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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지 않는 법
열왕기상 19장 1-8절, 시편 1편 1-3절, 요한계시록 3장 14-19절
한 문 덕 목사
[번 아웃 증후군]
지난 6월 25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책임연구원으로 사역하시는 홍승표 목사에게서 매우 긴 문자 하나가 제게 왔습니다. 내용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2024년 100주년을 맞아 지난 한국기독교의 에큐메니컬운동과 사회운동의 역사 속에서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 100명을 선정하고 관련하여 뜻 깊은 역사가 깃든 전국의 기독교 역사현장 100곳을 선정하는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위원으로 참여해 달라는 위촉문자였습니다. 홍승표 박사는 제가 잘 알고 있는 분이고, 사업도 매우 의미 있는 내용이었지만, 저도 매우 긴 문자를 보내 참여하기 어렵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내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홍 박사님! 이런 귀한 일에 저를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제가 실로 너무 바쁩니다. 이미 NCCK 종교간 대화위원회와 그 안의 TFT 역할을 하고 있고요, 총회의 평화통일위원회의 운영위원으로 두세 가지 일(북한 바로 알기, 북한에 두고 온 재산권 포기 선언서 작성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노회에서는 선교부 서기이자, 교회와 사회 평화통일 위원회의 실행위원, 노회조직개편 연구위원회에서 서기로 일을 해야 합니다. 게다가 2학기에는 기장 여신도 교육원 서울교실 강의가 2개,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강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또 매주 수요사경회라는 유튜브 방송을 하고~ 이런 상황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매주 주일예배와 수요예배, 사도신경 강의, 마태복음서 강의, 생명사랑 5분 말씀 묵상, 월요 아침 묵상 등을 영상과 글로 제작하고 있습니다. 제가 몸이 10개면 좋겠네요. 홍 박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웬만하면 거절을 잘 안하는 사람이고,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감당하려고 하는 사람인데, 아무래도 제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물론 제가 지금 하고 있는 대다수가 매우 의미 있는 일이고, 제가 할 수 있으며, 저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한 번은 우리 육성한 전도사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육성한 전도사님을 만날 때마다 제 안부와 건강을 물으면서, 너희 담임 목사님은 그렇게 많은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 지치지 않고 계속 일을 해 나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몇 번이고 지쳐 쓰러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전에 계시던 정찬용 목사님도 제게 목사님 체력이 대단하다는 말을 종종 하곤 했습니다. 저는 농담으로 요한복음 4장 32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제게는 여러분들이 모르는 하나님이 주신 다른 양식이 있다고 답변하시라고 육 전도사님께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홍승표 박사에게도 문자를 보냈듯이, 제가 지금처럼 바쁘게 사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저도 번 아웃에 빠지게 될 것이 불 보듯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일의 성취와 완성을 위해 쉬지도 않고 과도하게 일하다가 발생하는 번 아웃 증세는 만성적으로 피로감을 느끼고, 감정이 고갈되며, 삶 자체에 의욕을 느끼지 못하고, 작은 일에도 큰 스트레스와 막대한 에너지 소모를 느끼고, 과도한 감정적 표현을 하면서, 작은 일에도 짜증이 늘고,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도 자신이 상처를 입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어 장기간 동안 서서히 지쳐가 결국은 무기력과 우울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의 말씀에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나무는 시냇가에 있기 때문에 충분한 물과 양분을 공급받고 철 따라 열매를 맺으면서도 그 잎이 시들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삶도 시냇가 나무처럼 시들지 않으면 좋으련만 현대 사회에 몰아닥친 변화에 적응하며 무한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다 보면, 우리들은 어느 새 녹초가 되고, 다 타버리고 남은 재처럼 됩니다. 현대인치고 번 아웃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번 아웃과 관련한 연구에 의하면 어느 분야에 취업하든지, 취업 후 5년 정도가 되면 번 아웃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번 아웃을 생각할 때 일 중독자를 떠올리고, 과도하게 욕심을 부려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번 아웃은 성실하게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사람, 하나님께 받은 소명에 충성하려는 이들, 자녀들을 사랑하는 부모로서 애정을 가지고 육아에 몰두하는 이들에게도 찾아옵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는 일 자체가 우리 몸을 쉽게 피로하게 만들고, 가끔씩 찾아오는 삶의 무의미와 허무가 우리를 번 아웃 상태로 만듭니다. 특별히 요즘 같이 코로나 19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 저는 현대인들에게 일상적으로 찾아 올 수 있는 삶의 의욕 상실로부터 어떻게 빠져 나올 수 있고, 매일 매일의 삶을 시들지 않는 나무처럼 생기 있게 살 수 있을지 주어진 성서본문을 가지고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엘리야가 겪은 자살 충동]
오늘 먼저 다룰 성서본문의 주인공은 바로 엘리야입니다. 한 개인의 성격이 질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의학 연구를 경영학에서 가져다가 어떤 성향의 사람이 회사 조직에서 높은 성과를 내는지 연구했는데, 여기에서는 사람을 A 유형과 B 유형으로 나눕니다. A 유형의 사람은 공격적이고, 성취지향적인 사람들입니다. 매우 도전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시간 내에도 이를 달성하려고 노력하며, 모험을 즐기고, 극한 상황에서도 많은 에너지를 분출하면서 남들과 경쟁하여 승리할 때 자신의 가치를 느끼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B 유형의 사람은 비교적 느긋하고, 덜 공격적이면서 자율을 매우 중시합니다.
