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3부 일통 천하 (221)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24장 자객 형가(荊軻) (6)
세자 단과 헤어진 형가(荊軻)는 수레에 올라탔다.
"번관(樊館)으로!“
번관은 세자 단(丹)이 번어기를 위해 내린 역수가의 작은 성이다.
군사훈련을 하고 있었음인가.
번어기(樊於期)는 얼굴에 땀을 흘리며 형가를 맞이했다.
두 사람은 구면이다.
세자 단(丹)의 소개로 이따금씩 어울려 술을 마셨다.
그런데 그 날의 형가(荊軻)의 표정은 달랐다.
번어기(樊於期)도 그것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신지요?“
"긴히 의논드릴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지난날 장군은 진(秦)나라의 왕통을 바로잡으려다가 오히려 화(禍)를 당했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오.
더욱이 장군의 부모는 물론 가족까지 몰살당했으니 그 원한이 얼마나 깊으시겠소?
이제 장군의 목에는 황금 1천근과 1만호의 성(城)이 걸려 있소. 장군께서는 장차 이 원수를 어찌 갚으려 하시오?"
형가의 말에 번어기(樊於期)는 별안간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들었다.
그런 그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내 진왕(秦王)의 일을 생각하면 원통함이 뼛속까지 사무칩니다. 그러나 내게 아무런 힘이 없으니 통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형가(荊軻)의 눈이 잠깐 동안 번뜩였다.
슬그머니 가까이 다가앉았다.
"내게 연(燕)나라의 우환을 해소하고 동시에 장군의 원수도 갚을 수 있는 계책이 하나 있는데, 장군은 내 말을 들어보시겠습니까?"
번어기(樊於期)는 대뜸 되물었다.
"그것이 무엇이오?“
".........................!“
"어째서 말씀을 하시지 않소? 나를 못 믿어서이오?“
"그것이 아니라.... 좋습니다. 말씀드리지요."
"제가 필요한 것은 바로 장군의 목입니다. 만일 장군의 목을 선물로 가져가면 나는 쉽게 진왕(秦王)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 왼손으로 진왕의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 그의 가슴을 찌르면 어찌 연(燕)나라의 근심을 덜어주고 장군의 원통함을 갚아드리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장군께서는 저의 이 계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한 번어기(樊於期)의 대답은 어떠했을까.
역시 <사기(史記)>에서 그 답을 들어보자.
형가의 말을 들은 번어기(樊於期)는 한쪽 소매를 걷어올려 어깨를 드러냈다.
그러고는 팔을 세차게 휘두르며 외쳤다.
"그것은 내가 밤낮으로 이를 갈며 가슴 태우던 일이었소. 이제야 비로소 가르침을 받게 되었구려."
그러고는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대단한 번어기(樊於期)다.
아니 대단한 형가(荊軻)다.
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열정에 휘말리게 했을까.
이것이 바로 의협(義俠)이라는 것인가.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번어기(樊於期)는 금방 죽지 않았던 모양이다.
몸을 뒤틀며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이를 보고 있던 형가(荊軻)가 자리에서 일어나 칼로 번어기의 목을 내리쳤다.
번어기(樊於期)의 목이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그제야 번어기의 몸은 움직임을 멈췄다.
"...............................“
형가(荊軻)는 한참 동안 번어기의 목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번어기의 부하 중 하나가 세자 단(丹)에게 이 일을 보고했다.
세자 단은 놀라 번관(樊館)으로 달려왔다.
목이 끊어져 있는 번어기(樊於期)의 몸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아아, 어지러운 시대여!“
친히 번어기의 목을 오동나무 상자 안에 넣어 형가에게 내밀었다.
목함 위에는 두루마리 하나가 얹혀져 있었다.
형가(荊軻)는 아무 말없이 세자 단(丹)이 내민 목함을 받았다.
위에 놓인 두루마리를 펼쳤다.
독항(督亢)의 지도였다.
형가(荊軻)는 세자 단을 쳐다보았다.
세자 단(丹)도 형가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 자, 이제 떠나시오.
그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루마리 지도 안에는 또 하나의 작은 물건이 들어 있었다.
비수(匕首)였다.
형가(荊軻)가 물었다.
"이것이 바로 서부인(徐夫人)의 비수입니까?"
- 서부인의 비수.
칼 이름이다.
서부인(徐夫人)은 조나라 사람으로 단도(短刀) 제작의 명인으로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부인(夫人)은 공인(工人)의 오자(誤字)라는 설도 있다.
세자 단(丹)은 진작부터 서부인에게 비수의 제작을 의뢰했다.
물론 진왕 정(政)을 살해하러 갈 형가에게 내주기 위해서였다.
황금 1백 근을 서부인에게 사례금으로 주었고, 그 칼로 독을 묻혀 사형수를 상대로 실험까지 해보았다.
칼끝이 닿자 핏방울이 비쳤고, 피가 채 흘러내리기 전에 그 사형수는 죽었다.
이로써 모든 준비는 완료되었다.
이제 그 비수(匕首)를 독항의 지도 안에 숨겨 진왕 정(政) 앞으로 가 번어기의 목과 지도를 바치는 척하다가 찔러 죽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