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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42,1-7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2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3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4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5 하늘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펼치신 분
땅과 거기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펴신 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목숨을, 그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숨을 넣어 주신 분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7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2,1-11
1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2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3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4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5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7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8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9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10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11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
오늘 복음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배타니아의 라자로와 마리아와 마르타 집에서 벌어졌던 잔치 중에 있었던 일을 전해줍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기름을 머리에 붓는 것은 메시아의 도유나 집주인의 환대를 나타내지만, 발에 기름을 붓는 것은 장례를 준비하기 위한 행위를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고 향유를 발라 드린 것은 그의 헌신적 사랑과 존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침내 온 집안에는 그 향기가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이스카리옷 유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
(요한 12,5)
그 향유의 금액을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다고 하니, 이는 일 년 치 임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작은 돈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요한 12,7)
유다는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여겼지만,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행동은 곧 떠나시게 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그보다 더 비싼 향유가 있었더라도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사랑은 본래 비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경제적 효율성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랑은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며, 죽기까지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사랑의 가치보다 경제적 가치가 으뜸자리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물질적 가치가 사랑과 생명의 가치를 넘어서 버린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와 재물이 일종의 신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신앙인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는 듯합니다.
참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삶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 삶의 잣대는 무엇인가?
사부 성 베네딕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앞세우지 말라!”
그렇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을 섬기는 것에 앞세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생각을 품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행동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어떤 처신을 할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얻고 물질을 버리는 마리아로 살 것인지 아니면, 물질을 얻고 예수님을 버리는 이스가리옷 유다로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일입니다.
결코 하느님과 물질을 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요한 12,3)
주님!
옥함을 깨뜨리듯 제 자신을 부수고, 부서질수록 사랑의 향기 짙어가게 하소서.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쏟아지는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영혼에 새겨진 사랑의 숨 가쁜 소리를 듣게 하소서.
온 집안에 가득한,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내내토록 취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온통 배인, 이 집안을 사랑하게 하소서.
집안에 가득 퍼진, 그 향기 뿜어대는 당신 마음 닮아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성주간에는>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가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발라주자 유다는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면 더 값어치 있을 텐데 주님께서는 왜 그 짓을 막지 않고 내버려 두냐는 말을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유다의 말이 맞고, 주님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실 겁니다.
사랑의 주님, 평소에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주님,
가난한 이에게 해준 것이 바로 당신께 해준 거라고 하신 주님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행위를 질책하지 않고 두둔하십니다.
그것은 당신이 그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마리아를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그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마리아를 위해서입니다.
당신의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마리아가 맘껏 사랑을 표하라는 허용입니다.
마리아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그의 사랑을 귀히 여기고 받아주신 겁니다.
상대의 사랑을 귀히 여기고 받아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누누이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상대를 사랑하지 않으면 상대의 사랑을 하찮게 여기거나 귀찮게 여길 것이고, 아예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여간 지금 주님은 죽음을 앞둔 시점이고, 그래서 지금은 당신을 사랑하게 내버려 두시며, 당신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도 성주간에는 이웃 사랑도 좋지만, 주님 사랑에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신 다음에는 이웃 사랑을 열심히 하면 되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은 모든 것을 내어 줍니다>
성당 주변에 많은 꽃이 피었습니다.
개나리, 목련, 벗꽃, 진달래의 순서인줄 알았더니 올해는 순서도 없이 마구 피었습니다.
들에는 복숭아도, 배꽃도 만발입니다.
각자의 색깔대로 아름다운 만큼 열매도 풍성히 맺어지길 소망합니다.
우리 마음의 꽃도 활짝 피어나길 갈망하며,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예수님 부활의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아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다 퍼주고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심장이라도 내어주고 싶어 합니다.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3킬로그램)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하였습니다(요한 12,3).
마리아는 예수님께 자기의 아주 소중한 것을 바쳐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냄새가 가득했다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집안에 가득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럴 때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라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 상황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눈이 있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요한 12,5) 하며 향유의 값어치를 계산하였습니다.
향유를 붓는 행위를 존경과 사랑, 감사와 믿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계산하였습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입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있었다는 얘긴데, 그 좋은 머리를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서 사용하였습니다.
남모르게 돈을 가로채던 유다에게는 돈만 보일 뿐입니다.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사랑이거늘, 그 사랑을 외면한 채 약삭빠른 계산을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돈이 최고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능력에 걸려 넘어져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지금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바쳐드려야 함을 알지만 아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나의 시간과 재능, 능력, 재물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기꺼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미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주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일 뿐입니다.
