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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서예[2837]주방언(周邦彦)-소년유(少年遊)
소년유(少年遊) - 주방언(周邦彦·1056∼1121)
병도여수(幷刀如水) 오염승설(吳鹽勝雪)
섬지파신등(纖指破新橙) 금악초온(錦幄初溫)
수향부단(獸香不斷) 상대좌조신(相對坐調笙)
저성문( 低聲問) 향수행숙(向誰行宿?)
성삼이삼경(城上已三更) 마활상농(馬滑霜濃)
불여휴거(不如休去) 직시소인행(直是少人行)
물빛처럼 번뜩이는 병주(幷州) 과도,
눈보다 고운 오 지방 소금,
갓 익은 귤을 까는 섬섬옥수.
비단 장막 안은 이제 막 따스해지고,
향로에선 쉼 없이 향훈이 번지는데,
마주 앉아 여인은 생황(笙簧)을 연주한다.
낮은 목소리로 묻는 말. “오늘 밤 어느 곳에서 묵으실는지?
성안은 이미 야심한 삼경,
서릿발에 말이 미끄러질 터니 차라리 쉬었다 가시는 게 좋겠어요.
길엔 나다니는 사람도 드물답니다.”
송휘종(宋徽宗)과 이사사(李師師)
글: 문재봉(文裁縫)
송휘종 조길(趙佶)은 일생동안 경박하게 지냈다.
화목석죽, 조수충어, 훈정서화, 산선도교를 좋아하는 외에,
여색을 목숨처럼 좋아했다. 나중에는 하루종일 여색에 빠졌다.
방탕한 생활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송휘종의 후궁은 구름처럼 많았고,
수량이 놀라웠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삼천분대(三千粉黛)_, 팔백연교(八百煙嬌)"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 후궁들과 밤낮으로 함께 하고 조석으로 붙어있느니,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으면 질리는 법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도 눈에 익숙해지고나면 더 이상 신기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하루는 그가 무료하여,
부채위에 "선반조래불희찬(選飯朝來不喜餐), 어주공비팔진반(御廚空費八珍盤)"의
열네자를 썼다. 돌연 뒤를 잇는 글이 떠오르지 않아,
한 대학사에게 뒷 구절을 이어서 쓰게 했다.
그는 조길의 마음을 잘 헤아렸다. 그래서 뒷구절을 이렇게 이었다:
"인간유미구상편(人間有味俱嘗遍), 지허강매일점산(只許江梅一點酸)"
달면서도 시면서 시원한 양매(楊梅)는 주방장의 팔진요리의 느끼함을 없애줄 것이다.
조길의 '인간여색'중 "일점산"은 바로 경사에 유명했던 청루가기 이사사였다.
이사사는 생졸년이 미상이고, 북송말기 변경의 명기(名妓)이다. 원래 성은 왕(王)이고, 4살때 부친을 잃고, 이씨의 기적에 들어가면서 이사사로 개명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기질이 우아하고, 음율사화에 능통했으며 개봉성에 방명을 떨쳤다. 아마도 어렸을 때 처량한 생활때문인지 이사사의 마음 속에는 깊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이름을 날리게 된 후, 그녀가 사람들에게 주는 느낌은 항상 담담한 우상(憂傷)이다. 그녀는 처완청량(凄婉淸凉)한 시사를 좋아했고, 애원전면(愛怨纏綿)한 곳을 즐겨 불렀다. 자주 유백색의 옷을 입고, 가볍게 화장하였다. 이 모든 것은 "냉미인(冷美人)"의 기조였고 오히려 사람을 더욱 홀렸다.
송휘종은 이사사에 대하여 일찌감치 듣고 있었다. 하루는 문인의 의복을 입고 소교(小轎)를 타고 이사사의 집을 찾아간다. 그는 자칭 전시수재(殿試秀才) 조을(趙乙)이라고 하며 이사사를 만나기를 청한다. 그는 마침내 이사사를 만난 것이다:
빈아응취(鬓鴉凝翠), 환봉함청(鬟鳳涵靑).
눈은 추수와 같고, 뼈는 옥과 같고, 얼굴은 부용과 같고, 눈썹은 버드나무같다.
