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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師弟)에 살아라
불멸의 ‘정예 10만’ 결집! ⑨-1
사제의 서원인 ‘10만 결집’
그 성취를 눈앞에 두고 오사카사건의 법정투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케다 회장은 모든 것을 승리로 이끄는 대선풍을 일으켰다.
△저녁 무렵, 이케다 회장을 둘러싼 연수회. 원형대열 안에는 캠프파이어도 준비되어 있다.(1961년7월29일, 기리가미네)
종교 혁명은 청년만 할 수 있다
청년의 기상이 세계를 바꾼다
‘서원(誓願)’ 10만 결집은 은사 도다 제2대 회장의 소망에, 애제자인 이케다 회장이 응하는 서원이었다.
애제자는 은사에게 다짐한 약속을 전부 실현했다. 은사가 제시한 ‘5000명 총등산’(1954년)도 실현했다. “다시 1만명으로 세기의 총등산을 실시하라.”는 일대목표도 완수했다. 그리고 다음에 제시한 목표가 ‘10만 결집’이었다.
은사는 제자에게 말했다. “종교혁명은 청년만 할 수 있다.” “청년 10만이 있다면 광선유포를 할 수 있다. 과감하게 투쟁하게나.”
종교가 유포된 역사를 보면 그 중핵에는 반드시 청년이 있었다.
또 은사는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가 이만큼 전파된 원인은 청년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석존이 영원한 생명을 감득해 바라문의 교의를 깨고 불법을 건립했을 때, 그 투쟁에 참여한 사람도 전부 청년이다. 또 공산주의를 세계로 확대시키는 투쟁을 한 사람도 청년이다. 청년의 열과 힘은 실제로 세계 역사를 바꾸었다.”
서원에 선 청년이 있기에 비로소 스승의 구상을 실현할 수 있다.
제자는 각오를 다졌다. “도다 선생님 앞에 국사 10만을 모두 정렬시켰을 때, 그 모습이 바로 광포를 실현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1961년 여름. ‘서원하던 10만 결집’이라는 결실을 보는 날이 다가왔다. 전국 여섯개 방면에서 열린 방면 청년부총회의 결집인원도 이미 10만을 돌파했다.
남자부 수뇌는 깜짝 놀랐다. 자신들의 예상을 크게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남은 회합은 본진 도쿄에서 열리는 ‘10만 총집결’이었다.
이케다 회장의 기세가 모든 것을 끌어당겨 광포 승리의 흐름으로 만들었다. ‘10만 결집’의 일정도 명확히 정해졌다.
남자부는 1961년 11월 5일, 제10회 남자부총회가 그 결착의 날이었다. 여자부는 같은 해 11월 12일, 제9회 여자부총회다.
승리하지 못하면 정의는 증명할 수 없다
고군분투하는 법정투쟁
그 ‘10만 결집’을 앞두고 이케다 회장을 기다리던 것은 횡포한 권력과 정의를 놓고 벌이는 치열한 싸움이었다. 바로 ‘오사카사건’의 법정투쟁이다. 그것은 경찰과 검찰이라는 권력이 날조한 무고죄였다.
1961년 7월 12일부터 3일 동안 70차와 71차 공판이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공판은 핵심부분으로 들어갔다.
이케다 회장은 취조 중에 “호별방문을 지시했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학회본부를 덮쳐 도다 제2대 회장을 체포하겠다.”는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 사실무근의 죄를 본인이 모두 뒤집어쓰려 했다. 그 진실을 증명해야 했다.
재판상황은 〈수필 신·인간혁명〉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변호사들은 내게 말했다. ‘사실무근이라 해도 검찰의 주장을 뒤집을 수는 없다. 유죄를 각오하는 편이 좋겠다.’ 고군분투하는 법정투쟁이었다.
그 사이, 나의 아버지이자 스승이신 도다 선생님은 서거하셨다. 그리고 나는 제3대 회장에 취임했다. 만약 내가 유죄를 받는다면 종교법인법 규정에 따라 대표 임원직인 회장에서 사임해야 한다.”
“유죄를 각오하는 편이 좋겠다.”고 말하는 변호사에게 맡길 수는 없다.
