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 루카 조르다노의 ‘세네카의 죽음’
폭군 네로에 맞선 거장 철학자, 죽음 앞에서도 당당
- 루카 조르다노, ‘세네카의 죽음’(1684년), 캔버스에 유화(155×188cm), 루브르박물관, 파리.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의 한 장면’이라는 주제로 교회 역사에서 의미 있는 순간이 되었던 한 장면에 머물러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한다. 가능한 연대기 순으로 하겠지만 때로는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맞추어 과거의 그 순간을 꺼내 보기도 하겠다. 역사는 흐르는 것이라, 흘러온 만큼 또 흘러갈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발전을 향해 무한 질주하던 현 인류에게 ‘공동의 집’ 지구가 힘들다고, 그만 달리라고 제동을 건 사건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불편해진 여러 가지 상황이 그대로 생활이 될 공산이 커지고 있다. 날마다 늘어나는 코로나19에 감염된 확진자와 사망자에 대한 정보를 이름이 아닌, 숫자로 확인하는 일상에서 생사의 경계에 선 우리가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 이정표가 되어주는 그림이 있어 소개한다. 이것은 또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의 정점에서 일어난 한 사건에 주목하고 있어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하겠다.
화가 루카 조르다노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된 루카 조르다노(Luca Giordano, 1634~1705)의 ‘세네카의 죽음’이다. 철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초연함과 그의 주변에서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제자들의 움직임이 큰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그림을 그린 루카 조르다노는 바로크 시대 나폴리학파의 대표 화가다. 알려진바, 르네상스의 중심지는 피렌체이고 포스트-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로마라면 1600년대 바로크의 중심지는 나폴리였다. 카라바조, 존 로렌조 베르니니는 당시 나폴리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는 “Luca Fapresto”(루카 파프레스토), 즉 ‘루카는 빨리하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아무리 큰 제단화라도 하루 이틀을 넘기지 않을 만큼 신속하게 잘 그렸다고 한다. 라파엘로, 티치아노, 베로네세,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는 물론 카라바조까지 훌륭한 선배들의 영향을 여러모로 받아 화사하면서도 묵직한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었다. 주제도 성경과 신화, 역사적인 사건 등 가리지 않고 화폭에 담았다.
그는 30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고 나폴리, 로마, 피렌체, 마드리드, 파리 등 곳곳에 있다. 루브르에만도 ‘세네카의 죽음’ 외에 ‘동정녀의 결혼식’(1688), ‘목동들의 경배’(1688),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 등 9점이 있다.
스토아학파의 철인(哲人)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B.C.4~A.D.65)는 키케로(Cicero, B.C.106~43)와 함께 로마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1세기 중엽 대표적인 스토아학파 철인(哲人)으로 폭군 네로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는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로마의 정계로 진출하여 제국의 말단 공무원부터 원로원의 의원이 될 때까지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 과정에서 다섯 명의 황제를 경험하였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그리고 네로다. 그는 연설을 잘했고, 훌륭한 연설로 사람을 움직이는 자를 황제들은 싫어했다. 폭군 칼리굴라는 그의 목숨을 노렸고, 황제가 먼저 살해당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조카딸과 간통했다는 혐의로 그를 코르시카로 추방했다. 하지만 그는 거칠고 힘든 환경 속에서 자연과학과 철학에 더욱 정진했다.
8년 만에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에 의해 복권되어, 54년, 네로가 16살에 황제가 되자, 그는 황제의 스승이며 로마의 최고 지성인으로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부상하였다. 세네카가 네로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던 때, 로마 제국은 근래 없는 평화의 시기를 맞았다. 그 시기에 국가 재정과 법률 개혁을 단행했고, 문화적으로도 라틴 문학이 꽃을 피웠다. 네로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선정을 베풀어 주인이 노예들을 함부로 다루지 못하게 했다. 그 시기 네로도 시와 음악에 자질을 보이던 밝은 소년이었다. 나름대로 시도 잘 썼다고 한다. 훗날 로마를 불태운 것이 시상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런 네로를 변하게 한 것은 어머니가 정치적인 맞수가 되면서부터였다. 59년, 21살이 된 네로는 존속살해라는 비극을 시작으로 폭군이 되어갔다. 스승의 충고는 거슬렸다. 세네카는 ‘관용’이 로마 황제의 자질이라는 편지를 남기고 정계를 떠났다. 하지만 네로의 광기(狂氣)는 64년의 로마 방화와 그리스도인 박해로 이어졌고, 세네카는 황제 암살 모의에 동조했다. 네로 역시 가까이 있는 세네카보다 멀리 있는 세네카가 더 두려웠던 참이다. 연설의 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 암살 모의가 발각되고, 세네카는 황제로부터 자결 명령을 받아야 했다. 그때 세네카의 나이 69세였다.
