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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히브리어 원전 성경을 중심으로 한글로 쉽게 푸는 창세기 1장 내용의 좋은 강해가 집필되고 있어서
운영자분께 글로써 대신 양해를 구하며 여러분들께 나누고자 올려 드립니다.
서론 1,2와 본론 1을 시작으로 창세기 1장 전체를 히브리 원전 중심으로 한글 성경을 접목시켜 쉽게 풀어가는 내용입니다.
읽어 보시고 은혜 되시면 계속해서 나올 강해에도 많은 은혜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닉네임으로 검색하셔서 창세기 1장 1부 서론 처음부터 자세히 읽어 보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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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원전 성경 중심으로 한글로 쉽게 푸는 창세기 1장 (19)
강해자: 서균석 목사
창 1:14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하늘의 궁창]
하늘들과 궁창은 처음에는 따로 분리된 개념으로 있었다. 창1:7에 하나님은 넓게 펼쳐서 확장해 나가는 궁창의 본체를 행하셨다. 현상의 궁창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지식의 빛을 넓게 펼쳐서 확장해가고 어두움인 무지도 넓게 펼쳐서 확장해가는 궁창의 본체를 행하신 것이다. 이렇게 넓게 펼쳐서 확장해가는 궁창의 사역이 없으면 하나님의 지식의 빛이 본래적으로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인 무지의 얼굴들을 담고 있는 무저갱의 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마음땅에 들어와 있게 된다 할지라도 지식의 빛은 들어온 그 상태에서 멈추어 있을 수밖에 없다. 또 어두움인 무지도 그 상태에서 아무런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 하나님이 지식의 빛이 마음땅의 어두움인 무지 가운데 들어가 있으라고 말씀하신 목적은 지식의 빛이 넓게 펼쳐서 확장되어 커가고, 어두움인 무지가 넓게 펼쳐서 확장되어 점차로 작아지는 데까지 커가게 하는데 있다. 그래서 하늘들의 물들이 넓게 펼쳐서 확장하게 만드는 궁창을 익혀 나가기 위해서 궁창으로 내려오고,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인 무지의 얼굴들을 담고 있는 무저갱의 물들은 넓게 펼쳐서 확장해 나가는 궁창을 익히기 위하여 궁창으로 올라가게 하였다.
넓게 펼쳐서 확장시켜 커지게 하는 궁창은 무저갱의 얼굴들이 점차로 작아지는 데로 확장되어 커지게 하고, 지식의 빛을 넓게 펼쳐서 확장시켜 커지게 하는 사역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지식의 빛을 넓게 펼쳐서 확장시켜 커지게 한 궁창을 익힌 것이 하늘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창1:14에서는 하늘들과 궁창이 한 개념으로 결합하여 하늘의 궁창 안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넓게 펼쳐서 확장시켜 커지게 하는 궁창은 지식의 빛을 곧 하늘들을 펼쳐서 커지게 한 것이다. 반면에 어두움인 무지는 크게 펼쳐서 확장시켜 작아지는 데로 커지게 한 것이다. 여기서는 궁창이 하늘들의 일만을 넓게 펼쳐서 확장시켜 나가는 일만을 해나가는 것이다.
[광명이 있어]
광명은 ‘메오로트’인데 명사, 남성, 복수, 여성 접미가 붙었다. 광명체, 광체라는 뜻이다. 광명이라고 번역을 하였다. 지식의 빛에서 온 말이다. 광명이라고 하면 현상적인 빛을 비추는 개념이 된다. 그래서 해, 달이라는 개념으로 비약이되 버렸다. 광체는 창1:3의 지식의 빛에서 온 단어다. 여기의 광체는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식인 인간의 마음땅에 본래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인 무지의 얼굴들로 구성되어 있는 무저갱을 잘라내고 깨트리고 소멸시키는 목표로 있는 광체들이다. 창1:3의 지식의 빛과 창1:14의 광체는 어떻게 다른가? 창1:3의 지식의 빛은 지식의 빛을 인식하고 구분해서 분별하고, 어두움인 무지를 인식을 하고 구분을 해서 분별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지식의 빛을 익혀나가기 위해서는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의 한 시기 한 시기가 따라 주어야 하고 어두움인 무지를 익혀 나가기 위해서는 고난, 역경, 재난이 따라야 한다고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다.