실로 ‘고군분투하는 법정투쟁’이었다. 승리하지 못하면 정의는 증명할 수 없다. 7월 12일에 열린 제70차 공판에 출두하고자 도쿄역에서 오사카로 향했다.
반전공세
의지할 은사도, 믿을만한 제자도 없다. 이케다 회장은 홀로 권력과 투쟁했다.
회장은 12일에 열린 제70차 공판과 다음날인 13일과 14일에 열린 제71차 공판 등, 사흘 동안 법정에 나가 당당하게 진실을 주장했다. 이렇게 이케다 회장은 반전공세를 펼치는 법정투쟁을 개시했다.
검사의 취조도 필요 이상으로 가혹했음을 진술했다.
“7월 8일에 구치소에 들어간 날 저녁에는 (밤) 11시까지 식사도 못하고 조사를 받았습니다.”(공판기록에서)
“상당히 거만하고 고압적인 취조방식입니다.”(同)
또 취조할 때는 수갑을 풀었지만, 수갑을 찬 채로 지검에서 지검의 별관으로 데리고 가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만들고는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고 다시 그 길을 왕복시킨 사실도 진술했다. 공직선거법 위반혐의로서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가혹한 취조였음이 명백해졌다.
또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학회본부를 덮쳐 도다 제2대 회장을 체포하겠다고 협박한 경위도 덧붙였다. 그 내용은 변호사에게 전해 들었다. 공판기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변호사가) 간절하게 내(이케다 회장)게 전한 말이 있습니다. 첫번째로 만약 호별방문을 전부 시인하지 않는다면, 즉 검사가 말한 대로 하지 않으면 도다 회장이 체포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부까지 수사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중략)
당신 한 사람이야 어떻게든 좋으니 검사가 말한 대로 한다면 해결할 수 있으니까 해결을 봤으면 좋겠다.”
그 말을 듣고 이케다 실장(당시)은 직접 검사에게 이렇게 확인했다고 증언했다.
“전부 (검사가) 시킨 대로 하면 도다 회장도 체포하지 않겠다, 본부와 오쿠라상사에 대한 수사도 그리고 시라키와 우시다도 체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검사는) 그렇게 하겠다.”(공판기록)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성실하게 진술하는 이케다 회장에게 이번에는 판사가 확인했다.
“(도다) 회장이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몹시 염려한 일도 (짓지도 않은 죄를) 인정한 하나의 원인……”(공판기록)
이케다 회장은 자신에게 죄를 덮어씌우려고 ‘검사가 모의했다.’는 사실도 변호사가 보고해서 알았다고 말했다. 또 선거에 대해서는 시종 아무런 위반도 없었고 호별방문 지시도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힘주어 말했다.
회장이 직접 사실을 하나씩 상세하게 진술하자 차츰 명확해졌다. 사실이 곧 모든 사람을 납득시키는 힘이었다.
민족의 흥륭은 청년의 결집에서 시작한다
꾸며진 진술
제70차 공판에서는 호별방문으로 체포된 장년부원 한 사람도 법정에 출두했다. 그 장년부원은 취조할 때 강요 때문에 허위진술을 했다고 중언했다. ‘꾸며진 진술’은 이러했다.
“‘한 집이라도 많이 호별방문을 돌아라. 그 책임은 내가 질 테니,’라고 들었으며 또 그때 그런 말을 계속 한 이케다 실장은 한집씩 돌며 나카오 다쓰요시에게 ‘협력을 부탁드립니다.’'라고 부탁조로 말했다.”
판사가 사실과 다른 진술을 한 이유를 추궁했다. 장년부원은 경찰에게 협박받은 사실을 밝혔다. 경찰은 그에게 말했다.
“네 큰아들이 이번에 도쿄로 수학여행을 가지? 네가 계속 고집을 부리면 아이가 수학여행을 못 갈 텐데, 그러면 아이가 불쌍하지 않나? 계속 고집을 부리면 계속 붙잡아 둘 테다.”
장년부원은 경찰의 협박이 두려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케다 실장에게 들었습니다.’라고 말이지요.” 허위자백을 강요했음이 드러났다.
두 개의 제트기류
재판은 이케다 회장이 다음에 참석하는 제74차 공판에서 흐름이 역전된다. 이케다 회장을 취조한 검사가 증인으로 출두해 이케다 회장이 직접 검사에게 질문했다.