송휘종은 이사사의 노래를 듣고, 이사사의 춤을 보았다 몇 잔의 술이 뱃속에 들어가면 이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이사사를 안고 비단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와 자는 것은 비빈들과 자는 것보다 정취가 배는 되었다. 이사사의 온완영수(溫婉靈秀)한 기질에 송휘종은 꿈속을 헤매는 것같았다. 그러나 밤을 짧고, 순식간에 날이 밝았다. 송휘종은 어쩔 수 없이 옷을 입고 이사사와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안타까와하면서 헤어졌다.
그후, 송휘종은 자주 이사사의 청루를 찾아간다. 이사사도 더 이상 다른 손님을 받지 않았다. 권세있는 왕공귀족도 모두 물리쳤다. 그녀의 청루 문앞은 오가는 마차와 사람이 없어 쓸쓸해진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이사사가 관계를 끊을 수 없었다.
그는 바로 대세감(大稅監) 주방언(周邦彦)이다.
주방언은 재자이다. 그는 풍류가 넘치고, 제자백가를 섭렵하였으며 악보에 맞추어 곡을 쓸 수 있었다. 그는 당시의 대사인(大詞人)이다. 한번은 송휘종이 병이 나서 그 기회를 틈타 주방언이 이사사와 밀회를 즐긴다. 두 사람이 한참 즐기고 있을 때 황상이 왔다는 말을 듣는다. 주방언은 몸을 숨기기에 부족했고, 할 수 없이 침상 아래로 기어들어간다.
송휘종은 이사사에게 강남에서 보내온 신선한 등자(橙子)를 보내왔다. 그녀는 등자를 먹으면서 송휘종에게 아양을 떨었다. 그러나 송휘종은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유숙하지는 않고 돌아간다.
송휘종이 떠난 후, 주방언은 <소년유.감구>라는 시를 짓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병도여수(幷刀如水), 오염승설(吳鹽勝雪),
섬지파신등(纖指破新橙). 금위초온(錦幃初溫),
수향부단(獸香不斷), 상대좌조쟁(相對坐調箏).
저성문(低聲問): 향수행숙(向誰行宿)? 성상이삼경(城上已三更),
마활상농(馬滑霜濃), 불여휴거(不如休去), 직시소인행(直是少人行)".
이 사는 송휘종이 기생과 노는 내용을 잘 표현했다.
나중에 송휘종의 병이 낫고 다시 이사사를 찾아간다.
이사사는 아무 생각없이 이 사를 부른다.
송휘종은 누가 지은 것인지를 묻고, 이사사는 말나오는대로 주방언이라고 답한다.
그녀는 말을 내뱉자 말자 후회막급이었다.
송휘종은 즉시 가늘 주방언이 집안에 있었다는 것을 눈치챈다.
안색이 변하고, 그녀는 수치가 분노로 바뀌었다.
다음 날 조회에 채경에게 세금을 제대로 거두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주방언을 파면하고 경성에서 쫓아내라고 명령한다.
이사사는 눈바람을 무릎쓰고 주방언과 헤어진다.
그가 지은 사 <난릉왕>을 송휘종에게 들려준다.
이사사는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특히 "조진애현(酒盡哀弦), 등영이석(燈映離席)"이라는 부분을 부를 때는
목이 매어 거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송휘종도 자신이 너무 심했다고 느껴서 주방언을 다시 불러서
그를 음악을 관장하는 대성부(大晟府) 악정(樂正)으로 임명한다.
이사사는 나중에 궁중으로 불러들여, 이명비(李明妃)로 책봉한다.
그러나 금나라군대가 개보으로 다가올 때, 송휘종은 황위를 태자인
송흠종 조후에게 넘겨준다.
이사사는 배경을 잃게 되어 다시 서인(庶人)으로 폐해진다.
그리고 궁에서 축출된다. 지위는 일락천장한다.
그녀는 화를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여도사가 된다.
얼마후 변경이 함락되고, 북송이 멸망한다.
금나라군대는 송휘종, 송흠종 두 사람과 조씨종실중 여러 명을 북으로 끌고 간다.
이사사의 행방은 묘연하여 알 수가 없게 된다.
정사에서는 이사사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야사나 소문에서는 사람들이 이 일을 즐겨 얘기하곤 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전설과 신비의 색채를 띄게 된다.
이사사는 재색을 겸비하고 용모가 선녀같으며 동시에
금기서화에 모두 능했다.
문인의 필기소설에는 그녀가 적지 않은 문인들과 교유했다고 적었다.
