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산, 황매산, 바래봉, 제암산···
웬만한 등산 마니아라면 한눈에 알아봄직한 철쭉 명산들이다. 이 틈에 철쭉을 공통분모로 축제를 벌이는 곳이 있다. 주왕산 수달래축제다. 철쭉을 테마로 하고 있지만 테마와 형식은 크게 다르다. 위의 산들이 수백만평 군락지의 위용을 기반으로 한 물량공세라면 주왕산은 계곡을 따라 핀 수달래의 짙은 색감과 여운이 주는 정서적 호소를 특징으로 한다. 황매산처럼 레드카펫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위인의 넋을 기리는 애수가 있고 바래봉처럼 융단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망명군사들의 회한을 풀어주는 애도가 있다.
#계곡마다 봉우리 마다 주왕의 설화=옛 신라의 산악 오지에서 발견한 주왕의 전설은 생경스럽다. 주왕은 중국 당나라 때 패망했던 진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반역을 일으킨 주도(周鍍)라는 인물. 왕조 복위에 실패한 주도는 신라까지 망명을 오게 된다. 당시 당(唐)과 우호관계였던 신라는 마장군 형제를 시켜 이들을 진압케 했다. 패주하던 주도는 주방천(周房川)에 선혈을 뿌리며 주왕굴에서 최후를 맞는다.
이 전설은 적어도 이치적으로는 난센스다. 중국에서 쫓겨난 반군들이 인접한 백제를 놔두고 멀리 산간 내륙까지 온 것도 이상하거니와 당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신라로 온 것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 사실여부에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덕분에 주왕산엔 주도와 관련된 흥미로운 전설들이 산 곳곳에 흩어져 있다. 신라 토벌대와 주왕이 격전을 치렀다는 기암(旗巖), 주왕의 아들과 딸이 달구경에 매료 되었다는 망월대, 주왕이 갑옷과 무기를 숨겼다는 무장굴···. 산 입구 대전사(大典寺)도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을 추모하게 위해 건립된 사찰이다.
주왕과 수달래의 전설은 오늘 주왕산을 있게 한 정신적 근거다. 수달래는 산철쭉의 일종. 주왕이 화살을 맞고 흘린 피가 주방천을 적신 후 철쭉무리가 계곡을 붉게 수놓았다는 전설에서 유래 되었다. 수달래는 수단화(壽斷花) 또는 수단화(水丹花)라고 불린다. 전자가 주왕의 짧은 삶을 애도하는 추모의 성격이라면 후자는 계곡을 붉게 물들인 봄 정경에 대한 묘사다.
주왕산은 설악산, 월출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바위산으로 유명하다. 각종 기암과 봉우리들이 퍼레이드를 이룬다 하여 석병산(石屛山)으로도 불렸다. 절골, 가메봉, 금은광이 등 많은 산행코스가 있지만 대전사에서 3폭포에 이르는 십리길이 등산로의 근간이 된다.
#절골·가메봉 등 등산코스 다양=취재팀은 대전사를 출발하여 1, 2, 3폭포를 지나 후리메기 삼거리-주왕산 정상-대전사로 내려오는 코스를 잡았다. 등산로 초입 대전사 경내엔 아직 벚꽃이 한창이다. 대구와 세 시간 남짓한 거리지만 개화시점은 1주일 이상 차이가 난다. 위도 차이를 실감한다.
대전사를 지나 주방계곡을 따라 걷는다. 20분 쯤 왔을까. 기암을 선두로 주왕산의 기암지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암봉 숲을 지나면서도 삭막하지 않고 아늑한 느낌을 받는 것은 산과 계곡을 감싸고도는 풍부한 물 때문이다.
팔각정에서 1폭포 쪽으로 진행한다. 중간에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급수대와 만난다. 신라시대 왕위 쟁탈전에서 밀린 김주원은 급수대위에 안가(安家)를 짓고 피신했다. 보기에도 아찔한 벼랑에 거처를 잡았으니 쫒기는 신세가 얼마나 곤궁했을까. 당연히 이곳엔 물이 없으므로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길었다 하여 급수대(汲水臺)라는 이름을 얻었다.
주방천은 철마다 개성있는 경치로 산꾼들을 유혹한다. 곱기로는 옥류사이로 총천연색 단풍들이 떠다니는 가을이 최고지만 파스텔톤으로 펼쳐 놓은 수달래를 보면서 오르는 봄 산행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학소대, 시루봉 사이에서 깊게 공명(共鳴)되던 1폭포, 계류의 힘찬 낙차가 느껴지단 2폭포, 거친 바위와 옥색 물빛이 청명한 대비를 이루던 3폭포를 돌아 일행은 후리메기봉으로 오른다. 3폭포에서 반시간쯤 거리에 있는 후리매기 삼거리는 옛날 주왕의 군사들이 훈련했던 장소. ‘훈련목’으로 부르다가 갈림길이란 뜻의 기(岐)와 만나 후리매기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상에서 내려다 본 주왕산 속살=사창골의 맑은 계류를 따라 오른다. 오른쪽으로 이정표를 따라 오르면 오늘의 최고 난코스 칼등고개다. 지루한 경사면이 끝도 없이 계속된다. 가메봉 쪽 울창한 능선을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등산로엔 뿌리 채 뽑힌 소나무들이 곳곳에 널려있다. 1997년 태풍 ‘위니’때 희생된 소나무들이다. 나무 하나가 쓰러지면 수많은 곤충, 미생물들이 고사목을 자양삼아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드디어 정상이다. 사방으로 막힌 정상은 시원한 눈 맛도 없이 그저 밋밋하다. 표지석만 덩그러니 정상을 지키고 있다. 가이드는 이제부터 주왕산의 나신(裸身)들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며 호들갑을 떤다. 말대로 주왕산의 속살들이 곳곳에서 숨은 모습을 들어내기 시작한다. 밑에서 우리를 압도하고 고개를 아프게 했던 거봉들이 이제 발밑에서 온순하게 우리의 시선을 맞는다. 시루봉, 급수대도 미니어처처럼 작아졌다. 국립공원에서는 중간 중간에 전망대를 설치해 기암, 장군봉은 물론 멀리 금은광이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하산을 서두른다. 끝 모를 내리막길이 하염없이 이어진다. 단조로운 하산 길에 진달래가 수줍게 배웅을 한다. 인파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어느새 산밑에 이르렀다. 이내 대전사의 벚꽃들이 옅은 황혼 속에서 은빛으로 출렁인다. 계곡을 점점이 물들인 수달래가 주왕의 넋이라면, 석양 대전사 벚꽃의 낙화는 대전도군과 백련의 혼백이리라.
5월, 철을 늦춰온 수달래가 막 개울가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무채색 일색이던 산에도 신록이 제법 푸르렀다. 이제 곧 철쭉산행 시즌이 시작된다. 전국 곳곳의 능선은 ‘화염’(花艶)으로 덮일 것이다. 양(量)이 선(善)은 아니고 다수가 찾는다고 항상 옳은 길은 아니다. 인파를 피해, 군락의 번잡을 피해 조용히 철쭉을 관조하고 싶다면 주방천 계곡으로 오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