이케다 회장이 반전공세를 펼치는 법정투쟁은 드디어 속도가 붙어 호전됐다.
이케다 회장은 재판 중에 느끼는 심경을 ‘제트기류’에 비유해 오사카 청년부 간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본을 에워싼 강풍대가 두개라고 합니다. 하나는 아열대제트기류, 다른 하나는 한대(寒帶) 제트기류입니다. 그 두 개의 제트기류는 일본 상공에서 합류하거나 나뉩니다. 따라서 일본에서 시작된 이 흐름이 제트기류를 타고 세계에 고루 미칩니다.
나는 학회 정의의 깃발을 제트기류에 나부끼게 해 ‘광선유포의 대조류’를 일으키는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청년부 간부는 이렇게 술회한다.
“이케다 선생님은 ‘재판의 승리’와 ‘10만 결집’이라는 두 개의 제트기류를 일으켜 노도와 같이 광선유포를 지휘하시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선생님은 정말 큰 인물이시다.’ 지구적 규모로 사물을 고찰하는 모습과 한 사람의 청년을 소중히 여기는 선생님 행동에 감동을 억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또 회장은 오사카 청년부 간부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정예 10만의 청년이 있으면 고뇌하는 민중을 구할 수 있습니다. 민족의 흥륭은 청년의 결집에서 시작됩니다.”
‘청년의 결집’. 공판을 마치고 본부로 돌아온 이케다 회장은 10만 결집을 위해 더한층 대책을 강구했다. 먼저 ‘수호회’ ‘화양회’ 등, 청년부 중핵을 짊어질 인재를 육성했다.
청년부에게 ‘사제정신’이 없으면 광포의 제트기류는 기세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기리가미네
7월 29일과 30일, 이들 동안 ‘수호회’와 ‘화양회’가 야외연수를 하기로 결정했다. 장소는 나가노 기리가미네 고원, 이케다 회장이 선택했다.
회장은 1958년 8월에 처음으로 기리가미네를 방문했다. 그때 청년을 데리고 한번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나는 ‘잊혀진 언덕’에 서서 모든 멤버와 함께 산책했다. 도시에서 생활하는 나는 무심코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멋진 곳이 있었다니. 좀 더 일찍 오고 싶었다. 우리 도다 선생님을 꼭 모시고 싶었는데‥‥‥’
이 천지에서 자애로운 얼굴을 한 스승을 둘러싸고 미래를 응시하며 투쟁에 승리하는 청년과 연수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의의 깊었을까. … 언젠가 이 멋진 땅에 미래 광포를 건설할 젊은 지도자들을 데리고 와야겠다고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수필 신· 인간혁명>)
무책임한 방관자는 필요 없다
기리가미네에서 열린 야외연수를 앞두고, ‘수호회’ 멤버는 필사적으로 준비에 임했다. 왜냐하면 전해에 이누보시키에서 크게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3대 회장 취임 후 본격적인 청년의 출발을 알리는 의식이었는데 그러한 기개가 빠져 있었다.
"무책임한 방관자, 으스대는 관료주의자가 늘어나면 학회 내부는 몰락한다. ‘마치 패잔병 같지 않은가!’ 나는 수호회 멤버들에게 크게 기대를 걸고 있었기에 엄하게 질타했다.
‘오늘 모든 멤버의 모습에서는 광선유포에 대한 책임감이나 구도하는 숨결도 느껴지지 않는다. 도다 선생님이 오늘 이 모습을 보신다면 뭐라고 말씀하실까. 선생님과 나눈 맹세를 잊어버린 ’수호회‘는 이미 오합지졸에 불과하다.“(<수필 신· 인간혁명>)
수호회 멤버는 ‘같은 잘못을 두번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중심자 중 한 사람이던 요시다 겐노스케 씨는 이렇게 말한다.
“야외연수가 있기 석달 전부터 기리가미네에 선발대를 보내 사전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마침 청년부 결성 10주년을 맞이하는 때였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굉장한 기세를 접했고 어쨌든 필사적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승리!’라는 선생님의 일념을 부르짖으며 전진했습니다.”
