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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회
출 25: 21
출애굽기 25 : 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오늘은 우리교단의 교회들 전체가 기념하는 "성결교회주일"입니다.
성결교회는 외세의 침략 아래서 이 나라의 국운이 풍전등화와도 같던 1907년, 뜨거운 심령으로 복음증거 사업에 헌신했던 정빈과 김상준의 두 청년에 의하여 시작되어진 교회입니다.
시작 초기에는 "동양선교회"라는 선교회의 재정적 지원과 지도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적으로 우리 스스로의 재정과 지도력에 의하여 교회가 발전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교단의 국내외 교회들은 3천2백여 교회, 교인 수는 6십3만 여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1. 성막의 구조
뜻깊은 오늘을 맞이하여, 과거 구약시대의 "성막", 그 안의 성물들 중에서 특별히 "법궤"에 대해 살펴보며 그 의의를 살리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셔서, 무사히 시내산 밑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그의 종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의 "법"인 "율법"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계시대로 "성막"을 제조하여 세웠습니다.
"성막"은 지극히 높고도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기 위한 건축물이었습니다.
그 건축물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여행하는 중이었으므로, 이동이 용이하도록 제작되어진 조립식 건축물이었습니다.
동쪽으로 나 있는 출입문을 들어서면 성막뜰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번제단"이 있었고, 그 번제단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들을 불살라 바쳤습니다.
조금 더 전진하면, "물두멍"이 놓여져 있었고, 그것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전에 더러워진 수족을 깨끗이 씻는 성물이었습니다.
그 앞에는 지붕을 덮은 건축물인 "성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성소의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면, 그 곳에는 내부를 환하게 비춰주는 "금등대"와 하나님께 바치는 떡을 진열해 놓은 "진설병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쪽으로 "금향단"이 놓여져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분향하기 위한 성물이었습니다.
그 안쪽으로는 다시 휘장으로 구분되어진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그 지성소는 가로, 세로, 높이가 다 같은 정사각형의 장소였습니다.
그 곳에는 단 하나의 성물이 놓여져 있었는데, 그것이 "법궤"입니다.
2. 법궤의 형태와 의미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그 법궤를 제작하라는 계시의 말씀으로, 그 성물의 구조와 내용물을 알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것의 재료는 "조각목(애굽 아카시아)"이었습니다.
이 나무는 옹이가 많고 가늘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귀중한 목재로 여겨지지를 않았으나, 단단하고 내구력이 좋은 장점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천하게 취급되어졌던 나무가 성막의 성물을 만들기 위한 귀한 재료가 된 것입니다.
이 법궤의 크기는 가로의 길이가 1m 보다 조금 더 길고, 세로 약67cm, 높이 약67cm가 되는 직육면체의 아담한 상자였습니다.
그들은 그 상자의 안팎을 순금으로 쌌습니다.
그 위쪽 가장자리로는 금테를 둘렀습니다.
그 네 모서리 부분에는 금 고리 넷을 달았고 채를 그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사람들이 메어서 이동할 수 있게 하였는데, 그 채도 조각목으로 만들어 금으로 싼 것입니다.
그 채는 이동하지 않을 때에도 궤의 고리에 꿴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 법궤 안에는 "증거판"을 넣어 두었고, 히브리서(9:4)의 말씀에 의하면, 그 외에도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궤 위에는 역시 순금으로 뚜껑을 만들어 덮었는데 그것을 "속죄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속죄소의 두 끝에는 금으로 만든 그룹 둘을 세웠는데, 그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었고 그 얼굴들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였습니다.
법궤가 놓여져 있는 지성소에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는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그 때에도 그는 제물의 피를 가지고야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제물의 피를 가지고 속죄소 앞과 위에 뿌려 그 자신과 백성들의 죄가 가리워 지게 하였습니다.
이 법궤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그의 인격을 알게 해 주고 있습니다.
