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토벌사령관 백선엽장군, 2군단장 오자복대장, 그리고 지리산 남부군 45사단장 황의지<4회>
아침을 여는 창/ 수필가 서호련
1984년 9월, 황의지는 2군사령관 오자복 대장의 지리산 작전전술토의에 초빙되어 인사말을 하면서, 오자복 대장에게 대뜸 물었다. “장군께서는 빨치산전투 당시 계급이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당시 소위로 빨치산전투에 참여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빨치산 45사단장 황의지의 얼굴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황의지는 계속해서 나, 백선엽에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48년 말 포로 송환선을 타고 상륙한 곳이 흥남이었다. 상륙하자 동포들의 환영식과 함께 정치사상 교육이 흥남여중에서 있었다. 북한 당국은 북한 땅에 남아 있으라고 당부했지만 나는 한시바삐 해방된 고향에 가고 싶었다. 38선을 넘자마자 나는 곧 서북청년단에 붙잡혀 파주경찰서로 끌려갔다.
우리 일행 57명은 파주경찰서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그것은 귀향의 꿈에 젖어 있던 내게는 청천벽력이었다. 물고문과 고춧가루 고문, 몽둥이찜질을 당하며 나는 비통한 심정을 달랠 길이 없었다. 간신히 풀려나 집에 돌아온 뒤에도 실망한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당시 신생 대한민국의 요직은 대부분 친일파 나부랭이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일본 놈들에 붙어 순사 일을 하던 똑같은 얼굴들이 여전히 경찰에 몸담고 있었고 그들은 수시로 나를 찾아와 괴롭혔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집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은 49년 6월 나는 남로당 전북 도당 사령부가 있는 회문산에 입산했다.
처음 나는 평 유격대원이었으나 군대 경력을 인정받아 진급했고, 잇단 유격전 승리로 곧 전북 도당의 대표적인 지휘자가 됐다. 나는 탱크 병단의 병 단장을 지냈고, 전북 유격대에 독립418연대가 창설되면서 그 연대장을 맡았다. 나중에 418연대가 해체돼 항미연대와 구국연대가 만들어졌는데 항미연대는 박판쇠가, 구국연대는 내가 지휘했다.
남부군 체제 하에서 구국연대는 45사단으로, 항미연대는 46사단으로 개편됐다. 같은 부대가 이처럼 여러 이름을 갖게 된 것도 세력 과시를 위한 유격전술의 일환이었다.
빨치산 지휘자로서 지리산 골짜기를 누비면서 수도 없이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결국 군경에 생포되어 전향했고 그 후 나는 남원경찰서 사찰 유격대의 일원이 되어 「동지들의 생명을 하나라도 더 구하기 위해」활동했으며 지리산에 평화가 찾아온 뒤부터는 뱀사골 입구에 자리를 잡고 등산객의 길안내를 해주는 일을 했다“고 했다.
내가 만났을 당시 그는 양발로 붕대로 감고 있었다. 80년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노구로 견디기 힘든 고초를 겪었다면서 5공 정권에 이를 갈았다. 그러면서「진짜 원수는 일본 놈들과 그 밑에서 붙어먹던 친일 주구들이다. 아직도 그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는 친일 주구들을 척결해야만 이 민족의 한이 풀릴 것」이라고 강조 했다.
자신의 일생을 결정지은 주요 고비에서 매번 일제와 그 앞잡이들로부터 침해를 받았고, 그것이 입산의 동기가 됐던 그로서는 당연한 말일 것이다. 또한 비슷한 처지에서 입산해 빨치산이 됐던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빨치산들의 입산 동기나 활동 과정은 천차만별이었다. 빨치산 활동과 군경의 토벌에 대한 단선적인 평가는 이 같은 다양성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위험천만이다. 나는 후일 역사가 내릴 전체적인 평가가 올바른 역사의 진전과 함께 풍부하게 이뤄지길 기대한다. 내가 겪고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 것도 그런 바람 때문이다. ( 백선엽의 지리산 실록에서)
* 오자복 대장이 주관한 지리산 작전전술토의에 참석한 황의지
1984년 9월, 당시 2군사령관이었던 오자복대장이 35사단 103연대장 김경일 대령을 대동하고 남원을 방문했다. 지리산 전적기념관에서 개최된 지리산작전전술토의에는 남원군수 외 다수의 기관장들과 남원시 예비군 지휘관들이 참석했다.
여기에는 산내예비군중대장 오태록에 초빙된 특이한 증인 두 사람이 초청되었다. 한사람은 이현상부대의 작전참모였던 황의지였고 한사람은 산내면 빨치산토벌 특공대장 이었던 차석두 였다.
먼저 황의지가 소개되어 인사말을 하는 중, 사람들이 나에게 많은 사람을 죽인자라고 하지만, 난 이현상부대에 있으면서 양민을 학살한 적이 없다. 오히려 사지에 처해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살렸다. 그리고 나는 전향을 하여 동료빨치산들을 전향시키는데 큰 몫을 했으며, 군경에게 많은 정보를 주어 이현상부대를 무력화 시키고 이현상 제거에 공이 있었음에도 나는 당시 전두환정부의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죽도록 고생을 했다. 전투상황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다음은 당시 산내면방위 특공대장이었던 차석두의 증언이었다.
“나는 6.25직전 지역방위를 위해 산내면 청년들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여순반란사건으로 지리산으로 잠입한 반란군과 대항,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지역방위를 하면서 고향을 지켰다.
당시 지역주민들은 가정마다 인공기를 가지고 있었다. 밤이 되면 인공기를 달고 날이 새면 태극기를 달아야 아군과 적군에게 피해를 당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밤마다 빨치산 침투경로에 매복하였다가 빨치산을 사살하는 전과를 수십 차례 올렸다” 는 무용담을 이야기하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오자복 사령관은 “나는 6.25 전쟁 시 소위로 지리산 전투에 참여했는데, 혹독한 겨울 추위 속에 소대원들과 피아골, 뱀사골에서 매복하면서 전투를 감행했던 당시를 잊을 수 없다” 하면서 “오늘, 당시에 실전에 참여했던 두 분의 증언에 대하여 감사를 표한다”고했다.( 당시 산내면 예비군 중대장 오태록 목사의 증언)
♨출처/남원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