창1:14에서는 첫째시기, 둘째시기, 셋째시기를 한 시기 한 시기 익히고 적용하여 통과해 나가므로 셋째시기에 생명의 씨앗이 솟아나고 생명의 열매를 맺도록 행하는 열매나무가 솟아났다. 그래서 올바르게 있는 생명을 꺼내 주게 되었는데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인 인간의 마음땅에다 넘겨 준 것이다. 생명나무의 공이 인간의 마음땅으로 넘겨졌다는 말이다. 창1:14부터는 넷째시기가 시작된다. 넷째라는 말은 숫자적으로 넷째라는 뜻도 있지만 생명의 열매가 많이 맺어지도록 하나로 동침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생명의 공을 넘겨받았으니 이 공을 처리해 나가기 위해서는 생명이 인간의 마음땅에 있게 하도록 목표를 세운 데로 지식의 빛의 사역을 하는 발광체가 하늘들을 넘게 펼쳐서 확장해서 커지게 하는 궁창 안에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창1:3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인 무지의 얼굴들을 담고 있는 무저갱의 물들을 닭이 알을 품고 부화시키려 하듯 품으시고 지식의 빛이 들어가서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늘들의 물들인 지식의 빛을 인식을 하고 구분해서 분별을 하고 어두움인 무지를 인식하고 구분해서 분별하게 하셨다. 그런데 창1:14에서는 지식의 빛이 있으라고 하시지 않고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의 목표로 있는 것을 사역하는 지식의 빛인 광체들이 하늘들의 넓게 펼쳐서 확장하여 커지게 하는 궁창 안에 있으라고 하신 것이다. 목표로 있는 지식의 빛의 사역을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에 넓게 펼쳐서 확장시켜 자라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지식의 빛이 있으라 하신 것은 첫째시기, 둘째시기, 셋째시기가 되고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는 빛이 있게 된 것이다. 빛이 있게 된 사역을 하는 것이 광명체라고 이해하면 된다. 해, 달의 광명이 아니다. 지식의 빛과 동일한 광체들인데 목표로 있는 것을 인간의 마음땅에 있게 하도록 사역하는 지식의 빛인 광체들인 것이다.
하늘들을, 지식의 빛을 넓게 펼쳐서 확장케 만들어 커지게 하는 궁창 안에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의 목표로 있는 어두움인 무지를 잘라내고 깨트려 소멸시키기 위해 셋째시기에서 올바르게 있는 생명을 꺼내 준 것을 받아 하나로 동침을 해서 넓게 펼쳐서 확장시켜 생명의 열매를 맺으려면 광명체들의 사역이 있어야 가능하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나중이시다. 지식의 빛이 어두움인 무지의 마음땅에 있으라고 하셨으면 어두움인 무지가 다 태워지고 재가 될 때까지 목표를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리하여 나와 세상은 간곳없이 없어지고 나를 구속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만이 남게 된다. 어두움인 무지의 얼굴들이 점점 작아져서 없어지고 지식의 빛인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로 바꿔진 것만이 존재하게 된다. 이 목표를 위해 인간은 하나님이 계획하셔서 짜놓은 시간표에 따라서 끊임없이 익히고 적용해 나가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 시간표가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다. 인간이 짜놓은 시간표대로 살면 생명이 없는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 짐승의 속성을 가진 자들이 갇혀 있는 무저갱의 옥에서 헛바퀴만 돌게 될 뿐이다.
[주야를 나뉘게 하라.]