법궤를 나무로 만들어 그 안팎을 금으로 싼 것은 그리스도의 양면성을 알게 해 주는 사실로서, 그의 인성과 신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인간이 되심으로 미천한 우리와 고락을 같이 하셨지만, 한편 그는 하나님의 아드님으로서의 신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후 광야를 여행할 때에, 그곳에서는 양식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셨는데, 그것이 "만나" 기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진을 치고 있는 주위에 아침이 되자 이슬이 덮여있었고 그 이슬이 마르자 땅위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만나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굽거나 삶아서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농사지어서 얻은 것이 아닌 하늘의 양식으로서, 그들이 광야를 여행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의 사십 년 동안 그들을 살려준 양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후손들이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만나 조금을 금항아리에 담아 보관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만나는 믿는 자들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영적 양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요6:).
구약 시대에, 신비한 음식인 만나를 먹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수명이 다한 다음에는 죽어야 하였지만,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 가운데 참여한 사람들은 부활의 영광 가운데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궤 안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있었습니다.
출애굽 하여 광야를 여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그들의 지도자로 세워주신 모세와 아론에 대하여 거역하며 그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휘관들에게 각각 지팡이를 가져오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12개의 지팡이를 가져왔는데, 그 중 하나가 대제사장 아론의 지팡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팡이들을 모두 성막 안 법궤 앞에 두게 하셨습니다.
다음날, 성막 안으로 들어가 보니, 12개의 지팡이들 중에서 아론의 지팡이에는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 살구 열매가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로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누구를 선택하셨는가? 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그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표상입니다.
구약시대 인간 대제사장은 그 자신도 죄인 중 한사람으로서 불완전하며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신약시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완전한 의인으로서 우리의 죄를 속해 주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 궤 속에는 두 돌판(율법판)이 있었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하여 시내산 밑에 도달한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모세를 그에게로 올라오게 하셔서 그에게 율법을 계시하여 주신 후, 두 증거판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산밑에 진치고 있던 백성은 산 위로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먹고 마시며 뛰놀고 있었습니다.
산밑으로 내려오다 그러한 광경을 본 모세는 대노하여 가지고 있던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내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백성을 책망하여 돌이키게 한 후, 하나님의 지시대로 돌판 둘을 다듬어 만들어 가지고 다시 산 위로 올라갔더니 하나님께서 처음 판에 쓰셨던 말씀을 다시 그 판들에 써주셨습니다.
그 판들을 법궤 안에 놓아 둔 것입니다.
깨어져 버린 첫 번째 돌판에서 알 수 있듯이, 타락한 인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한 채 계속적으로 그의 법을 범하는 죄인들에 불과합니다.
인생들 중에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나설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으며, 자기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자도 전혀 없습니다.
법궤 안에 넣어진 두 번째 돌판은 계속적으로 범죄 하는 죄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변하지 아니하는 "언약(율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도덕과 법은 그들 대다수의 의견이나 상태에 의하여 그 기준이 수시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하신 하나님의 언약(율법)은 이 세상의 상황이나 조건에 의하여 변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돌판이 지성소 안의 법궤 안에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기준이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보호되어짐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돌판은 이 죄악 세상에 오셨으나 범죄하지 아니하시고 율법의 완성이 되신 그리스도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은 신약시대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서 완성되어진 것입니다.
그 궤 위에는 뚜껑(속죄소)를 만들어 덮었습니다.
정금으로 제작되어진 속죄소는 죄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나타냅니다.
그 속죄소의 양쪽 끝에는 정금으로 만든 그룹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날개를 펼쳐 속죄소를 드리웠습니다.
그들은 속죄소에 나타나 죄인 된 백성과 만나시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보호해 드리는 것을 상징해 주는 존재들입니다.
그 속죄소로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심판을 예고해 주는 율법을 덮으시고, 속죄의 자비를 베풀어주심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구약시대, 의롭지 못한 인간들이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 위하여, 대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가지고 와 속죄소 위에 뿌렸습니다.
