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배우는 교훈과 책임(눅16:19-31)
2025.2.9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오늘 설교본문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이다. 이 비유는 이런 내용이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는 한 부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는 거지가 있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려고 했다. 심지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았다는 표현을 보면 질병도 있었던 것 같다(눅16:19-21).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와 부자가 죽었다. 거지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낙원의 아브라함 품에 들어갔고, 부자는 음부의 불꽃 속에서 크게 고통스러워했다.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낙원에서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자신에게 보내서, 그 손가락을 물을 찍어서 자신의 혀를 좀 서늘하게 해달라고 애걸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서 서로 오갈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부자는 다시 말하기를, 그러면 나사로를 아직 살아있는 자신의 다섯 형제들에게 보내서, (죽음 이후의 현 상황을) 증언하게 해서 이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그에게 한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라는 말이었다(눅16:22-31). 여기까지가 이 비유의 내용이다.
사실 이 비유는 어린 시절 주일학교 때부터 수없이 들었던 익숙한 이야기다. 예전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 “왜 나사로는 낙원에 들어갔고, 부자는 왜 못 들어갔을까?”라는 질문을 했던 기억이 있다. 처음 이 비유를 대하는 분들이나 초신자 분들은, 부자는 거지 나사로를 돕지 않고 욕심껏 살았으니까 그 대가로 음부에 떨어졌고, 나사로는 세상에서 힘들게 살았으니까 그 보상으로 낙원에 간 것처럼 이해하기 쉽다. 물론 우리들은 이 비유를 통해서 성도들의 올바른 생활의 모습도 돌아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셨던 과정을 보면, 돈을 좋아하는(두 주인을 섬기는) 어떤 바리새인이 비웃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시는 연장선에서 주신 비유이기 때문이다(눅16:14-15).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16:14-15)
그러나 주님은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은 천국에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만약 인간의 소유물의 유무나 선행으로 인해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면, 예수님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들이 돈을 벌려고도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성도로서 주님이 기뻐하실만한 올바른 재정생활을 하고, 거지 나사로와 같은 이웃을 돕는 선한 일을 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지만, 천국과 지옥은 이러한 행위들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선행은 구원 얻은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열매이고 상급에 관한 일이지, 구원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나사로는 낙원에 갔고, 부자는 음부에 떨어졌을까? 그들이 그렇게 된 진짜 이유가 뭘까? 이 점에 오늘 이 시간 우리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 대한 대답은 음부에 떨어졌던 부자의 말에 주님이 의도하시는 힌트가 숨어있다. 부자는 음부의 불꽃 속에서 이렇게 말했다(눅16:27-31).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6:27-31)
이 말씀을 보면, 음부에 떨어진 부자는 나사로를 자신의 다섯 형제에게 보내서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지니라”라고 대답했다. 이 대화들을 종합해 보면, 부자가 생전에 모세와 선지자들의 권함을 들었다는 말인가 안 들었다는 말인가? 듣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부자는 자기가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하지 말고, 자신의 형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 들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말한 것이다. 또한 이 말은 역으로 보면, 나사로는 비록 거지였지만, 생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말씀이다. 부자와 나사로가 살아있을 때, 무명의 전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그 집을 방문했을 때, 부자는 전도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대문 옆에서 있던 거지 나사로는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들이 진짜 놓치지 말고, 깨달아야 할 것은 전도에 대한 사명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그리고 제사장들은 영혼구원이라는 본질은 뒤로하고 두 주인(돈과 하나님)을 섬기면서, 정작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들려주는 일은 외면했다. 오늘 우리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오늘 먼저 믿은 우리들 옆에는 다양한 이웃들이 있다. 그들 중에는 부자도 있고, 거지 나사로처럼 어려운 사람도 있다. 선택은 그들의 몫이지만, 우리에게는 차별 없이 복음을 들려줄 전도자의 책임이 있다.
진실해 말해주는 한 사람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들 중에 이런 실화가 있다.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우리나라 철도역사상 가장 최악의 사고 중의 하나인 열차 화약 폭발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로 59명이 사망하고, 1343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이재민 1647세대 7800여 명이 발생했다. 폭발현장에는 지름 40m, 깊이 15m에 이르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고, 반경 500m 이내의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었다(좌측 사진). 10톤짜리 기관차 본체는 폭발지점에서 부터 700m 떨어진 민가까지 날아가 버렸고, 일부 파편은 직선거리가 7km나 되는 춘포면까지 날아갔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체 이리역을 향해서 600명을 실은 열차가 오고 있었다. 폭발사고로 인해서 모든 통신장비는 파괴되어서 알려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인지한 송석준이라는 역무원이 달려오는 열차 쪽으로 죽을힘을 다해 1Km이상을 뛰어갔다. 그리고 윗옷을 벗고 흔들었다. 한 밤 중에 철로 위에서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 열차는 송석준씨를 보고 가까스로 멈춰섰다. 만약 송석준이라는 역무원이 달려오는 열차를 향해 달려가지 않았다면, 더 큰 참사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후에 송석준씨는 철도안전명예의 전당에 기록되었다. 생각해 보면, 전도하는 한 사람의 역할이 바로 이런 것이다.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막아서서 멈춰 세우고, 그들에게 천국으로 가는 길을 어떤 것인지 진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다(요14:6).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살고 있는 태안군의 인구는 6만133명이고, 그중에서 근흥면은 5,328명이다(2024.12월). 미래목회전략연구소에 의하면, 태안군 인구 6만여 명 중에 기독교 인구비율은 약 15.3%, 불교 11.26%, 천주교 2.11%, 무종교 68.65% 심지어 이단도 3.87%에 이른다. 이러한 기독교인 비율도 우상숭배가 상대적으로 더 심한 바닷가나 시골 리(里) 단위 동네로 가면 더 줄어들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동네에 85-90%는 마치 폭발사고 소식을 모르고 달려오는 열차에 탄 사람들과도 같다.
그렇기에 먼저 믿은 성도들이 마치 송석준씨가 달려오는 열차를 막아섰던 것처럼, 또한 무명의 전도자가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했던 것처럼 해야 한다. 물론 선택은 복음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각자의 몫이겠지만, 최소한 우리들에게는 들려줄 책임이 있다. 우리들의 심장이 멈추기 전에는 누구나 들을 기회는 열려있고, 전할 수 있는 기회도 열려 있다. 어떤 사람은 “난 늦었어... 나는 믿어도 교회에는 도움이 안돼”라고 말한다. 심지어 자칫하면 전도자 자신도 이런 착각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영혼구원 사역은 교회에 도움을 삼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죽어가는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전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 가까웠다고 느끼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오히려 더 긴급성을 갖고 예수님을 영접해야할 때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성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은 복음을 전하는 발이라고 했다(롬10:15). 성경은 그 사람이 무엇을 신었는지, 부자인지 나사로처럼 거지인지와 같은 외적인 것들을 보지 않는다. 하나님의 그의 영혼의 귀중함을 보신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우선 1년에 1명이 1명 이상 전도할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기도를 시작해 보자. 뜻을 정하고 기도를 시작하면, 더욱 관심이 생기고, 그 관심은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해 줄 것이다. 친밀한 신뢰 관계가 형성되면, 전도는 보다 쉽게 될 수 있다. 또한 이를 위해 하나님이 성령충만을 주실 줄 확신한다(행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