창1:4에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창1:5에는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고 말도 안 되는 번역을 해놓았는데 여기서도 '주야를 나뉘게 하라'고 말도 되지 않는 번역을 해놓았다.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으라 했으니 해는 낮으로 별은 밤으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존재하라는 것으로 보고 '주야를 나뉘게 하라'고 번역을 한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경전이다.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그리스도 예수의 본체시다. 그런데 여태껏 읽어 내려왔고 많은 훌륭하신 성경학자들도 아무런 말을 하고 있지 않은데 성경을 왜 이제 와서 이러쿵저러쿵 하느냐 라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것은 나한테 반론을 제기 할 사안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직접 땅을 치고 통곡을 하면서 여쭤볼 일이다. 나는 영적으로 소경된 자라고 자인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예레미야가 왜 눈물의 선지자가 되어야 했는가를 연구해 보기 바란다.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길은 눈물 없이는 못 가는 길이다.
‘하나님 그는 그 시기를 인식을 하고 그 고난과 역경을 인식을 하고 구분해서 분별하기 위하여 그 하늘들의 넓게 펴서 확장하게 하는 궁창 안에 광명체들 그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로 번역을 해야 한다.
창1:4에서는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가 아니다. ‘지식의 빛을 인식을 하고, 어두움인 무지를 인식을 하고 구분을 해서 분별하게 하셨다’로 번역을 해야 한다. 창1:14에서는 ‘주야를 나뉘게 하라’가 아니다. ‘그 시기를 인식을 하고 그 고난과 역경을 인식을 하고 구분해서 분별하기 위해서 하늘들의 궁창 안에 광명체들이 있으라’는 말씀에서 중요한 내용은 그대로 빼놓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로 번역을 해놓았다. 이쯤 되면 성경을 경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주야가 무엇인가? 낮과 밤이라는 말이 아닌가? 창1:5에서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에서 말씀하신 그 낮과 그 밤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번역이 크게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창1:5에서 빛을 낮이라 칭하신 것이 아니고 지식의 빛을 익혀 나가기 위해서는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가 따라 주어야 하고 어두움을 밤이라 창하신 것이 아니라 어두움인 무지를 익혀 나가기 위해서는 고난, 역경, 재난이 따라 주어야 한다고 선포하신 것이다. 창1:5에서도 설명 하였듯이 성경은 지식의 빛과 시기, 어두움인 무지와 고난, 이 네 개가 축이 되어 맞물려 돌아가면서 성경을 이루어 나간다. 이 네 개가 성경의 핵이다. 창1:14에서는 빛과 어두움인 무지는 나오지 않고 시기와 고난, 역경, 재난만 나오고 있다. 이것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창1:4에서 지식의 빛이 어두움인 무지의 마음땅 안에 들어오게 되니까 지식의 빛을 인식을 하고 구분을 해서 분별하게 하셨고, 어두움인 무지를 인식하고 구분해서 분별하게 하셨다. 지식의 빛이 이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창1:14에서는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의 목표로 있는 지식의 빛의 사역을 하는 광명체들이 하늘들을 넓게 펼쳐서 확장하는 궁창 안에 있게 되니까 시기를 인식하고 구분해서 분별을 하고 고난, 역경, 재난을 인식을 하고 구분해서 분별을 하게 하신 것이다.
시기는 지식의 빛이 익혀지게 하기 위해서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로 따라 주는 것이고, 고난, 역경, 재난은 어두움인 무지를 익히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따라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광명체들은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의 목표의 사역을 해나가기 위해서 시기와 고난, 역경, 재난을 인식을 하고 구분을 해서 분별해 나가게 하는 것이다. 이 둘을 인식하고 구분해서 분별해 나가지 않으면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인 인간의 마음땅에는 지식의 빛이 넓게 펼쳐서 확장되어 커갈 수 없고, 어두움인 무지는 넓게 펼쳐서 확장되어 점차로 작아져 소멸되는 데로 커져 갈수 없다. 인식과 분별을 해서 시기와 고난이 반드시 따라 주어야 한다. 이 고난이 싫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좁은 길에서 벗어나 넓은 길로 나가서 어두움인 무지의 옥에 갇혀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내용이 많이 틀리기 때문에 다시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여 번역을 하고 설명을 하기로 한다.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의 목표로 있는 표적들을 익히기 위하여, 절기들을 익히기 위하여, 시기들을 익히기 위하여 그들(광명체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로 반복하는 것으로 있을 것이다.’
