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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밀알감리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대구밀알감리교회,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아 편지로 보낸 아시아의 7교회는 현재 터키 남부 지역 일대에 위치해 있다. 당시 7교회 이외에도 골로새, 갈라디아, 히에라볼리 교회등이 있었다.
<두아디라교회>
티아티라고 하며 현재명은 아크히사르이다. 당시 이 도시에는 트림나스라는 무당이과 무녀(巫女)들이 많아 기독교인들을 유혹했고 또한 시장 조합을 중심으로 우상 숭배와 음란한 제사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두아디라 염색 기술, 두아디라는 옷감 기술이 뛰어난 곳으로 빌립보의
루디아도 두아디라 출신으로 자주 옷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되었다
<버가모교회>
버가모왕국에는 토지와 풍산의 여신 데메테르 신전터가 남아있는데 기원전 3세기 초에 세워졌으며 로마시대에 개조 되었다. 이곳에는 "알지못하는 신에게" 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버가모왕국 입구를 들어서면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아타로스1세와 유메네스 2세의 헤론 (신성한 지역)이다. 헤론 앞의 것들은 가게들이었다. 그 앞을 지나면 제우스 신전터가 나오는 데 지금은 불행히도 소나무 3그루만 있다. 제우스 신전(로마명으로 쥬피터)은 주전 180년에 유메네스 II세에 의해서 건축된 신전으로서 세계 7대 명물 중의 하나였다.
이 신전은 길이 27m, 높이 12m나 되는 웅대한 신전으로 온통 고대 조각예술로 장식되었다. 이 곳의 유물은 독일의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이 되었기 때문에 이 신전의 유물들은 모두 동베를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헬라 신화에 의하면 제우스 신은 신 가운데 최고의 신이고 전 인류의 통치자이며 기후를 주관하는 신으로 여겨지고 제우스 신의 출생지가 바로 버가모라고 알려지고 있다
이 신전은 페르가몬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으로 기원전 4세기 경에 지어졌다. 이 신전은 유메네스 2세에 의해 북쪽과 동쪽면에 2층의 화랑을 갖게 되었다. 신전으로 통하는 입구는 동쪽 화랑의 남쪽 끝에 위치해 있었는데, 현재 이 대문의 조각들을 사용해 베를린에 그대로 복원되어있다.
이것을 근거로 해볼 때 화랑의 아래층 기둥은 도리아식이고 위층은 이오니아식의 기둥으로 되어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기둥의 석가래에 "유네메스 왕으로부터, 그에게 승리를 내려준 아테나 여신에게"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신전 마당의 중앙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조각이 세워져 있었다고 전해지며 마당에는 갈라티아인들로 부터 노략한 전리품들을 진열했다고 한다.
제우스신전을 돌아서 오른 쪽으로 가면 극장이 나온다. 이 극장은 10,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극장의 제일 밑의 오른쪽 방면으로 디오니소스의 신전을 볼 수 있다. 연극이 원래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에 대한 축하의식에서 발생한 것이기에 일반적으로 디오니소스 신전은 극장 가까운데 세워지기 마련이다. 또한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동물을 희생시켜 행해지는 제사의식도 이 신전에서 거행되었다.
이 신전은 카라칼라 황제가 원정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에 배의 사고로 다쳐 아스클레피온에서 치료를 받고 완쾌된 후 그 보답으로 지어진 것이다.
버가모왕국 트라얀 황제신전, 당시 버가모는 소아시아 지역 수도였고 아크로폴리스(왕국)안에는
여러개의 신전(제우스, 디오니소스 등)과 함께 트라얀 로마 황제 신전이 있었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로마명은 옥타비안) 황제를 신격화하기 위해서 주후 30-40년 사이에 아시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세워졌습니다. 트라얀 황제의 신당은 주후 98년에서 117년 사이에 건축되었고, 세베투스 황제를 숭배하기 위해 서 주후 193-211년 사이에 건축이 되어졌습니다.
하드리안 황제 때 완공한 이 신전은 지형상 깍아진 V자 형의 절벽사이에 걸쳐 짓게 되었다. 따라서 지형을 평평히 고르기 위해 신전 앞부분에 축대를 쌓을 수 밖에 없었다. 주위의 다른 건축물들이 회색이나 분홍의 대리석을 사용한 반면 이 신전은 선명한 흰 대리석을 사용함으로써 산 밑의 평원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 보인다. 신전의 3면은 모두 기둥으로 둘러싼 화랑이 있었으며 신전의 안쪽 마당에는 제단이 세워져 있고 제단의 양쪽 끝에는 황제의 조각을 세워 놓았으나 오늘날에는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다.