그로서, 그들의 죄가 일시 가리워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제물로 바쳐 피를 뿌리심으로 우리의 죄가 영원히 가리워 지게 해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참된 속죄소가 되는 분이십니다.
과거 구약시대, 성막에 거하시며 법궤로서 그 자신의 임재를 알게 해 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이 교회에 거하시며 진리와 성령으로 우리와 만나고 계십니다.
우리모두 그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하심에 감격할 것이며, 이 성결의 지성소로 불러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가운데, 나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의 높으신 뜻을 받들어 드리는 그의 자녀들이 되도록 하십시다!
과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천한 죄인에 불과하였던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아 귀한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재료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를 위하여 살 수 없습니다!
나를 불러주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
25: 21-22
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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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가 창립 113주년을 맞이하는 기념주일입니다. 먼저 좋은 역사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교회를 세우고 이끄신 믿음의 선조들의 수고와 땀 그리고 우리의 정성이 이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연동교회의 성도가 된 것을 감사하고 성도의 의무를 잘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113’이란 숫자의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뒤져도 특별한 의미가 없는 숫자였습니다. 성경에도 숫자의 큰 의미는 없고, 찾다보니 딱 한 가지를 찾았습니다. 간첩신고는 ‘113’입니다. 그것도 요즘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간첩도 없다고 하고, 신고해도 잡지도 않고 해서 최근에는 ‘113’ 번호가 거는 사람이 없어 놀고 있을 것 같습니다.
간첩신고란 안보를 해치는 적을 신고하여 없이하는 일입니다. 국가의 정체성을 흔드는 원수를 멸하는 일입니다. 간첩을 신고하여 없이하는 일이 국민의 사명입니다. 국가의 근간을 든든히 하는 국민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정체성을 흔드는 것을 뿌리 채 뽑아 버리는 일입니다. 사탄의 손길을 발본색원해야 합니다.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들을 찾아 제거해야 합니다. 사회악, 부조리, 범죄, 사상과 사조 등 사회를 좀먹게 하는 것들을 뿌리부터 제거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특히 113주년을 교회인 우리교회가 이 일을 잘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수도원의 영성의 핵심은 수도사들이 영성적 훈련을 통하여 수도원의 영성을 교회에 흘려보내는 일을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맑은 물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교회로 말미암아 세상이 변화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이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때문에 지역이 맑아지고, 서울이 좋아지고, 한국에 희망이 있고, 세계가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성막을 세우실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25장 이하의 말씀은 성막을 세우신 뜻과 율례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라고 하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기 위한 것이 성막을 세우신 뜻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십니까? 교회에서 만나십니다.
둘째는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한 모든 일을 이르리라”고 하신 것으로 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올 때마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올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교회를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인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교회에 오신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많은 교회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 시대에 하나님이 만나시고, 시대에 필요한 말씀을 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를 113년 전에 연못골에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 번 새기고 교회의 사명을 잘 수행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26절에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부부에 대한 말씀이지만 교회에 적용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물과 말씀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물로 씻는다는 말은 한 번의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물로 씻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누구나 한번의 물로 씻음은 필요합니다. 교회에 올 때에 처음부터 말씀에 은혜를 받고 감동이 되어 온 사람은 없습니다.
한 번의 물세례가 필요하지만 계속되는 말씀의 세례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한 번 거듭남을 체험하고 나서 계속해서 깨끗하게 하시는 정결한 삶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하신 말씀처럼 목욕한 자라도 발을 씻어야 합니다.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됩니다. 두 번의 세례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계속되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한 번의 세례와 계속적인 성찬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합니다. 한 번의 구원과 계속적인 성결의 삶이 필요합니다. 한 번의 결단과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이 일을 잘 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일상생활에서의 성화를 맛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변화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각성으로 삶의 현상이 달라지게 보여야 합니다.