엘리야 예언자를 가만히 살펴보면 전형적인 A 유형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불같은 믿음을 소유하였고, 도전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며 한결 같은 길을 걸어온 그는 온 이스라엘 백성을 갈멜 산에 불러 놓고 열정적으로 설교하였으며, 850대 1이라고 하는 무모한 싸움에도 전혀 기가 눌리지 않았습니다. 아합 왕의 병거보다도 빨리 달렸다는 기록(왕상 18:45-46)은 그가 얼마나 활동적인 사람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열왕기상 19장에는 매우 지치고 무력한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갈멜산 정상에서의 싸움이 끝난 후 자신이 섬기던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의 예언자들을 잃은 이세벨 왕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서 24시간 안에 엘리야를 잡아 죽이겠다고 맹세합니다. 당대 최고 권력자의 서슬 퍼런 살기를 느낀 엘리야는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고, 살기 위해 수행원을 대동하고 나귀를 타고 이스라엘의 최남단 브엘세바로 도망합니다. 또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수행원을 남겨 둔 채 홀로 꼬박 하룻길을 걸어 광야로 들어갑니다. 요단강 동편 길르앗 지방에 살던 엘리야가 여기까지 오려면 일주일 이상 걸리고, 사마리아를 지나 거친 산길을 지나야 했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목전에 다다랐기에 이런 강행군을 한 것인데, 광야로 들어간 엘리야는 야훼 하나님께 죽기를 간청합니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지금 엘리야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자살 충동을 느끼고 있습니다. 성서는 엘리야가 이 기도를 로뎀 나무 아래에서 드렸다고 적고 있는데, 로뎀 나무는 잎이 제법 그늘이 지는 싯딤 나무나 종려나무가 아닌 댑싸리 나무로 광야의 뜨거운 햇살을 피할 수 없는 나무였습니다. 즉 엘리야는 지금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고, 거센 바람과 무서운 맹수와 도적들의 위협이 가득한 광야에서 수행원도 없이 홀로 죽으려고 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갈멜 산 전투를 떠올려야 합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850대 1로 싸워야 했습니다. 지난 주에 설교했듯이 엘리야는 누가 진정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인가를 두고 아합 왕과 설전을 벌이고, 아합과 야훼 하나님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고 있는 온 백성들 앞에서 결판을 내야 합니다. 850명의 이방 신 예언자들이 자신들의 신에게 바치는 엄청난 예식을 펼치며 물량공세로 엘리야를 짓누르고,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의 권력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엘리야는 홀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면서 대결을 펼쳐야 합니다. 다행히 엘리야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과 나무, 심지어 돌까지 태우며 모든 물을 증발시켜 버리면서 승리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850명이나 되는 모든 이교의 예언자들을 도륙합니다. 다행이 이 싸움에서 이겼고, 그제서야 백성들이 엘리야 편에 서서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을 몰아내지만, 이 대결을 홀로 치러야 했던 엘리야는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소모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굳센 믿음의 소유자였고 자기 통제력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분명 갈멜 산의 대결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막대한 감정적 영적 에너지의 소모가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게다가 이 정도의 승리와 성취를 거두었다면 북이스라엘 왕가의 실제적 변화가 있어야 했지만, 즉 아합 왕이나 이세벨이 회개하고 엘리야 예언자의 말을 따라 야훼 하나님께 순종해야 했지만 도리어 이세벨은 길길이 날 뛰면서 엘리야를 죽이려 들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의 대결에서 성취한 것에 대해 인정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목숨마저 위협당하면서 극심한 무기력에 빠져 드는 것입니다. 좋은 성과를 낸 것이 분명한데도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부정적으로 사고하기 쉽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나의 적이며, 어느 누구하나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지금은 이들이 나와 함께 하지만 언젠가는 나를 배신하고 버릴 것이라는 부정적 사고는 두려움과 더불어 우울증으로 사람을 몰고 갑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으로부터 불굴의 용기를 내었지만 그것이 제대로 수용되지 못했을 때, 엘리야마저도 깊은 상처 속에서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저는 할 만큼 했습니다. 주님! 제 목숨을 거두어 주소서. 무덤 속에 있는 조상들 만날 준비가 되었습니다.”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엘리야가 처한 상황을 맞닥뜨릴 수가 있습니다. 거대한 성공 뒤에 오는 탈진도 그런 것이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과제 속에서 반복적인 일들을 무의미하게 해야만 할 때도 그렇습니다. 자기와 친한 사람이 겪은 고통에 함께 마음 아파해 주다가 심리적으로 전염되면서 나도 모르게 과거의 아픈 상처와 트라우마에 휩싸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 빠르게 변해 버린 세상, 현대 사회에 몰아닥친 이 폭풍과 같은 변화에서 우리의 정서적 안정감이 산산조각으로 찢기어 흩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나도 모르게 낭떠러지 끝에 서 있고,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한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회복]