세네카는 철학에서 흔한 주제인 존재론이나 인식론 등에는 관심이 없었다. 스토아 철학은 금욕적인 삶과 이성을 발휘하여 자연과 세계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특징이다. 더욱이 살아온 시대가 힘겨웠던 만큼 세네카는 주어져 버린 인간의 삶과 도덕에 천착했다. “인생살이처럼 어려운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많은 실용서를 내놓았다. 「서간집」, 「대화」 등의 저서와 「분노에 대하여」, 「행복한 삶에 대하여」,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등의 논술서 등이다. 그의 저서들은 훗날 단테와 ‘제2의 세네카’로 불린 몽테뉴를 비롯하여 루소, 흄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을 미쳤다. 화를 다스리는 법과 덕에 관한 것, 죽음에 관한 내용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종교관과 도덕철학은 네로 이후 계속되는 제국의 박해 속에서 많은 호교론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최후의 순간에도 시대의 진리 전해
이제 작품으로 들어가 보자. 빛은 현자를 비추고 있다. 그가 중심이다. 그는 광풍이 몰아치는 시대에 치열하게 살았고 그 속에서 사색했다. 그렇기에 평소 가르치던 대로 “죽음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원로원으로부터 ‘로마의 적’이라는 선언을 받고 비 오는 새벽에 신하의 집으로 도망갔다가 죽은, 전혀 황제답지 못했던 네로의 죽음과는 대조적이다. 배경은 시대를 반영하듯 사방이 어둡다. 어둠 속에서 제자들은 서둘러 현자에게 집중하고 있다. 스승의 허름한 몸은 영적인 힘으로 지탱되고, 그의 가르침은 계속된다. 그래서 이 작품의 부제가 ‘철인의 작별’이다.
배경 속 기둥은 스토아철학의 흔들리지 않는 자세를 의미한다. 왼쪽 끝, 붉은 옷을 입고 공책에 뭔가 열심히 받아 적고 있는 사람 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황제의 자결 명령서를 들고 온 사람으로 보인다. 그의 담담한 표정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대조를 이룬다.
노쇠한 철인의 죽음 앞에서도 시대의 어둠을 걷어내려는 듯 젊은 학도들의 열기가 발목 동맥을 자르고 밴드를 쥔 의사의 손에 들어간 힘과 복받치는 슬픔을 압도한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 휴버트 로베르의 ‘서기 64년 7월 18일 로마 화재’
로마 대화재, 그리스도인 박해의 불길로 번지다
- 휴버트 로베르, ‘서기 64년 7월 18일 로마 화재’, 1771년경, 템페라에 유화, 앙드레 말로 현대 박물관, 르아브로, 프랑스.
서기 64년 7월 18일과 19일 밤에 일어난 로마의 화재는 역사에도 ‘대화재(Great Fire of Rome)’로 기록되어 있다. 엄청난 재해였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7월 로마의 기후는 고온에 건조한 날씨다. 도시를 송두리째 집어삼키기에 좋은 조건이다.
불은 대전차경기장 옆 시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대전차경기장으로 옮겨붙었는데, 관중석이 목조건물이었기 때문이다. 불은 대전차경기장을 순식간에 전소시키고, 첼리오 언덕과 팔라티나 언덕의 집들을 모두 태웠다. 로마인들의 아파트 인술라(Insula)는 아래층을 제외한 위층은 모두 목조건물이어서 화재에 취약했다.
불길은 로마 공회당, 테베레 강과 로마 공회당 사이에 있던 벨라브로, 현재 ‘진실의 입’ 옆에 있던 동물시장 보아리오로 이어졌다. 수부라(Subura)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수부라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공회당 위쪽 오피오 언덕과 비미날레 언덕 사이, 하층민들이 밀집하여 살던 구역이다. 이곳의 건물은 대부분 인술라였다.