모두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부활의 생명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은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들이 자기들로부터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요한 12,11).
살리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죽음의 어둠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곳에 기쁨이 넘쳐나야 하는데, 유다의 모습도 있고, 수석 사제들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생명의 문화’와 더불어 ‘죽음의 문화’가 함께 있습니다.
살리는 일에, 생명의 문화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 분노, 기득권을 누리려는 욕심이 있는 곳에 어둠의 그림자가 밀려옵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이 있는 곳에 모두를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마리아처럼 존경과 사랑으로 모두를 바칠 수 있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부모에게 아끼는 자녀가 형제에게 아끼지 않을까?>
영화 ‘라이언 킹’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파사는 프라이드 랜드의 왕으로, 아들 심바와 함께 평화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어린 심바는 세상을 발견하며 성장하고 있고, 아버지 무파사는 그에게 왕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가르칩니다.
하지만 무파사의 동생 스카는 왕위를 탐내며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스카는 하이에나들과 결탁하여 무파사를 살해하고, 심바를 쫓아내어 왕위를 차지합니다.
심바는 삼촌 스카가 아버지를 살해한 것을 알지 못하고 삼촌 스카의 말대로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여 프라이드 랜드를 떠납니다.
스카는 심바까지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합니다.
심바는 목숨을 건진 덕분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새로운 친구 품바와 티몬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과 함께 성장하며, ‘하쿠나 마타타’라는 철학에 따라 걱정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성장한 심바는 운명적으로 그의 과거와 마주하게 되고 어린 시절의 친구 나라를 만납니다.
나라는 프라이드 랜드의 현재 상황을 알려주며, 심바에게 왕의 자리에 서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스카가 하이에나와 결탁하여 프라이드 랜드가 황폐해졌기 때문에 모두가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심바는 처음에는 자신의 과거를 회피하려 하지만, 무파사의 영혼과의 만남을 통해 용기를 얻게 됩니다.
아버지의 뜻을 물려받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책감과 삼촌, 그리고 하이에나들과 대결을 해야 합니다.
결국 심바는 나라, 품바, 티몬과 함께 프라이드 랜드로 돌아와 스카와 전투를 벌입니다.
스카는 패배하고, 심바는 왕의 자리에 다시 오르게 됩니다.
영화는 새로운 왕실의 탄생과 함께 평화롭게 회복된 프라이드 랜드를 보여주며 끝납니다.
심바가 프라이드 랜드의 형제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부끄러움도 무릅써야 하고 목숨까지 내어 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께 대한 효성이 자기 친구들에게 행복을 주는 길이었습니다.
만약 아버지의 뜻에 자기를 바치지 않았다면 그의 친구는 품바와 티몬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길은 부모를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그 대상에게 자신을 봉헌합니다.
부모의 뜻에 자신을 봉헌하지 않는 사람은 형제들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님께 300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발라 드립니다.
2~3천만 원 상당의 상당히 고가인 향유입니다.
이것을 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예수님께 아끼는 자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 때문에 요한은 이렇게 주석을 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봉헌하는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성경에서는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막달라의 마리아가 다른 인물처럼 나오지만,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책에는 동일 인물로 나옵니다.
곧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다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여인이 된 것입니다.
봉헌이 곧 사랑입니다.
얼마만큼 줄 수 있느냐가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의 정도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에게 아끼는 자녀는 당연히 형제들에게도 아낄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는 부모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 형제의 의미도 사라집니다.
따라서 부모에게 아끼지 않는 자녀가 형제 간에도 아끼지 않습니다.
결국 그리스도께 봉헌함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시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카리옷 유다처럼 예수님에게까지 질투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부모에게 아끼는 사람은 형제에게도 아낍니다.
하느님께 아끼는 사람은 그분의 모든 피조물에도 아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어떤 피조물에게도 좋은 일을 하지 못하고, 어떤 피조물에게도 사랑 받지 못합니다.
하느님께 아끼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는 길로 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아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봉헌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베타니아는 예수님께 아주 친밀하고 각별한 장소였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의 절친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의 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인지라 이런저런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가 있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의 힘겨운 신경전을 치를 때면 더욱 그랬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즐겨 찾으셨던 곳이 베타니아였습니다.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의 집은 예수님께 일종의 편안한 쉼터 내지는 포근한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밤늦도록 포도주 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푸셨을 것입니다.
특히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방문하실 때마다 지극정성으로 환대하였고, 예수님께서 세상 편안히 쉬실 수 있도록 극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을 환대하고 그분의 쉼터가 되어 드린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제 개인적으로 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주님께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집요하게 졸라대기만 했던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틈만 나면 주님,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냐며 따지고 대들기만 했던 지난 시절이 송구스러웠습니다.