인도의 펀잡 지방에 주로 분포되어 있는 ‘시크’ 교도를 아시지요? 머리에 터번을 쓰고 칼을 차고 다닙니다. 얼마 전에는 비행기를 탈 때도 칼을 차고 다닐 수 있도록 인도해서 허용했습니다. ‘시크’의 총본부인 암리차르 사원에는 황금사원이란 사원이 있습니다. 영국 BBC 방송은 죽기 전에 꼭 가보아야 할 50곳 가운데 6위로 선정한 곳입니다. 이곳은 완전히 물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시크교도들을 ‘펀자비’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사원 안의 물 속에 들어가 줄을 잡고 몸을 담그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자신을 씻는 예식을 하는 것입니다. 사원에는 몸을 씻는 물도 따로 있습니다. 이 거룩한 물 속에서 나와 다시 물로 씻으면 이전에 물에 잠근 것이 무효가 될 것 같은데도 이들은 이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간지스강은 인도인들에게는 거룩한 강입니다. 이들은 이 물을 성수라고 생각합니다. 물에 몸을 잠금으로 자신이 거룩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최근에는 강이 심하게 오염되어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했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이곳을 거룩한 곳이라고 하는 이유는 부처님이 목욕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곳에서 무엇을 씻습니까? 인간의 번뇌를 씻습니다. 죄를 씻지 않으면 번뇌가 씻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보혈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는 일은 계속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성결의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이런 일을 하기 위하여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물로 씻음을 받았습니까? 구원 감격과 거듭남의 체험이 있습니까?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신 성화의 체험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를 통하여 죄를 씻음 받은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삶을 거룩하게 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성적 기능과 예언자적 기능입니다. 영성적 기능이란 구원의 기능입니다. 예언자적 기능이란 사회정화의 기능입니다. 교회가 사회와 믿지 않는 자를 구원하고 있습니까? 구원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살아서 그렇지는 않습니까? 전도의 능력도 상실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원의 감격과 체험을 가지고 사회를 구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영적전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7월 미국 뉴욕타임즈은 한국을 IT 강국에서 미신 강국으로 추락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에 무속신앙이 부활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재 서울과 인근도시에는 무속 사당이 300여개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무당이 80만 명이나 됩니다. 압구정동에 점쟁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 고객이 20대 청년들입니다. 옛날에는 점쟁이를 찾아갈 때 몰래 갔었는데 이제는 버젓이 갑니다. 무속인들이 수입이 일년에 1조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30%는 기독교인들이 갖다 주는 돈이라고 합니다. 이 나라가 귀신의 손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선거철이 되면 조상의 묘를 명당으로 이장하면 선거에 이길 수 있을지 문의하는 정치인들이 무속인들의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용하다는 무속인들은 예약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입니다. 첨단 IT 사회인 한국 사회에서 가장 바쁜 일상을 가지고 가장 호황을 누리는 직업이 무속인입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 이런 일이 미신이 아니라 전통 한국문화의 중요한 요소로 인정한다고 합니다. 이게 한국교회의 영적 수준입니다. 이게 한국교회의 현상입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가장 잘 생긴 얼짱, 몸짱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귀신 때문에 죽었습니다.
역대상 10:13-14에는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었더라”고 합니다.
귀신에게 물어보는 사울을 하나님은 죽이셨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고 귀신에게 물어보면 하나님은 여지없이 죽이십니다.
반면에 다윗을 보세요. 그는 하나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판단할 수 있는 일도 일일이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불레셋을 치러 올라갈까요?” “언제 치러갈까요?” “어디로 올라갈까요?” “어떻게 갈까요?” 그런데 하나님의 답을 보세요.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느냐?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던데”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귀찮게 할수록 좋아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물어보세요! 틀림없이 답하십니다. 여러분, 알아서 하세요! 틀림없이 죽습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구원하게 하는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구원받은 자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둘째, 티나 주름 잡힌 것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27절은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역할은 티나 주름을 없애는 일입니다. 거룩하게 하는 일, 흠이 없게 하는 일은 도덕적 삶을 살게 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도덕적 규범과 삶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찬송가 55장 4절을 보세요.