화재로 인한 피해는 100만 명이 조금 넘는 로마 시민들을 공황에 빠트렸고, 20만 명 이상을 하루아침에 노숙자로 전락시켰다. 수많은 공공건물과 신전들은 파괴되었고, 4000여 개의 인술라와 132여 채의 도무스가 사라졌다. 로마 시내 14개 구역 중 10개 구역에서 일어난 대형 참사였다. 화재는 9일간 이어졌다.
화재에 관한 소문
화재의 원인에 대한 소문은 첫날부터 끊이지 않고 나왔다. 가장 유력한 것이 네로 황제의 방화설이었다. 사실 화재가 있기 전부터 네로는 로마를 ‘네로폴리스’, 즉 ‘네로의 도시’로 새로 건설하고 싶어 했다.
누군가는 네로가 불타는 로마를 보며, 리라를 켜고 ‘트로이의 멸망’을 노래했다고도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때 네로는 로마가 아닌 안치오(Anzio)의 별장에 있었다고도 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팔라티노 언덕에 지은 자신의 궁 트란시토리움마저 전소된 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의 방화설이 가장 설득력을 얻는 것은 역사가 타키투스(55/58~ 117/120)가 「연대기(Annales)」에서 관련 내용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불은 팔라티노와 첼리오 언덕을 가르는 대전차경기장에서 시작되었다. 가연성 높은 물건이 많은 상점에서 발생하여, 즉시 거센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번졌다. 건물 벽이나 신전의 담이나 그 외 불길을 막을 만한 어떤 것도 없었고, 대전차경기장은 송두리째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는 또 로마에서 회자되던 네로에 관한 소문도 전했다. “그가 불타는 도시를 보며, 자신의 궁 꼭대기에 올라 트로이의 멸망을 노래했다”는 것이다. 잿더미가 된 도시는 처참했고, 로마의 종말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의 박해와 ‘도무스 아우레아’
제국 시대, 로마에는 화재가 빈번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이미 비질레(vigile)라는 소방대를 구성하여 취약한 지역의 소방을 맡긴 바 있다. 불이 난 곳에 무거운 물체로 덮는 훈련도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어떤 구실도 64년 대참사의 제공자로 황제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의혹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이에 집권 세력은 “사악한 미신”, “로마 제국에 의해 처형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유다교의 이단자들”이라고 공격을 받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을 희생 제물로 삼기로 한 것이다. 사회 혼란의 해결책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고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그에 합당한 죄를 묻기로 했다. 그리스도인들을 겨냥한 박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화재로 허허벌판이 된 오피오 언덕에서 팔라티노 언덕까지 방대한 그곳에 네로는 자신의 궁전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 황금의 집)를 건설했다. 이것이 원래 꿈이었다면, 기존의 건물을 완전히 없애고 새로운 궁전 혹은 도시를 건설하기에 방화만큼 좋은 수단이 없었을 것이다. 네로가 기획한 자신의 새로운 궁전에는 거대한 인공호수도 있었다. 지금의 콜로세움 자리다.
로베르의 ‘서기 64년 7월 18일 로마 화재’
소개하려는 그림은 제목이 매우 구체적이다. ‘서기 64년 7월 18일 로마 화재(The Fire of Rome, 18 July 64 AD)’라는 작품으로, 프랑스 파리 출신의 화가 휴버트 로베르(1733~1808)가 1771년경에 그렸다. 현재 이 작품은 프랑스 노르망디의 관문, 르아브르에 있는 ‘무마 아브르’로 알려진 앙드레 말로 현대 박물관에 있다.
로베르는 풍경 화가로 이름난 인물이다. 특히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21세에 로마에 와서 11년간(1754~1765) 활동하며 당시 이탈리아의 유명한 판화가 피라네시(1720~1778)의 친구며 동료로 지냈다. 그는 로마의 유적지를 매우 이상적이고 낭만적으로 묘사를 잘했기 때문에 ‘유적의 로베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고대 로마의 웅장한 건축물과는 대조적으로 인물들을 매우 작게 넣음으로써 역사의 유구함과 인간의 유한함을 탁월하게 표현한 작가였다. 그는 로마의 유적지를 로마에서만 찾지 않았다. 프랑스 남부지방에서도 찾아 주변의 풍경과 함께 화폭에 담았다.
