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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독립운동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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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경 러시아의 레닌은 30여 국가의 대표가 모스크바에 모인 자리에서 코민테른(다른 이름 :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제3인터내셔날, 제3국제공산당)을 결성하였다.
코민테른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원을 위해 결성되어 코민테른을 통해 당시 약소국, 식민지 국가들의 무장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
제1회 코민테른 대회는 대체로 창립 선언만 하였다.
하지만 1년 후의 제2회 코민테른 대회(1920년 7월)에서는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 독재」를 선언하고, 비합법 조직의 병행, 군대·농촌·노동자 조직, 의회에서의 활동, 식민지 독립, 민주적 집권주의, 각 당의 중앙위원회는 코민테른 대회와 집행 위원회의 결정에 복종할 것 등의 구체적 가입 조건을 규정하고, 「세계 혁명」을 목표로 운동을 전개했다.
(코민테른은 1943년 스탈린에 의해 다른 조직으로 대체되며 해산된다.)
러시아 적백내전과 한국인들의 활약
1917년 10월 혁명이후 시베리아 지역의 러시아인들 중에는 정치적 이념에 따르거나 기아를 피해 몽고, 중국, 중국, 터키 등 국외로 탈출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도시지역에서 식량과 연료를 구하지 못하여 농촌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수두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 한국인들 중에서도 볼셰비키 지지자들이 출현하였다.
1918년 1월경 동시베리아 하바로프스크에서 극동인민위원회 외교인민위원이 된 김알렉산드라(Ким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1885~1918)도 있었다.
김알렉산드라는 1918년 9월 16일경 하바로프스크가 점령되었을 때 일제와 백파들에게 죽음을 당했지만 러시아 내전 무렵에는 최소 수백 명의 한국인이 볼셰비키당(공산당)에 참여했다.
1920년 초까지 대략 3,700여명에 이르는 한국계 볼셰비키가 있었다. 또한 수천 명의 한국인이 적군(赤軍)에 입대하거나 볼셰비키를 위해 싸웠다.
일제가 시베리아, 만주, 간도를 침략하자 한국인 중 많은 젊은이들이 일제를 맞아 자발적으로 싸웠다.
대표적인 인물은 박일리야, 홍범도, 한운용, 이용, 한창걸 등이 있다.
1919년 11월 14일경 볼셰비키(공산주의, 파르티잔)가 콜차크 백군의 수도 옴스크를 해방시켰다.
1920년 2월 콜차크는 한 때 동지였던 체코군에게 체포되어 볼셰비키에게 넘겨져 처형되었다. 러시아 내전에 관계된 체코군단은 1918년 2월부터 우크라이나 부근에서 출발하여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약 9,700킬로미터에 이르는 대륙횡단 기차여행을 통해 온갖 사건에 휘말린 후 1920년경까지 대략 6만여명이 체코로 귀환할 수 있었다.
1920년 가을부터는 러시아 내전에서 볼셰비키의 승리가 확실해지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부터 식량 부족에 허덕이던 러시아에 1920년경 대기근이 발생하였으며 1921년 봄까지는 극심한 화폐가치 하락과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러시아 내전기 기아로 죽어간 사람이 대략 수백만여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는 러시아의 1차 대전 사망자와 러시아 내전 사망자보다 많은 것으로, 외국 구호기관에서도 러시아에 식량을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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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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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 독립을 위한 비폭력 평화 시위의 시작
(※ 출처 : 주로 강만길 저, 「고쳐 쓴 한국 현대사」, 창작과비평사, 2006, 54쪽 ~ 72쪽에서 참고)
일제 식민지시대의 본격적 민족해방운동은 3·1운동을 기점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3·1운동은 러시아 혁명,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미국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되어 일본 동경의 유학생들의 2·8선언이 먼저 나오고 뒤이어 서울에서 종교계를 중심 한 민족대표들이 독립을 선언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민족자결주의는 주로 유럽 패전국의 식민지 문제에 적용하기 위한 원칙이었을 뿐, 뒤늦게 참전하여 전승국의 대열에 끼인 일본의 식민지 조선의 독립문제에 도움을 줄 만한 것은 아니었다. ‘민족대표’의 일부도 이 점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있었던 것 같으며,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그들에 의해 하나의 기회로 활용되었다.
‘합방’ 후 의병전쟁의 남은 병력과 애국계몽운동계의 독립전쟁론자들이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준비하는 동안 애국계몽운동계의 국내 잔여세력은 대규모 독립운동을 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조선총독부는 이들을 탄압하기 위해 소위 안악사건, 105인 사건을 만들었다. 그 때문에 민족해방운동 대열이 상당한 타격을 받았으나 이후에도 비밀결사 등을 통해 기회를 기다리다가 1차대전 종결 후의 민족자결주의 선포를 하나의 기회로 이용했다.
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애국계몽 운동계 국내세력의 독립선언이 일시에 전민족적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식민통치 10년이 전체 조선민족의 생존을 그만큼 위협했기 때문이다.
우선 자산가 계급에게도 일본의 식민통치가 준 타격은 컸다. 문호개방 이후 일부 선진적 민족 자본가층이 형성되어갔으나 화폐정리사업과 ‘합방’ 후의 회사령 등에 의해 다시 큰 타격을 입었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특히 중소지주층과 자작농층이 입은 타격은 컸다.