내용이 많이 틀린다. 번역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틀리다는 것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히브리어 원문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히브리어를 모르는 분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원문을 볼 필요를 느끼는 분은 <성경의 잣대> 책을 참고 하시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극히 논리적으로 구성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 하나 따져 보면서 읽어야 한다.
표적들은 현상의 세계에서 바리새인들이 구하고 찾는 이적이 아니다.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의 목표로 있는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인 무지의 무저갱의 얼굴들을 지식의 빛으로 잘라내고 개간을 해서 지식의 빛인 생명으로 열매 맺고 많아지고 충만해지는 것을 말한다. 어두움인 무지의 마음토대가 지식의 빛으로 바꿔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표적이다. 날마다 속사람이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것이 표적 중의 표적이다. 하늘들과 인간의 마음땅이 입을 맞추고 하나로 결합되는 것이 표적이다.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깨트려져야 할 악한 세대를 향하여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셨다. 요나는 비둘기라는 말인데 발효한다는 말에서 왔다. 발효는 성분이 바뀌는 것이다.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 안에서 육의 속성이 발효되어 영의 속성으로 바뀐 것이 요나의 표적이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삼야를 지냈다고 해서 큰 물고기가 무엇이냐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큰 물고기는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삼일 삼야는 첫째시기, 둘째시기, 셋째시기가 삼일이고, 넷째시기, 다섯째시기, 여섯째시기가 삼야다.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 안에서 요나의 육성이 발효되어 생명을 꺼내 주는 자로 변화 받았다. 이것이 표적이다. 보이는 표적을 찾는 것이 이 세대다.
절기들은 현상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뜻하는 것이지만 성경에서는 자연현상의 사계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지식의 빛이 어두움인 무지로 가득 차 있는 마음땅에 들어오게 되면 무지한 마음땅은 지식의 빛을 처음 접해 보는 것이기 때문에 인식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인식이 먼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단계인 지식의 빛과 어두움인 무지를 구분을 해서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인식과 분별이 되어야 그 다음 단계로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신 지혜에 이르르게 된다. 이 지혜의 단계에까지 이르러야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고 하나님처럼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키며 살아 갈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인식과 분별과 지혜의 과정으로 성장을 해 가는데 이 과정 속에서 인식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단계로 진행을 해나가고 분별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단계로 진행을 해나가고 지혜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단계로 진행을 해나간다. 또 봄 절기에서 여름 절기로, 여름 절기에서 가을 절기로, 가을 절기에서 겨울 절기로 성장을 해나간다.
그러니까 동일한 말씀을 받는다 하여도 인식을 받을 사람 모두가 똑같이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사람은 봄 절기 수준에서 인식을 하고, 어느 사람은 여름 절기 수준에서 인식을 하고, 어느 사람은 가을 절기 수준에서 인식을 하고, 어느 사람은 겨울 절기 수준에서 인식을 하게 된다. 절기에 따라서 인식의 수준이 달라진다. 이 절기가 바뀌어 가면서 지식의 빛은 지식의 빛대로 확장되어 커가게 되고, 어두움인 무지는 무지대로 확장되어 커가게 되어 작아져서 소멸되게 된다. 예수님께서도 인자가 올 때에 겨울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 하셨다. 겨울은 추수가 다 끝나는 절기다. 열매 없이 주님을 만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절기가 변하는 것에 따라 곡식이 성장하여 열매를 맺듯이 사람도 절기에 따라서 성장해 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절기들을 익히기 위해서는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의 시기와 고난, 역경, 재난(밤이라고 번역을 함)을 인식하고 구분을 해서 분별을 하는 광명체들이 있어야 한다.