이 작품, ‘서기 64년 7월 18일 로마 화재’는 주제는 로마 제국이라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에 화가의 미학적 감각이 더해져 64년 여름의 로마 화재를 극적이면서도 낭만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파리의 한 살롱에서 발표되었을 때, 디드로(1713~1784)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전체 구성을 아우르는 배경의 뜨거운 불길은 백라이트 효과를 주면서 역사의 사건을 넘어 그 이상의 뭔가를 묘사하려는 것 같다. 제국 시대의 건축을 대표하는 신전과 아치의 위용이 불이라는 자연의 힘과 강한 대립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건물은 거대한 틀이 되고 사람은 그 안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마치 액자 속에 갇힌 존재의 나약함을 보는 것 같다.
그림이 더욱 극적인 것은 화재라는 역사적인 주제뿐 아니라, 등장하는 인물이 사회에서 가장 약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과 아이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앞에 물이 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어떠한 행동도 구체적으로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도망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을 향해 중앙의 아치 위에 우뚝 선 조각 신상(神像)이 내려다보고 있다. 자연과 역사 속에서 인간의 미약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작품을 통해 통찰할 수 있는 것은 화재로 인해 희생된 약자들과 방화범으로 몰려 희생된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역사적 맥락에 있다는 사실이다. 로마를 태운 불길과 그리스도인들을 태우게 될 박해의 불길은 모두 네로의 치세가 만들어낸 인재(人災)였기 때문이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콘스탄티누스의 꿈’
이교도 어둠 걷어낼 천사의 빛
-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콘스탄티누스의 꿈’, 바치 경당,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내, 아레초.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그리스도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황제를 꼽으라면, 네로와 콘스탄티누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네로는 박해로 그리스도교의 수난과 동시에 내적인 성장을 촉진하는 시발점이 되었다면, 콘스탄티누스는 신앙의 자유와 교황의 세속적인 권한이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소개하는 작품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16/1417~1492)의 프레스코화 ‘콘스탄티누스의 꿈’이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아레초 시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내 바치 경당(Capella Bacci)에 그린 교리교육용 연작 벽화 중 하나다.
작품의 내용은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와 전투를 앞둔 날 밤으로 설정된다. 역사 비평이 아무리 이 꿈 이야기가 허구라고 해도, 정치는 그것을 기정사실로 했고, 화가들은 계속해서 이 주제의 그림을 그렸다. 그래야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고, 그리스도교는 신앙의 자유와 함께 서방세계에서 ‘하느님의 뜻’이라는 명분을 얻어 뿌리를 내리게 되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의 전투는 312년 10월 28일에 있었다. 이야기는 좀 더 앞에서부터 시작된다. 284년,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Valerius Diocletianus)는 방대한 제국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제국을 둘로 나누어 자기는 동쪽에, 서쪽에는 막시미아누스(Marcus Aurelius Valerius Maximianus)를 세워 통치하도록 하는 이른바 ‘이분통치’를 시작했다. 이것은 후에 ‘사분통치’로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교는 계속해서 확산되었고, 제국의 황실에까지 들어갔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내와 딸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지만 황제는 여전히 그리스도교에 냉소적이었고, 심지어 박해까지 했다.
305년, 로마 제국을 공동 통치하던 두 황제가 퇴위하고, 각자 부제(caesar)로 옹립했던 갈레리우스(Galerius Maximianus)와 콘스탄티우스(Flavius Valerius Constantius)가 뒤를 이었다. 이 콘스탄티우스가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다.
콘스탄티누스(Flavius Valerius Constan tinus)는 군인이었던 아버지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와 어머니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293년 부제의 지위에 올랐을 때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라는 칭호를 얻고, 막시미아누스 황제 밑에서 일하기 위해 서로마로 갔다. 거기서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의붓딸 테오도라와 결혼하기 위해 헬레나와 이혼했고, 어린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 제국의 니코메디아(오늘날의 이즈미트)로 보내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정에서 자랐다.306년 서방의 정제가 된 지 얼마 안 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갑자기 죽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가 죽기 1년 전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황궁에서 나와 믿음직한 장수로 갈리아, 잉글랜드를 평정하고 있었다. 그 사이, 콘스탄티누스도 막시미아누스의 딸 파우스타와 결혼했다. 그러니까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 부자(父子)에게 딸을 하나씩 준 공동의 장인이 된 셈이다.