앞으로는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처럼 주님께서 제 집, 곧 제 영혼의 집에 오셔서 편히 머무쉬고 쉬실 수 있는 안식처가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을 기쁘게 내 집에 영접하고 환대하고 배려해드릴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의 준비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주님이신,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기꺼이 환영하고 배려해야겠습니다.
수난의 때를 목전에 두신 예수님께서는 결전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 절친 라자로와 마르타, 마리아의 집을 마지막으로 방문하십니다.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고 존경했던 마리아는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민감함으로 한 가지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방문이 지상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예수님의 방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세 남매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예수님을 위한 송별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식사가 무르익어 가고 있던 어느 순간, 마리아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값진 물건인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왔습니다.
마리아는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왕창 부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정성껏 닦아드렸습니다.
마리아가 가져왔던 향유가 얼마나 값나가는 것이었던지,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은 탄식을 터트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니라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사심 없는 사랑과 철저하게도 세속적인 유다 이스카리옷의 음흉한 마음이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느 쪽 인물에 더 가까이 서 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봉헌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실 정성이 담긴 예물입니까?
그저 마지 못해 아까워하면서 툭 던져버리는 영혼 없는 봉헌입니까?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요한 12,1-3)'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는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요한 11,53)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면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다'
(요한 11,57)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다음에 공개적으로 지명수배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상황입니다.
공개적으로 지명수배를 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을 것이고, 마리아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잔치’ 라고 표현되어 있는 그 잔치는 겉으로는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것을 축하하는 잔치였을 것이고, 또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잔치였을 텐데, 실제로는 죽음을 앞둔 예수님을 위한 고별 만찬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사도들과 신자들의 심정은 무척 침통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이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는 무엇을 해 드려야 할까?
그런 상황에서 마리아의 이례적인 행동은 사도들과 신자들의 침통한 심정을 대변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예수님께 최고의 사랑과 존경을 드리는 것이 죽음을 앞둔 예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의(신앙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예수님께 표현하려고 최고급 향유를 사서 예수님의 발에 부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리아는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비통한 심정을 생각하면,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일이나, 그 향유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정말로 사랑이 크고 깊으면 사랑 말고는 중요한 것이 없게 되고, 사랑 말고는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게 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앞당겨서 거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장례를 위한 일이라는 예수님의 해석에 근거해서 니코데모가 한 일과 마리아가 한 일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
(요한 19,39-40)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는 ‘한 리트라’였는데, 니코데모가 사용한 향료는 ‘백 리트라’였습니다.
몰약과 침향을 섞은 향료는 당시에는 최고급품이었습니다.
가격도 마리아가 사용한 향유의 백배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니코데모가 사용한 향료에 비하면 마리아가 사용한 향유는 가격도 양도 적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유다가 살아서 니코데모가 사용한 향료를 보았다면, 펄쩍 뛰면서 너무 심한 낭비라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어떤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봉헌하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돈이 아니라 마음만 보시면서 그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마르 12,43-44).
아마도 배반자 유다는 가난한 과부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돈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마리아가 한 일은 가난한 과부가 한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돈을 많이 바치든지 적게 바치든지 간에 마음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는 원칙은 똑같이 적용됩니다.
유다가 말하는 ‘가난한 이들’은 아마도 자기 자신일 것입니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낭비하지 말고 나에게 주면 좋지 않은가? 내가 좋은 일에 잘 쓸 수 있는데.”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이라는 예수님 말씀에는 마리아가 평소에 항상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을 잘하고 있다는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마리아가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고 예수님에게만 돈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에서 배반자 유다의 말은 마리아가 한 일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설정한 배경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돈을 보지 말고 마음을 보아라.
마리아의 행동을 겉으로만 보지 말고 그 의미를 생각하여라.
나의 죽음을 죽음으로만 보지 말고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하여라.”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는 부활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의 부활에도 연결됩니다.
마리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중에 부활하실 예수님께 미리 경배를 드린 셈이 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Church, home for all"(교회는 모두의 고향) - 하느님, 예수님 역시 모두의 고향>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로다.”
(시편 27,1ㄱ)
시편 화답송 후렴이 큰 위로가 됩니다.
오늘 강론과 관련하여 다음처럼 고백하고 싶습니다.
“주님은 나의 고향, 나의 치유이시로다”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글 중 한 말마디가 마음 깊이 와닿았습니다.
위로와 치유를 받은 듯 마음이 참 편안했고 여러분과 나눴습니다.
