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9년 , 프랑스 대혁명
17세기 후반,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재정 전문가 콜베르를 기용하여,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이에 따라 국가의 부를 늘리려고, 상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정책을 실시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한 국가로 올라섰고, 루이 14세는 절대 군주로서 최대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18세기 초, 베르사유 궁전 건축과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과 같은, 여러 전쟁에 참여하여 국가 재정을 바닥냈다. 또 루이 15세 때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 참가하여, 엄청난 재정만 낭비한 채 성과도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이어 ‘제2차 백 년 전쟁’이라 불리는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을 위한, 오랜 전쟁에서도 밀려 재정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루이 16세가 즉위하였을 때는, 이미 국가 재정은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왕실 재정은 거의 파탄 상태에 빠졌다. 루이 16세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제3 신분인 평민들만 냈던 세금을 제1 신분(성직자)과 제2 신분(귀족)에게도 거두려는 재정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왕비와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루이 16세는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한 마지막 선택으로, 1614년 이후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삼부회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 소집한 삼부회는 프랑스 혁명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그 당시 제1 신분과 제2 신분 대표는 각각 300명이고, 제3 신분인 노동자/평민 대표는 약 600명으로 숫자에서는 두 배였다. 그렇지만 표결 방식이 각 신분별 투표였기 때문에, 관례대로 투표를 진행한다면 2:1로 제3 신분이 질 것이 분명하였다. 이에 제3 신분 대표자들은 신분별 표결 방식을 반대하면서 국민의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프랑스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면서, 베르사유 궁전의 테니스 코트에 모여 시위를 하였다. 그들의 주장에 하급 성직자와 일부 귀족이 합류하면서, 드디어 국민의회를 인정하고 헌법 제정에 나섰다.그러자 루이 16세는 군대를 동원해 의회 활동을 위협하려 했다. 이를 본 파리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켜, 1789년 7월 14일에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1789년)의 도화선이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소식은 곧 전국으로 퍼졌고, 무거운 세금과 부역으로 고통받고 있던 농민들은, 영주의 저택을 습격하여 성을 약탈하고, 봉건적 의무가 기록된 문서들을 불태웠다. 농촌이 대혼란에 빠지자 국민의회에서는 봉건제 폐지를 제의했고, 성직자·귀족들이 그 제의에 찬성하면서, 새 헌법의 기본 원칙을 만들어 그 결과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프랑스 의회가 결의하여 1789년 8월 26일에 발표한 ‘인권 선언’ 이다. 헌법 제정 과정에서 루이 16세가 다시 의회를 제지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1791년에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는 새 헌법을 제정하고 각종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후 프랑스는 부유한 상공업자와 부농 출신에 기반을 둔, 지롱드 당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입법 의회 시대를 열었다. 그렇지만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전하여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파리 시민들은 다시 폭동을 일으켜, 왕의 퇴위와 보통 선거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 결과 왕정이 폐지되고 국민 투표로 공화정(제1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격렬한 내분과 혁명전쟁의 와중에서 승리를 쟁취한 공화파는 1792년 9월 헌법제정회의를 폐지하고 국민공회를 세운 뒤 왕정 폐지, 공화정 실시를 내걸었다.