콘스탄티누스가 계속해서 북방 지역 평정에 전념하고 있을 때 로마에서는 콘스탄티우스 사망 이후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아버지의 도움으로 세베루스를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했다. 막센티우스는 아들보다 사위를 더 챙긴다며 아버지에게 불만을 드러냈고, 막시미아누스 역시 권력에 대한 향수에 젖어 결국 부자(父子)는 서로를 배신했다. 아들에게 버림받은 막시미아누스는 갈리아로 와서 콘스탄티누스와 합류했지만, 결국 사위마저 배신하고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밀비오 전투와 밀라노 칙령
로마 황제가 된 막센티우스는 폭군으로 시민들의 원성을 샀고, 로마는 제국의 패권을 의미하는 장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가 결전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로마 북쪽 삭사 루브라로 진격했고, 막센티우스는 안방에서 10만 명이 넘는 병사를 거느리고 콘스탄티누스를 맞았다. 수적으로 열세지만 사기가 충만했던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막센티우스를 밀비오 다리까지 몰아붙였다. 좁은 다리는 수적으로 많은 병사가 퇴각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치고 들어오는 적에 밀려 말과 병사들이 뒤엉켜 좁은 다리는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고, 그 와중에 막센티우스도 테베레 강에 빠져 죽었다.
열악한 조건에서 콘스탄티누스 군대의 사기가 어떻게 북돋우게 되었느냐에서부터 허구가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전투를 앞두고 콘스탄티누스가 꿈을 꾸었는데, 천사가 “In hoc signo vinces”(이 표시로 승리하리라)라고 적힌 깃발과 함께 십자가를 들고 오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이다.
전투는 예상대로 콘스탄티누스가 승리했고, 분할통치 시대의 막을 내리고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313년에 밀라노에서 ‘종교 관용령’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였다. 당시 로마는 다신교 사회였기 때문에 유일신교였던 그리스도교와 유다교는 소수 종교로서 법적으로 금지된 종교였다. 「밀라노 칙령」은 이들에 대한 종교 자유의 선언이자, 그리스도교의 박해가 끝난 것을 의미했다. 또한, 서방 세계에서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는 중대한 시발점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꿈
이제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작품은 1452~ 1466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그린 ‘거룩한 십자가 전설’ 연작 중 하나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찾아오는 장면’, ‘솔로몬을 방문한 사바의 여왕’, ‘채찍질 당하는 그리스도’, ‘주님 탄생 예고’(성모영보) 등이 있다. 이 시리즈는 작가의 최고 작품 중 하나이자, 초기 르네상스의 귀중한 자료기도 하다. ‘콘스탄티누스의 꿈’은 서양 미술사 최초로 밤 풍경을 그린 작품이자, 카라바조 이전, 밤 풍경을 가장 설득력 있게 조명한 최고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회화에 수학과 과학을 도입하여 균형 잡힌 구성, 계산을 통한 원근법을 구사한 인물이기도 하다. 동시에 단순한 형태와 부드러운 색채로 종교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 작품은 플랑드르 화풍이 가미된, 그러니까 바치 경당의 시리즈 후반부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전의 작품과 확연히 다른, ‘빛’에 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빛의 변화에 따라 색을 잘 사용하여 밤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 속 장면은 열린 막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배경이 없었다면 막사가 아니라 어떤 무대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멀리 하늘이 밝아오는 걸로 봐서 새벽, 빛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보인다. 막사의 붉은 지붕과 황금색 커튼이 황제의 막사라는 것을 암시한다. 막사 앞에는 두 병사가 양쪽에 서서 잠자는 황제를 지키고 있다. 이들은 눈을 크게 뜨고, 한 사람은 황제를 보고, 다른 한 사람은 관객을 보고 있다. 황제의 몸종은 침대 발치에 기대어 관객을 보고 있다.
몸종과 황제의 연관성은 침대 시트와 담요의 흰색과 붉은색이 몸종의 옷과 신발과 같은 색이다. 여기서 몸종의 역할은 관객의 시선을 끄는 것으로 해석된다. 천사는 왼쪽 위, 관객 쪽에서 막사로 향하고 있다. 한쪽 날개가 반사되어 크게 보이지만 손에 든 하얀 십자가는 매우 작다. 손가락은 잠든 황제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빛’이다. 작은 십자가에서 시작된 빛이 병사들의 갑옷과 모자를 비추고 잠든 황제를 향한다. 병사들과 배경은 어둠 속에서도 깨어 있다. 화가에게 이 빛은 ‘신비’다. 제국 시대 이교도의 ‘어둠’에서 그리스도교의 ‘빛’으로 이동되는 것처럼 말이다. 천사의 등장은 그래서 더욱 극적이고, 본질적으로 ‘빛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 줄리오 로마노의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교황, 로마의 실질적 통치권을 황제로부터 받다
- 줄리오 로마노,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일부, 1520~1524년, 프레스코, 바티칸박물관.