“Church, home for all(교회는 모두의 고향)”
즉시 하느님도, 예수님도 모두의 고향이라는 생각에 다음 글을 전송했고 공감의 글도 받았습니다.
“Church, home for all
교회는 모두의 고향
God, home for all
하느님은 모두의 고향
Jesus, home for all
예수님은 모두의 고향
Coming home(커밍 홈)
고향에 돌아올 때 힐링(치유)의 구원이다!”-
이에 대한 답신도 나눕니다.
“태능 요셉수도원이 마음의 고향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이 계신 고향입니다.
마음이 힘들 때 요셉수도원에서 치유의 은총을 받아 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신부님들의 말씀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참으로 본향을 깨닫게 해 주시네요.
감사합니다. 신부님”
그래서 산티아고 순례시 가는 곳마다 성전에 들어갔을 때 고향집에 온 듯 편안한 느낌이었습니다.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수십년 동안 휴가없이 살아 올 수 있었던 것도 고향집 같은 편안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고향집을 찾듯이 끊임없이 수도원을 찾습니다.
윗글에 이어 어느 환자분과 주고 받은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감사합니다! 벌써 치유되신 듯 하여 기쁩니다!
최고의 명약 셋은 희망, 기쁨, 감사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선사되는 희망, 기쁨, 감사가 우리를 치유합니다.”
“신부님, 약먹을 때마다 외치겠습니다.
희망, 기쁨, 감사!”-
Coming home(커밍 홈) 집에, 고향에 돌아올 때 치유의 구원입니다.
고향집과 같은 하느님을, 예수님을 만날 때 치유의 구원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 예수님의 사람, 교회의 사람이 될 때 병들고 아픈 이웃들에게 치유의 구원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절친이 될 때 이웃에게 고향집같은 치유의 구원이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바로 우리의 고향입니다.
교회 안에서 만나는 예수님이, 예수님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이 우리를 치유하고 구원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치유의 구원임을 치유의 고향집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을 때 마리아의 반응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바로 치유의 고향집,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의 응답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안이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참 아름다운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향유 냄새가 그대로 마리아의 사랑의 향기처럼 느껴집니다.
마리아는 고향집 예수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지 않는가?”
일견 유다의 말이 합리적인 듯 하지만 그는 예수님이 참된 고향집임을 몰랐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 않다.”
사랑에서 나오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마리아의 사랑은 이미 사랑하는 분 예수님의 죽음을 예견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향유를 예수님께 부음으로 그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치유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제1독서 이사야서의 나오는 주님의 종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고자 노력하는 모든 분들이 잘 마음에 새겨할 내용들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은 이런 주님의 종같은 분들과의 만남은 그대로 치유의 구원이 될 것입니다.
“여기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이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껴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온유하고 겸손하고 섬세하고 자비롭기가 그대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은 주님의 종입니다.
이런 고향집같은 예수님을 닮은 주님의 종인 사제를, 형제자매를 만나면 저절로 치유의 구원이겠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고무적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주님의 종으로 불림받은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함이다.”
그대로 미사를 통해 베푸시는 치유와 구원의 은총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시고 이웃을 위한 세상의 빛으로, 치유의 구원자로, 치유의 고향집으로 파견하십니다.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치유의 고향집으로 살게 하시는 주님의 미사은총입니다.
다시 한번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Church, home for all
교회는 모두의 고향
God, home for all
하느님은 모두의 고향
Jesus, home for all
예수님은 모두의 고향
Coming home(커밍홈)
고향에 돌아올 때 힐링(치유)의 구원이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주관하는 ‘줌으로 하는 신앙 특강’이 있습니다.
지난 3월 12일에는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주교님의 강의는 미주지역의 교우들에게 영적인 갈증을 풀어주는 ‘단비’와 같았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예정된 시간을 넘어서 강의를 해 주셨고, 교우들의 질문에도 자상하게 답변해 주셨습니다.
주교님은 ‘숨’으로 강의를 시작하였습니다.
숨이 고르면 건강하지만, 숨이 차거나 불규칙하면 건강에 이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숨이 멎으면 세상을 떠난다고 하였습니다.
흙에서 온 사람이 생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숨’을 넣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숨에 의지하면, 하느님의 숨과 함께 하면, 세상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도록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물으니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심을 믿고 파라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 아이를 가질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은 마리아의 잉태로 현실이 되었고,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강아지를 사랑한다고 강아지가 되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몸소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보아라.’라고 하셨습니다.