예를 들어, 장단의의 <귀이록>, 장방기의 <묵장만록>에는 모두 그녀가
대사인 주방언, 조충지(晁沖之)와 교유하면서 시사를 주고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사사가 궁을 나오고, 금나라병사가 휘종,흠종 두 황제를 북으로 데려가기 전에,
그녀의 행방에 대해서는 두 가지 판본이 있다:
<삼조북맹회편>에서는 그녀가 축출된 후, 곧이어 집안이 몰수당했다고 한다;
<이사사외전>에서는 그녀는 자신의 가산이 몰수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앞장서서 자신의 재산을 하북의 군용물자로 내놓았다.
어찌되었건, 두 가지 내용의 결과는 같다. 즉 한때 명성을 떨치고, 부를 쌓았으며,
권세가 하늘을 찔렀던 이사사가 아무 것도 없는 평민여자가 된 것이다.
"정강지치(靖康之恥)"후의 이사사의 행방에 대하여는 3가지 판본이 있다:
첫번째 판본은 이렇다. 죽어서 순국(殉國)했다는 것이다. <이사사외전>의 기록에 따르면, 금나라군대가 변경을 함락시킨 후, 금나라황제는 이사사의 이름을 들은지 오래되어 그의 총사령관인 달나(撻懶)에게 이사사를 찾으라고 한다. 그러나 여러 날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나중에 한간(漢奸) 장방창(張邦昌)의 도움으로 마침내 이사사를 찾아낸다. 이사사는 금나라황제를 모시고 싶어하지 않았다. 먼저 금잠(金簪, 금비녀)로 자신의 목을 찌르나 자살에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자 다시 금잠을 삼켜서 자살한다. 죽기 전에, 그녀는 장방창을 크게 욕한다: "천한 기생인 저는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니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 뿐 다른 생각은 없다. 그런데 그대들은 높은 작위와 두터운 봉록을 받았고 조정에 그대들에게 잘못대해주지 않았는데, 왜 사사건건 종사를 멸망시킬 생각만 하는가?" 청나라때 사람인 황정감(黃廷鑒)의 <임랑비실총서>는 이를 근거로 그녀의 순국행위는 대장부 기개의 표현이라고 칭찬한다. 후세의 통속소설도 많이 이 내용을 답습한다. 그러나 소설의 작자는 주로 이를 가지고 망국의 한을 이야기한 것이지, 무슨 사실적 근거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은 이 설에는 이견을 가지고 있다. 노신은 <중국소설사략>에서 <이사사외전>을 전기(傳奇)라고 하였다. 송지재의 <황제와기녀>에서는 '외전의 작자가 쓴 것은 전기이다'라고 하였다. 이 설은 사실보다는 감정이 많이 포함된 것이다. 작자는 개락 이사사의 충의가 세상을 풍자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같다. 등광명의 ㅡ동경몽화록주>는 이 책에 대하여 '한번만 봐도 명계인(明季人)의 망작(妄作)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채동번의 <송사통속연의>, 이일후의 <송관십팔조연의>에서는 모두 작자가 이사사를 빌어 세상을 풍자했다고 여겼다.
두번째 판본은 강호에서 늙어죽었다는 것이다. <청니련화기>의 기록에 따르면, "정강의 난때 이사사는 남으로 갔다. 누군가 그를 호상(湖湘, 호남남부)간에서 보았는데, 늙어서 초췌해졌으며, 옛날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장방기의 <묵장만록>에서는 이사사가 가산몰수당한 후, 강소절강일대로 흘러들어가서, 어떤 때는 현지의 사대부를 위하여 노래부르고, '정강때, 이생(이사사)는 절강으로 흘러들어갔고, 사대부는 여전히 그녀를 불러서 노래를 들었다. 초췌해져서 더 이상 얫날의 모습이 아니었다." 청나라초기의 진침(陳忱)의 <수호후전>도 이 견해를 이어받았다. 이사사는 남송초기, 임안(항주)로 갔고, 서호 갈령에 살았으며 옛날에 하던대로 기생으로 살았다고 한다. 송나라때의 평화 <선화유사>에도 유사한 기술이 있다. 그러나 "나중에 호상간(지금의 호남남부)으로 흘러 들어가 상인이 그녀를 얻었다." 송나라때의 유자휘(劉子翚)는 <변경기사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사수로과호상(師師垂老過湖湘)이라고 썼다. 이 주장은 처절하고 우울하다. "문전냉락차마희(門前冷落車馬希)"와 "낙화시절우봉군(落花時節又逢君)"의 맛이 있다. 이것도 당시 사람들이 자신들이 바라는 바를 쓴 것일 것이다.
