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얀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 바실리 페트렌코의 지휘와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
실황입니다
* 시벨리우스의 고향 <하멘린나>의 숲속 자작나무 풍경
[ 핀란드 음악의 아버지 얀 시벨리우스(1865~1957) ]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시벨리우스의 탄생지인 하멘리나로 가자면 기차가 있습니다. 약 100km의 거리를 북북서로 달려 1시간 남짓 만에 닿습니다. 연변에는 산이 없어 평지에 총림이 이어지고 사이사이로 언뜻언뜻 호수들이 지나갑니다.
이따끔씩 노란 유채꽃밭이 곱습니다. 위도상으로 북위 61도 조금 못 미처가 하멘린나입니다. 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큰 호수를 건넙니다. 바나야베시호입니다. 기다랗게 끝간 데 없이 뻗어 강물 같습니다.
하멘린나는 핀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내륙 도시의 하나입니다. 옛 건물들은 스칸디나비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힙니다. 호수가의 700년 된 빨간 벽돌의 古城이 아취있습니다. 성은 늙어 가고 시가는 젊어갑니다. 근년 들어 산업 및 상업 도시로 발전하여 큰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시벨리우스 당시 인구가 3천이던 마을이 지금은 10만의 중도시로 변모했습니다.
* 시벨리우스의 생가
시벨리우스가 태어난 집은 구시가지의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19세기 핀란드의 대표적 건물로 이 집만 옛 집인채 인근에는 새 건물들입니다. 생가는 일반 공개합니다. 방 배치는 물론 벽지 빛깔 하나까지 시벨리우스 일가가 살던 당시대로 손질을 했습니다. 응접실에 있는 피아노는 시벨리우스가 헬싱키 음악원의 학생 시절에 쓰던 것입니다.
구형(矩形) 피아노 한대는 그가 어린 시절 외할머니 댁에서 처음 피아노에 손을 댈 때의 것과 동형의 것이라고 합니다. 소년 시벨리우스는 누가 피아노를 치면 그 밑으로 기어들어가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그가 5,6세 때 켜던 조그만 하모니엄(오르간의 일종)도 찾아다 놓았습니다. 진열장에 들어 있는 바이올린이 시벨리우스 음악의 母胎입니다. 선장이던 숙부가 사다 주어 14세 때부터 손에 든 이 바이올린을 그는 무척 좋아했습니다.
* 생가 내부
장차 바이올린의 대가가 되는 것이 어린 시벨리우스의 꿈이었습니다. 마을의 군악대장한테서 처음 배운 뒤 야외에서 산보를 할 때도 언제나 이 바이올린을 들고 나갔습니다. "나는 숲을 거닐 때 커다란 바위를 무대로 하여 새들을 위해 긴긴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다. 돛배를 타고 여행을 할 때도 大海를 향해 즉흥곡을 켰다"고 그는 뒷날 회상했습니다.
그런 바이올린입니다. 이 바이올린에서 시벨리우스 음악의 大河가 發源합니다.
생가의 침실에 있는 소파,탁자,의자,그리고 촛대가 당시의 것입니다. 이 방에서 시벨리우스가 1865년 12얼 8일 태어났습니다. <핀란디아>가 장중한 팡파르로 귀에 울립니다. 그의 탄생은 실로 <핀란디아>를 위해서 운명지어진 것입니다.
* 시벨리우스가 탄생한 침대
시벨리우스는 생후 2년 8개월 때 아버지가 죽자 이 집을 떠나 같은 마을에 있던 외조모 집에서 자랐습니다.
아래는 소년 시절의 시벨리우스에 대해서는 같이 자란 한 친구의 회상입니다.
"그는 몽상가였다. 그의 강한 환상력은 그 營養을 자연에 대한 熱愛에서 받았다. 자연의 풍경이 주는 인상은 그에게 격렬한 반응을 일으켰다. 그는 사크스마크 근처의 숲 속을 쏘다는 것이 즐거웠다. 옛 이야기에 나오는 요정을 찾아 헤맸다. 그는 특히 일몰을 좋아했다. 저무는 해를 바라보면서 언제까지나 그 빛이 사는 신비의 나라를 공상하고 있었다."
시벨리우스의 음악에는 그가 사랑하는 北歐의 대자연이 항상 밑바닥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의 음악은 핀란드 특유의 풍토와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핀란드는 전 면적의 70% 이상이 침엽수의 삼림으로 덮인 나라입니다. 대지는 파상(波狀)의 작은 기복을 이루고 그 사이로 무수한 氷蝕湖가 널려있습니다.
* 고향의 시벨리우스 동상
호수가 국토의 약 9%를 차지하고 경지는 6%밖에 안됩니다. 한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내려가 강도 호수도 해안도 얼어붙습니다. 이것이 핀란드의 자연입니다. 긴 겨울,혹독한 추위, 깊은 숲에서 하모니와 선이 굵은 선율의 북구 음악이 나옵니다. 특히 시벨리우스의 음악에서는 핀란드의 대자연의 페달음(오르간 포인트)이 들립니다. 이 자연과의 친화의 시발점이 고향 하멘린나였습니다.
시벨리우스는 1865년 헬싱키 대학의 법과에 입학하면서 하멘린나를 떠납니다.
1930년 65세의 시벨리우스는 모교(중고교)에서의 자신의 초상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 땅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아울란코 고원에서 걸어내려와 바나야베시 호수 앞에 섰습니다. 여름이 시작되는 아름다운 날이 저물고 있었습니다. 호수 건너편 교회의 古塔 너머로 일몰을 바라보며 그는 "내가 <핀란디아>를 작곡할 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젊은 날에 보던 내 고향의 바로 이 경치였다"고 말했습니다.