첫 번째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보았던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제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이방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죄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둘이나 셋이서 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나도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세상 끝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사제는 미사 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인도합니다.
그러면 교우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응답합니다.
미사는 주님께서 함께 하는 제사입니다.
미사는 주님께서 함께 하는 축제입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베드로 사도는 ‘주님 나도 걷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던 베드로 사도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주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베드로 사도는 이내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면 우리들 역시 유혹의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욕망의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두려움의 바다에 빠지게 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르자, 베드로가 주님만을 바라보자, 주님께서는 물속에 빠진 베드로를 구해 주셨습니다.
빛이 9개 있고 어둠이 1개 있을 때, 어둠만을 바라보면 빛에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9개 있고 빛이 1개 있을 때라도 빛을 바라보면 능이 어둠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둠은 주님께로 가까이 가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빛은 생명에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강하게 느끼기 위해서는 3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는 독백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동전을 넣으면 커피가 나오는 자판기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독’을 만지려고 하면 어머니는 못 만지게 합니다.
아이가 독에 감염되어서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예방주사가 무서워서 맞지 않으려고 하여도 어머니는 아이를 달래서 예방주사를 맞게 합니다.
이처럼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사생활’입니다.
고백성사를 보기 전에 미리 죄를 성찰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굳게 다짐하며 고백성사를 보면 좋습니다.
미사에 참례하기 전에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 좋습니다.
미사 시간 전에 미리 성당에 와서 성체조배를 하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은총을 성사를 통해서 드러내 보이셨으니, 성사 생활에 충실한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기쁨이 넘쳐납니다.
감사와 기쁨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셋째는 ‘성경 읽기’입니다.
하느님 구원의 역사는 성서에 있습니다.
성서를 읽고, 쓰는 것은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자동차는 기름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습니다.
성서 읽기는 내 신앙의 여정에 기름을 채우는 것입니다.
주교님께서는 강의를 마치면서 로마의 카타콤베(지하묘지)에 있는 벽화를 보여주었습니다.
원래 묘지는 죽은 자들의 도시로 불렀는데, 신앙인들은 묘지를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 머무는 곳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벽화들에는 순교자들의 뜨거운 신앙이 있었고, 그 벽화들에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나아간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믿음과 희망은 사랑으로 열매 맺는다고 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신앙이 사랑으로 열매를 맺도록 신앙생활에 충실하기를 당부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은 마치 주교님께 하는 말씀과 같았습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언어 박탈 실험’이 과거에 있었습니다.
7세기경 이집트의 파라오 프삼티크 황제는 어떤 언어에도 노출되지 않은 아기가 내뱉는 말이 최초의 언어일 것이라면서, 갓난아기 둘을 산속 오두막에 가두어 키운 것입니다.
모든 언어로부터 고립된 채 자란 아기가 처음 내뱉은 말은 ‘베코스’였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프리기아어로 ‘빵’을 뜻합니다.
그래서 프삼티크 황제는 프리기아어가 최초의 언어라고 발표했습니다.
솔직히 말이 안되는 실험이었습니다.
사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아기를 전혀 존중하지 않은 끔찍한 실험이었지요.
그리고 두 아기라는 표본만으로 최초의 언어가 프리기아어라고 주장하는 것도 너무 근거 없습니다.
그로부터 거의 500년 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 역시 비슷한 실험을 했습니다.
단, 이번에는 아주 많은 갓난아기를 한 방에 가둬서 키웠지요.
마찬가지로 모든 언어와도 접촉하지 못하게 하면서, 보모와 간호사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아기들을 돌보게 했습니다.
황제는 아기들의 첫 언어가 구약성경이 쓰인 히브리어일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사회로부터 분리되면 살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첫 번째 언어를 찾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함께 사는 방법을 찾는 방법이 더 중요했습니다.
함께 잘 사는 것이 하느님 창조 사업에 부합한 모습이며, 생명을 지키면서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세상을 보면, ‘함께’보다 ‘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끔찍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도 늘어납니다.
함께 해야 사랑할 수 있으며, 이 사랑의 세상이 될 때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최고 존경의 표시입니다.
예수님 사랑에 감사하면서 존경과 사랑을 담아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그는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300일치 노동자 품삯으로 현재 약 3,000만 원의 가치)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라면서 자기 혼자 옳은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30냥에 팝니다.
이 액수는 당시 노예의 가격으로, 노동자 120일치 품삯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을 노예 취급하고 있으니,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만을 옳다고 생각했기에 주님을 팔아넘기는 큰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과연 ‘함께’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주님께 사랑과 존경을 드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주님과 함께해야 진정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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