버가모 시내에 있는 세라피스 신전은 원래 이집트 신이기 때문에 "이집트신전"이라 불리기도하며 신전 건물이 붉은 벽돌로 지어져서 "붉은 궁전(The Red Hall)"이라고도 한다.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된 후 요한 계시록의 버가모교회에 바쳐지기 위해 바닥을 높여 교회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붉은 교회(The Red Basilica)" 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신전의 26m x 60m 로 되어 있으며 오늘날 건물의 상층부가 붕괴되어 있지만 남아있는 벽의 높이가 19 m에 이르는 대형 신전이었다.
신전의 동쪽 끝에 남아있는 2개의 도움양식은 로마시대에는 보기 드문 건축 양식으로써 오늘날한 쪽은 이슬람 서원으로, 다른 한 쪽은 박물관의 창고로 사용하고있다. 이 신전의 가장 중요 부분은 3면이 기둥으로 둘러 싸여 있는 데, 이색적인 것은 이 기둥이 당시에 흔했던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이 아니라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기둥으로 되어 있는 점이다. 이 조각 중 하나는 남성의 모습 하나는 여성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이집트의 신인 이시스와 세라피스 신으로 추측된다.
또 한가지 특징은 강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즉 이 신전 밑에는 대각선으로 셀리누스 강이 흐르고 있는데 직경 9m의 토관 2개를 묻어 강물이 흐를 수 있도록 했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평평하게 했다. 이 건물은 기독교 공인 후 바닥을 높여 버가모 교회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약 1~2m 높이의 벽만이 옛날의 교회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세라피스(Serapis)
세라피스는 마케도니아 통치시기(BC.305-30)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국가신이다. 그는 머리 위에 바구니를 얹은 곱슬 머리에 턱수염이 있는 남자로 묘사되어 있다. 멤피스의 아피스 수소에 대한 예배에서 유래한 세라피스 숭배의 주된 중심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의 학문과 상업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였다.
그곳에 있었던 세라페움(Serapeum : 세라피스의 신전)은 세계의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으며, 기적적인 치료법을 찾아나선 순례자들을 먼 지역으로부터 끌어들였다. 세라피스는 첫째로 질병의 치유자이며, 운명을 초월하는 신이고, 오시리스로부터 지하세계의 신격을 계승한 신이다
세계 최초로 정신치료를 실시한 아스크레피온(ASKLEPION) 병원이다. Asklepions은 아폴론의 아들로 건강과 약의 신이었다. 버가마에 있는 Asklepion는 이 신의 이름의 딴 의료센터를 말하며 초기 에게문명을 꽃 피웠던 페르가몬의 중요한 의료센터였다. 이 곳은 다른 병원들과는 치료방법이 다르다. 물과,진흙,스포츠,연극 그리고 도서관 등으로 병을 고쳤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현재도 매년 연극이 공연되고 있다. 입구 근처의 좌측 건물은 Asklepions 사원이다.
이 사원은 AD 150년에 건강의 신의 이름으로 기증되었다. 지붕은 돔으로 되어있으며 신전의 벽은 무려 3M나 될 정도로 두텁다. 내부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BC 4세기에서 AD 세기까지 번성한 이 병원은 대지진으로 파괴되었으며 아직도 유적이 남아 있다. 166년경 전염병이 이 페르가뭄을 휩쓸었을 때 제우스 제단 근처에서 발견된 한 비문에는 "오, 위대한 제우스 신이여, 아스클레피우스(건강의 신)를 섬기는 우리 도시를 파괴하는 이 재난을 쫓아 주옵소서"라고 써있었다.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많은 비문들은 당시의 치료법을 자세히 적고 있다. 하드리안 황제시대 만들어진 양쪽에 기둥이 늘어선 화려한 대리석 도로가 있는데 폭 20m, 길이 820m로 길 양편에는 15m의 석주(石柱)가 세워져 있다. 이 길은 소위 "성스러운 길"이라 불렀다. 환자들은 아스클레피온에 들어오면 우선 맨발로 성스러운 길의 대리석 바닥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이 과정이 벌써 치료의 시작이다. 죽음의 신인 하데스로부터 멀어지고 건강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신에게 가까이 간다는 믿음 때문에 안도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정원 한 가운데서 흘러나오는 샘물로 목욕을 한다.