* 헬싱키의 시벨리우스 기념관
아울란코 공원은 현재 캠핑장,놀이터,비치 등이 들어서 핀란드에서도 이름난 유원지가 되어 있습니다. 그 아래쪽 호수 가에서 건너의 古城을 바라볼 때의 아름다움은 가히 환상적입니다. 이 고장의 옛 백성들이 그렇게도 신성시했다는 호수의 물은 시벨리우스의 가슴에 핀란드 민족의 피처럼 흘러, 민족애의 절창인 <핀란디아>의 영감을 일찍이 젊은 그에게 심어 준 것입니다.
시벨리우스가 법학을 버리고 음악에 전념하면서 다니게 된 헬싱키 음악원은 지금 이름이 '시벨리우스 아카데미'입니다. 그의 생존 때인 1939년에 개명했습니다. 그는 1892년부터 10년 간 이 음악원의 교수이기도 했습니다.
시벨리우스는 음악원을 나오자 베를린과 비엔나에 유학한 뒤 그의 여러 민족적인 작품들의 가치가 인정되어 32세 때(1897년) 이미 정부로부터 종신 연금을 받는 대작곡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대표적 작품인 <핀란디아>는 헬싱키 시절인 1899년에 나왔습니다.
당시 조국 핀란드는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연극 <역사적 정경>이 상연되었을 때 그 부수 음악을 작곡하면서 마지막을 힘찬 交響詩로 맺은 것이 나중에 독립된 곡의 <핀란디아>가 되었습니다. 핀란드頌이란 뜻의 <핀란디아>는 핀란드 국민들의 찬가입니다. 그 때 억압된 민족의 강한 분노의 열정을 소리로 담아 국민들의 애국심심에 호소하는 바가 컸기 때문에 러시아 관헌의 연주 금지에도 불구하고 국내외로 널리 퍼져 결국 오늘날처럼 전 세계적으로 시벨리우스의 작품 중 가장 인기있는 곡이 되었습니다.
웅대하고 정열에 넘친 이 곡은 1919년 핀란드가 마침내 독립하여 공화국이 선언되었을 때 경축식전에서 연주되었고, 지금도 자유 핀란드의 상징으로 핀란드 국민들에게 國歌 이상으로 열광적인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헬싱키에서 시내 관광버스를 타면 시벨리우스 공원으로 반드시 안내합니다. 넓은 녹지의 한쪽에 핀란드의 국민적 영웅 시벨리우스를 기리는 기념물이 있습니다. 수백개의 강철 파이프로 연결시킨 거대한 조각입니다. 힐투넨이라는 여류 조각가의 작품으로 전국에서 모금하여 1967년에 세웠습니다.
* 시벨리우스 공원의 시벨리우스 조각
시벨리우스는 39세 때인 1904년 헬싱키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그가 그토록 사랑한 자연 속에 묻혀 살기를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집을 지어 나간 것이 그가 죽을 때까지 50년간을 지내게 되는 아르벤파의 '아이놀라'입니다.
아르벤파는 헬싱키에서 북쪽으로 38km 떨어져 있습니다. 시벨리우스는 이 곳에 땅을 사서 핀란드의 저명한 건축가 라르스 송크의 설계로 이 집을 짓고는 사랑하는 아내 아이노의 이름을 따서 '아이놀라'라고 옥호를 붙였습니다. 아이노는 또한 시벨리우스가 즐겨 제재로 삼았던 핀란드의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에 나오는 처녀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 아이놀라 저택
시벨리우스는 외국 여행이나 헬싱키에 볼일이 있어 나갈 때 외는 줄곧 여기에서 은서(隱棲)하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다섯 딸이 이 집에서 자랐고, 제3교향곡 이후의 그의 명작들이 이 집에서 줄줄이 탄생했습니다.
시벨리우스 기념관이 되어 있는 '아이놀라'는 방이 아래층에 4개,위층에 3개입니다. 응접실에 놓인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시벨리우스가 50회 생일 때 친구들로부터 선물 받은 것. 서재에 있는 안락 의자는 그가 즐겨 앉아 쉬던 자리 .그는 라디오의 안테나를 집에 높이 세워 놓고 이 의자에 앉아 전 세계에서 연주되는 자신의 작품을 단파로 듣고 있었습니다.
* 부인과 함께...
전축이 있기는 하나 그가 그런 기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만년에 들여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서재의 책은 3,000권 이상입니다. 작곡을 하던 작업실은 처음에 위층에 있었으나 나중에 아래층으로 옮겼습니다. 위층에서는 투술라 湖의 맑은 수면이 저만치 내려다 보입니다.
* 응접실에서...
시벨리우스는 64세 때인 1929년 붓을 끊고는 그 이후 여생의 28년 동안 작곡 활동을 일절 하지 않고 완전한 공백 속에서 이 집에 살았습니다. 흔히 '야르벤파의 침묵'이라 일컫는 休止입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낮이면 방문객을 맞아 유쾌하게 이야기하면서 실컷 웃다가 저녁이면 혼자가 되어 엄숙한 얼굴로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조용한 고독의 시간을 가지곤 했습니다.
* 현재의 응접실 모습
시벨리우스는 1957년 9월 20일 이 집에서 뇌출혈로 죽었습니다. 92세였습니다.
* 숲속 산책길의 시벨리우스
'아이놀라'에 달린 숲은 4헥타르나 됩니다. 집에서 나와 숲 사잇길로 조금 내려가면 공지가 트이는 곳에 시벨리우스의 무덤이 있습니다. 정방형의 돌 위에 이름자를 새겼습니다. 사위인 건축가 블롬슈테트가 디자인한 것입니다. 숲을 사랑하던 시벨리우스는 숲 속에 누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