루이 16세는 논란 속에 국가 반란죄로 기소돼 1793년 1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국왕 없는 프랑스 공화정의 탄생은 미국보다 늦었지만, 유럽 한복판에 있는 프랑스의 위상으로 인해 근대 세계의 모습을 결정한 역사적 대사건으로 기록됐다. 당시 프랑스 시민들에게는 낡고 모순된 구제도(앙시앵 레짐)는 시정하고, 개혁해야 한다는 비판 의식을 심어 준 사상이 있었다. 바로 18세기 중엽 유럽을 지배했던 계몽주의 사상이다. 먼저 정치에 관해서는 계약론(契約論)이 주장되었다. 인간은 침범되어서는 안 되는 자연권自然權)을 가지고 있다. 자연에 입각해서 자유이며, 평등이다. 생존과 재산 소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은 계약에 의해 국가를 만들었다. 따라서 우리는 기본적인 권리가 침해당했을 경우, 비판하고 저항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로크의 주장은, 시민 계층인 부르주아들이 사회 개혁을 요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거기에 바다 건너 미국이 독립 혁명에 성공하게 되자, 이에 자극을 받아 봉건적인 요소와 전제 정치를 타파하고, 자유와 평등이 존중되는 사회 건설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 1,861년, 미국 남북전쟁
1,861년 ,미국이 노예 해방 문제를 둘러싸고 남북으로 분열됐다. 공업이 발달한 북부 지방에서는 노예제를 폐지하자는 여론이 강했는데, 이는 농장에 묶여있는 노예를 해방시켜야, 자본가들이 고용할 수 있는 공장 노동자가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노예를 이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이 성행했던 남부에서는, 농장주들이 노예제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전쟁은 4년 동안 계속된 끝에 공업 생산력이 우세한 북부의 승리로 끝나, 미국 전체에서 노예제가 폐지된다. 남북 전쟁 이후의 미국은 지속적인 서부 진출, 산업화와 도시화의 진전, 외국 이민의 대량 유입, 그리고 세계적인 강대국으로의 부상이 이루어졌다. 남북 전쟁이 끝난 뒤 골드러시가 일어나자, 금광을 찾아 모여든 사람들에게 생필품과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광산촌이 생겨났고, 이러한 열기는 인디언의 영토권을 더욱 심하게 짓밟았다. 미국 영토는 서쪽으로 계속 팽창하고 있었지만, 개척지와 미개척지 사이의 경계에 해당되는 변경은 과거의 상징이 되었다. 미래의 경향을 보다 정확히 예언해준 것은, 사람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물려든 이농 현상이었다. 이 무렵의 인구 통계를 보면, 미국의 농촌 세력이 쇠퇴하기 시작하고 ,갑자기 커진 공업 단지에 바탕을 둔 사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부의 주들은,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풍부한 지하자원을 이용한 공업과 상업이 발전하였다. 이에 비해 넓은 평야가 대부분인 남부는, 노예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면화와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대농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독립할 당시부터 연방파(북부)와 반연방파(남부)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해 오던 이들은, 새로 편성된 서부의 주들이 자유 주(노예 제도를 인정하지 않은 주)를 택하느냐, 노예 주(노예 제도를 합법적으로 인정한 주)를 택하느냐를 둘러싸고 매우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양측 모두 한 치의 양보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은 이 문제가 바로 정치적인 세력 확장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4년에 걸친 남북 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함으로써, 미국의 연방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노예 제도가 폐지되어 해방된 노예에게 시민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남북 전쟁은 당초 예상보다 길게 끌면서 양측 모두에 엄청난 피해를 안기고 말았다. 북부군은 약 36만 명이 전사했고, 남부군은 약 25만 명이 전사하는 인명 피해를 낳았다. 특히 패배한 남부는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전쟁 중이던 1863년 1월 1일에 ‘노예 해방 선언’이 발표된 후 이미 많은 노예들이 북부로 도망을 가 큰 타격을 입었다. 여기에 4년여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땅이 황폐화되어 대농장 중심의 남부 지역으로서는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1865년 4월 14일,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 반대론자인 부드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이로써 그가 주장했던 관대한 남부 재건 안이 무용지물이 되었고, 남부에서는 10년 동안 군정이 실시되었다. 그 뒤 남부는 사회·경제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대규모 농장은 소규모로 바뀌게 되었고, 북부 사람들의 투자로 자본과 기술이 들어오면서 섬유·제철 등의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공업 생산량이 배로 증가하여, 미국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 1871년 , 독일 통일
독일의 기원은 독일의 제부족을 하나로 통합한 프랑크 족이 세운 프랑크 왕국에서 시작된다.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 대제는 유럽에서 고대 로마제국의 대부분에 해당되는 지역을 정복한 후, 이탈리아에 진격하여 로마교황을 롬바르드족의 공격으로부터 구출해주었다. 교황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서 800년 샤를마뉴 대제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다. 이리하여 프랑크왕국은 제국이라 불렸고, 이 제국은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이라 생각되었다. 독일에서는 샤를마뉴 대제의 혈통인 카롤링거왕조가 10세기 초에 단절되고, 그 뒤를 계승해 작센왕조에서 10세기 중엽에, 유능한 국왕 오토1세가 출현하였다. 오토 1세는 밖으로는 마자르인(헝가리인)의 침입을 격퇴하고 국방을 견고히 하는 동시에, 국내에서는 왕권에 대항하는 귀족 세력을 억압하고, 국왕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기독교를 이용하려 하였다.
