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집 허 열 웅 사람들은 저마다 섬이고 빈 집인지도 모른다. 녹슨 양철대문 한 귀퉁이에 빛바랜 부고장이 꽂혀있고 쓸쓸함이 가부좌 틀고 있는 고향의 빈 집에 들어선다. 뒤뜰의 수줍은 복사꽃은 혼자 흐드러지게 피고 윤기 나던 주춧돌에는 파란 이끼가 돋았다. 마당은 묵정밭이 되어 허리에 닫게 웃자란 개망초 하얀 꽃이 뒤 덮여있다. 뒤꼍의 울타리주위엔 죽순이 높이 솟아올라 울창한 대숲을 이루고 있다. 어머니의 숨결이 아직도 남아있는 장독대 옆 모란은 목을 길게 뺀 채 활짝 피어 뜨락이 환했다. 워낭소리 짤랑대던 외양간은 거미들이 겹겹이 집을 짓고 장작불 타오르던 가마 솥 자리엔 멀리 날아와 핀 민들레 몇 송이 홀씨를 날리고 있다. 옆집 순이와 소꼽놀이하던 툇마루엔 여름 햇살이 부서질 듯 쌓이고 있다. 몸이 야윈 고양이 한 마리 졸고 있다가 반가운 듯 눈을 뜬다. 유년의 추억이 새겨져있는 고향 풍경은 4각 액자만 대면 항상 걸어놓고 싶은 그림이 되었다. 허물어진 담벼락에 기댄 감나무 줄기에 한 생명을 출산하고 난 뒤 덩그러니 매달린 텅 빈 매미 집을 올려다본다. 7년을 암흑 속에서 동안거 하안거를 치열하게 되풀이하며 기도한 결과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여 목소리 고운 성악가가 탄생되었다. 푸른 날개를 펼쳐 햇빛을 털어내고 영혼을 감쌌던 허물은 빈 집으로 남았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영혼의 집에 물소리 바람소리가 수시로 들락거리고 목청 가다듬은 노래 소리도 쌓인다. 뻐꾹새 울음소리에 감꽃은 몰래지고 여름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모두가 떠난 숲속의 빈 집들엔 초록 그림자들만 머물고 있다.
어린아이 두엇 앞세우고 뒤 세우며 쫒기 듯 떠나오던 고향 길 옆 가로수엔 빈 까치집만 덩그렇다. 개울가에 핀 하얀 찔레꽃은 반갑다고 실바람에 손을 흔든다. 배고플 때 가시에 찔리면서 연한 줄기만 꺾어먹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느 가수는 찔레꽃을 보면 아프고 슬프다고 노래하던 가사가 가슴에 와 닿는다. 저 흰빛을 보면 어머니가 하얀 고무신에 흰 버선을 신고 장에 가시던 모습이 아련하다. 자갈밭 일구시며 소를 몰고 쟁기질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산마루 어디쯤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뒷산 어디쯤에서 나 찾아보란 듯이 꿩이 소리를 지르고 있다. 7월의 여름마다 찾아가던 대천 바다 멀리 섬을 다시 찾았다. 썰물과 밀물이 어루만지는 금빛 모래위에 소라가 살다 떠난 빈 집이 어둠에 빛나고 있다. 바닷물이 듬뿍 담겨 보름달도 떠있고 늦잠 자던 새벽별은 화들짝 놀라 하늘에 오르고 있다. “내 귀는 소라껍질 파도소리를 그리워한다”는 어느 시인의 노래가 파도에 실려 오면 등대지기는 뜬눈으로 밤을 지킨다. 넘실대는 푸른 물결은 몽돌을 쓰다듬고 뻘밭에 숨어있는 조개는 찬란한 진주를 잉태한다.
자식들은 도시와 외국으로 멀리 떠나 손자손녀 발길조차 끊긴 빈집 한 채 허물어져가고 있다. 가뭇가뭇 사라져가는 추억 한 토막 훔쳐서라도 기억하고 싶은 시간, 눈은 침침하고 귀에서는 이명소리가 둥지를 틀고 있다. 자식위해 열망조차 줄이고 만 갈래 세상살이 힘들었던 어느 시절, 왜 그리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 쳤던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적당히 쉬엄쉬엄 느긋하게 걸어왔어도 괜찮았을 터인데 하는 마음일 때도 있었다. 젊음이 노력으로 얻지 않았듯, 늙음도 죄로 받은 벌이 아니었음을 그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못했다.
물소리 바람소리만 드나드는 빈집에 저녁노을은 오늘도 변함없이 찾아온다. 올무와 그물을 던져버린 빈손에 어둠 한 움큼 쥐어본다. 불면의 밤에 기우리는 소주잔의 무게가 점점 힘겨워져 간다. 혼자보다는 함께하면 더 행복할 것 같다는 간절함에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오지 않을 사람을 마중 나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