지금도 흐르고 있는 이 물의 성분을 조사한 결과 치료에 도움이 되는 방사능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이 판명되었다. 목욕이 끝나면 환자는 지하터널을 통해 치료실로 들어 가는데 80m 길이의 이 지하터널은 매우 조용하고 어두우며, 샘물에서 물이 지하터널의 입구 계단을 따라 흘러 들어 오면서 작은 소리를 냄으로써 신비로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게다가 천정에 나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의사들이 작은 소리로 환자들에게 속삭인다. 즉, 환자들에게 생의 의욕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다. 또 의사들은 환자들의 꿈을 해몽해 주기까지 하는데 이 경우도 역시 치료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말한다. 사티로스나 갈레누스와 같이 유명한 의사들이 이곳에서 활약했으며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Hypocrates)도 이곳에서 출생했다 한다.
필라델피아는 현재명으로 알라세히르이다. 주님께 칭찬만 받았던 교회로 초대
교회 당시 교회는 크지 않았으나 디오니소스 신전과 황제 숭배의 핍박을 이겨낸 교회였다. 현재의 유적은 동 로마 제국 비잔틴 시대(AD600년경)에 세운 것으로 성 요한의 교회로 세워졌다.
현 빌라델비아 지역 시내, 어린이날을 맞아 시내 학생들이 모두 모여 행사를 하기위해 행사장으로 고적대와 학생들이 가고 있다
사르디스라 하며 현재명은 살리히리이다. 사데 교회는 1세기 중반에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사도 바울의 제자이며 일곱 집사 중의 하나였던 클레멘트가 사데 교회의 첫 감독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사데 교회는 이 도시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크게 부흥 하였다가 나중에는 쇠퇴하는 우여곡절을 경험한다. 사도 요한이 사데 교회에 편지를 쓸 당시의 교회지도자는 누구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처음에는 아데미신전을 빼앗아 예배드리다가(4세기경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권세를 얻었을 때쯤)후에 신도의 숫자가 작아져 아데미신전 담 밖에 돌담을 싸놓고 예배드린 것 같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 당시 신도 수는 매우 많았으나 영적으로는 미약하였다. 때문에 "너는 살아있다고 말하나 실은 죽어가고 있다!"란 책망을 받았다. 사데 지역은 황금이 많은 지역으로 재물의 유혹이 있었고 또한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어 신앙생활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현재의 사데교회 유적은 아데미 신전 뒤편에 비잔틴 시대에 벽돌로 지은 교회이다.
라오디케아는 현재명도 라오디케아 이다. 당시 라오디케아는 양모가 풍부하고 안약 등 의약품이 유명했으므로 재물의 유혹과 생활의 편안함으로 미지근한 교회로 책망을 받았다. 특히 라오디케아 지역은 물이 좋지않아 멀리 히에라볼리 파묵칼레로 부터 관을 통해 온천수를 공급받았고 또한 골로새로부터는 냉수를 공급받았으나 오는 도중 물이 식어 미지근 하게 되었다.
스미르나 라고 하며 현재명은 이즈밀 이다. 터키 남부의 미항으로큰 도시이다. 현재의 교회는 아시아 7교회 중 유일하게 건물이 있는 곳으로 황제 숭배를 거부해 순교한 서머나 감독 폴리캅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이다. 당시 서머나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고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잔학하게 탄압하였다. 또한 로마 황제 숭배 거부로 서머나 교회는 많은 재정적 궁핍을 겪었다. 그럼에도 서머나교회는 모든 핍박과 유혹을 물리치고 열렬한 신앙을 지켜 가장 모범적인 교회로 칭찬을 받았다.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직계 제자였으며, 그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았던 폴리캅은 115-116년까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다. 156년에 서머나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지방 총독인 스타티우스는 빌라델비아 등지에서 잡아 온 11명의 기독교인들을 원형 경기장에서 야수의 먹이로 희생시켰다. 이때 폴리캅은 밀고로 체포된 상태에 있었는데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스타티우스는 그를 살리기 위해 그의 신앙을 부정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폴리캅은 '86년간 나는 그분을 섬겨 왔고, 그분은 나를 한번도 모른다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나의 주님을 모른다고 하란 말인가?' 하고 거절하였다. 군중들은 그를 사자밥이 되게 하라고 외쳤으나, 총독은 경기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에 성이 난 군중들은 물러가지 않고 그를 장작더미에 올리라고 외쳐댔다. 할 수 없이 화형에 처했는데 군중들은 '이 사람은 우리 신의 파괴자다. 기독교인들의 아버지다' 라고 외쳤다는데 지금 생각하면 기독교인으로서 최대의 찬사가 아닐까? 오늘날에도 그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그가 세웠던 교회 위에 현대식으로 폴리캅 기념교회를 세우고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머나 시내
에페소스 라고 하며 현재명은 셀주크이다. 물론 에베소 유적지는 따로 있다. 당시 에베소는 실질적인 소아시아 지역의 수도라 할 만큼 교역과 교통, 정치와 종교의 중심도시였다. 로마의 독립 행정관이 다스렸고 순회재판소도 있었다. 에베소 유적지에는 수천명이 들어가는 야외 음악당과 셀슈스 도서관, 법원, 병원, 사우나 탕과 아고라 지역이 있었고티베리우스, 트라얀, 하드리안, 도미시안 등 로마 황제 신전과 함께 아테나, 아데미 신전도 있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시 3년을 머물러 세운 교회로 현재의 에베소교회 유적지는 셀죽에 있는 사도 요한 무덤교회를 말하고 있다. 셀죽성 아래에 자리잡은 사도요한 무덤교회는 아래쪽에 아데미 신전터가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비잔틴시대에 세운 교회이다.