“우리들이 거듭나서 흠이 없게 하시고 주의 크신 구원받아 온전하게 합소서”.
흠이 없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램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추구해야 할 일입니다. 거듭나야 흠이 없게 되고, 온전하게 됩니다. 구원이란 영적 기능입니다. 흠이 없고 온전하게 하는 것은 도덕적 기능입니다. 영적 기능이 있어야 도덕적 기능이 따라옵니다.
제가 군대 생활할 때에 헌병이어서 다림질을 잘 했습니다. 헌병들이 잘 하는 것이 다림질과 구두 닦는 일입니다. 구두도 얼마나 잘 닦았는지 제게 군화 한번만 닦아달라고 줄을 섰습니다. 다림질도 아주 잘 했습니다. 군복 바지 말에 손을 벤다고 할 정도로 칼날 같이 선 바지를 세웠습니다. 다림질을 보세요. 결국은 물과 열로 날을 세웁니다. 티는 물로 닦고 주름 잡힌 것은 물을 살짝 뿌려서 열로 누르는 것입니다. 물과 불은 티나 주름을 없애는 도구입니다.
다리미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옛날 냄비 같은 다리미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숯불을 냄비 같은 다리미에 넣어서 다렸습니다. 조금 발전한 것이 숯불 다리미입니다. 그 때는 물을 입안에 잔뜩 넣어서 ‘푸우’라고 뿌려서 다리미로 다렸습니다. 그러다가 물이 나오지 않는 다리미가 나왔습니다.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 다리미로 다렸습니다. 그 다음에 증기가 나오는 다리미가 나왔습니다.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요즘 다리미 같은 다리미가 있었으면 제가 졸병 시절에 조금은 편했을 것입니다.
티는 물로 닦아야 합니다. 주름은 열로 눌러야 합니다. 티나 주름 잡힌 것을 없이하는 비결은 물과 불입니다. 기독교는 불의 종교이고, 물의 종교입니다. 불로 태우고, 물로 씻는 것이 그리스도의 역할이며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물과 불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새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도덕적 규범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두 번째 기능입니다.
기독교의 예언자적 기능이 이런 기능입니다. 기독교의 대 사회적 기능입니다. 사회를 판단하고, 비판하고, 경고하고, 개선하고, 지도하는 기능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첫 번째 기능과 더불어 두 번째 기능이 있어야 올바른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티와 주름을 보세요. 사회 전반에 티가 있습니다. 구겨지고 주름잡혀 바른 곳이 없습니다. 어디 하나 제대로 된 데가 없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어느 곳도 온전한 곳이 없습니다. 성한 데가 없습니다. 술집이 아무데나 어디에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사회적 규범이나 예의도 없습니다. 수없이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성도덕이 타락하고 있습니다. 웬 사기꾼이 그렇게 많은지 쑤시면 터지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사회가 온통 곪아 터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 가장 좋은 방법은 물과 불로 다림질해야 합니다. 물과 불로 다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서서히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정부나 기관에 대한 정책 감사가 아니라 후보에 대한 감사를 국회 각 위원회에서 합니다. 국민들이 볼 때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데 자기네들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정치적 티와 주름은 물로 닦고, 열로 주름을 다려서 구김을 펴야 합니다. 이 일은 교회가 해야 합니다. 영적 능력으로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
이번 12월의 대통령선거는 국민을 통합하고, 경제를 회생하고, 국가 정체성을 살리고, 교회와 대학 그리고 언론의 자유와 민주적 자율성을 보장하는 대통령이 되게 교회가 밀어줘야 합니다. 교회가 정치에 가담할 수밖에 없고, 대학이 정부에 대립각을 세우고, 언론이 정부와 투쟁하는 이런 일은 민주주의를 퇴보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은 세계화 시대에 국가의 발전을 위하여 다시는 없어야 합니다. 누굴 찍든지 우리 교인들은 빠짐없이 다 선거에 참여해야 합니다.