312년 로마의 밀비오 다리에서 막센티우스를 꺾고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316년에 발칸반도를 탈환하고, 324년에는 동로마의 리키니우스를 제패하여 동서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자기가 나고 자란 동로마의 비잔티움(Visantium)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지금의 이스탄불)로 개명하고, 제국의 수도로 지정했다. 이것은 로마를 제국의 모든 영토에서 공동의 뿌리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1000년 넘게 건재함으로써 로마 문화를 르네상스로 연결하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312년 밀비오 다리 전투 승전 후, 이듬해인 313년에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에 종교 자유를 선언했다는 것은 지난 호에도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은 콘스탄티누스가 이전의 황제들이 시행한 이분통치, 사분통치를 통해 경험한바, 비대해진 로마 제국의 중앙집권적인 통치의 한계를 절감한 데 따른 것으로, 더 이상의 박해보다는 오히려 제국의 통합에 활용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그 근거를 오늘 소개하는 작품의 내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방
작품은 현재 바티칸박물관 라파엘로의 네 개 방 중 마지막 방인 ‘콘스탄티누스의 방’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방에 그려진 4개의 벽화 중 하나다. 1520~1524년, 클레멘스 7세 교황 시절에 라파엘로 학파의 여러 예술가가 참여한 가운데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 1492?~1546)가 중심이 되어 완성했다.
줄리오 로마노의 원래 이름은 줄리오 피피 데 얀누찌(Giulio Pippi de' Jannuzzi)다. 훗날 만토바에서 활동할 때, 로마 출신의 작가라는 뜻으로 ‘로마노’라고 불렸다. 그는 로마에서 태어나 르네상스와 매너리즘 시대를 살며 건축, 회화, 태피스트리의 밑그림, 조각, 은세공 등 여러 분야에서 다재다능했다. 바사리는 그와의 개인적인 친분을 들며 라파엘로 학파의 중심인물로 소개했다. 그가 라파엘로와 일하기 시작한 것은 1515년 전후로, 1520년 라파엘로가 사망하자 공방에서 주문받은 일들을 모두 물려받아 펜니(Gian Francesco Penni)와 함께 마무리했다고 전했다. 당시 공방에서 주문받은 대표작이 바티칸박물관의 ‘콘스탄티누스의 방’이라고도 했다. 후에 곤자가 공국의 로마 사절로 왔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주선으로, 1524년 줄리오 로마노는 만토바로 가서 죽을 때까지 일했다. 대표작이 만토바에 있는 팔라조 델 테의 장식이다. 이 궁은 건축, 조각, 회화 등 복합미술의 첫 번째 매너리즘 예술의 사례가 되었다.콘스탄티누스의 기증과 의미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교회사에서도 팩트와 픽션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픽션이 많이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교회사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미술 작품이 많아 한 번은 짚고 넘어갈 문제라고 생각해 여기에 소개한다.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면서 로마를 비롯한 일부 서방의 영토를 실베스트로 1세 교황에게 기증했다. 기증문서에는 제국의 영토 중 다섯 지역(로마, 콘스탄티노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에서 교황은 최고 우위에 있고, 로마, 이탈리아, 그리고 서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의 휘장과 권한을 부여한다고 명시했다. 같은 문서에서 또 황제는 교황에게 라테란 궁도 증여한다고 했다. 이는 나병을 앓던 황제가 기적적으로 치유되자 그 보답으로 이루어졌다고 전하기도 했다. 서로마의 실권을 사실상 교황에게 준 것으로, 중세기 교황이 서방 세계에서 종교적인 권한만이 아니라 기증받은 영토를 다스려야 하는 이른바 속권(俗權)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후 콘스탄티누스가 보여준 정책들은 이 기증문서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많다. 집권 시기 전반에 걸쳐서, 그러니까 306~337년 직ㆍ간접적으로 그리스도교와 관련하여 많은 관용 정책을 폈다. 성직자들에게 과세를 면제하고, 제국의 최고 사형수들에게 행하던 십자가형을 폐지하며, 범죄자들에 대한 처벌 수단의 하나로 행하던 검투사 시합도 없앴다. 이교적인 희생 제사와 그 외 사람을 대상으로 행하던 부도덕한 이교 예식을 모두 금했다. 유언장을 수리할 권한을 교회에 부여했고, 주일 미사를 국법으로 정했다. 화려한 교회 건축물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로마의 라테라노 대성전, 성 베드로 대성전과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전, 예루살렘의 주님 무덤 성당, 베들레헴의 주님 탄생 기념 성당, 콘스탄티노풀의 사도들의 성당과 성 소피아 성당, 트리어의 황제궁전의 2층 성당 등이 그것이다.