이 성안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살았고 그 성안에 하나님의 성소가 있다.
지금은 아랍의 모스크가 되어 있다. ▼
외각의 성 길이가 동서만불 각각 1km씩 4km입니다.
원래는 정사각형으로 지어졌지만 수많은 전쟁으로 지금은 정사각형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안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살고있고,
원래는 동서남북에 3문씩 12문으로 지어져서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 12개의 문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동성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12개문중 8개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역시 전쟁으로 예루살렘성안에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져있는데
지금은 아랍의 성전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의 종교구역
요단강
요단강은 수원인 북쪽의 갈릴리 호수로부터 출발하여 사해로 흘러드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영구하천이다. 이 강은 동쪽의 요르단지역과 서쪽의 가나안 땅을 나누는 자연적인 경계선이 기도 하다. 요단강 주변 지역은 삼단식 계단구조로서 맨 위쪽은 경작과 취락이 가능한 평지 로서 고르라고 불린다. 중간 지대는 사막이나 다름없는 불모지이다. 맨 아래쪽은 요단강가로 조르라고 불리는 밀림지역이 형성되어 맹수가 출연하는 지역이었다(렘 49:19). 갈릴리~사해까지는 100km 이다. 사행천인 요단강의 길이 320km(비교: 한강 514km)이다. 지질과 지형을 보면 1) 범람원, 충적토이다. 렘 12:5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 하겠느냐. 욥 40:23 하수가 창일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 강이 불어 그 입에 미칠지라도 자약하니 2) 물이 부족하고 여름에는 50도를 기록하는 무더운 날씨해서 거주지로는 적당하지 않다. 강의 물은 조르(zor)라는 덤불과 낮은 지역으로 인해 거주지로 이용하기가 어렵다. 3) 요르단의 야수, 정글 지역이다. 렘 49:19 보라 사자가 요단의 수풀에서 올라오는 것같이 그가 와서 견고한 처소를 칠 것이라 내가 즉시 그들을 거기서 쫓아내고 택한 자를 내가 그 위에 세우리니 나와 같은 자 누구며 나로 더불어 다툴 자 누구며 내 앞에 설 목자가 누구뇨 (3) 홍해만큼이나 건너기 어려운 강 강은 해수면보다 낮다. 성경상으로 요단강은 요단강 도하(수 3)사건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강을 건넌 때는 보리를 수확하는 시기이므로(수 3:15) 3월이나 4월로서 봄이었다. 요단강은 평상시에는 폭이 약 27-30m이며 깊이는 약 1-3m이지만 봄에 늦은 비가 내리면 요단강 하류부근은 강물이 넘쳐 홍수를 이루게 되어 그 폭과 깊이는 더해지고 급류를 이룬다. 이때 강을 건너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아마도 여리고성의 왕이 이스라엘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고도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은 그 무렵에 강을 건넌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나 좀더 건너기 쉬운 상류 쪽에 군사들을 배치해두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쪽의 평지를 내려와 밀림지대를 통과하고 마른 땅이 된 요단강을 건너 다시 여리고 평지를 향해 올라가야 하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것이다.