경제학자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일등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과 사회 자원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은 이미 과잉 상태라고 합니다. 남아도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회 자원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사회자원이란 신뢰와 협동과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회 자본이란 무형 자원인데 이것이 없이는 절대로 경제 대국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회 자원을 충족시켜줘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국가발전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사회 자원이란 결국 영적 자원입니다. 신뢰와 협동과 사랑이란 것이 영적 자원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사회 자원이란 교회만이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남은 것은 교회의 몫입니다.
교회가 사랑이 있고, 신뢰가 구축되고, 협동이 이루어져야 영적 자원, 사회 자원이 충족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사회발전, 국가발전에 앞장서서 기여해야 합니다. 국가와 괴리되고, 동떨어진 교회는 필요 없는 교회입니다. 영적자원은 결국 영적 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성경적 기초 위에서 기도하고, 말씀 보고, 묵상하는 신앙생활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지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게 샘물교회 청년들이 억류된 사건 이후에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합니다. 저는 분명히 그 때도 말씀드린 것처럼 방법에는 문제가 있었다고 봅니다. 선교 정책이란 지역적 특성에 따라 지혜롭게 탄력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뱀같이 슬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에 ‘방어적 선교’는 없습니다. 선교는 그 자체가 공격적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공격적으로 했습니까, 아니면 방어적으로 했습니까? 선교는 사탄을 죽이고, 그리스도가 살게 하는 일입니다. 악을 죽이고 선을 심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방어적으로 합니까? 기독교가 방어한다고 하는 것은 진리나 교리를 방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이것을 호교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옹호하고 변호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도덕적 결함이 없어야 하고, 선교가 무례하지 말아야 하고, 무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도 선교를 젊잖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무슬림이 이미 30만이 되었습니다. 이슬람 국가들은 절대로 기독교를 전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들은 엄청난 물량공세로 포교하고 있습니다. 모스크가 이곳저곳에 세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3천명의 한국말 잘 하는 무슬림 총각들이 와서 한국 여성과 결혼하는 정책적 포교를 하고 있습니다. 영국에는 이미 120만 명이 무슬림입니다. 뉴욕에만 70만 명의 무슬림이 있습니다. 2020년에는 한국을 이슬람 국가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고 합니다. 2080년에는 전 세계를 이슬람 세계로 만들겠다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얼마 후에는 종로거리에 히잡을 쓴 한국 여인을 쉽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방어적 선교로, 적당한 마음 자세로 살 때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영적, 도덕적으로 재무장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우선 자신의 티와 주름을 없애고, 교회가 사회의 티와 주름을 없애는 일에 앞장 서야 합니다.
결론
서울에 어느 유명한 캬바레가 있습니다. 조직폭력배들의 패싸움으로 언론에서도 떠들썩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 캬바레의 사장이 잡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엄청난 재산을 두고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들도 그 엄청난 재산을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가족들까지도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도 몰랐습니다. 어느 증권회사의 여직원이 이것을 알고 사장의 돈 2억원을 가로챘다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사장 명의의 은행 금고에서 열쇠 하나가 나왔습니다. 이 열쇠는 분명히 재산의 비밀을 알려줄 중요한 열쇠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열쇠가 어디 열쇠인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엄청난 재산을 주인에게 돌려줄 열쇠이지만 아직도 그 열쇠의 비밀을 풀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 자체가 천국으로 직행하는 곳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를 천국으로 가는 열쇠로 사용하십니다. 113주년을 맞이하는 우리교회가 구원하는 영적 능력과 바르게 하는 예언자적 능력을 갖춘 좋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천국 열쇠를 가진 교회가 되어 우리 교회의 성도와 모든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