세번째 판본은 포로로 잡혀 북으로 끌려갔다는 것이다. 이사사는 변경이 함락된 후 포로로 잡혀 북상했고, 병든 장애인인 금나라병사에게 억지로 시집갔다고 한다. 그리고 치욕적으로 나머지 삶을 보낸다. 청나라때 사람인 정약항(丁躍亢)의 <속금병매>등 책에서 모두 이 설을 취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금나라장수 달나는 장방창등 항복한 신하가 제공한 명단에 따라 황궁부녀를 수색했는데, 이사사는 일찌감치 여도사가 되어 있었다. 자연히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소위 "이사사는 반드시 먼저 동경을 나왔고, 수색대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상의 여러가지 의견을 종합해보면, 두번째 견해가 비교적 믿을만한 것으로 보인다. 변경이 함락되기 전 이사사는 이미 서인으로 폐해졌고, 여도사가 되었다. 그가 민간에 숨어들어 강소,절강에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소설가들이 윤색을 했기 때문에 이사사의 귀속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근원을 찾아보면 주로 이사사는 망국군주와 관련있는 여자라는 것이다. 황제와 기녀는 귀천의 차이가 크고, 그 사정은 반드시 국사에 관련된다. 그에 관한 소문은 많은 억측과 와전이 있다. 그녀의 귀속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마도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일 것이다.
동아일보=입력 2024-01-11
여인의 유혹[이준식의 한시 한 수]〈246〉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물빛처럼 번뜩이는 병주(幷州) 과도,
눈보다 고운 오 지방 소금, 갓 익은 귤을 까는 섬섬옥수.
비단 장막 안은 이제 막 따스해지고,
향로에선 쉼 없이 향훈이 번지는데,
마주 앉아 여인은 생황(笙簧)을 연주한다.
낮은 목소리로 묻는 말. “오늘 밤 어느 곳에서 묵으실는지?
성안은 이미 야심한 삼경,
서릿발에 말이 미끄러질 터니 차라리 쉬었다 가시는 게 좋겠어요.
길엔 나다니는 사람도 드물답니다.”
(幷刀如水, 吳鹽勝雪, 纖指破新橙. 錦幄初溫, 獸香不斷,
相對坐調笙. 低聲問, 向誰行宿?
城上已三更, 馬滑霜濃, 不如休去, 直是少人行.)
―‘소년유(少年遊)’ 주방언(周邦彦·1056∼1121)
시가 정중하고 엄숙한 분위기라면 사(詞)는 경쾌하고 자유분방하다.
시가 사대부 문학의 정수라면 사는 연회나 주루(酒樓)의 여흥 분위기를 돋우는
유흥 문학의 성격이 강하다. 가사의 속성상 근엄한 메시지보다는
평이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써야 호소력이 더 도드라지는 법이다.
노랫말에 고답적인 삶의 이치나 인간의 도리 따위를 담는다면 누가 반기겠는가.
이 작품은 사의 이런 특징을 잘 보여준다.
연인 사이인지 아니면 주루에서의 하룻밤인지는 알 수 없다.
비단 장막을 두른 것으로 보아 이 방의 주인은 아마 여인,
갓 익은 귤껍질을 벗기는 섬섬옥수의 주인공이겠다.
잘 드는 과도와 백설 같은 소금을 준비한 것으로 보아 시고
쓴맛이 도는 귤 위에 살짝 소금을 칠 모양이다.
길상(吉祥) 동물 형상의 향로에 향을 피우고 생황 연주까지 곁들였으니
그 대접이 여간 곡진하지 않다. 급기야 나지막이 건네는 한마디.
‘야심한 데다 서릿발로 길이 미끄러우니 쉬어가시라.’
배려인 듯 애소(哀訴)인 듯 여인의 농염한 유혹에 밤이 무르익고 있다.
송 휘종(徽宗)과 기녀 이사사(李師師)의 밀회 장면을
묘사한 거라는 믿기 어려운 야사의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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