요단강 서안지역
요단강과 사해 서쪽지역에 해당되는 요단강 서안지역은 그 면적이 5860㎢정도이며 현재 210여만명의 아랍인이 그곳에 살고 있다. 요단강 서안지역은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영토 반환의 핵심 지역으로서 팔레스타인의 대이스라엘 테러가 계획되고 감행되는 지역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이 대대적인 테러범 소탕작전을 벌이는 지역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사마리아 벧엘 헤브론과 같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를 순례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테러 때문이다.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요단강 서안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혹은 무력 행사 등 테러를 서슴지 않는다. 이유는 관광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간접적으로 돕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중동평화회담의 핵심 사안인 요단강 서안지역으로부터 이스라엘군의 철군 문제는 다른 중동평화문제와 마찬가지로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요단강 서안지역에 대한 강제 점령은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선언후 요르단에 의하여 감행되었다.요르단은 요단강 서쪽 지역과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이스라엘과 대립하였다.그러나 1949년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소위 ‘녹색선’(the Green Line)이라고 불리는 경계선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요단강 서안지역’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으며 이곳에 아랍인들이 많이 이주하였다.그런데 요르단이 이스라엘과의 휴전협정을 어기면서 1952년 이 요단강 서안지역을 일방적으로 요르단 영토에 편입시키고 거주하는 모든 사람에게 요르단 시민권을 부여하였다.그러나 이스라엘은 1967년 6일전쟁에서 완승을 거두고 요단강 서안지역과 동예루살렘을 점령한뒤 동예루살렘은 자국에 합병시켰으나 ‘요단강 서안지역’은 합병하지 않고 단지 군사적 점령지역으로 남겨두었다. ‘요단강 서안지역’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베긴 총리 정부가 요단강 서안지역에 대규모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이스라엘 주택성장관은 현 총리인 샤론이었다.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한 결과 요단강 서안지역에는 140여곳의 정착촌이 건설돼 20여만명의 유대인들이 살게 되었다.1978년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맺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도 요단강 서안지역에서의 팔레스타인 자치권 확보를 위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으나 그 목표는 달성되지 못하였다. ‘요단강 서안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이 대이스라엘 무장 테러를 시작한 것은 1982년 ‘레바논 전쟁’ 이후부터이다.레바논 전쟁은 레바논을 거점으로 테러를 일삼는 PLO 본부를 섬멸하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의도가 기폭점이 됐다.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무장 폭동을 일으켰고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요단강 서안지역에 군사계엄령을 선포하고 병력을 증가시켰다.요단강 서안지역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극한 대립은 점점 고조되었으며 특히 1987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민족봉기(인티파다)가 발생했을 때 요단강 서안지역은 인티파다의 중심지가 되었다.
1993년 미국 워싱턴에서 체결된 ‘오슬로 평화협정’은 이러한 양측의 첨예한 대립관계를 종식시키는 듯하였다.이 평화협정에 의하면 요단강 서안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단계적으로 요단강 서안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을 1998년까지 철수하고 요단강 서안지역에 대한 모든 권한을 팔레스타인에게 넘겨주어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이 자치정부를 수립하게 한다는 계획이었다.평화협정문에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여리고로부터 철수하는 시점부터 5년간의 과도기간을 가지며 과도기간 3년안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최종협상을 하되 그 협상에서 예루살렘 문제,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정착촌 문제,국경문제 등을 다룬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평화협정에 조인하면서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자치정부가 테러와 그밖의 모든 폭력행위를 배격하고 그 위반자를 징계해서 팔레스타인내의 모든 구성원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문제 해결을 위한 최종 협상과정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현격한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즉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가 보장된 이후에 요단강 서안지역을 팔레스타인에게 돌려주겠다는 ‘선안보 후반환’을 주장한 반면 팔레스타인측은 ‘선반환 후협상’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996년에 들어서면서 팔레스타인의 대이스라엘 테러행위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수단에 대한 자살테러가 감행되면서 이스라엘 국민은 팔레스타인측의 평화협정 준수 의지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반면 팔레스타인측은 이스라엘이 선안보를 주장하는 것은 영토를 반환할 의사가 없기 때문이고 그 때문에 테러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모든 책임을 이스라엘측에 떠넘겼다.
이러한 양측의 뚜렷한 입장 차이는 수십차례의 평화회담에도 불구하고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이러한 과정에서 2000년 7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개최된 최종 협상에서 양측이 아무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 하자 같은해 9월 ‘요단강 서안지역’을 중심으로 제2차 인티파다가 일어났고 이에 이스라엘 안보에 위협을 느낀 이스라엘의 에후드 바라크 총리는 2000년 10월22일 중동평화회담의 전면 중단을 선언하였다.2001년 2월 강경파인 샤론이 이스라엘 총리로 집권하였고 계속되는 팔레스타인의 테러 행위를 뿌리뽑기 위하여 그 동안 이스라엘 군대가 철수해 있었던 ‘요단강 서안지역’에 대한 재점령에 나섰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난 3월 예닌 사태가 발생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상호 불신의 골이 깊기 때문이다.서로 책임을 공감하기보다 국내 정세에 따라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평화는 요원하다.진정한 평화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양측간의 상호 신뢰회복이 선결과제이다.