그런데 오늘 엘리야는 바로 이런 상태에서 조금씩 회복됩니다. 우선 회복에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잠’, 둘째는 ‘음식’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죽기를 기도하였지만 죽는 대신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렇게 자고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시고, 그를 깨워 돌에 구운 과자와 물을 줍니다.
지난 주 수요기도모임에서도 설교했지만, 육체적 쉼과 정신적 안식은 우리 삶을 생기 있게 유지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것입니다. 인간은 사유하는 능력으로 지구별의 리더가 되었지만 생각하는 힘도 건강한 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떤 일이 있어도 잘 자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기 때문입니다. 번 아웃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길은 바로 우리들의 몸을 보살피는 것입니다. 나 자신도 모르게 받았을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고, 일하면서 긴장했던 근육들을 풀어 주며, 삼시 세끼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던 날들에서 벗어나 가끔씩이라도 자신을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규칙적인 휴식을 갖는 것이야말로 번 아웃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입니다.
번 아웃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두 번째 방법은 바로 시편에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시냇가의 심은 나무가 잘 되는 것처럼 언제나 영적이고 정신적인 양분인 말씀을 가까이에 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번 아웃은 자신이 모든 것을 해야 하고, 자신만이 할 수 있으며,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지려고 할 때 생깁니다. 그러니 2000년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이 알려 주는 지혜를 들으십시오. 사람은 의존적 존재입니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러하기에 때때로 하나님께 맡기고 너무나도 자기가 다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상당 부분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너무 책임지려고 하시지 마십시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할 만큼만 하시고 나머지는 주님께 맡기시라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이 해 주실 것입니다. 제가 지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목회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목회의 스트레스가 크지 않습니다.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주님, 제가 세 가지 큰 죄를 범했으니, 용서를 청합니다. 첫째, 저는 어디에나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주님의 많은 성지를 찾아다니며 헤매곤 했습니다. 둘째, 주님은 제가 잘 사는 것에 대해서 저보다 훨씬 더 마음을 쓰신다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고 너무 자주 당신께 도와주십사고 외쳤습니다. 셋째, 우리 죄는 우리가 범하기도 전에 이미 용서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용서를 청하고 있습니다.” (앤소니 드멜로, <개구리의 기도 1> 27. 살짝 각색)
저와 여러분이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어쩌면 우리가 드리는 상당수의 기도는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우리의 분주한 행동도 부질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목소리 높여서 외칠 일도 아니고, 안달하고 불안해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온갖 초초함과 불안, 짜증과 부담감, 부정적인 정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번 아웃에서 벗어나는 세 번째 길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말씀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아 미적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성서학 연구자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상태는 로마제국과 하나님 사이에서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설합니다. 양다리 걸치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라오디게아 교회가 미지근하게 된 것, 즉 삶의 의욕을 느끼지 못하고 그냥저냥 죽지 못해 사는 것처럼 살게 된 이유가 바로 번 아웃 상태에 이른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시는 조언도 바로 번 아웃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로 보였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세 가지를 갖추라고 요구합니다. “불에 정련한 금”과 “흰옷”과 눈을 밝게 하는 ‘안약’입니다. 불에 정련한 금이란 불순물을 제거하여 순도가 높은 금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박해와 시련을 이겨낸 참된 신앙을 가리키는 은유입니다(벧전 1:7 참조). 