시킨 것만 한다면 훈련이라 할 수 없다
만반의 준비가 곧 승리의 별
기리가미네에서 열린 연수 준비는 일찌감치 추진됐다. 캠프파이어용 장작은 두 달 전부터 준비해 불에 타기 쉽게 충분한 건조기간을 거쳤다. 취사용 큰 솥, 아궁이, 식기, 텐트 등 준비가 작착 진행됐다.
취사장은 실개천 근처에, 화장실은 캠프장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로 정하는 등, 지금까지 이케다 회장에게 받은 훈련을 되살려 결정했다.
7월 29일 오후, 기리가미네에 도착한 수호회 멤버는 곧바로 야외연수 준비에 매달렸다.
당시 이야기 - 다나카 미쓰요시 씨
저도 선발대의 일원으로 준비를 담당했습니다. 선배가 “좀 더 신속하게“라고 격문을 띄웠습니다. 전해에 실시한 이누보사키 연수와 분위기가 전혀 달랐습니다. 긴장감이 감돌았지요.
저는 선생님이 하신 지도를 떠올렸습니다. 1960년 6월, 쓰쿠지와 스기토 두 개 지부 합동간부회 때였습니다.
당시 저는 사회를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회합에서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손을 들었지요. 그 기백에 압도당한 저는 누구를 지명하면 좋을지 몰라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이 질문에 답하시는 동안 이번에는 혼란스럽지 않게 다음에 누구를 지명할지, 진행요원과 의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봐요, 젊은이. 끝났습니다. 다음은 어떻게 하나요?”
선생님 목소리였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됐습니다.
회합이 끝난 뒤 다른 진행요원과 함께 선생님에게 용서를 구하러 찾아갔습니다. 선생님은 “모두 훈련을 받지 않았군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수고했어요. 열심히 하십시오”라고 지도하셨습니다.
“훈련을 받지 않았다.” 선생님에게 적극적으로 지도를 구하는 자세가 약했던 것입니다. 다음날, 결심하고 선생님에게 지도를 받고자 학회본부로 갔습니다.
“잘 왔습니다. 오늘 와서 다행이네요 내일 왔더라면 내가 없을 뻔 했어요. 투쟁은 신속함이 중요합니다. 훈련은 스스로 자진해서 받아야 합니다. 시킨 것만 하면 훈련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시킨 것만 하면 훈련이 아니다.” 라는 지도를 떠올리며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고 진지하게 사색하며 준비했습니다.
‘신문지’ 배려
고와시미즈에 있는 캠프장은 해발 약 1500미터에 있었다. 캠프장 북쪽에는 와시가미네와 우쓰쿠시가하라 등이 보였다.
근처에는 뻐꾸기와 휘파람새가 울고, 초원에는 보라색 엉겅퀴나 분홍색 터리풀, 청보라색 체꽃, 흰색 꿩의 다리 등이 선들바람에 한들대고 있었다.
식사준비를 마쳤다. 식사라고 해도 돈지루와 밥, 통조림이 전부인 소박한 식단이었다.
그러나 쌀쌀한 저녁에 야외에서 하는 식사여서 따뜻한 돈지루가 맛있었다고 한다. 한창 식사를 하던 중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이야기 - 야부나카 요시히코 씨
저녁 무렵이 되어 내리기 시작한 비가 차츰 빗방울이 굵어지자 우리는 일단 텐트로 돌아왔습니다. 7월 하순이라고 해도 고원의 밤은 쌀쌀했고, 게다가 몸이 비에 젖어 더 추웠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감기에 걸리면 안 됩니다. 마키구치 선생님, 도다 선생님 때부터 내려온 전통인데, 추울 때는 신문지로 몸을 감쌌다고 합니다. 그러면 몸이 따뜻해집니다.” 하며 한 사람 한사람에게 신문지를 나눠주셨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정말 그랬습니다. ‘그저 신문지 한 장을 몸에 둘렀을 뿐인데 이렇게 따뜻해지다니.’ 하며 깜짝 놀랐지요.
청년은 ‘나의 보배’ ‘나의 목숨’
잠시 후 비가 그치자 연수를 다시 시작했다. 준비해 놓은 캠프파이어에 불을 붙였다. 장작은 활활 타올랐다. 그러나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 상황이 <수필 신·인간혁명>에 이렇게 씌어 있다.