예루살렘에서 세겜길을 따라 약 60Km지점에 잘 알려진 세겜이 있다. 세겜의 뜻은"목덜미"란 뜻으로, 세겜은 에발산과 그리심산을 양쪽 어깨에 메고 있는 듯이 두 산 사이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세겜은 또한 나블러스라고 불려지고 있다. 나블러스는 로마 시대부터 쓰여진 이름으로 “새로운 도시”라는 뜻이다. 오늘날 세겜은 요르단 서안(West Bank)의 팔레스틴 지역에서 가장 큰 아랍인 도시로서 아랍민족주의 중심지이다. 따라서 유대인과 아랍인과의 갈등이 가장 심하게 대두되고 있는 점령지로서 시내 곳곳에 이스라엘군의 삼엄한 경계가 이루어지고 있다. 세겜은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주전 1850년경에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이곳 세겜에 이주해 왔고(창12:6-7), 그의 손자 야곱은 천막과 제단을 세우기 위해 땅을 매입하였다(창33:18-19). 야곱의 딸 디나는 세겜에서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거민들을 살육함으로서 디나에 대한 보복을 하였다.(창34장) 요셉의 유언대로 출애굽할 때 가져온 요셉의 시신을 세겜에 매장하였다(수:24:32).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을 세겜에 모아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였다(수24장). 주전 9세기에 북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은 수도를 세겜에서 사마리아로 옮김으로서 세겜은 더 이상 발전하지는 못했다. 주전 722년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세겜에 앗시리아인들이 대거 이주해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겜 사람들은 이민족과 피가 섞이게 되었고 이로 인해 남 유다 유대인들은 혼종이 된 사마리아인들을 거절하였다. 이때부터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독자적인 종교생활을 다지기 시작하였고 모세 오경과 여호수아서만 성경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적대시하게 되었다. 신약시대에 빌립, 요한, 그리고 베드로는 세겜 이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행8:4-5). 비잔탄 시대에 세겜과 그리심산에 교회가 세워졌다. 1948년 독립당시 세겜은 요르단에 속했었으나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점령지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헬몬산
헬몬산 (Mt. Hermon)
이스라엘의 최고봉인 헬몬산은 그 정상 높이가 2814m이다. 헬몬산이 높이 융기되면서 동반적으로 주변에는 계곡이나 분지 등과 같은 낮은 지역이 생겼다. 즉 북서쪽의 리타니계곡, 남서쪽의 이온계곡, 남쪽의 훌레계곡, 그리고 북동쪽의 다메섹분지 등은 모두가 헬몬산 주변에 위치한 낮은 지역들이다. 헬몬산과 지형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곳은 북쪽의 안티레바논산지에 속하는 산지의 한 지류이다. 헬몬산의 폭는 약 30km이며, 연중 약 1500mm 이상의 강우량이 기록되는 지역이다. 헬몬산의 강우량은 대부분이 눈으로 내리는데, 겨울 동안 내린 눈은 이른 여름철까지도 녹지 않고 쌓여 있다. 여름이 되면서 서서히 녹은 헬몬산의 눈들은 지표면 아래로 스며들어 헬몬산 주변의 샘들을 통하여 다시 분출된다. 이러한 샘들은 남쪽의 요단강, 북쪽의 리타니강, 그리고 동쪽의 다메섹으로 흐르는 강의 수원지가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헬몬산은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었다. 모세나 여호수아에게 헬몬산은 눈 앞에 두고 있는 가나안 정복의 최북단 지역이었다.(신 3:8; 4:48; 수 11:17; 삿 3:3) 아모리사람들은 헬몬산을 '스닐'(Senir)이라고 불렀으며, 시돈사람들은 이 산을 '시룐'(Sirion)이라고 불렀다.(신 3:9) 이러한 지명들은 이집트의 저주문서나 우가릿 문서에서도 자주 언급이 되고 있다. 기원전 1330년경 히타이트왕과 수리아왕 사이에 체결된 어느 계약 문서에는 계약 체결 증인으로서 레바논의 신들과 시리온의 신들과 더불어 헬몬산이 언급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를 이루고 있는 헬몬산 주변의 우거진 숲들, 산기슭에 위치한 여러 수원들, 그리고 눈으로 덮여있는 정상의 모습 등은 고대 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경외심을 일으켜 주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헬몬산과 관련하여 유명한 성소들이 자주 언급된다. 사람들이 신탁을 얻으려고 찾아 왔던 '벧마아가 아벨'(삼하 20:15, 18)도 헬몬산 근처의 지역이였다. 여로보암 시대에 거대한 신전이 세워진 단(왕상 12:29; 왕하 10:29; 암 8:14)과 헤롯이 아우구스터스를 위하여 세운 로마 황제 숭배 신전이 있었던 가이사랴빌립보 등도 모두가 헬몬산과 관련된 지역들이다
요단강의 수원지 나할 헬몬 (나할 바니아스)
훌레계곡의 북동쪽에 위치한 헬몬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나할 헬몬'은 헬몬산 기슭의 바위들 사이를 뚫고 나오는 거대한 샘에서 시작된다. 나할 헬몬의 주변에는 물가에서 자라는 나무들로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는데, 헬라시대 이곳에는 '판'이라는 자연신을 숭배하는 신전이 세워졌었다. 그런 것과 관련하여 현재 이곳을 '바니아스'라고 부른다. 신약시대 이곳은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가 있었다. 좁은 협곡을 따라 흐르는 나할 헬몬은 경사가 급한 지역에서는 폭포를 이루기도 한다. 이 강은 남서 방향으로 흐르면서 '나할 단'을 만나게 되고, 다시 '나할 스닐'을 만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할 헬몬을 요단강의 가장 중요한 본류로 간주하기도 한다.
