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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시편 42:1~43:5)
* 본문요약
(※ 70인역과 라틴역은 시편 42편과 43편을 하나의 시로 편집하고 있습니다. 시편 42편에서 후렴구로 나오는 5절과 11 절이 시면 43:5에서도 반복되고, 두시의 분위기와 내용이 서로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 시를 함께 묶어서 정리를 하겠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얼굴 뵙기를 갈망합니다. 그는 이전에 하나님의 성전에서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했던 것을 추억하며 하나님을 앞에 나아가기를 갈망합니다. 원수의 압제와 대적자들의 비방으로 영혼이 낙심되고 불안에 싸여 있지만, 그를 도우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의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합니다.
시인은 자신을 불의한 자에게서 건져주시고, 주의 빛과 진리를 통해 주께서 계신 곳으로 자신을 인도해주시길 간구합니다. 주께서 자신을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시면 그는 큰 기쁨이신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수금으로 찬양할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자신의 영혼을 향해 왜 낙심하고 불안해하느냐고 책망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합니다.
찬 양 : 404장(새 304)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483장(새 539)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 본문해설
(고라 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1.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1~2절)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 마스길(표제) : 마스길은 ‘교훈시’ 라는 뜻입니다.
- 시냇물(1절) :
‘시냇물’에 해당하는 ‘아피케 마임’은 ‘물의 근원, 마르지 않고 흐르는 물’을 가리킵니다. 심한 가뭄에 모든 것이 다 마른 때에도 항상 흐르는 그런 샘물을 뜻합니다.
-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1절) :
연약한 사슴이 목이 말라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고통 받는 하나님의 백성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 찾기에 갈급하니이다(1절) :
찾기에 갈급하다는 것의 원어‘아락’은 조용히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헐떡거리는 소리를 내며 갈망하여 찾는 것을 뜻합니다.
- 생존하시는 하나님(2절) :
‘생존하시는 하나님’에 해당하는 ‘엘 카이’는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모든 생명체에 생명을 공급하시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2절) :
이것은 시인이 하나님의 성막(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쫓겨나서
먼 타국에서 떠돌아다니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2. 탄식 중에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기도함(3~8절)
3) 사람들이 종일 나더라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곤 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생각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하는가?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를 도와주시는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양하리로다.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깊은 바다가 깊은 바다를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나를 휩쓸고 지나가나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으니
(찬송으로 나를 채우시니), 내가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혹은, 낮에는 내가 여호와의 얼굴의 도우심을 기다리고 밤에는 그의 인자하심을
기다리나니, 나의 생명의 하나님을 향한 나의 기도를 노래로 읊으리로다. : 궁켈 번역)
-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3절) :
날마다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슬픔이 이 시인의 삶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
- 내가 전헤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4절) :
이것은 시인이 과거에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종교적 지도자의 위치에서 활동했던 것을 추억하며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에 크게 상심(傷心)하고 있습니다.
- 주의 폭포 소리, 주의 파도와 물결(7절) :
주의 폭포와 주의 파도는 시인이 받은 하나님의 진노를 비유한 것입니다. 시인이 지금 하나님의 진노 속에 있는 것 같은 낙심과 불안감에 싸여 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3. 절망 중에 하나님을 노래하며 찬양함(42:9~43:5)
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슬픈 나날을 보내야만 하나이까)?”하리로다.
10)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하도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하는가?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를 도와주시는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양하리로다.
43편
1)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거짓을 일삼는 저 악한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2)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내가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슬픔에 잠겨 있어야만 하나이까)?
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주셔서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찬양하리이다.
5)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하는가?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양하리로다.
* 묵상 point
1. 절망과 불안감 속에서 탄식하는 시인
1) 먼 타국에서 이리저리 떠돌며 살아가는 시인(42:2)
시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뵈옵기를 갈망하지만 나갈 수 없는 처지에 있음을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성막(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쫓겨나서 멀리 타향에서 이리저리 떠도는 방랑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조롱과 핍박(42:3, 9~10, 43:2~3)
고대 사회에서는 각 나라의 전쟁을 그들이 믿는 신들의 전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가령 두 나라가 전쟁을 하여 이쪽 나라가 저쪽 나라를 이기면 이긴 나라의 신이 더 강한 신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을 믿는 시인이 나라를 잃고 쫓겨나서 먼 타국에서 방랑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주변 나라의 사람들이 시인을 향하여 그가 섬기는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졌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이 자기들이 믿는 신보다 못하다는 증거라며 시인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주변 나라의 백성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하고 조롱하는 소리가 마치 자신의 마치 칼이 자신의 뼈를 찌르는 것 같다고 탄식합니다(42:10). 이 일로 시인은 항상 슬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3) 주의 폭포 주의 파도와 물결에 싸인 시인(42:7)
그러나 시인은 주변 나라 백성들의 조롱소리처럼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에 망하여 쫓겨 간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진노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의 진노의 한 복판에 있는 자신의 처지를 ‘주의 폭포, 주의 파도와 물결’로 표현합니다.