나아가 입법으로 교회를 국가에 편입하고, 사법상의 전권을 교황에게 위임했다. 그는 고대 로마의 국가 사제단에 속한 최고 사제를 가리키던 라틴어 명칭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를 교황에게 부여했다.
동시에 그는 교회의 일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 소집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리스도교로 방대한 로마제국을 통합하려고 했는데, 그리스도교 안에서 분열을 야기하는 이단적인 행위가 나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6월 19일 니케아(지금의 터키 이즈니크)에 있는 황제의 궁에서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시작되어 8월 25일 폐회될 때까지 약 두 달간 계속되었고, 318여 명의 주교가 참석했다. 공의회 결과, 황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 아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추방했다. 그로 인해 분열된 교회를 통일하고, 로마 제국의 안정을 꾀했다. 그는 교회와 국가의 유대 관계를 공고히 하는 한편 교회의 일에 세속의 지원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그 시발점이 된 셈이다. 중세기 교회는 서방에서 영토 문제에 관한 권리를 주장하고 보편적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기증문서를 활용했다. 기증문서는 1053년 성 레오 9세 교황이 찾아서 재차 소개하기도 했다. 1400년대 말,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은 이제 막 발견한 신대륙의 지배권을 두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논쟁에 자신의 개입을 정당화하는데도 이 문서를 인용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서방 세계 전체를 일컫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편, 기증문서에 대한 비판은 이미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신곡」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아, 콘스탄티누스여, 그대의 개종이 아니라 처음 부유해진 교황이 그대로부터 받은 봉물이 얼마나 큰 악의 어미가 되었던가!”(지옥편, 제19곡 115-117절)
이것은 교황에게 토지와 권력을 부여한 콘스탄티누스를 향한 명백한 독설이다. 이런 기조는 1440년 인문주의 학자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7~1457)에 의해 더욱 거세어졌다. 그는 이 문서가 위조라고까지 했다. 눈에 띄는 연대기 상의 오류와 4세기 이후에 나온 라틴어 사투리에 섞인 많은 야만적인 표현들을 사례로 들었다. 게다가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것은 이 문서가 허위라는 것을 입증한다고도 했다. 로렌조 발라의 논문은 1517년 종교개혁자들이 다시 들고 나왔다.
로렌조 발라의 주장이 교회 안팎을 흔들던 바로 그때, 레오 10세 교황은 라파엘로에게 이 방의 벽화를 주문한 것이다. 알다시피, 레오 10세 데 메디치는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위한 대사 규정으로 종교 개혁의 불씨를 던진 교황이기도 하다.
작품 속으로
작품의 배경은 콘스탄티누스가 지은 옛 성 베드로 대성전을 연상케 하는 건물이다. 원근법이 들어간 기둥들 안쪽에는 반원형의 모자이크 안에 ‘만유의 구세주’가 묘사되어 있다. 그 아래는 성 베드로의 무덤인 듯 제단과 네 개의 나선형 기둥 장식이 있다. 교황은 사도좌에 앉아서 황제로부터 도금한 로마 여신상을 받고 있다. 신상은 로마에 대한 최고 통치권을 상징한다.
바사리는 그림 속에서 여러 인물의 초상화를 언급했는데, 오른쪽에서 두 번째 기둥 밑에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이 이 그림의 총책을 맡았던 줄리오 로마노라고 했다. 기둥들 맨 앞의 양쪽 두 개에는 글자가 적혀 있다. 왼쪽에 “그리스도를 고백함이 자유이고 합법이다”, 오른쪽에 “콘스탄티누스의 보호 아래 있는 교회”라고 적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