아겔다마
Akeldama. '피 밭'이라는 뜻으로 예루살렘 성곽 바깥쪽에 있는 이방인들을 위한 묘지의 이름이다. 가롯 유다가 은사 예수를 판돈으로 산 밭이다(행1:19). 지금은 그 소재를 알지 못하나 전설에 의하면 예루살렘 서남 힌놈의 골짜기 안에 있는 학에둠 인듯 한데 실로암에서 가깝다
베드로의 수위권교회
베드로 수위권교회
이 곳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에 다시 오셔서 고기 잡는 어부로 되돌아와 있는 베드로에게 나타나 "네가 이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시면서 "내 양을 먹이라"고 당부하시던 곳 (요 21:1 ~ 23)으로 작은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4게기 후반에 세워진 비잔틴 교회의 벽면을 보존하면서 1933년에 해변가에 다시 세워진 이 교회 안에는 주께서 베드로와 함께 잡은 고기를 구워 잡수시면서 대화를 나누시던 바위 (Mensa Christi)가 보존되어 있어, 주님과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묵상과 기도처가 된다. 마당에는 넓은 정원과 베드로가 열쇠와 지팡이를 든 형상의 석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마16:13-20에서 나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베드로의 이름 위에 교회를 세우고 천국의 열쇠를 맡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형상화 한 것이다.
키프러스섬 파포스, 바보 바울채찍기념교회, 성 바울의 기둥
싸이프러스 파포스(바보) 바울 채찍기념교회
북키프로스의 서쪽에 있는 바보는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여행 중 살라미를 떠나 도착한 항구도시이다. 오늘날 파포스(Paphos)로 불리는 이곳을 바울과 바나바는 터키의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살라미로 온 것과는 달리 섬 중앙을 통해 육지로 이곳에 왔다(행 13:4∼6). 바보는 한때 구브로섬의 수도였던 성읍으로 이 섬의 남서부 연안 평원에 위치해 있다. 바보는 구바보와 신바보로 구분되는데 바나바와 바울이 선교차 방문한 곳은 신바보이다. 이곳은 주전 55년 로마의 수중에 들어간 이후 이 섬의 수도가 되었고 로마 총독의 주재지였으며 바울은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했다(행 13:6∼12). 그런데 이를 방해하려던 바예수는 바울에게 질타를 받아 얼마 동안 소경이 되리라는 선언에 따라 그가 장님이 되자 큰 감명을 받은 서기오 바울은 더욱 바울의 전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항구에는 주차장 시설이 잘돼 있었고 작은 돛단배들이 항구에 가득 정박해 있었다. 항구의 바로 북쪽에는 중세 때의 성채가 항구를 방어하듯 서 있었다. 2000여년전 사도 바울은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는 고통을 겪은 후에도 전도여행을 포기하지 않고 이곳 바보 항구에서 배를 타고 오늘날 터키 남부에 있는 버가로 전도여행을 계속했다. 바울이 채찍이 맞았다는 바울채찍교회는 항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교회는 영국 성공회에서 바울이 채찍에 맞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교회이다. 교회 앞에는 300년께 세워진 교회터가 발굴되어 있었고 그 교회 유적 옆에는 ‘성 바울의 기둥’이란 푯말이 그리스어와 영어로 새겨져 있는 대리석 기둥이 놓여져 있다. 바로 바울이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기 위해 묶였던 기둥이다. 고린도 후서 11장 24절에는 바울이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 매를 맞은 장소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이곳 바보에 있는 바울이 채찍에 맞은 것을 기념하는 기념교회와 바울이 묶였다는 대리석 기둥은 그 중의 한곳임을 증거하고 있다. 교회 오른쪽으로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카타콤이 있다. 비록 작은 규모이기는 하나 초기 기독교의 박해와 순교사에 등장했던 카타콤이다. 해안가에는 왕들의 무덤이 있다. 왕들의 무덤은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께 조성된 것들로 바위를 파서 만든 것이다. 무덤벽에는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색이 변하지 않은 벽화가 남아 있다.