일자는 단수가 아니고 시기들이다. 일자라고 하면 365일의 한 날을 말한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를 현상의 날인 365일 가운데에서 6일 동안 창조하였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6일 동안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내용은 맞지 않는다고 이미 설명을 하였다. 시기들은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에서 한 시기 한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를 시기를 향해서 시기들이라고 한 것이다. 첫째시기를 둘째시기가 익히고 적용하는 것을 반복하여 하나로 결합되어져야 셋째시기로 통과되어 나가게 되고, 셋째시기에서 올바른 것을 꺼내준 것을 넷째시기가 동침을 하여 익히고 적용해서 하나로 결합되어져야 다섯째시기로 통과되어 열매를 맺고 많아지고 충만해지는 역사가 있게 되고, 여섯째시기로 통과되어 다스리고 정복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마음땅이 완성된다. 하늘들과 마음땅이 하나로 결합되어 하나님이 근본 의도하신 높은 뜻과 계획이 성취되는 것이다.
이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로 한 시기 한 시기를 익히고 적용하며 어두움인 무지를 잘라내고 소멸시키고 낮아져서 내려가는데 이것을 굴러간다는 뜻의 갈릴리라고 말을 한다. 여섯째시기까지 무지를 깨트리며 굴러가 낮아지는 것을 요단강이라고 말을 한다. 요단강을 통과해야 가나안땅인 하나님의 왕국이 실현된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바리새인들과 처절한 싸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바리새인이라는 말은 열매를 맺기로 결단을 한다는 뜻이다. 이름은 참으로 좋은 뜻을 가지고 있다. 이단들도 좋은 이름은 다 독차지하고 있다. 열매를 맺겠다고 매일 결단은 잘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단을 한 것과 상응한 삶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없다. 말만 무성하다. 실천이 아니라 생각 속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 자들이다. 왜 실천은 못하는가? 마음땅에 자리를 잡고 있는 어두움인 무지를 잘라내고 깨트려 가는 데에는 아픔과 고난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요단강으로 내려 갈 수 없는 자들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본다고 하나 죄는 그대로 있느니라고 정죄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연한은 완전히 왜곡된 번역이다. ‘샤님’인데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 안에서 하나로 결합할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해 나가라는 뜻이다. 표적들을 익히기 위하여, 절기들을 익히기 위하여, 시기들을 익히기 위하여 넷째시기의, 다섯째시기의, 여섯째시기의 목표로 있는 지식의 빛의 사역을 하는 광명체들이 계속해서 첫째시기에서 여섯째시기로 반복해서 존재하고 있으라는 말이다. 반복하지 않으면 익히고 적용해 나갈 수 없다. 신앙생활은 반복해서 익혀나가는 훈련을 받는 것이다. 기한이 정해진 것이 아니다. 일평생 삶을 통해서 이루어질 때까지 반복한다.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인 무지의 얼굴들로 구성된 무저갱의 옥에서 완전히 구원을 이루어 생명 안에서 자유 함을 누릴 때까지다.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고 번역을 해놓으니까 여기가 광명은 현상적인 빛을 비추는 해와 달로 오해를 해서 볼 수밖에 없다. 한 절 한 절 설명해 나가고 있는 것은 히브리어 원전 성경에 의해서 바르게 정리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는 바이다. 한글 성경과의 차이가 너무나도 많이 나고 있으니까 억지로 꿰맞추어 가고 있다고 말을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 이후 계속해서 창세기 1장 15절을 담은 내용은 집필 중이십니다. 분량이 나오는데로 이어서 올려드리겠습니다.
※ 서론과 본론 등 앞 구절의 강해 내용의 궁금하시면 제 닉네임으로 검색하셔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 본 강해글은 2014년 상반기 <하나님의 천지창조 원리-히브리어 성경의 맥에 의한(가제)> 도서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 궁금하신 내용이나 문의 사항은 맨 아래 서균석 목사님 연락처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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