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 어 빵
일 아 배 효 식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 옷깃을 여미게 하는 대한의 추위에 지하철 플렛폼을 나서는 모두들 종종걸음으로 저마다 갈 길을 바쁘게 걸어가고 있다. 나도 사람들 틈에 섞여서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어둠과 상가조명이 교차하는 인도를 따라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가는데 길모퉁이에 붕어빵을 굽는 포장 친 리어카가 보였다. 금방 구워서 노릿 노릿한 붕어빵은 따스하고 맛날 것 같았다. 3마리에 천원, 어찌 생각하면 비싼 것 같지만 추운 날 고생하시는 아주머니의 노고에 비하면 비싸다할 수 없는 가격이다. 나는 2천원을 주고 붕어 6마리를 종이봉투에 넣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옛 생각이 스쳐간다. 한 45년을 거슬러 올라간 나의 어린 시절, 가정형편이 몹시 궁색하여 가만히 부모님이 주시는 밥을 먹고 공부만 해도 되는 호사스런 처지가 되지못하고 부모님을 도와 경제활동의 최전선에 투입되어야하는 어려운 시절이었다.
요즘은 거리에서 자주 볼 수 없는 호떡장사를 한 기억이 난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에 따뜻하고 달콤한 호떡은 제법 인기가 있었다. 엄마가 밀가루 반죽과 속에 넣을 누런 설탕을 준비해주시면 나는 연탄불 화로가 설치된 포장 리어카에 이를 담아 거리로 나가서 호떡을 구워 파는 장사를 했다. 처음에는 호떡의 옆구리가 자꾸 터지고 설탕물이 흘러내려서 실패를 할 때가 많이 있었지만 세월이 갈수록 실력도 늘어 제법 그럴싸하게 만들 수 있었다. 어떤 손님들은 추운데 고생이 많다고 격려도 해주시고 또 어떤 손님은 어린 학생이 대견스럽다며 칭찬도 해주시곤 했다. 손님들의 그러한 말씀이 큰 힘이 된 것 같다.
당시 집안 사정이 어려워 설과 추석 명절에는 삯을 받고 강정을 만드는 일을 돕기도 했고 겨울에는 호떡장사, 또 다른 철에는 자전거에 따끈한 영덕대게를 싣고 팔러 다니기도 했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이까짓 것 못할게 뭐있나 하고 열심히 살아왔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다 지나간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그때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기가 힘든 생업의 전쟁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 때는 학교에 가는 것이 참 곤혹스러웠다. 학교에만 가면 선생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오늘은 언제 공납금 독촉을 받을지 또 언제 교무실로 부르실지 항상 불안 속에 있다 보니 학교생활이 재미가 없고 선생님이 싫기도 했다.
그때의 영향인지 몰라도 졸업을 한 후 은사님을 모시는 기회가 여럿 있었지만 나는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다. 내 머리에는 존경할 만한 선생님이 한 분도 없었다. 나의 비뚤어진 사고인지 잘못된 편견인지 몰라도 내 마음이 내키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 당시 나이어린 나로서는 돈과 선생님에 대한 원망이 감당하기 어려워 큰 멍울로 남았다고 생각된다.
집에 도착하니 사랑스런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집에 있었다. 아내는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고 딸과 아들은 제방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나는 갖고 간 붕어빵을 내어놓으며 “빵이 따뜻하고 맛있는 것 같다. 한 개씩 나눠 먹자”고 하며 먼저 한 개를 입에 물었다. 붕어빵 속의 팥이 따끈하게 입에 물리며 달콤한 맛을 전했다. 아내도 자식들도 모두 한 개씩 먹었다.
붕어빵이 두 개가 남았다. 배가 부르다며 먹지 않는 것이다. 붕어빵은 식으면 딱딱해지고 맛이 없다며 아내와 자식들에게 더 먹기를 권했지만 한마디로 퇴짜를 받았다. 아빠의 성의를 봐서 한 개는 먹었지만 더는 먹기가 싫다는 것이다.
옛날 어려운 시절 같으면 어찌 붕어빵이 남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시대는 분명 달라졌다. 이젠 어지간한 사람은 먹고 입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시대가 된 것이다. 물론 아직도 끼니를 제때 해결 못하는 많은 이웃이 함께하고 있기도 하지만.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요즘 인기리에 상영 중인 영화 “국제시장”을 봤다. 6.25전란 이후 주인공이 살아가는 온갖 역경에 모두들 눈시울을 적시며 그 시절을 공감했다. 부산 국제시장에서 구두를 닦으며 연명을 하고 미군들에게 초크릿을 얻어먹다 불량배에게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맞는 주인공을 보면서 배고픔의 절박함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상상이 됐다.
그리고 나중에 성숙한 자식들이 아버지의 힘든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하며 무시하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로 다가와 씁쓸한 여운을 남겼다.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들의 비운이 아닌가 생각해보며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기도 했다.
2015. 1. 21
첫댓글 요새 상영되는 국제시장이 어려웠던 시절을 되돌아보게하는 것 같습니다. 옛날은 붕어빵이 아니고 풀빵을 사 먹었는데 그 추억이 생생합니다. 정감이 있는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글 속의 삶이 그림처럼 그려지네요. 그때 우리는 국화빵이라 했는데....이름은 어쨌든, 참 고단하지만 꿈 하나는 야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식 날 우등상과 개근상만 받고 졸업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공납금을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년이 지나 담임선생님이 졸업장을 가지고 집을 방문했을 때 너무 쌀쌀맞게 대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만정님도 여려운 시절을 보내셨군요.
지난날 붕어빵(고기빵)은 맛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붕어빵은 지난날의 추억이 그리워 먹고싶은 빵입니다. 그런 아련한 추억을 글로 풀어놓으시는 님 - 많은 지난 일들을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쉽잖게 ,살아온 모습을 드러내는 일아님의 글월에 경의를 표합니다.
지극히 가족적인 서정적인 모습이 겨울을 훈훈하게 합니다.
다음에는 잉어빵도 읽게 하여주셨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