 국정 운영을 위해 자연 현상을 잘 살피고 책임지라는 깊은 뜻이 담겨있다.
성종대왕 태실(成宗大王 胎室)
또 창경궁에는 성종대왕 태실(成宗大王 胎室)과 태실비(胎室碑)가 있는데 조선시대에서는 왕실의 태를 없애지 않고 조선 최고의 백자 안에 넣어 봉하고 다시 큰 항아리에 넣은 후 태실을 조성하여 보관을 했기에 전국 각지의 길한 땅에 태실과 관련 내용을 기록한 태실비가 존재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전국 각지의 태실을 경기도에 있는 서삼릉에 한꺼번에 모아 놓고 상당수의 좋은 항아리들을 빼돌렸다고 한다. 그 중에 유독 성종 태실의 석물만은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나 경기도 광주군 경안에 있던 것을 창경궁에 가져다 놓았다 한다.
창경궁 후원의 연못인 춘당지
조선 왕궁인 궁(昌慶宮)을 원(昌慶苑)으로 격하시켜서 동물의 똥 냄새가 진동하는 동물원과 위락 시설로 만들고, 우리말 우리글의 말살 정책과 창씨개명(創氏改名) 등에다가 한민족(韓民族)은 역사적으로 늘 다른 나라에 지배되어 왔고 자립 능력이 없는 정체된 민족으로 조선시대도 당파 싸움으로 망한 민족이라는 그릇된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심어놓아 우리에 정신문화를 뿌리채 흔들어 놓은 그 후유증을 아직도 극복해내지 못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기도 한 오늘이었다.
<59회 송현 출신 조병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