라오디게아 교회는 겉으로 볼 때 부자였고, 그래서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교회는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모두는 진짜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참된 삶의 의미와 풍족함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것에 매몰되어 살다가 번 아웃에 이르게 되고, 또 깊은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고요하게 머물러 있는 훈련, 주님 품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험, 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능력, 예수님을 닮아 온유함을 유지하는 것, 신앙의 동료들과 나누는 교제, 성령님을 통한 깊은 영적 사귐 가운데 얻게 되는 놀라운 깨달음과 충만함의 선물들,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놀라운 자기 통제력, 미래의 소망으로 현실을 진단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능력 등은 모두 참된 신앙에서 얻을 수 있는 보물들이고, 이것은 우리 삶이 소진되는 것을 막아 줄 뿐만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생기를 돋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흰 옷”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신앙의 실천을 말합니다. 한편 이것은 세상 문화에 물들지 말라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회 교우 여러분! 전국에서 우리 예배에 함께 참여하시는 성도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우리를 못살게 굴고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모든 원인은 어디에서 왔나요? 그렇습니다. 바로 세속적 문화로부터 온 것입니다. 보이는 것에만 신뢰를 두는 실증주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는 승자독식의 분위기, 참되고 옳은 것이 아니라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것, 숭고한 가치가 아니라 돈을 쫓는 천박한 삶의 추구들이 모두 세속의 가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기를 쫓아가다 보니 우리의 정신이 피폐해지고, 우리가 마음 둘 곳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눈을 밝히는 “안약”을 준비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헷갈리는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분별력을 지니고, 그것으로 세상의 망가진 곳을 치유해야 합니다. 모두 밝은 눈을 갖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겉으로 화려했지만 그 문명은 노예에게 부과한 가혹한 노동과 착취를 통해서, 다른 나라의 침략과 조공을 통해서 건설된 것이었습니다. 서커스를 보고 빵을 받아먹으며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로마시민들 뿐, 대다수의 식민 지배를 받던 사람들은 모두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존과 상생의 길을 우리 모두 찾아야 합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별 모든 자연 생태계가 함께 살아야 할 길을 찾아야만 우리 인간의 삶의 질도 나아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순금과 흰옷과 안약을 준비합시다. 서로가 서로에게 순금이 되고, 흰 옷을 입혀주고, 안약을 발라 줍시다. 함께 슬픔과 고통을 나눌 때는 반이 되고, 함께 기쁨과 즐거움을 나눌 때는 배가 된다는 변함없는 진리를 우리 생명사랑 공동체가 실현해 봅시다. 무엇보다 하늘과 땅을 휘젓는 폭풍우 속에서도 태풍의 눈과 같은 고요함을 간직하고 주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바로 거기는 치유의 장소이고 회복의 둥지이기 때문입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평화와 위로의 하나님! 우리들 삶은 가끔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겉은 웃지만 속은 썩어 들어가고, 천둥과 번개가 내리칠 때도 있습니다. 꺼진 불처럼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멍한 상태로 있을 때도 있습니다. 때로 질병과 예기치 않은 불행이 우리를 슬픔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그런 때에라도 주님의 은총이 언제나 우리를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중심에 언제나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기억하게 하소서. 연약함 속에서 겸손을 배우며, 주님의 살아계심을 통해 희망을 갖게 하시고, 주님의 품 안에서 다시 생기를 얻게 하여 주소서. 따뜻한 손길로 서로가 서로를 보듬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참된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거룩하시고 좋으신 하나님! 이 좋은 날 우리 모두를 주님 앞에 불러 모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예배하게 하신 은혜 감사합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주님의 따뜻한 빛을 쪼이니 지난 삶의 구김살들이 살살 펴지고, 주님의 자애로움과 미소로 우리의 굳어진 마음이 부드럽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지의 구름이 걷히고, 우리의 모든 이웃이 주님의 향기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은총에 감사하여 오늘 우리의 삶과 예물을 드립니다. 꼭 필요한 곳에 써 주소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곳에, 생명을 살리고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곳에 쓰이게 하소서.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우리가 날마다 진보하게 하시고, 더욱 더 주님과 가까워지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깨어나십시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철따라 열매를 맺고 하는 일마다 생기가 넘치게 하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의 거룩한 친교가 주님의 품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며 보람찬 삶을 살아가는 생명사랑교우들과 이 시간 전국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