당시 독일 내부의 교회·수도원은 귀족의 침략을 받아 경제적으로 어려웠으나, 오토 1세는 이 교회를 귀족의 침략으로부터 수호하고 토지를 제공하여, 교회 소속으로 해주었다. 국내의 기독교를 자기쪽으로 끌어들인 오토 1세는, 로마교황에게도 접근하여 교황의 구원 요청에 응하여 이탈리아에 원정, 교황을 괴롭히던 현지의 귀족을 토벌하고 교황을 구출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 요한12세는 962년, 로마에서 오토 1세에게 황제의 제관을 씌워줌으로써 보답하였다. 이로써 신성로마제국이 출현하였으며, 이후 역대 독일 국왕은 황제의 칭호를 가지게 되었다. 오토 1세는 교회를 왕권 유지의 하나로 생각하고, 그 목적을 위하여 교회를 지배하였으며, 고급 성직자를 자기 자유의사로 임면하려 하였다. 이 정책을 제국교회정책이라 하는데, 이것과 서로 연관되어 출현한 것이 신성로마제국 성립의 특수성이다. 이후 독일 황제와 로마 교황 사이의 갈등, 주변 국가와의 갈등, 중앙과 지방 제후간의 갈등으로, 독일은 오랜 시간 정치적 혼란기에 직면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국민들의 불만도 함께 폭발했고, 독일은 농민전쟁·기사전쟁·30년전쟁 등을 겪었다. 독일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전쟁을 치른 뒤, 1806년 결국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후 39개 주권 국가로 구성된 독일 연방으로 다시 태어났다가, 1871년 1월 빌헬름 1세를 황제로 한 독일 통일이 이루어졌다.
# 1,876년 , 벨의 전화기 발명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1847-1922)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발명가, 과학자, 엔지니어다. 그는 특히 전화기를 발명함으로써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외에도 벨은 의료 진단 장비, 비행기, 광섬유 통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연구를 수행하였다.1870년대 초반, 벨은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교육 기관에서 일하면서, 사람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소리 파동을 전기 신호로 변환하는 방법에 대해 탐구하게 된다. 1876년 3월 10일, 벨은 성공적으로 최초의 전화 통화를 시도하였다. 이 때 사용된 기계는 소리를 받아들여 전기 신호로 변환하고, 다시 송신하여 원래의 소리로 복원하는 원리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의사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이 개발되었다.
벨은 자신의 발명을 상용화하기 위해 '벨 전화 회사'를 설립하였고, 이 회사는 후에 AT&T라는 이름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통신 회사 중 하나가 되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실시간으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이는 비즈니스, 교육, 사회적 상호작용 등 여러 분야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전화기 발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명 중 하나로 꼽힌다. 그의 기여는 단순히 새로운 기계를 만드는 것을 넘어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의 업적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다양한 통신 기술의 기반이 되었다. 이어서 에디슨에 의해 백열등이 발명되고, 많은 발명품이 줄을 이었다. 자동차 발명은 독일의 고틀리에프 다임러다. 그는 1886년 시속 15킬로미터로 달리는 네 바퀴짜리 가솔린 자동차를 발명했다. 또 다른 독일인 카를 벤츠도 거의 동시에 아주 흡사한 모양의 자동차를 발명했다. 벤츠가 ‘가솔린 엔진 구동의 타는 장치’라는 특허를 받은 1886년 1월 29일은 세계 자동차 탄생 기념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