이 때문에 아직 예속되지 않은 민족 자본가층과 지주증이 식민지 경제구조의 정착과정에서 그 진로를 봉쇄당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농민들의 경우 사정은 더욱 절박했다. 조선왕조 후기 이래 점진적으로 발달해오던 농민적 토지소유가, 많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행되어 1918년에 끝난 토지조사사업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극히 일부의 지주층을 제외한 조선 농민 전체가 식민통치 10년의 피해를 깊이 입고 있었던 것이다.
평화시위의 확산과 의의
약 2백만명으로 추산되는 시위 참가자 중 공식 집계만으로도 7,500여명이 피살되었고, 4만 6천여명이 검거되었으며 약 1만 6천명이 부상했다. 또한 49개처의 교회와 학교, 715호의 민가가 불탔다.
3·1운동은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운동이 되지 못하고 비무장 독립운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첫째, 이 운동은 대외적으로는 항일운동이요 대내적으로는 공화주의 운동이었다.
둘째, 3·1운동은 무장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은 만주지방에서 준비되고 있던 무장항쟁의 불심지를 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만주·연해주에서의 독립투쟁
‘합방’을 전후한 시기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불가능하게 된 의병부대들이 간도와 연해주 지방으로 옮겨갔고,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인사들도 대거 이 지역으로 옮겨가서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그 결과 3·1운동을 계기로 서간도지방에 30여개, 북간도지방에 40여개의 민족해방운동 단체들이 성립되었다. 이들 중에는 서간도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과 같이 복벽주의 노선의 단체도 일부 있었으나 같은 지방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暑)와 같이 그 중요 단체의 대부분은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공화주의 노선의 단체였다.
국토가 완전 식민지로 되어 국내에 해방구를 갖지 못한 조건 아래서, 1860년대부터 교포사회가 형성되었고 특히 ‘합방’을 계기로 이 주민이 급격히 증가했던 간도 및 연해주 지방이 독립전쟁 기지의 적지로 인식되었다.
간도지방에 설치된 독립전쟁 기지 중 대표적인 것의 하나는 신민회 중심의 애국계몽운동 계열 인사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해 건설한 서간도의 삼원보(三源堡)기지였다. ‘합방’ 직후 이곳으로 이주한 이동녕(李東寧 : 1869~1940) · 이상룡(李相龍 : 1858~1932)과 이회영(李會榮 : 1867~1932) · 이시영(李始榮 : 1869〜1953) 등은 경학사(耕學社)란 항일단체를 조직하고(1911) 군사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1913년에 신흥학교)를 설치했다.
경학사는 부민단(扶民團) · 한족회(韓族會)로 발전했다. 한편으로 군정부(軍政府, 뒷날의 서로군정서)를 두어 운영한 신흥학교는 3·1운동 때까지 1천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3·1운동 후에는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되어 1920년 8월에 폐교될 때까지 약 3천명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밖에 신민회계의 이동휘가 중심이 되어 훈춘현(琿春縣)의 사도자(四道子) 부근에서 3천여명 이상의 독립군을 러시아제 무기로 무장시켜 양성했고 밀산(密山)의 산속에 무관학교를 세웠다. 주변의 6,500호 교포사회로부터 의연금을 거두고 구한국군 장교들을 교관으로 하여 교포청년 1,500여명을 훈련시키며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서일(徐一 : 1881〜1921) 등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김좌진(金佐鎭 : 1889~1930)을 교장으로 한 사관연성소를 두고 4백여명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의병장 출신 홍범도(洪範圖 : 1868〜1943)의 대한독립군도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 시기 간도·연해주 지방에 있는 이들 독립전쟁 기지는 민정(民政)조직과 군정(軍政)조직을 함께 갖추고 있어서 실질적으로 하나의 독립된 자치적 정부조직을 방불케 했다.
한족회의 민정조직을 예로 들면 중앙의 행정조직은 총장(總長) 밑에 서무사장(庶務司長)과 학무(學務)·재무(財務)·상무(商務)·군무(軍務)·외무(外務)·내무(內務) 사장 등을 두어 중앙정부적 조직을 갖추었다.
또한 교포사회를 근거로 지방조직도 갖추었다.
...... 이상은 강만길 저, 「고쳐 쓴 한국 현대사」, 창작과비평사, 2006, 54쪽 ~ 72쪽에서 주로 인용함 ......
만주·시베리아에 한국 독립운동에 호의적인 인물들의 등장
이 무렵 러시아령 연해주, 만주의 조선인 수는 모두 합해도 50만여명 미만으로, 중국계·러시아계·일본계 등이 본격적으로 만주와 시베리아에 진출하자 만주·시베리아에서의 무장 독립운동 한계가 분명해졌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과 시베리아에서의 러시아 적백내전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일제의 중국영토 및 러시아령 시베리아 침략과 잦은 민간인 학살과 겹쳐 곽송령, 소병문, 장전구, 마점산, 장옥정, 주복성, 공헌영, 리두, 주경란, 왕덕림, 이작형, 진세영(진계량), 풍점해, 정초(친일변절), 야코프 트리피츤, 세르게이 라조 등과 같이 한국 독립운동에 우호적인 인물들을 만들었다.
첫댓글 3.1 운동이 무장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군요
맞습니다.
한국 현대사와 민족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3.1운동이 다양하게 '희망'을 주어서 무장독립운동도 본격적으로 할수있게 해준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