이란수사(다니엘의 묘)
수산
수산(수사)은 이란 남서쪽에 있는 아와즈에서 북북서쪽으로 117㎞쯤 떨어져 있다. 페르시아(성경에는 바사)의 수도였던 수산은 오늘날 수스(Shush)라고 불리운다. 수산은 선사시대에서 페르시아 제국에 이르기까지 이란 문명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이었던 도시이다. 특히 이곳은 사르디스(성경의 사데)와 엑바타나(성경의 악메다), 페르세폴리스로 가는 길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고고학적 연구 결과 수산은 5000여년 이상이나 되는 역사적 도시임이 밝혀졌다.
이 지역에는 기원전 4000년경부터 엘람 민족이 거주하여 신석기 문화를 이룩하였고 아케메니아인들의 지배 기간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기원전 324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신하와 병사들 1만명이 이 지역의 처녀들과 집단결혼을 한 역사도 지니고 있다. 이후 수산조 왕조의 사푸르 2세(309∼379년)는 기독교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수산을 파괴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후에 에란샤르 사푸르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으며 아랍에 다시 점령된 이후부터는 점차 쇠퇴하여 오늘날에는 중소도시 규모를 갖고 있다. 수산궁터는 시내 외귱 산 언덕 위에 있었고 19세기말 프랑스 고고학자에 의해 수산궁터가 발굴 되었다. 한쪽으로는 수산 성터가 텔(언덕) 형태로 자리잡고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수산궁터가 있다. 수산궁터의 모습은 건축물의 기초 흔적만 남아 있고 북쪽 끝에 돌로 된 쌍사자 석상만이 홀로 궁터를 지키듯 서 있다. 성경에서 수산은 느헤미야 1장 1절과 다니엘 8장 2절에 한번씩 소개되었고 에스더서에는 여러 번 기록돼 있다(1:2,5:2,9:6). 아하수에로왕 시대에 수산궁은 화려와 사치가 극에 달하였다. 다리오(다리우스) 대왕 때의 비문에서 수산궁의 건축에 언급된 부분을 보면 레바논과 간다라에서 많은 재물을 가져왔으며 사르디스와 박트리아에서는 금, 코라스미아에서 터키옥을 가져왔다. 또 은은 이집트, 벽 장식품들은 이오니아, 상아는 에티오피아에서 가져왔고 돌기둥은 엘람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각국에서 기능공(목수 석수 벽돌공 세공인 등)이 징발되어 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사치와 화려함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알 수 있다. 에스더 당시 페르시아의 수도인 이곳 수산궁에서 아하수에로는 즉위식을 갖고 3년째에 모든 방백과 신복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에 1:1∼3). 다니엘은 벨사살왕 3년에 엘람의 수도인 수산성에 있었으나 숫양과 숫염소의 이상을 본 것은 을래강변이었다(단 8:1∼2).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즉위 20년 기슬르월에 수산궁에서 예루살렘성이 훼파되고 성문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울며 금식하며 기도한 후(느 1:1∼40) 왕의 허락를 받아 위험하지만 빠른 길을 선택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왔다. 수산궁터에서 아래 마을 사우르 강둑의 동쪽에 다니엘의 묘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이 묘는 이슬람 시아파 교도들에게 중요한 참배처가 되고 있었다.
천으로 덮여 있는 다니엘의 석관은 일종의 가묘이나 다니엘의 묘는 9∼18세기까지 아랍인 작가들에 의해 자주 언급됐다. 1164∼73년 사이 이란을 여행했던 투델라의 벤야민(Benjamin)에 의하면 셀주크 왕조의 산야르(Sanjar 1117∼1157) 도시에 살던 두 지역 주민들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다니엘의 관을 유리관에 넣어 그 도시 중앙에 있는 강의 다리에 매달아두도록 했다고 전한다. 수산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와 살던 곳 중의 하나로 다니엘과 느헤미야, 에스더의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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