주님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깊은 바다를 부릅니다. 깊은 바다는 음부(스올, 지옥)을 뜻하는 것으로, 주님의 진노의 소리가 저 바다 깊은 곳에 있는 지옥을 불러 자신을 덮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천국과 지옥을 모르니 지옥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4) 과거 좋았던 때를 추억하며 더욱 슬픔에 싸임(42:4)
시인은 과거 좋았던 때를 추억합니다. 과거에 그는 예루살렘의 성막(성전)에서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직책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함께 찬양하고 예배하던 그때가 얼마나 좋았나 하며 과거를 추억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리에 갈 수가 없습니다.
5)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42:3)
그래서 눈물이 주야로 자신의 음식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날마다 음식을 먹듯 슬픔이 자신의 삶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 슬픔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리에 갈 수 없다는 것이 슬픔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탄식합니다.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2. 탄식 중에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기도함
1) 낙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억함(42:6)
시인은 낙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과거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구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아픔도 해결해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헤르몬과 미살 산은 이스라엘의 북쪽 국경에 위치한 산맥에 있는 산들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타국에서 최대한 이스라엘과 가까운 곳에서 예루살렘 쪽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나라가 망하여 포로로 사로잡혀 간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마치 실향민들이 북한 땅이 보이는 임진각에서 북한 땅을 바라보며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그렇게 시인은 자신의 현재의 상황에서 최대한 예루살렘과 가까운 쪽으로 가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2)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주를 찾기에 갈급함(42:1)
하나님을 찾는 자신의 갈급한 상황을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목이 마른 사슴, 그것도 새끼를 배었거나 새끼를 데리고 다니는 암사슴의 경우 그 애태움이 더 심각합니다. 일 년 중 가뭄의 시절(4월~10월) 비가 내리지 않을 때 모든 와디(시내)들은 완전히 그 물이 말라버립니다. 그때에는 언덕을 넘고 들판을 건너도 시냇물을 찾기 힘듭니다. 찾다가 지쳐버리면 사슴은 목을 길게 뻗은 채 쓰러집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신의 심정을 시냇물을 찾는 이 암사슴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3) 주님의 빛과 진리로 자신을 인도해주시길 간구함(43:3)
비록 지금의 시인의 처지는 고통과 아픔 속에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자신의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실 능력을 갖고 계심을 믿고 있습니다. 만일 시인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처리하여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기에 시인은 아픔을 치유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주님의 빛과 진리로 자신을 인도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련과 환난을 당하면 이 환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말씀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다면 혹 그 시련에서 벗어나게 되더라도 다시 또 다른 시련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진정한 평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지금 당장 아픔을 해결하는 것보다 자신이 주님의 빛과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참된 성도가 되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자하심을 기다리며 노래하고 찬양함(42:8)
자신이 지금 하나님께 주님의 빛과 진리로 인도해달라고 기도했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그가 할 일은 이렇게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일하기 시작하셨음을 믿기에 시인은 고통 중에서 노래하며 찬양합니다.
3. 절망 중에도 찬양할 수 있는 이유
1)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으므로
시인이 절망 중에도 기뻐하며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의 현재의 처지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처지만 보았다면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 더욱 깊은 절망에 빠졌겠지만, 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니 소망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하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미래를 보았으므로
나의 오늘을 가지고 나의 내일을 만드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지금은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드릴 예루살렘의 성전에 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지금 그가 하나님을 부르며 찾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새로운 미래를 만드실 것입니다. 나의 미래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기에 시인은 고난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을 기뻐하며 노래합니다.
3)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으므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부르며 찾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므로 시인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비록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을 찾는 자를 인자하심으로 만나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으므로 그는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기뻐하며 노래할 수 있습니다.
4. 시인의 간구의 제목 :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43:3)
시인이 간절하게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의 제목은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의 의미로 해석하면 주께 예배하며 경배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담은 기도를 드립니다. 오늘날에야 어디서든 주께 예배드리면 주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지만,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었으므로 주님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해 달라는 기도가 간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 비록 오늘날의 형편과 시인의 형편이 다르지만, 예배를 향한 시인의 간절한 열망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당신은 주일 예배를 드리고 성전에 갈 때에 시인처럼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가고 있는지 스스로 자신을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5.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기다리십니다.
