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7
신금철
그와의 해후에 밤잠을 설쳤다. 행여 헛걸음칠세라 며칠 전 알아낸 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소설을 지난 날씨는 찬 기운을 품었지만 쾌청하다. 미처 낙엽을 떨치지 못한 떨켜들의 안타까움이 찬바람에 파르르 떨고, 이미 들판을 지나 여행을 서둔 잎새들이 방향을 잃고 머뭇거린다. 휑뎅그렁한 들판은 그가 남긴 빈자리처럼 허전하다.
우리의 인연은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던 날부터 시작되었다. 내 뒷자리에 앉아 시험을 본 친구였다. 그도 나도 시골에서 온 촌뜨기였다. 동병상련이었을까? 우리의 인연은 중고등학교를 거쳐 40여 년을 이어가며 평생지기 친구로 지내자고 무언의 약속을 했다.
왜소한 나와 달리 그는 키도 크고 몸도 탄탄했으며 내가 갖지 못한 조건을 많이 가진 친구였다. 아버지, 6명의 동생, 경제적으로 풍족한 집안의 장녀였다. 나보다 한 살 아래였지만 의젓하고 배려하며 여유가 있어 부족한 나에게 도움을 주는 편이고, 나는 주로 받기만 했다. 아버지 없는 나를 딸이라 부르시던 친구 아버지는 하숙하는 친구를 보러 오시는 날이면 나도 함께 불러 외식을 시켜주셨다. 가끔 그의 집을 찾을 때면 동생들도 나를 언니, 누나로 불러주 어 형제 없는 나의 외로움 한구석을 채워주었다.
50여 리 먼 길을 기차로 통학하던 나를 위해 하숙을 하는 이모 댁으로 자주 불러 저녁을 먹게 해주고, 시린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자기 식구 한 끼 마련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 자주 친구를 데려오는 조카도 원망스럽고 눈치 없이 따라오는 내가 얼마나 눈엣가시였을까? 염치없던 그때를 생각하면 친구와 이모님에게 감사와 죄송함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부럽기만 했던 친구에게도 장녀의 무게와 부모님의 기대로 부담되어 고민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땐 속마음을 털어놓는 친구를 위로해주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고생하시는 어머니 때문에 힘들어하는 나를 위로해주는 건 늘 친구의 몫이었다. 친구가 대학에 실패하고 좌절했을 때 나는 내 일인 듯 괴로웠다. 그러나 친구는 의연하게 나의 합격을 축하해주고 친구 가족들도 축하해주었다. 진정한 가족애에 뭉클했다. 심지 굳고 심성 고운 친구는 상경하여 자신의 꿈을 접고 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동생들 뒷바라지에 장녀의 몫을 다했다.
부모님의 권유로 일찍 결혼한 친구는 훌륭한 남편을 만나 딸 둘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나도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부터는 서로의 집을 방문하고 만남을 이어가며 행복을 함께 공유하고 더 깊은 정을 쌓았다.
청천벽력이었다. 친구의 딸이 전화로 알려온 소식에 눈앞이 캄캄하고 무거운 돌덩이가 머리를 내려치듯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며칠 전 헬스장에서 쓰러져 의식불명이라는….’
서둘러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이미 초점 없는 눈동자, 본인의 의사는 아랑곳없이 밀어버린 민둥산의 머리, 관을 통해 생을 이어가는 의미 없는 생명줄, 감각도 감정도 없는 그의 손을 잡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만 흘린 채 친구를 위해 고작 기도 이외에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친구를 만난 건 영안실에서였다. 그의 나이 52세, 사랑하는 가족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사랑하는 남편, 두 딸과 이별의 인사도 못 한 채 천상에 올랐다.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받아들이며, 조용한 슬픔 속에 눈물을 가두고 가끔 흘려보낸 지 22년이 흘렀다. 지금도 제일 친한 친구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떠오르는 자매 같던 친구이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떠올린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무에 그리도 바쁘게 살았을까? 아니, 바쁜 게 아니라 나의 무성의함 탓이었다. 영혼이 사는 친구의 집을 22년이 넘도록 방문하지 못한 데 대한 변명의 여지가 없다. 어찌 이리도 무심했던가! 22년의 회한에 가슴이 먹먹했다.
11월은 위령성월이다.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달이다. 친구가 떠나고 몇 해는 그를 위해 미사를 드리고 미사 때마다 그의 영혼이 주님의 품 안에서 평안해지도록 기도를 올렸다. 늘 친구 집을 방문해야겠다고 벼르기만 했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 무관심했나 보다. 하나둘 지인들이 세상을 떠나고 이제 나이 들어 여기저기 아픈 신호를 보내어 병원 출입이 잦다 보니 친구 집 방문을 이제는 미룰 수 없다는 절박함에 어렵게 그의 집 주소를 알아냈고 벼르고 별렀던 그의 집을 찾아 나섰다.
그의 집이 가까워져 온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낼까? ‘미안하다, 그리웠다, 반갑다, 이제 자주 올게….’ 눈시울이 뜨꺼워졌다. 묵묵히 운전하는 남편 옆자리에서 두 시간 동안, 22년 동안 정지되었던 친구와의 추억을 소환했다.
안내도를 쥐고도 어렵게 그의 집을 찾았다. 그의 집은 윤슬이 반짝이는 팔당댐이 바라보이는 ‘천주교 소화묘원 1-137구역’이다. 무릎을 꿇었다. 삶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재회의 그날, 친구와 마주하면 용서를 빌고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약속했다. 세월은 슬픔도 지워주는 하느님의 은총일까? 만나면 엉엉 소리 내어 터져 나올 줄 알았던 그리움의 응어리들이 그저 소리 없이 눈물방울로 볼을 적셨다. 그가 말없이 내 눈물을 닦아준다. 여전히 너그럽고 다정한 친구다.
해후를 지켜본 마지막 잎새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스테파니아, 사랑해.” 나뭇잎 엽서에 짧은 손편지를 남기고 발길을 돌렸다. 성마른 가지초리에 새순이 돋을 무렵 다시 그의 집을 방문하리라. 새봄이 기다려진다.
첫댓글 천주교의 위령성월이 있군요.
불가에는 백중이라고 해서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죽음은 누구나 언젠가는 맞게 되는 일인데 나의 죽음은 잊기 쉬운가 봅니다.
1-317, 마음 아픈 숫자가 되었습니다.
한국수필에서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오랫동안 미루던 친구와의 해후에 조금은 미안함을 덜었습니다.
늘 선생님의 격려 말씀에 글 쓰기에 용기가 생깁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먼저 떠난 친구를 찾았을 선생님의 마음이 제게도 아픔으로 전해옵니다. 가슴이 먹먹합니다.
김경순 선생님,
반가워요.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