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작가는 진보적이어야 한다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날개 꺾인 어린 용사들이 앙코르와트 사원 아래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인간의 욕망을 무기로 다스린다면 이제 저들의
무기는 나무 속을 파낸 악기이다 진격 능선에 주저앉아
진혼의 목관을 불고 있다 킬링필드 영혼들이 줄줄이 걸어 나왔다
팔다리 하나씩 날려 보낸, 그들의 연주하는 아리랑은 밀림을
흔들며 날아다녔지만 공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총성도 악기도 죽음 위에 뿌려진 노래였다 나무 구멍은 점점 커지고 사람들은 그 속으로 사라졌다.
김용권의 <관> 전문
나찌 독일의 폭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어떻게 한 편의 서정시를 쓸 수 있을까? 라고 하면서, <문학은 미적 진보여야 한다>고 언명한 바 있다. 김용권 시인의 시 <관> 역시 아도르노의 고민 속에서 생성된 ‘추창조성’을 통해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기존의 서정시가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는 데서 ‘좋은’ 또는 ‘훌륭한’이란 에피쎄트를 이 시나 시인 앞에 수식어로 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 편의 시가 문학적 원리에 의해 직조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무기로 다스린다면 이제 저들의 무기는 나무 속을 파낸 악기이다.’ ‘그들이 연주하는 아리랑은 밀림을 흔들며 날아다녔지만 공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무구멍은 점점 커지고 사람들은 그 속으로 사라졌다.’에서 보는 것처럼, 킬링필드의 땅이 운유된 <관>에서 시적 화자는 인간의 욕망을 ‘무기’로 치환하고, 다시 ‘악기’로 환치하여, ‘이것’을 ‘저것’으로, 킬링필드의 영혼을 환기하고 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나무구멍이 점점 커지는 것으로’ 의미화하고, 욕망의 존재들, 권력자들은 무기에 의해 죽어간다는 의미를 ‘사람들은 그 속으로 사라졌다’로 형상화하고 있다. 인과적 특성을 보이는 문장이 매우 인상적이다. ‘날개 꺾인 어린 용사들이 앙코르와트 사원 아래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라는 묘사적 언술을 전제함으로써 이 시는 폭압정치의 그늘이란 선명한 이미지를 획득하게 된다. 김지하가 시를 어불성설이라 했듯이, 시는 우회적, 내면적, 비유적, 간접적으로 왜곡되어 제시된다. <관>이란 시를 읽으며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시적 화자의 진술 역시도 매개체를 통해 우회적 양상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묘사가 이미지라는 기표를 통해 그 안에 내재한 기의를 제시하는 것처럼, 진술 역시 시인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보다 시적 정황을 우회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관>은 우회적 진술어법에 의하여 감각화된 묘사적 특성을 전제함으로써 시적 진술이 전달하는 사유를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는 고통과 좌절 그리고 희망에 대해서 도피나 침묵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는 것이 예술임을 말해준다. 김용권의 <관>은 자신과 대화하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 즉 사회의 부름에 응답하는 사회의 목소리, 우리 삶의 원인이자 결과인 역사의 목소리에 천착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의미있는 울림이 있다. 거대한 아우슈비츠처럼 관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어떤 모습을 해야 할까. 아도르노는 예술이 사회와 비동일성을 주장하며 타자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예술은 스스로 저항적이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아름다운 가상으로서 보충한다면 그것은 기만이 된다고 했다. 이 세계는 지금 ‘동일성의 폭력’이 자리 잡고 있으므로 예술은 사회의 타자로 남기 위해 계속 새로워져야 한다. 끝없는 탈주를 해야 한다.
그래서 예술은 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게 되는데, 새로운 예술의 창작은 내용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그 누구도 아직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형식은 침전된 내용이기에 진리는 재료를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에 있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이러한 “미적 진보에 참여하지 않고 과거의 형식 언어를 고집하는 예술가는 미적으로만 퇴행적일 뿐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반동적”이라고 한 대목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문학인은 공동주체로서 타자-되기, 우리-되기를 지향해야 한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미적 진보가 녹아 있는 김용권의 시는 모두 불완전한 사회에 대해 경계하면서도 저항성을 유지해서 더 나은 생활,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어서 감동을 준다.
대통령 지지율이 23%대로 떨어져 취임 이후 최저다. 국민 대다수가 초보 대통령의 정치를 걱정하고 있다. 이 즈음에서 헤겔의 ‘현실적인 것이 이상적이다’란 말이 떠오른다. 정권 초기 정부를 지지하던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보수신문들이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판독할 수 있는 정부 비판적 논조로 시대적 좌표를 제시했다는 것은 크다란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때 오늘날 문학의 위치와 작가의 임무, 나아가서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문인이 단순히 이상의 세계를 그리는 창작에만 몰두한다면, 오늘의 ‘입틀막’ 정치권력은 급속한 가속과 불통의 중압감으로 국민의 삶을 더욱 위협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시인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세상을 응시하고 자신과 겨레와 인류의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 아도르노가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슬픈 학문’이라고 표현한 것은 슬픈 역사의 진행에 학문이 부역한 것을 비판하는 함의를 담은 슬픈 표현이다. 아도르노는 서구의 예술철학, 미학, 예술이론의 패러다임을 ‘미적 진보’의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예술을 통한 세계인식, 해명, 비판 가능성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놓았다. 김용권의 <관>은 권력의 폭력과 억압으로 얼룩진 오늘날의 현실을 깊이 있게 성찰해 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진보적이어야 한다. ‘의식을 형성하는 비판’ 정신을 담고 있는 미적 진보가 총체적 위기에 처해 있는 오늘의 부정적 현실을 극복하는 데 기여하게 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