1)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와의 차이
43:2에서 시인은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슬픈 나날을 지내야만 합니까?”하고 호소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셔서 지금 내가 이런 환난 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다음 기도에 무엇이 나올 것이라 기대합니까? 이렇게 힘들고 어렵다는 호소가 나왔다면 당연히 나를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할 것입니다. 빚져서 집이 넘어가게 생겼으니 도와달라든지, 병들어 죽게 생겼으니 고쳐달라든지 하는 기도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시인은 3절에서 이런 기도를 합니다. “주의 빛과 주이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위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자신을 괴롭게 하는 고통의 현장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주셔서 바른 길을 걷게 하고,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셔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경배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련이 왔을 때 그 시련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시련을 주께서 주셨다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시련의기간이 끝나기까지 믿음을 잃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2)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도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십니다.
다만 그들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을 가지고 오시는 여호와의 날이 속히 오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의 모든 것이 주께 달려 있으니 주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여 들어오시는 여호와의 날이 오면 주께 부르짖어 기도한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그 날을 기다리신다는 점입니다. 아이가 밥을 달라고 울며 보챌 때 엄마도 그 밥이 뜸이 들기를 기다립니다. 아이뿐 아니라 엄마도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가져다주시는 여호와의 날이 오기를 하나님께서도 기다리십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날이 오기까지 믿음을 잘 간직하기를 바라며 기다리십니다.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아무런 원칙도 없이 무조건 복을 주실 수는 없습니다. 그 복에 합당한 믿음이 있는지 확인한 후에야 그에 합당한 복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 날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그날이 오기까지 믿음을 잘 간직하며 인내하며 기다리기를 바라시며 기다립니다.
그러다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지켜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복을 받을 수 있게 되면 우리보다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며 춤을 추시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좋은 시험 성적을 받으면 엄마가 더 기뻐하는 것처럼 우리가 복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십니다.
4) 그러므로 여호와 날이 오기까지 끝까지 이기는 성도가 됩시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날이 오기까지 끝까지 이기는 성도가 됩시다. 그날이 오기까지 믿음을 잘 지킨 사람은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모세나 다윗처럼 큰 복을 받게 됩니다. 지금 당장 내가 당하는 시련에서 벗어나려고만 하지 말고, 주께서 복을 주시는 그날을 기다리며 주님을 참되게 섬기는 성도가 되십시오.
● 부록 : 표제 “고라 자손의 마스길” ●
42편에는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는 표제가 붙어있습니다. 마스길은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고라 자손의 마스길’에 담긴 뜻을 묵상해봅시다.
① 고라의 반역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렀을 때 정탐군들의 보고를 받은 백성들은 “저들의 키는 하늘에 닿았고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하며 다시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이 일로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의 광야생활을 해야 했으며, 20세 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가데스바네아 사건은 출애굽 2년에 있었기 때문에, 이 후 38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합니다. 이 38년의 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의 고라 일당의 반역이 일어납니다. 레위자손 고라와 르우벤 지파의 다단과 아비람, 벨렛의 아들 온이 모세를 거역하여 모세를 향해 “너희만 거룩하냐?”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위임하신 권위에 도전했던 것입니다.
고핫 자손에게는 지성소의 지성물을 옮기는 역할을 주셨으므로 제사는 집전할 수 없었습니다. 제사는 아론의 자손에게 맡겨주신 일이었으니까요. 고라는 이것이 불만이었던 것입니다(민16장). 하나님께서는 고라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따로 불러서 세우고, 지진으로 땅이 갈라져 한꺼번에 몰살당하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이 때 고라의 아들들은 반역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② 고라 자손의 마스길
그런데 이 고라의 자손들이 다윗의 시대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 됩니다. 시편 42편의 표제에 나오는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 바로 고라 자손의 노래입니다. 이 시편으로 우리는 고라 자손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오직 하나님을 구하며, 눈물로 회개하며, 어떠한 형편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들의 회개와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하게 하셔서, 오늘날 어려운 형편에 처해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고 끝까지 붙잡게 하시고, 바른 믿음을 북돋아 주십니다.
* 기도제목
1. 절망의 현장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심을 믿게 하옵소서.
2. 이 시인처럼 우리도 고통과 아픔 중에도 주께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옵소서.
3. 우리의 생명 되시는 하나님을 주님 오시는 날까지 항상 기억하며 살게 하옵소서.
출처: 가애교회 글쓴이: 송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