“저녁 무렵 모두 캠프파이어를 에워쌌다. 그러나 변덕스러운 고원의 날씨는 이윽고 세찬 비로 변했다. 순조로운 때에는 추억이 적다. 고난이 있을 때에 만든 추억은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는 법이다.
젊은 지도자들은 그런 큰 비 속에서 깔고 앉았던 멍석을 우산 대신 쓰고 ‘비쯤은 대수롭지 않아.’ 하며 의기충천했다. 모두 흠뻑 젖어 춤을 추며 즐거워하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고난은 승리하는 인간을 만들기 때문이다.
줄기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나는 사랑하는 청년, 아니 제자에게 말했다.
‘나의 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분이 장래 광선유포를 위해,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세계의 본무대로 웅비하는 것이다.
그것이 도다 선생님의 염원이었다. 나도 전부 그것을 위해 행동하며, 그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삼아 진력을 다해 길을 열고 있다 ‥‥‥.’
그대들 청년은 나의 보배다. 나의 목숨이다. 나와 함께 큰 이상을 실현할 동지다.
절대로 약한 자신에게 패배하거나 하찮은 일에 실패하도록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도 나는 소중한 청년에게 당부할 수밖에 없다.”
세계 광포는 청년의 책임
젖은 셔츠
비 때문에 캠프파이어를 둘러싼 연수는 짧은 시간에 끝내고 흩어졌다. 회장의 셔츠도 흠뻑 젖었다. 그래도 회장은 격려를 멈추지 않았다. 숙소인 ‘싸쿠타장’ 넓은 방에 수호회 대표를 불러 질문회를 열었다. 청년들 수십 명이 기쁨에 넘쳐 모였다.
회장은 모든 멤버에게 당부했다. “젖은 셔츠는 벗지요. 우리는 가족이니까 탁 터놓고 이야기 합시다.” 회장도 셔츠를 벗고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하고 재촉했다.
당시 이야기 - 구로야나기 아키라 씨
저는 가장 먼저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당시 동서 베를린 문제로 미소 냉전의 긴장이 극도로 고조됐고, 핵전쟁의 위기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생각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현재 미소의 심각한 냉전 상황에서는 아무리 ‘세계 광선유포’라 해도 현실적으로 힘들지 않을까요?”
선생님은 대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세계광포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세계광포는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것은 청년부 여러분의 사명이자 책임이기도 합니다.”
이때 선생님이 우리 청년부에게 걸고 계시는 커다란 기대에 전율이 흘렀습니다.
선생님은 계속해서 종교의 오강(五綱)을 통해 가르쳐주셨습니다.
“핵전쟁이 시작되려 하는 이와 같은 때에 세계광포를 외친다 해도 확실히 현실성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종교의 오강에 비추어 볼 때, ‘때’나 ‘기근’이 갖춰지면 법은 반드시 넓혀집니다.
현재의 냉전도 영원히 지속될 리 없습니다. 하나하나의 국가들이 평화를 바라고, 그 나라에 사는 한 사람 한사람이 반드시 행복을 찾고 대화를 시작해 이 냉전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꼭 옵니다.
국민이나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의 기근도 변하는 법입니다. 대성인이 ‘때를 기다릴 뿐’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를 대비해 여러분은 세계 누구보다 실력을 쌓고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십시오.”
이케다 선생님이 세계광포에 거는 원대한 구상에 감탄하면서 우리가
짊어진 사명의 무게를 절실하게 실감했습니다.
당시 이야기 - 오카야스 히로시 씨
저도 손을 들고 선생님에게 질문했습니다. “긴박한 세계정세 속에서 어떻게 광포를 추진하면 좋을까요?” 선생님은 즉각 “좋은 질문이네.” 라고 흐뭇해하셨습니다.
당시 무역회사에 근무하던 저는 세계의 동향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베트남전쟁이 발발하는 등, 세계의 전도(前途)는 몹시 불안했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지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추진하는 광선유포는 세계의 항구평화를 실현하는 투쟁입니다. 그 광선유포를 추진하는 단체는 세계가 넓다 해도 우리 창가학회뿐입니다. 즉 세계평화를 여는 열쇠는 창가학회가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광선유포를 책임질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여러분 청년들입니다. 세계가 여러분의 성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투쟁하십시오. 그리고 실력을 쌓으세요.”
선생님의 진지한 열변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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